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맺고 끊는 디가 분명허고, 분수를 알어서 모질 때는 모질어야 허는 것인디. 어물쩡하게 “그려? 그려보까아!” 해놓고는 황해바다 복판, 연 사흘을 쉬지 않고 내려 무릎까지 빠지는 눈 속에서 시방 내가 끙끙 앓고 있다.
벌써 한 달이 다 되어가지, 아마? 서해 낙도, 으시시 찬바람 새어 들어오는 암자 골방에 전화가 삐리리삐리리 울었었다. 가끔, 그것도 어쩌다 한 번씩 번지수를 잘못 찾은 전화나 들었다 놓곤 하던 터라 시큰둥해서 집어든 수화기 저쪽은 문학동네였다. 겨울 섬진강에 가라는 엄명이었다. “산 사이/작은 들과 작은 강과 마을이/겨울 달빛 속에 그만그만하게/가만히 있는 곳/사람들이 그렇게 거기 오래오래/논과 밭과 함께/가난하게”(「섬진강 15―겨울, 사랑의 편지」) 사는 섬진강 변! 아하, 회문산, 김용택 시인, 좋지!
그러나, 아무리 내 그 양반을 좋아하기로서니 이 푼수로 선뜻 그러마고 해서는 안 될 것 같아서 더듬거리는데 능청스럽게 이문재 주간이 그랬다.
“재연 스님, 시인 될라고 절에 갔었잖아요오!”
내 귀에는 절에 간 지 삼십 년이 다 되는 지금까지 시인이 못 되었으니 늦게나마 시성(詩聖)이 계신 섬진강 변에라도 다녀와야 되지 않겠느냐는 얘기로 들렸다. 그려? 순례든 탐방이든 좋지이!
스님들이 다 시인인갑다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기는 했지만, 내가 그래서 그해 겨울 눈 덮인 산길을 올라갔던 것은 아니다. 입산하던 날이었다. “왜 왔느냐?”고 물으면 어떻게 해야 될지 그럴싸한 대답 하나 만들지 못하고 일없이 걸음을 늦추거나 멀건 하늘을 올려다보기도 하며 숲길을 걸었었다. 어찌어찌해서 들어간 주지 스님 방에서 한 노장 스님이 그러셨다.
“어치케 왔어?”
“중 될라고요.”
“누가 그걸 몰라서 묻간디. 어쩌서 중이 될라고 허냐? 그 말이여, 내 말은.”
“……시인 될라고요.”
어이없다는 투로 허! 웃으며 그 노장님이 그러셨다.
“시인? 이런 얼빠진! 별 시덥잖은 놈 다 보네그려. 절집에 김삿갓 하나 나올랑갑다. 시(詩)허고 중(衆)허고 무슨 상관이 있냐? 그려, 시가 먼디? 어떤 시가 좋데?”
나는 김삿갓과는 영 어울리는 구석이 있을 것 같지 않은 시를 읊어댔다. 어디선가 읽고 외어둔 게송이었다.
댓그림자 뜨락을 쓰네 티끌 하나 날리지 않고
또 거기, 잔물결도 없이 못을 뚫고 들어간 달!
竹影掃階塵不動이요 月穿潭底水無痕이라!
웅얼거리는 내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내렸었다. 가만히 듣고 계시던 노장 스님 가로되:
“거거 태산이로고. 꼭 못생긴 모과맹이로 생긴 대갈통에 별 요상헌 것이 다 들었네그랴.”
그날 이래 이적까지 “시가 뭔디? 어떤 시가 좋은디?” 곰곰 따져보지 못한 나에게 시는 여전히 이 섬 골짜기 솔밭 암자에 잘못 배달된 보험료 고지서거나 못생긴 내 두상에 들어온 ‘요상헌 것’이다. 어쩌다 그냥 지나는 눈으로 훑어보다가 “얼레, 이거 참 좋다잉!” 하고 접어둘 뿐이었다. 이런 덜된 내 눈에 좋은 시인은 숫제 “얼레, 얼레!” 소리를 자주 내뿜게 하는 사람이다.
형편이 그러니 섬진강 순례객으로 나를 찍은 것은 순전히 실수라고 해야 될 것이다. 김용택 시인의 시집을 펼치면 내 입에서 연방 “얼레!”가 튀쳐나온다는 것을 문학동네 식구들이 미리 알았더라면 여러 가지로 좋았을 것 아닌가? 우선은 솜씨 없는 사람이 쓰는 그저 그런 이야기를 읽게 하지 않아도 되고, 거기다 잔뜩 찌푸린 하늘, 회색 바다를 바라보며 “눈이 와도 세상에 너무 온다고, 오늘도 배가 안 뜬다고, 그러면 내일 첫 배는 나가느냐고, 언제 주의보가 걷히느냐고” 묻고 또 물으며 이리 안달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오늘 아침 여덟시, 드디어 배는 떴다. 바다는 몇 날 며칠 길을 막아 놓고도 언제 그랬었느냐는 듯 얄미울 만큼 잔잔하기만 했다. 하얀 눈 을 쓰고 누워 있는 변산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 느린 배로도 한 시간이면 넉넉할 거리 안에 있는 이 땅이 그리도 멀었던가? 아예 수평선 너머에 있는 땅이라면 그러려니 해버릴 수도 있을 텐데, 빤히 보이는 곳에 가지 못한다는 것은 여간 답답한 노릇이 아니다. 지척이 천리라더니.
사나흘 전에는 무릎까지 빠지는 눈길을 걸어 부두가 보이는 곳까지 갔었다. 어차피 배야 뜨지 않을 거고 싸드락싸드락 걸어 찬거리나 사올 작정이었다. “세월아 네월아 갈라면 가고 말라면 말아라/세월이 좀먹냐 모래에서 싹트냐 소달구지 타고 진달래 꽃가지로 소 엉뎅이 찰싹찰싹 때리며 깐닥깐닥 산길 내려”(「조그만 오두막집」)가는 질쇠양반처럼 느긋하게 눈길을 걸어볼 양으로. 그러나 불과 몇 분 걷지 않아 당초에 어림없는 생각이었다는 것이 드러났다. 진눈깨비와 함께 대중없이 몰아붙여 온몸을 휘감아 도는 바닷바람은 진달래 흐드러진 회문산의 봄바람이 아니었다.
목도리로 귀와 볼때기를 싸매고 지나는 포구 마을, 드러난 개펄에는 낡은 어선 몇 척이 삐딱하니 드러누워 온몸으로 시린 바람을 맞고 있었다. 칠산 바다 조기잡이가 한창이던 시절 파시(波市)로 제법 흥청거렸던 곳, 그러나 이제 노인들 혹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람들이나 남아 썰렁하기 그지없는 마을이다. 김용택 시인이 그린 고향 마을 ‘진메’의 겨울 풍경과 거기서 거기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아, 집. 집. 집/지붕은 무너지고/문짝은 떨어졌다/여기도 사람이 사는 집인가/쟁기는 썩고/방구들은 쥐들이 들랑거린다/꺼먼 부엌 아궁이는 허물어져 막히고/삽과 괭이와 낫과 호미가 여기저기 흩어져/녹슬고 썩어간다/확에는 흙이 수북하고 풀이 쓰러져 있다.”(「저 강변 잔디 위의 고운 햇살 1」) 이 그림에서 강과 들판을 바다와 개펄로 바꾸고, 쟁기와 낫을 그물과 대바구니로 바꾸기만 하면 될 것이었다. 하기는 엄청난 차이 하나가 있지. 그 동네는 김용택 시인 같은 아들 하나 두지 못했다는. 그 무너져가는 집 안에 옹송그리고 앉아 있을 몇몇 노인들이 “저것들 손끝에는 개펄이 묻지 않게 해야지” 하며 아등바등 키워낸 아들딸들은 어디서 무슨 꿈에 취해 있을까? 다들 삼베 잠방이 방귀 빠지듯 솔솔 빠져나가고 해성해성한 포구 좁은 돌담길 사이로 찬바람만 우우 몰려다니고 있었다.
뭍에 거의 다다라 저만큼 방파제가 보일 때쯤 안내 방송이 있었다. “승객 여러분께 알려드립니다. 기상 악화로 인해 이 시간 이후의 여객선 운항은 정지될 것입니다. 이 점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변덕이 동짓날 팥죽 끓듯 한다는 말이 있지만 바닷가 날씨만큼 변덕이 심한 것도 없다는 것을 요새 알게 되었다. 불과 한 시간 전까지 멀쩡했던 하늘이 기상 악화라니? 부두에 내려서면서부터 눈발이 비치더니 금세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쏟아지기 시작했다. 서둘러 올라탄 버스는 이미 여러 날 내려 얼어붙은 빙판길에 다시 쌓이는 눈을 뚫고 잘도 달렸다.
동진강을 지나면서 눈송이는 더 커졌다. 덜컹거리는 찻속에서 「눈 내리는 김제만경」을 다시 읽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내 입에서 얼레얼레 소리를 제일 많이 나오게 한 시들 가운데 하나는 아니었다. 사실 나는 그 시를 읽고 나서 섬진강과 동진강의 같고 다름을 생각했었다. 운암댐에서 나온 물과 정읍 북부 산지, 그리고 모악산에서 서쪽으로 흘러내린 도랑물들이 호남평야 남쪽 들판을 적시고 모여들어 황해로 가는 물길이 동진강이다. 엇비슷한 수원지에서 동쪽으로 흘러 진메 앞을 지난 물줄기가 이 골 저 골 물과 섞여 섬진강을 이루고 지리산을 휘감아 하동 포구, 남해로 나간다. 이 두 강이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를까? 집히는 게 있을 것도 같지만 그만 두고 그 임실 산골 시인의 들 노래나 다시 읽지 뭐! 남의 시를 분석하고 평가하는 일에는 재주도 없고 또 내 일도 아니거니와, 그냥 아리까리하니 감이 좋으면 그만 아닌가. 이 시의 후반부가 그렇다. “내가 자꾸 그대를 부르다가/언뜻 뒤돌아보면/내가 넘어온 산 너머/산 하나가 숨는다/드러누워 이 세상 눈을 다 받는 김제만경이여/나도 이제 부를 이름을 눈에 덮고/논 한다랑지로 하얗게 숨는다/그 위에 눈이 내린다/눈 내리는 김제만경이여/여기서는 모든 길을 잃을 때만/이 세상을/새로 다 만나/그대를 부를 수 있다.”
전주가 가까워지면서 시야는 더 좁아지고, 공사중인 도로 복판 아무데나 멈춰 선 차들이 바퀴에 체인을 감느라고 부산했다. 처음에는 소담스럽게 내리는 눈을 보며 오랫동안 우리나라의 눈을 보지 못한 나에게 조선의 겨울이 푸짐한 선물을 주려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점점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벼르고 별러 마주하고 싶었던 김용택 시인의 아버지인 섬진강, 그리고 그 강물로도 타는 발바닥을 식히지 못했던 땅, 밭과 흙이고, 지혜와 인간애, 시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는 시인의 어머니, ‘통안이떡’과 또 누군가의 논밭이신 그분의 이웃들이었는데, 이렇게 되면 당초에 생각했던 순례는 다 틀린 일이 된 성싶었다. 「섬진강 9」에 그린 “오늘도 강을 건너 비탈진 산길 거름을 져다 부리고 빈 지게 로 집에 오기가 아까워 묵은 고춧대 한짐 짊어지시고 해 저문 강길을 홀로 어둑어둑 돌아오시는 어머니, 마른 풀잎보다 더 가볍게 흔들리시며 징검다리에서 봄바람 타시는 어머니. 아, 불보다 더 뜨겁게, 불붙을 살도 피도 땀도 없이 식지 않는 발바닥으로 뜨겁게 뜨겁게 바람 타시 는 어머니”는 농사꾼의 자식으로 태어난 우리 모두의 어머니상이며 고향일 터이다. 그러나 허옇게 쌓인 눈길에 거북이 걸음을 하는 차들을 보면서 관촌이나 운암 고갯길을 넘어가는 일은 이미 반쯤은 포기한 일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김용택 시인 집에 전화를 걸었다.
“예, 저 재연인디요. 쫌전에 전주에 왔고만요. 예? 예에! 근디 눈이 겁나게 와갖고 어치케 움직이기나 허겄어요. 긍게 말이네요잉. 거그, 어머님 계신 진메 가서 사진도 두어 장 찍고, 마암분교도 갔다왔으먼 좋을 틴디요잉. 예? 도현이요? 아까 전화히봤는디 안 받는당게요. 아마 전화 줄 확 빼놔불고 퍼질러 자는 게벼요. 저번날 전화혔을 때 그러는디 서울 갔다가 어저끄 밤 늦게나 오늘 새벽에 돌아올 거라고 혔거등요. 예? 저도 전주 잘 모르잖여요. 시방 도청 옆에 있는디요, 예, 저그 머시냐, ‘도둑과 시인’이라고 새로 생긴 찻집 뵈능만요. 예, 맞어요. 거 꺼벙허니 무슨 창고같이 생긴 그 집이요. 예? 그러먼 시방 열두싱게요, 한시에 나오실랑가요? 예, 그러먼 거그서 기다리고 있으께요.”
그렇게 만난 시인과 시골 중은 이상한 이름을 한 찻집에서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속세의 중생 이야기로 시간을 서캐 죽이듯 똑똑 죽였 다. 그 지독한 사랑의 불길에도 타지 않고 남아난 섬진강 변의 갈대밭(온통 벌겋게 타오르는 시집, 『그대 거침없는 사랑』을 읽으면 무슨 말인지 안다), 혹은 회문산 그늘에 잠깐 우두커니 서 있는다거나 진메 마을의 고샅길을 어정거려보는 일이 아닌 다음에야 사실 새삼스럽게 해야 될 일, 혹은 확인할 일이란 없었다. 솜씨 있는 일꾼 혹은 빼어난 탐색자 는 찾을 것 없는 데서 무언가를 건져내고 밝히는 것이겠지만 애시당 초 그런 말과는 거리가 먼 나일 뿐만 아니라, 밥그릇이 몇 개인지까지 까락까락 밝혀진 유명 시인에게서 더이상 털어낼 것도 없을 터였다. “누가 알랴 사람마다/누구도 닿지 않은 고독이 있다”(「사람들은 왜 모를까」)고는 했지만 김용택 시인은 남의 외로움을 이해하고 덜어주려고 공들이는 만큼 자신의 속내도 애써 감추려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왔었다.
창 너머 한길에 눈이 녹고 있었다. 물창을 튀기며 내달리는 자동차를 위태위태하게 피하여 허리가 기역자로 굽은 할머니 한 분이 길을 건너오는 것이 보였다. 남문 시장에 다녀오는 것 같았다. 플라스틱 그릇에 비닐 호스를 담아 옆구리에 끼고 불안한 표정으로 주위를 살피는 할머니를 보고 김용택 시인이 그랬다.
“분명히 혼자 사시는 양반이고만. 촌 동네 진메 같은 디는 그려도 훨씬 낫어. 마을 회관에라도 가시면 말동무라도 있응게. 사람들 말여, 비 싼 돈 디려서 도서관 짓고 박물관 세우는디, 그보다 먼저 저 양반들 살펴야 헌다고. 저런 노인네 한 분 돌아가시는 게 도서관 하나 없어지는 것이여. 머시냐, 그 『오래된 미래』를 읽고 라닥, 라닥 혀쌓는디, 보존허고 보호혀야 될 것이 라닥이나 히말라야뿐이간디? 멀라고 그 먼 디 얘기 허냐고? 우리네 고향 동네, 저 어르신네들이 다 소중헌 박물관이랑게. 그러고, 그 양반들이 우리들한티 가르쳐준 것이 머여? 맨나 ‘많이 묵어야 좋간디’, 아니면 ‘콩 한 조각도 나눠 먹는단다’ 그렸잖여. 그나저나 도현이 야는 잠자능가, 우리는 어디 가서 머 헌디야? 걍, 일단 나가보까?”
우리는 찻집에서 나와 눈 녹아 질척거리는 거리를 배회하다가 “영화나 한 편 땡기까?”에 합의하고 〈비상계엄〉이라는 미국 영화를 감상(!)했다. 산문집 『그리운 것들은 산 뒤에 있다』에서 밝힌 것처럼 영화를 겁나게 좋아한다고 했다. 영화가 돌아가고 있는 중에도 “재밌지? 재밌지잉?” 거듭 묻는 바람에 “예, 겁나게 재밌고만이라오!” 하기는 했지만 나는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앞뒤가 빤한 이야기에 헤헤거리거나 찔끔대고 나면 왠지 속은 것도 같고, 모르는 사람들 틈에 끼어 앉는 게 편치 않은데다, 우루루 몰려나오는 출구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극장에서 나와 이따금 간다는 식당에 들어가서 얼마 안 있어 부새한 얼굴로 안도현 시인이 들어왔다. 막 자리에 앉는 사람에게 김용택 시인이 그랬다.
“야, 도현아 집이서 어떻게 지내냐? 방학이라고 학교 안 강게 죽겄어야. 걍, 겁나게 답답허다잉.”
바스라져 사라지는 흙의 정서를 살려내고, 가난한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가지는 소외 혹은 모멸감, 죽음조차도 축제의 언어로 재생해내는 우리 시대의 탁월한 시인의 바탕은 그냥 좋은 “선생님”이다. 시인은 지금 「2학년 교실 칠판」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다.
〈장난 치는 사람 적기〉
김현우:1번 장난했음
강지호:1번 장난했음
강지호:창문에 올라갔음
강지호:선생님 의자에 앉졌씀
강지호:오늘도 세수 안 했음
―동시집 『콩, 너는 죽었다』, 「2학년 교실 칠판」 전문
부르는 사람마다 제각각 다른 호칭들, 용택이 성, 형님, 형, 용태기, 김용택 선생님, 김용택 시인…… 그 많은 호칭 가운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김용택 선생님이다. 우선 그는 방학중에도 아이들이 그리운 선생님이다. 또 운동장에서 어린애들과 공을 쫓아 뛰어다니는 천진한 선생님일 뿐만 아니라, 어머니 혹은 자연의 이름으로 우리를 계도하려는 선생님이고, 다시 배우는 선생님이기도 하다. 그는 “가르치면서 배우고 가르치면서 자기의 생활 태도를 반성하고 삶을 깊이 깨닫지 못하면 그 교육은 교육이 아니다. 즉 교육은 ‘자기’ 교육이다”라고 말한다. 그의 시는 교실에 걸린 칠판과 백묵의 다른 모습일 수도 있다.
“그러고 말이다/니가 알아서 다 허겄지만/아침 일찍 일어나서 니가 사는 집 마당도 쓸고/들고 날 때 동네 어르신들께/인사깔이 밝아야 헌다./사람덜이 호랭이 무서워 모여 사는 것이 아닝게/서로 돕고 그려라./일터에서도 니 혼자 욕심부리지 말고/동무들이랑 경오 안 빠지게 혀라./돈도 쓸 때 가서는 써야 허고/사람은 혼자는 못 사는 벱이니라./사람 나고 돈 났지/돈 나고 사람 나지 않았단다./뭐니뭐니 혀도 사람 에게는/사람이 젤 중요허니라.” 나는 어디서도 「아들아 내 아들아」식 의 시를 보지 못했다. 어머니는 이렇게 편지를 끝맺는다. “여그 쌀 속 에 고춧가루랑 깨랑 꼬깜이랑 넣어 보낸다./깨는 볶아뒀다가 음식에 섞어 먹고/꼬깜 한 접은 큰방 쥔 주고/한 접은 저녁일 허고 굴풋허면 너 묵어라.”
나로서야 그가 이룬 농촌문학 또는 서정시의 성과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주제넘는 일이다. 다만 그의 생활과 시는 뭔가 어그러진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개선하고 회복하는 일에 초점이 맞춰져 있음에도 ‘내가 사람이어야 사람이 보인다’고 말함으로써 자기를 돌아보고 살피는 일에 게으르지 않음을 본다. 거기다, 삭막해지는 세상에도 불구하고 김용택 시인은 자신의 두번째 산문집을 이렇게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