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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1월 3일
화성탐사선 ‘랜더’ 호, 미국
케이프 커내버럴 우주기지에서 발사
화성 극지착륙선 ‘랜더’ 의 모습
화성 탐사선 ‘화성 극지착륙선(랜더)’ 이
1999년 1월 3일 오후 3시21분 미국
플로리다주 케이프 커내버럴 우주기지에서
델타 로켓에 실려 발사됐다.
높이 1m, 무게 576kg의 랜더는 50여 분
만에 델타 추진로켓과 분리돼 항해를 시작
하였으며 화성 남극의 만년빙에 세발로
내려앉은 뒤 로봇팔을 이용, 흙과 암석을
퍼 올리면서 ‘물 발견’ 임무를 수행했다.
처음으로 극지방에 대한 탐사를 벌이는
랜더는 화성의 바람 등 생생한 현지음향을
녹음해 전송했다.
랜더에 실려간 쌍둥이 탐침 ‘딥 스페이스2’ 가
화성 지하 1m에서 물의 흔적을 찾는
조사활동을 함에 따라 1964년 매리너 4호가
화성에 접근한 이래 처음으로 화성 지표 속을
탐사했다.
그러나 이날 발사된 랜더는 장장 11개월
에 걸친 우주 여행 순항길에 들어섰으나
1999년 12월 3일 이후 지구와의 교신이 끊겼다.
미국의 일간지 덴버포스트는 2000년 1월 6일
보도를 통해 탐사선이 협곡에 떨어져 파손되면서
교신 불가능 상태에 빠졌다고 보도했다.
▶ 2016년 1월 3일.
서해안고속도로에서 안개로 인한 17중 추돌사고가 발생.
3일 오전 8시20분께 충남 보령 천북면 서해안고속도로 상행선 광천IC 부근에서 차량 10여 대가 연쇄 추돌했다.
이 사고로 카니발 승용차에 타고 있던 40대 남성 1명이 숨지고 11명이 부상했다.
부상자 중 1명은 중상이고 10명은 경상으로 경찰은 파악했다.
사고는 구간별로 2∼3대씩 차량이 추돌하는 등 모두 10여 대의 차량이 얽히며 발생했고,
이로 인해 이 일대 고속도로가 30분가량 심하게 정체됐다.
경찰은 짙은 안개로 운전자들의 시정이 확보되지 않아 사고가 난 것으로 보고 정확한 사고경위를 조사하고 있다.
앞서 충남 지역에는 이날 오전 7시를 기해 가시거리 40∼140m의 안개 예보가 내려진 상태였다.
한편 새벽 2시30분부터 인천과 경기도 평택 등 서해안 일대 대부분 지역에 안개주의보가 발효됐다.
서해대교와 영종대교 등 주요 도로 곳곳에도 짙은 안개가 끼어있으며
특히 인천과 해남 강화의 가시거리는 60m가 채 보이지 않는 상태고, 서산도 90m 정도다.
안개는 낮에도 연무 현상으로 남아있는 곳이 있어
"차량 주행 속도를 줄이는 등 교통 안전에 유의할 것"을 국민안전처는 당부했다.
▶2007년프로야구, 국내 프로스포츠 중
처음으로 도핑테스트 도입
▶ 2006년 오늘,
일본의 군인 아즈마 시로(일본어: 東 史 郎)일본 교토부 교토시
한 병원에서 대장암으로 사망(1912년 4월 27일 일본 교토 부에서 출생~)
일본제국 육군 제16사단 20연대의 병사로, 난징 대학살 당시에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한 인물이다/시민을 무참히 학살한 내용을 일기로 써놓았다 가 50년 만인 1987년에 《아즈마 시로 일기》라는 책으로 학살의
진상을 입증 해냈다. 이 책을 둘러싸고 옛 전우로부터 명예
훼손으로 고소당했으며, 소송이 진행되는 동안 난징대학살희생자기념관과 일본 아즈마 시로 지원 단체는 일본 육군의 범죄 행위를 증명하는 많은 증거 자료를 제공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최고 재판소에서
아즈마에 대한 패소를 확정하면서, 일본 최고 재판소에서는 그가 폭로한 학살의 진상을 부정하였다.
난징대학살의 '산증인'일본군 '아즈마 시로'는 50주년이던 1987년 참회의 일기를 출간했다.
https://ko.m.wikipedia.org/wiki/%EC%95%84%EC%A6%88%EB%A7%88_%EC%8B%9C%EB%A1%9C
<양심가'이즈마 시로' 씨와 '난징대학살'의
전모에 대한 리포트>
▶2003년독도에 우편번호 ‘799-805’ 처음 부여
독도의 ‘대한봉’(왼쪽)과 ‘우산봉’(오른쪽).
▶2002년양승숙 대령,
첫 여성장군으로 진급
청와대에서 양승숙 육군준장이
진급신고를 하고 삼정도를 받고 있다.
▶2001년월간조선, 독립법인
`주식회사 월간조선`으로 분사
▶1999년화성탐사선 ‘랜더’ 호,
미국 케이프 커내버럴 우주기지에서 발사
▶1997년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대한민국
대표부 설치, 특명전권대사에 구본영씨를 임명
▶1993년미소정상회담,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 II) 조인
▶1990년파나마 노리에가 장군, 미국에 인도
미국의 침공을 받아 파나마주재 교황청대사관에 피신해 있던 노리에가가 1990년 1월 3일 미국 정부에 인도됐다. 파나마군과 정치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노리에가 최고사령관은 1960년대부터 CIA에 정보를 제공하며 거액의 보수를 받는 반면 미국의 정보를 쿠바에 판매하기도 했다. 또한 콜롬비아 마약밀매조직이 파나마를 경유, 미국으로 마약을 운반하는 것을 용인하기도 했다.
노리에가는 대외적으로는 민족적 반제국주의적 외교정책을, 안으로는 군부독재체제를 추구, 집권 이래 줄곧 미국 정부와 끈질긴 신경전을 벌여왔다. 다부진 몸매에 파인애플껍질같은 곰보투성이 얼굴의 노리에가는 1981년 의문의 비행기사고로 숨진 토리호스 장군에 이어 방위군 사령관에 취임하면서 파나마의 실력자로 부상한 바 있다. 파나마 최대의 정보기관인 G2 사령관 출신인 노리에가는 집권 후 야당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으로 국민들의 불만을 샀으나 1만5천명 규모의 파나마 국방군의 무력을 배경으로 독재체제를 구축할 수 있었다.
미국은 1989년 12월 20일 군부독재자 마누엘 노리에가의 정권을 전복시키기위해 2만5천명의 군대를 동원, 파나마를 침공한 바 있다. 노리에가는 1992년 마이애미 연방지방재판소에서 마약밀매단의 증언으로 유죄판결을 받아 금고형 40년을 선고받았다.
▶1989년미국 해군전투기,
리비아 전투기 2대 격추
▶1989년북한 예술품 6백12점,
남북교역사상 처음으로 부산항 입항
북한 도자기들.
▶1981년언론기본법 발효1973년미국,
월맹과 파리평화협상 재개
▶1966년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3대륙인민연대회의(아바나선언 채택)
▶1966년오트볼타 군부쿠데타 발생
▶1962년송재구, 권투시합중 사망
▶1962년카스트로 쿠바 대통령,
교황청으로부터 파문
▶1961년미국, 쿠바와 단교
▶1959년알래스카, 미국의 49번째 주로 합병
1912년부터 미국의 준주였던 알래스카가 1959년 1월 3일, 정식 주로 편입돼 미국의 49번째 주가 됐다. 주 승격은 '알래스카 주법'이 한 해 전에 의회에서 통과되고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서명과 알래스카 주민들의 찬반투표를 거쳐 이뤄졌다.
알래스카는 1741년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에게 고용된 덴마크인 탐험가 베링이 발견한 뒤, 러시아 모피상인이 서서히 이주해 왔으며, 18세기 말에는 러시아 - 아메리카회사가 모피무역을 독점하고 싯카를 건설하여 19세기 초에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19세기 중반 영국의 알래스카 강점을 두려워한 러시아는 미국과 매각교섭을 하여 1867년 10월 18일 미국의 슈워드 국무장관이 720만 달러에 구입했다. 이 지역을 1에이커당 2센트로 환산해서 계산한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알래스카의 주력 수출품 1호였던 모피도 거의 고갈된 상태였고 극한의 땅이라서 투자 메리트도 없다며 미국인들은 이 거래를 가장 어리석은 거래라고 하며, 이를 `슈워드의 어리석은 행위`(Seward Folly)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후 발견된 금광과 유전은 미국에 상당한 부를 안겨 주었다. 알래스카는 금, 석유, 천연 가스 등이 생산되고, 삼림 자원과 수산 자원도 풍부한 땅이었던 것이다. 지금은 미국의 대륙방위체재의 전초지역으로서 전략상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참고로 미국의 첫번째 주가 된 것은 델라웨어주(1787년 12월 7일)이고, 마지막 50번째 주가 된 것은 하와이주(1959년
▶1958년뉴질랜드 힐라리탐험대,
남극 정복
알래스카 빙하 `허버드`.
▶1957년세계 최초 전자시계 발명
▶1956년아동문학단체 새싹회 발족
▶1956년제1회 청룡상 시상식 거행
▶1951년정부, 부산으로 이전
▶1951년UN한국재건위원단 발족
▶1949년자유중국이 한국을 승인
▶1932년간디, 인도총독에 선전포고 반영운동 개시
▶1931년대구의 약령시 개시
▶1930년이육사,
조선일보에 처음으로 시 발표
▶1924년김지섭, 일본 니주바시(二重橋)에
폭탄 던지고 체포당해
김지섭 선생.
추강 김지섭 선생이 일제의 침략상을 국제적으로 널리 알리고 한국의 독립의지를 세계 만방에 호소하고자 1924년 1월 3일 일본 왕궁과 가장 가까운 다리인 니주바시(二重橋)에 폭탄 3개를 투척한 뒤 체포됐다.
1884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난 그는 금산지방법원 서기겸 통역으로 재직하던 1910년 일제에 의해 국권이 상실되자 공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가 조국독립 방안을 강구하다가 1920년 만주로 망명했다. 1922년 의열단에 가입한 이듬해인 1923년 국내에 잠입, 조선총독부를 파괴하려다 계획이 사전에 탄로나자 단신 니주바시 투척사건을 감행했다. 체포 후 1928년 44세의 나이로 옥중 순국했다. 국가보훈처는 선생을 1995년 ‘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1923년대한민국대표회의
상해에서 열림
▶1922년언론인 선우휘 출생
▶1904년미군 64명,
거류민과 공관보호의 구실로 입경
▶1901년베트남의 정치가 고딘디엠 출생
▶1884년계초 방응모 출생
▶1883년영국 정치가 애틀리 출생
▶1874년스페인 군부
쿠데타로 군주제 부활
▶1868년일본, 막부정치에 종장,
왕정복고령 발표
▶1840년하와이 구라(救癩) 운동의 선구자
벨기에 선교사 다미앵 출생
▶1793년미국의 선구적
개혁운동가 모트 출생
▶1780년영국 정치가
미첼 토마스 새들러 출생
▶1694년수도회 설립자 파울루스 출생
▶1562년임꺽정 처형
임꺽정 [林巨正, ?~1562]
도적들은 이미 들끓고 있었다. 임꺽정이 살았던 조선 명종 때는 ‘민란의 시대’라고 불릴 만큼 농민들의 봉기도 많았다. 정치 기강의 문란으로 마을 수령들의 가렴주구(苛斂誅求)가 극성을 부렸기 때문이다.
임꺽정은 1559∼1562년 단 4년의 활약으로 우리에게 알려졌다. 나라의 안위를 위협할 만큼 큰 도적이 되자 실록에 임꺽정이 등장한 것이다. 명종실록에서 임꺽정은 단순한 도적이 아니라 임금까지 그 존재를 걱정했던 ‘반국대적(叛國大賊)’ ‘광적(광賊)’이었다.
조정에서 파견한 관리를 살해하고 옥에 갇힌 죄인을 풀어준 것은 지배층의 시각에서는 체제를 위협하는 신호였다.
그러나 임꺽정은 백성들로부터는 ‘의적(義賊)’의 칭호를 받았다. 서울로 가는 봉물을 빼앗아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눠 준 얘기가 무수히 전해진다.
지배계층을 골탕 먹이는 그의 활약은 백성들에게는 ‘삶의 청량제’였을 것이다. 지략이 뛰어나 신발을 거꾸로 신고 도망가 관군들을 따돌렸고, 어떤 때는 장사꾼으로 변장해 개성 한복판에서 장사를 했다.
백성의 지지 덕분인지 임꺽정은 조정이 총력을 기울여 붙잡으려 했지만 3년이나 버텼다.
그러나 임꺽정 역시 도적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음을 알리는 대목이 실록에는 종종 등장한다. 약탈을 하면서 무고한 양민을 살해하고, 관가에 고발을 한 자를 찾아내 무자비하게 죽이는 방식으로 복수를 했다.
임꺽정은 1561년 부하를 이끌고 황해도 구월산에 들어갔다가 관군의 습격으로 부상을 입고 붙잡혀 1562년 1월 3일 처형됐다.
임꺽정은 동아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을 지낸 벽초 홍명희에 의해 1928년 ‘소설 임꺽정’으로 되살아난다. 조선시대 하층민의 삶을 생생하게 묘사해 한국 리얼리즘 소설의 전형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는 작품이다. 그 덕분에 임꺽정은 지금 우리 곁에 있다.
‘시대가 도적을 만든다’는 말은 위정자들이 명심해야 할 말이다.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한 한 사관은 임꺽정의 반란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재상이 멋대로 욕심을 채우고, 수령이 백성을 학대하며 살을 깎고 뼈를 발리면 고혈이 다 말라버린다. (중략) 아침, 저녁거리가 없어서 잠시라도 목숨을 잇고자 해서 도둑이 되었다. 그들이 도둑이 된 것은 왕정의 잘못이지 그들의 죄가 아니다.”
▶1521년교황 레오 10세, 마르틴 루터 파문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Luther, Martin) 파문
1521년 1월 3일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가 로마 교황청에 의해 공식적으로 파문을 당했다. 1517년 루터는 교황청의 면죄부 판매에 반대하며 95개 조항을 발표했는데, 이로써 프로테스탄티즘 종교개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면죄부란 죄의 대가로 받을 형벌을 돈으로 면제받는 것으로, 당시 로마 교황청은 교회의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이를 판매했다. 루터는 전통적인 신학 논쟁에도 뛰어들어 화체설을 반대했고, 의인(義認)은 선행에 의해서가 아니라 믿음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교황의 권위에 반대해 오로지 성서만이 권위가 있다고 역설했으며, 평민들을 위하여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그의 사상과 저술에서 비롯된 종교개혁운동은 개신교를 낳았으며, 사회·경제·정치 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 1502년 1월 3일(음력 1501년 11월 25일).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이황(李滉) 출생.
1571년 1월 3일(음력 1570년 12월 8일) 사망.
▶1029년고려, 천추태후(千秋太后)
황보씨(皇甫氏) 사망
https://youtu.be/-vpZRiUQUp47
출처 네이버지식백과,솦트리종려나무, 반가운의hi스토리
편집 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