|
1. 당의 지식인
선거 후 홍세화 진보신당 대표는 당원들에게 보낸 공개편지에서 진보신당의 두 지식인이 새로운 저서를 발간했다고 썼다. 그 중 하나가 김상봉 선생의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이다. 이 책은 철학자로서 그가 한국 사회의 변혁을 위한 상을 제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자신의 표현에 따른다면, 이 책은 “자본주의 체제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종합적 답변이다.
그간 김상봉 선생은 이런 저런 강연을 통해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에서부터 구체적인 정책개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쟁점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제시해 왔다. 삼성 반대, 서울대 폐지 등 진보신당의 정책이 그의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가 당 강령 전문을 작성한 지식인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의 성향과 진보신당의 정책 방향이 크게 다를 것 같지는 않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이 책에서 제시된 자본주의 극복 방향은 진보신당의 노선 결정에도 큰 영향을 줄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는 자본주의적 소유제도의 특징과 주식회사의 구조분석에서 출발하여, 노동자들을 노예화시키고 있는 경영의 본질을 밝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으로서의 노동자 경영권을 주장하고 있다. 그는 노동자들 스스로 경영권을 갖고 노동을 자주적으로 통제하며, 잉여를 자율적으로 배분함으로써 예속의 상태를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적 소유관계의 변혁 없이도 노동자들이 경영권만 장악할 수 있다면 기업을 만남의 공동체로 전환시킬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의 주장이 과연 창조적 발상이 될 것인지 아니면 개인적인 몽상에 불과한지를 알기 위해서는 꼼꼼한 검토가 필요하다. 이 글은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에 대한 비판적 논평이다.
나는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김상봉 선생의 진단과 처방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그의 철학적 상상력은 창조적 문제 제기라기보다는 고립된 철학자의 몽상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이후의 장들에서 내가 왜 이렇게 판단했는가를 제시해볼 것이다. 나의 문제 제기는 김상봉 선생이나 그의 입장을 옹호하는 진보신당 내의 세력들과의 생산적 대화를 위한 것으로 이해해주었으면 한다.
2. 소유권과 분리된 경영권?
이 책은 현대 사회의 노동자들은 노예와 같은 처지로 전락했다고 진단한다. 노동자계급이 노예의 상태가 된 것은 현대 기업 체제에서 사용자가 경영권을 독점하고, 이를 토대로 노동과정에서 노동자들을 이윤 추구의 수단으로 활용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경영권은 “노동자에게 자신의 지위와 명령에 복종할 것을 요구할 수 있는 사용자의 권리”(122쪽)로서, 사용자는 이 권리를 통해 “노동자들의 인격”을 지배할 수 있고 “착취”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123쪽) 이는 인간을 “수단이자 목적”으로 대해야 하는 칸트식의 도덕적 명령에 위배되는 것으로 인간의 도구화만을 부추길 뿐이다.
경영권은 노동자들에게 가해지는 권력이기도 하다. 비록 노동자는 자유로운 계약을 통해 고용되지만 노동과정에서 자본착취의 도구로 전락하고, 그의 인격은 경영주에게 예속됨으로써 노예와 같이 되었다고 한다.
경영주는 노동자들을 그들의 자유 의지와 상관없이 명령하고 강제함으로써 인격적 억압을 자행하고 있는 것이다. 근대 이후 시민들은 법 앞의 평등을 획득했지만, 노동과정에서 예속됨으로써 노예의 지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기업의 경영권은 자율적인 개인들의 동의에서 벗어난 외부적 강제 수단일 뿐이다.
노동과정에서 노동자가 노예와 같은 처지가 되었다는 주장은 별로 새로울 것도 없고 특별한 것도 없다. 김상봉 선생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듯이, 이 책이 진정 독창적인 점(?)은 경영권을 자본주의적 소유와 분리여 사고하고 있다는 점이다. 김상봉 선생은 기업의 경영권은 자본주의적 소유와 필연적인 관련이 없기 때문에 소유권의 전환 없이 경영권만 노동자들이 장악하면 노동자들은 노예 상태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새로울 것도, 특별할 것도 없는 주장
주주들이 기업을 소유하더라도 경영권만 노동이 지니게 되면, 노동자들은 기업을 자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고 잉여의 사용을 주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 노동자는 경영권을 장악함으로써 자율적인 사회적 주체가 되는 것이다. 이렇듯 “소유 없는 자유”를 제시한 것이야말로 그의 독창성을 보여주는 증표인 듯하다.(107쪽)
그는 주식회사의 구조분석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주식회사는 소유와 경영이 분리되어 있다. 주주들은 비록 배당권과 주식평가차익을 얻고자 하지만 어느 누구도 기업을 배타적으로 소유하고 있지 않으며 경영권에 대해서도 대부분 무관심하다.
주주들은 이사를 선임하고, 이사회에서는 대표이사를 선출한다. 이렇게 선출된 사용자들은 경영권만 지니고 있을 뿐 실질적인 소유권을 행사하지 않으며 행사할 수도 없다.(257쪽) 왜냐하면 주식회사는 법인으로서, 자본의 결합물이지 인간적 결합물이 아니며, 주식회사가 자유로운 인격(법인격)으로 간주되는 것은 회사 스스로가 주인이지 다른 어떤 인간의 독점적 소유물이 아니라는 것이다.(147쪽)
그러므로 주식회사의 소유구조는 그대로 두고 경영권만 노동자들이 장악하면, 주주들은 배당이익을 받고 노동자들은 인격적 예속에서 벗어나 기업을 만남의 공동체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소유권과 분리된 경영권 장악이라는 김상봉 교수의 주장은 언뜻 독창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는 그가 부르주아적 소유에 대한 기본적 이해조차 제대로 하지 않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다. 소유란 생산관계의 법적 표현일 따름이다. 그것은 특정인이 무엇을 소유했기 때문에 임의적으로 처분하거나 혹은 처분할 수 없다는 문제가 아니다.
자본주의적 소유법칙
자본주의적 소유법칙은 부르주아 계급의 생산수단의 독점과 재생산을 보증하는 것이다. 자본가는 사적으로 소비하고 생산수단을 감가시켜도, 잉여가치를 생산에 재투자함으로써 생산수단을 지속적으로 소유할 수 게 된다. 잉여를 재생산에 투자함으로써 생산수단에 대한 부르주아의 소유는 지속되는 것이다. 이것이 자본주의적 소유법칙이다.
문제는 자본가의 소유가 재생산 되려면 생산과정에서 잉여가치가 추출되어야 하고, 잉여가치를 추출하려면 노동과정에서의 자본의 지배는 필수적이다. 부르주아들이 경영권을 장악해야 하는 이유는 생산과정에서의 지배를 통해서만 잉여가 추출될 수 있고, 잉여가 추출되어야만 소유가 재생산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본가가 계급으로서 자신을 재생산하는데 필수적인 부분이며, 노동과정에서의 지배야말로 계급투쟁의 핵심적 사안이 되는 것이다. 자본주의적 소유는 노동과정에서의 부르주아의 지배(경영권)와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주들은 경영에는 관심이 없고 배당에만 관심이 있다는 분석은 전혀 맞지 않는 주장이다. 주주들이 경영에 무관심한 것은 경영권을 장악한 부르주아들이 잉여의 생산을 감독함으로써 부르주아적 소유가 재생산된다는 가정 하에서 그런 것이다.
특정 주주가 주식 평가차익에만 관심을 두는 것을 두고 부르주아 일반이 경영권에 관심이 없다고 일반화시키는 것은 계급으로서의 부르주아의 본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소치일 뿐이다. 부르주아들이 소유권만 갖고 경영권은 노동자들에게 넘겨줄 것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려면 부르주아들이 노동자들의 도전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는지만 살펴보면 된다. “곤봉을 맞아보면 정신을 차린다.”
독일 노동자평의회의 경우
물론 김상봉 교수는 나의 이런 비판에 대해 노동자들이, 소유권의 변동 없이도 경영에 참여한 역사적 사례가 있다고 반박할지 모르겠다. 그가 제시하는 대안 가운데 하나는 독일의 노동자평의회이다. 그는 독일에서는 노동자들이 사용자에게 “제안하고 협의하고, 동의할 권리”를 지녔다고 쓰고 있다.(186쪽) 노동자들 스스로 주체적으로 노동과정에 참여한 역사적 선례인 것이다.
그러나 독일의 사례는 전혀 근거가 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독일의 노동자 경영참가는 부르주아의 경영권에 대한 자발적 동의였지 그 반대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는 전후 미국 법인자본을 따라잡기 위한 전형적인 ‘노사협조 문화’일 뿐 노동자의 경영권 분점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이는 3절에서 다룬다). 그것은 부르주아 경영권에 대한 자발적 종속의 다름 아니었다.
부르주아들이 소유권에만 관심을 두고 경영권에는 무관심하다는 사고는 김상봉 선생의 심오한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지 현실의 부르주아들은 결코 그렇게 멍청하지 않다. 부르주아들은 잉여의 생산과 소유의 재생산은 필연적으로 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노동과정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계급투쟁을 언제나 능동적으로 조직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부르주아적 소유관계의 철폐를 주장하는 이유는 소유관계(생산관계의 재생산)와 노동과정에서 자본가의 지배(경영)는 필연적으로 결합되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상봉 선생은 “마르크스는 겉으로는 자본주의적 소유를 경멸하는 허세를 부렸으나 마음속으로는 은밀하게 자본주의적 소유를 부러워했다”(104쪽)고 마르크스를 비판한다. 참으로 코믹스런 비판이지 않는가?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적 소유를 은밀하게 부러워해서” 부르주아적 소유관계를 전환시키려고 했다는 해석이야말로 김상봉 교수의 전무후무 한 독창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3.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는 주주자본주의의 대안인가?
김상봉 교수는 주식회사(법인자본)에 대한 분석을 보충하여 법인자본의 구체적 형태에 대한 비교 분석을 제시한다. 그는 독일, 일본, 미국, 한국의 법인자본의 특징을 비교 분석한다. 그는 미국 자본주의가 주주자본주의에서 경영 자본주의로 이행함으로써 도저히 빠져 나올 수 없는 수렁에 빠졌다고 주장한다.
경영자들이 자신들의 권력과 이해를 추구함으로써 주주의 지배권을 전복시켰으며, 경영자(대표이사)가 이사들을 선임함으로써 이사회를 완전히 장악해 버렸다고 주장한다. 주주권과 경영권의 대립이 미국 자본주의의 심각한 문제라는 지적이다.(197쪽)
반면 독일 법인자본주의는, 노동자들이 직장별로 존재하는 노동자평의회를 통해 경영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노동자의 자주 관리의 전범이 된다고 주장한다. 노동자들은 경영주들과 동등한 입장에서 자신들의 입장을 관철시킴으로써 생산과정이 주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일본의 주식회사에 대한 예찬도 빠지지 않는다. 일본 기업들은 종업원들에게 종신고용을 보장하고, 경영자는 종업원 출신이 많으며, 기업은 종업원을 운명공동체로 여긴다고 주장한다.(228쪽) 반면 한국은 일본 재벌의 껍질만 가져왔을 뿐 일본 기업의 ‘종업원 중심주의’는 전혀 수용하지 않고 있다고 덧붙인다.
김상봉 교수의 법인제도의 비교는 1990년대 초반 한국 사회 일각에서 미국의 주주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된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의 변종이다. 몇몇 진보주의자들은 미국식 주주자본주의를 넘어서기 위한 전거로 독일 자본주의를 가져 왔던 것이다.
독일 노동자운동의 후진성
더불어 일본의 ‘종업원 중심주의’까지 결합시킴으로써 자본주의적 시장체제 내에서도 노동자들의 지위는 혁신적으로 개선될 여지가 있음을 보이고자 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미국식 법인자본은 경영권의 과잉이라는 측면에서 헤어 나올 수 없는 수렁에 빠져있으며, 한국의 재벌은 제왕적 지배자가 독재를 하는 악의 근원인 것처럼 제시된다.
그러나 김상봉 교수가 독일이 노동자평의회를 찬양하지만 20세기 법인 혁명의 중심지는 미국이다. 20세기 초반 미국에서 등장한 법인자본은 생산(라인이라 한다)과 스텝을 결합시킴으로써 거래비용을 내부화했다. 미국 법인 기업들은 컨베이어벨트로 라인을 혁신했을 뿐만 아니라 부품산업을 내부화하고, 생산과 인사-재무-마케팅(판매)을 결합시킴으로써 시장의 불안정성을 내적으로 통제하는 새로운 혁신을 이뤄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지오바니 아리기가 『장기 20세기』에서 논하고 있는 20세기 미국 법인혁명이다.
미국은 법인혁명을 통해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자본주의의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헤게모니 국가가 될 수 있었다. 김상봉 교수가 법인체제에 대한 분석을 하고자 했다면, 가장 표준적인 사례인 미국 법인자본주의의 혁신을 제대로 분석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가 제시하는 표준적인 사례는 독일이다. 전후 독일은 미국의 생산성에 한참 뒤쳐져 있었다. 이런 와중에 미국과의 경쟁을 위해서는 노사협력이 필수적이었다. 기업들은 노동자들에게 일자리 안정과 경영에 참여를 보장하는 대신 노동자들은 임금인상을 억제하고, 파업을 자제하며, 기업의 경영전략에 적극 동참할 것을 결의한다.
1948년부터 1968년까지 무려 20년간의 무파업 행진이 이를 상징하고 있다. 로버트 브레너가 『혼돈의 기원』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는 독일 노동자 운동의 후진성을 보여주는 것이지 결코 진보적인 무엇이라 할 수 없다. 경쟁력 향상을 위한 노동자들의 자발적 종속을 어떻게 ‘진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노동자 경영참여와 자율성은 무관
1990년대 한국의 진보주의자들이 독일의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를 찬양하고, 산별노조를 주장하는 세력들이 독일 금속노조를 모델로 삼기도 했다. 그러나 2010년 비교자본주의는 온 데 간 데 없다. 유럽은 붕괴되고 있고, 독일이 유지되는 것은 유럽 주변부의 부를 착취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독일 노동조합은 노사협조주의의 전형이었지 노동운동의 독자성과는 별반 상관이 없었다.
물론 노사협력의 문화가 정착되면서 노동자들의 경영참여가 보장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노동의 자율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오히려 노조는 부르주아의 축적 전략에 보수적으로 통합되어 있었을 뿐이다. 이와 같은 보수적 타협체제의 근원은 비스마르크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김상봉 교수의 분석에서 더 기가 막히는 것은 일본 법인기업에 대한 분석이다. 그는 일본 기업의 종업원 중심주의를 찬양한다. 일본 기업들은 오랫동안 헌신한 종업원에게 승진의 기회를 보장하고 종업원의 안정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일본기업의 종업원 중심주의는 ‘정규직 노동자’에 한하여 그렇게 하고 있을 뿐이다. 일본 기업체계는 다층적인 하청체계를 통해 다수의 노동자들을 계층화시켰으며, 기업의 위기는 하청 노동자들을 조절함으로써 외부화했다.
정규직은 기술적 신축성의 대상이 되고 비정규직 하청고용 노동자들은 산술적 신축성의 대상이 된 것이다. 이것이 그 유명한 도요티즘이다. 도요티즘의 린 생산방식은 1980년대 미국과 유럽으로 수입됐고, 이는 다시 세계로 번져 나갔다.
일본 법인기업 분석, 기가 막히다
한국의 재벌체제의 하청 계열화와 비정규직화는 이런 도요티즘을 극단화시킨 것이다. 그 표준적인 사례가 동희오토와 같은 ‘꿈의 공장’이다. 정규직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점에서 꿈의 공장이다.
김상봉 교수가 기이한 것은, 그가 진보신당 내에서 비정규직 투쟁을 가장 열심히 주장하는 분이라는 사실이다. 그런 분이 일본의 기업문화를 찬양하고 있다. 그 일본의 기업문화가 바로 린 생산방식, 노동의 불안정성을 세계적으로 수출하는 표준적인 모델이 되었는데 말이다.
이런 기이한 주장을 할 수 있는 이유도 그가 현대 노동과정과 관련된 쟁점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이다. 기초적인 문헌 학습만 했어도 그는 린 생산방식이 일본에서 유래한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비정규직 확대의 모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한국 기업들이 다른 모든 것은 일본을 따라하면서도 기업문화는 일본을 따라하지 않는다고 타박하는데, 한국 기업들이야말로 일본식 생산방식의 가장 반동적인 수입자들 중 하나이다. 너무 잘 따라 해서 문제이지 따라하지 않는 게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