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성, 깨달음은 가풍마다 다르다
법상 스님
부처님, 부처님이라는 말을 우리가 너무 저 하늘 위에 모셔놓고
올려놓고 떠받들고 뭐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깨달음의 자리에서 보면 아라한과를 증득한 것만 부처냐,
부처님만 부처냐, 아라한까지만 부처냐, 수다원 사다함은 부처가 아니냐,
견성한 건 부처가 아니냐, 해오(解悟)는 진짜 깨달음이 아니고 증오(證悟)
뭐가 진짜 깨달음이라느니 법의 자리에서는 깨닫지 못한 사람도 부처고,
깨달은 사람도 부처예요.
견성만 부처가 아니고, 뭐 이런 이런 기준이 없어요.
깨닫지 못한 중생도 부처인데 하물며 견성이 부처가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무슨 말을 해도 좋고 그 말을 쓸어버려도 좋단 말이에요.
정해진 게 없어요.
그러니까 이게 방편을 쓰는 걸 보면 여러분들이 그 방편에 속으면 안 돼요.
말에 속으면 안 돼요.
이제 선을 가르친다는 많은 스승들도 보면 이제 가풍이 달라요.
미세하게 가풍이 다 달라요.
어느 가풍에서는 뭔가 쑥 내려가는 체험을 해야지만 그게 진짜다.
심지어 어떤 가풍에서는 딱 정해놨어요.
요 체험, 요 체험만 깨달음이다.
또 어떤 데서는 꼭 그건 아니지만 어쨌든 한 번 쑥 내려가는 체험이
크게든 작게든 있어야지만 깨달음이다 이렇게 얘기하기도 하고
또 어떤 가풍에서는 그렇게까지 쏙 내려갈 필요 없다라는 걸
아주 강조하는 가품도 있고, 해오적인 깨달음의 어떤 이렇게 인가까지
해주면서 그게 바로 견성이야, 그거 견성한 겁니다.
아니 아니 이거 이건 견성 아니에요.
그게 견성 맞다니까요 하면서 자꾸 견성했다고 막 그냥 그게 막 견성이라고
하고 나는 아니라고 하고 이렇게까지 얘기하는 곳도 있을 수 있다.
그럼 이제 헷갈리는 거예요.
그게 이게 어느 게 옳고 틀리냐 이걸 얘기할 수는 없을 것 같고
어쨌든 그렇게 딱 정해놓으면 이거 견성이다 아니다라고 이렇게 정해놓으면
사람들이 거기 속아요. 왜, 그게 명(名)과 상(相)이잖아요.
명(名)과 색(色). 특정한 상황을 특정한 이름으로,
견성한 사람으로 그렇게 상으로 딱 만들어 놓은 거잖아요.
그래서 그렇게 돼도 이게 오염이 돼요.
오해의 소지가 있고, 그런데 제가 오랜 세월 보니까
쑥 아주 아주 막 그냥 눈앞에 확 사라지네요.
어마어마한 체험을 한 사람이든, 그냥 반풀만한 체험을 한 사람이든
그냥 아 하고 그냥 확 그냥 문득 돌이켜 확인한 사람이든
체험이 떠나가고 나면 전부 다 다시 놓쳤다 해쌓고 그게 진짜 깨달음이
맞을까 하고 왔다 갔다 하고 오랜세월 오히려
깨닫기 전보다 더 못할 수도 있을 만한 헤매는 시간을 겪더란 말이죠.
오후(悟後) 수행이라고 한단 말이에요.
점수라고 한다. 육조스님도 사냥꾼들 속에서 한 10몇 년을
계시면서 보임을 했던 것처럼 오래오래 시간이 필요해요.
단박에 안목이 확 갖춰지지 않아요.
그래서 어느 가풍에서 하는 것들이 절대적으로 맞거나
틀리다라고 얘기할 수 없지만, 왜냐하면 사람에 따라 다르니까.
사람에 따라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기 때문에
그걸 다 맞다 틀리다라고 얘기할 수는 없으나 모르겠어요.
저희 공부처에서는 어떤 특정한 상황을 가지고 견성했느니 안 했느니
이게 견성이니 일별(一瞥)이니 해오니 증오니 이런 식의 무슨 입증을
해주거나 인가를 해주거나 이게 오히려 병이 된단 말이에요.
그거 여전히 미숙한 거야, 여전히 완전히 내가 이제 더 이상 어디에도
의지할 필요 없겠구나 스스로 자성자오하기 전까지는,
그 미진함에 그 미진함이 좋은 일이에요.
미진함에 기대여서 내가 자꾸 공부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단 말이에요.
왜냐하면 견성하고 나도 당연히 미진할 수밖에 없어요.완전히 해결
끝나버리기 전까지는 그러면 완전히 끝났다는 사람 찾아가면 되겠네요?
그것도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수 없단 말이에요.
제가 만난 많은 스승님이라는 분들 중에는 본인은 완전히 됐다고 하고
됐다는 많은 사람들 전부 다 저 사람들 다 아니야 나만 됐어 이렇게 하는
분들도 많았는데 그분이 진짜 됐는지 안 됐는지 알 수 없단 말이에요.
우리의 안목으로 알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그게 오히려 더 좀 삿된 그런 경우도 있을 수 있단 말이에요.
다 나만 부처라고 하고, 나머지는 모든 스승들을 싸그리
아니라고 하는 분들이 의외로 또 계시다니까요.
그래서 하여간 제일 중요한 건 끝까지 내가 끝끝내 이 공부 포기하지 않고
내가 끝까지 가겠다. 이런 마음으로 내가 한결같이 정진하는 것
그게 가장 중요한 공부인의 자세입니다. 여기까지 말씀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