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특집
잠망경이 필요한 시간
김윤환
조각난 지도를 붙잡고
구멍난 구명조끼를 붙들고
견고한 수평선에 머리를 박고
가라앉는 시간에 매달려 운 적이 있었다
아득히 가라앉은 나의 함정艦艇은
허공에 치켜세운 흐린 눈처럼
파랗게 질려 있고
바다는 온통 검은 천으로 나를 감싸곤 했지
뭍으로부터 멀어진 새 한 마리
잠망경 꼭대기에 앉아
바깥의 시계視界를 흐리곤 했지만
흐릴수록 선명한 바닥이 보였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꿈길에 놓쳤던 아버지의 손이
침몰하는 내 허리를 붙잡아 주었고
나의 팔은 세상을 향한 가녀린 잠망경潛望鏡이 되었지
깨워도 일어나지 못하는 몽유의 경유지
여전히 캄캄한 해저에서
팔과 발의 멀고 먼 원경遠鏡만이
실낱같은 빛을 보이곤 했다
세상은 언제나
잠망경이 필요한 바닥없는 바다
풀 수 없는 그물이었네
오체투지各論
지구 밖으로 자신을 던지는 일은
자전을 포기하고 우주를 제 안으로 끌어당기는 일
지구를 거꾸로 돌리면 현기증으로 쏟아지는 별들의 눈
먼저 떨어진 별 조각은 사라진 엄마의 눈썹이거나
옛 애인의 찢어진 편지이거나 잃어버린 처녀의 일기 같은 것
팽팽히 감긴 시간 위에 은하로 치닫는 열차가 있고
레일 위로 쏟아지는 별은 몸속의 초침으로 살았지
모로 세워진 지평 일몰의 시침 위에 나를 던지는 순간,
부풀어 오르는 공기 방울 그 콧노래를 부른다
지구 밖으로 자신을 던지는 일은
날개를 다친 새 한 마리 번지 점핑의 짧은 유영 같은 것
오르가슴 그 찰나의 쾌락 가장 깊이 패인 기억
어혈의 공전으로 다시 산다는 지구인의 오래된 생존가설
지구 밖으로 자신을 던지는 일은
언제나 엉금엉금 별을 찾아가는 일
자기 안으로 우주가 들어오는 일
애꾸눈 인생
필자는 스물여섯 살에 등단한 33년 차 시인이지만, 마흔일곱 살에 목사 안수를 받고 쉰 살에 다 되어 개척 목회를 시작한 작은 교회 목사이다. 아무도 오지 않는 빈 새벽 성전에 앉아 눈물로 기도를 하다 보면 참으로 기도 없이는 살 수 없는 가난한 목사라는 연민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그러나 모세도, 다윗도, 스룹바벨도, 요한도 자신의 결핍이 두드러지고 주위에 아무도 없는 고립을 느꼈을 때 비로소 빛을 보았음을 알게 되었다. 모세의 지팡이, 베세메스의 소, 물맷돌, 그리고 성전 이것만 있으면 잘할 것 같다는 닫힌 내 눈을 발견하게 되었다.
“모세의 지팡이도 없고 / 법궤를 매는 베세메스의 소도 없고 / 다윗의 물맷돌도 없고 /
스룹바벨의 성전도 없고 / 세례 요한의 신들메도 없지만 / 로마 병정 론지노의 / 외눈을 가진 사람들 / 닫힌 눈 위로 뚝 떨어진 피, / 그 개안開眼의 선혈을 / 새벽마다 보았네 / 그 동공에 빛이 들어오는 것을 / 애꾸눈 목사는 / 오늘도 보고 있네“
- 졸시 「애꾸눈 목사」 전부
론지노는 예수가 십자가 처형 당시 애꾸눈의 사형 집행병이었다. 말하자면 망나니인 셈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피 흘려 죽은 것을 확인하기 위해 창을 찌르자 예수의 피 한 방울이 그의 애꾸눈 위로 뚝 떨어졌다. 그 순간 론지노의 애꾸눈이 회복이 되었다는 전해오는 이야기다. 예수를 창으로 찌른 병정 론지노처럼 여전히 예수를 욕망의 창으로 찌르고 또 찌른 나에게 그의 보혈이 내 닫힌 눈 위로 떨어지는 것을 아무도 없는 새벽 성전에서 체험하였다. 반쯤 떠진 눈으로 그의 광채를 내 안으로 받아들이자 그나마 흐릿한 여명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수태고지를 받고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눅 2:30~32) 라고 노래한 것처럼 누군가의 희생이 내 눈을 뜨게 해주는 구원의 새 빛을 발견하게 되었다. 허망한 욕심과 이기심으로 눈먼 나를 새로운 눈으로 다시 뜨게 해준 눈의 구원을 고백한 시편이다.
곁눈질로 보는 눈의 오남용이 범람하고 있는지 모른다, 눈물을 흘리기보다 눈에 불을 뿜는 치열한 시간을 보내는 동안 대상이 무엇이건, 혹은 누구이건 그 뚫어져라 쳐다보던 눈에는 안압이 오르고 마침내 스스로 생성되지 못한 눈물을 인공으로 넣어야 하는 모순의 삶에 지쳐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안압이 오른 후에 의사 왈 신경 쓰지 마세요 무리하지 마세요 / 뭐 그리 신경 쓸 일도 무리할 일도 없는 나에게 참 과분한 처방이다 / 얼핏 들으면 신경 좀 쓰고 살아라, 힘 좀 쓰고 살아라 양심에 독촉하는 듯 들려 / 약 처방에 인공눈물약이 들어있네 하루 대여섯 번 눈물을 넣으란다 // 얼마나 울지 못했으면 / 얼마나 눈물이 말랐으면 / 눈물약이라니 / 참, 눈물이 난다
- 졸시 「눈물처방」 전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간만이 지닌 눈동자 흰자위의 순기능과 흘릴만한 눈물의 저수량과 배수의 기능을 회복하는 일이다. 자신은 물론, 이웃과 약자, 지연과 역사의 아픔에 대하여 눈길을 주고 눈물을 흘리며 오독이나 난독이 아닌 정독의 눈을 회복하는 일이 필요하다. 시詩가 예술의 영역 안에서 시인은 물론, 사람들의 시각과 가치관에 있어 교정矯正의 기능과 안약眼藥의 역할도 함께 수행되길 기대해 본다.
문학도 종교도 궁극적으로 무엇을 보고 걸을 것인가의 여로旅路에 다름 아니지 않은가. 내면을 볼 수 있는 기능과 진심으로 울 수 있는 기능만 있어도 그 인생은 살만한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