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7.21. 14:24 / 전남대 사학과 81학번 ‘마로골’이라는 학생의 글이다.
外松 이석연교수님을 추모하며 /
外松 이석연선생님께서 세상을 떠나신지 사십여일이 지났다.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4~5년 전쯤 용봉동의 동네 사우나에서 잠시 뵌 게 마지막인 듯 싶다. 어린 놈 솔강이에게 용돈을 주시면서 웃으시던 눈매가 아직도 선하다.
얼마 전“李錫淵 ․ 李相寔敎授 停年紀念 特輯號”로 발간된 <<全南史學>> 19집을 찾아보았다. 2002년 외송선생께서 이상식교수님과 함께 정년하신 것을 기념해 전남사학회에서 만든 이 책에는 각별히 지내던 동료교수 두 분의 글이 실려있다.
“ 역사가란 말이지 ....”
역사가의 조건을 여쭤보니, 해질녘 물건파는 아낙네의 목소리가 문득문득 어머니의 소리라 고 느껴지면, 그런 마음을 모아서 역사에 담는단 말 지금도 생생하네 (‘외송선생정년기’, 김대현)
외송선생은, 역사가의 조건이 무엇이냐 물은 국문학과 김대현교수에게 하찮은 아낙네의 말이라도 어머니의 것처럼 소중하게 들을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역사를 공부하는 자들이 모름지기 지녀야 할 태도를 짚은 것으로 생전에 항상 평이하게 강의했던 그 다운 설명이다.
외송선생은 일찌기 4년간 역사학을 전공한다는 것은, 역사학을 배운 사람만의 눈 즉 역사학도의 오롯한 관점으로 세상과 주위를 살피게 되어지는 것이라 말했었다. 4년의 시간동안 역사를 탐구하는 자의 태도와 관점이 세워지고 열정을 가지고 공부하기를 주문한 것이었으리라.
방학중 절에서 바지게에 실려 내려올 정도로 공부에 온 힘을 쏟았다는 외송선생의 젊은 시절에 관한 에피소드를 季父에게 듣고서 전율했던 적이 있었다. 항시 조용한 목소리로 은은한 깊이를 풍겨주고 조용한 동작으로 느긋한 여유를 일깨워 주었던 외송선생의 깊은 눈을 보면 그가 지녔던 열정을 읽을 수 있었다.
‘一見 美男型’
철학과 성진기교수는 난초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성품이 맑고 순수할 것 같은데 외송선생이 그 범주에 든다고 했다. 또한, 외송선생이 깃 세운 바바리코트와 수려한 용모가 서양신사임에 틀림없다고 하면서, 1980년 봄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수배가 되었을 때 경찰이 작성한 전단에‘ 일견 미남형’이라는 인상착의 설명이 있었던 에피소드를 더하며 이 정도면 공인된 미남이라고 적어놓았다.
외송선생에게는 성품이 깐깐하다는 평이 있었나보다. 그러나 성정이 괴팍하지 않다면 깐깐함은 지조일 수 있다는 성진기교수의 말처럼, 그의 성품은 올 곧았던 것이 아닌가한다.
이렇게 평교수로만 살아온 이교수님에게는 그러나 지식인으로 너무 소중한 이력이 있다. 1978년 소위‘교육지표사건’으로 불리우는 민주화운동 때문에 대학을 떠난 아픈 이력과, 1980년 봄에 옥고를 치른 것이 그것이다. 화려하고 요란한 풍경에 좀이 쑤시는 사람들에게는 무언의 가르침을 주는 처사다(‘구름과 바람이 함께 떠나 시는데’, 성진기).
외송선생에게 화려한 이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학내외를 물론하고 감투를 쓴 자국도 없고, 백페센트 교수로만 살아온 것은 그의 곧은 성품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지식인 노릇하기가 결코 쉽지 않았을 그 답답한 시기에, 그는 부조리에 항거하며 살았던 셈이다. 내 보기에 외송선생은 마음이 늠름하고 담대한 미남이었고, 그 성품에 멋까지 더한 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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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교수님에 관하여 웹서핑을 하다가 눈에 띄는 글이라 올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