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信)에 대한 불법(佛法)의 올바른 정신.
여러분. 지금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조용히 앉아 있다고 해 봅시다.
잠들지도 않는 상태이고 눈을 감지도 않았습니다.
이럴 때 옛 선사들은 주장자를 들어줍니다.
그리고는 “아느냐?” 이렇게 대중을 향해 묻습니다.
어떤 사람은 ‘무엇때문에 주장자를 들어서 “아느냐?”라고 묻지?’ 이렇게 궁금하게만 여깁니다.
선사께서는 “내가 주장자 들기 전에 이미 법을 설(說)-해 마쳤느니라.”
하고 내려가 버립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제가 이렇게 수건을 들면 여러분은 제가 수건을 들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바로 그 자리라는 것입니다. 그 자리가 수건을 들었거나 놓았거나 무슨 관계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장자를 들어 보이고 “알겠느냐?” 하면서 대중의 얼굴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빙긋이 웃습니다.
‘네. 당신이 지금 수건 들고 있는 모습을 잘 보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일체 의심이 없습니다.
“화두를 들고 의심하라.” 이 말은 곧 ‘확인하라.’ ‘맞는지 보라.’ 이 소리입니다.
조금이라도 의심이 있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놈이 알았는지, 정말 알았는지, 확실히 알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이렇게 떠보기도 하고 저렇게 떠보기도 합니다.
질문의 모습을 바꾸어보는 것입니다. 결국은 같은 뜻입니다.
확실히 깨달은 사람은 어떤 소리의 질문을 받더라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화엄경(華嚴經)』에서는 신성취(信成就), 믿음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보통 믿음이라고 하면 중생이 부처님이랄지 신(神)이랄지 하는 존재에 의지하는 것이라 여깁니다.
그것도 믿음이겠지만 믿음에 대한 불법(佛法)의 올바른 정신은 아닙니다.
믿음의 올바른 정신은 자신의 마음을 바로 알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차를 마시고 음식을 먹고 소리를 듣고 있는 놈이 바로 나 자신이요
이것이 부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차리면 부처님이요 알아차리지 못하면 중생입니다.
중생과 부처는 한 몸인데 알아차리지 못하면 헤매고 괴로워합니다.
알아차리면 헤매고 괴로운 것이 사라집니다. 이 차이일 뿐입니다.
그래서 알아차린 사람, 눈 뜬 사람은 일상생활의 행주좌와에서 완전히 안정을 성취한 모습입니다.
행동만이 아니고 말 한마디 던지는 속에서도 안정된 사람인지 헐떡거리고 있는 사람인지 그 모습이 보입니다.
이 법문은 21년 11월 19일 금정총림 범어사 보제루에서 봉행 된
‘불기 2565년 신축년 동안거 결제 법회’에서
방장 지유 스님이 설한 내용 중 일부를 옮긴 것입니다.
[1610호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