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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월 23일 연중 제2주간 금요일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he appointed twelve to be with him; and he called them apostles. He wanted to send them out to preach, and he gave them authority to drive out demons. 말씀의 초대 하 느님과 이스라엘 백성 간의 계약 관계란 순종과 축복의 역사이기도 하다. 신앙의 역사를 이해하는 바탕에서 히브리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새로운 계약(신약)의 중개자로 설명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더 나은 약속을 바탕으로 세워진 중개자시므로 다른 계약을 찾을 필요가 없었다(제1독서). 새 계약의 시대를 여시는 예수님께서는 열두 사도를 선발하신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소 비문화 시대의 복음적 삶에 관한 성찰에서 악령에 대한 생각이 많아졌다. 악령의 실체와 존재 양식의 구조가 확실하게 느껴지고 있다. 아담의 유혹자와 카인의 질투심, 노아 시대의 환락과 바벨탑의 무모함, 광야의 예수님을 유혹하던 악마와 그 세력들이 엄청난 물신 우상의 세력으로 성장해 우리 시대의 창조의 질서와 복음적 삶을 포위하고 있다. 돈이 대접받는 시대에 악령은 당당하게 군림한다. 금융과 기술 과학을 떠받드는 악령의 위용은, 복음을 한입에 넣어 삼키고 토하기를 반복하는 패권 시대를 거리낌 없이 드러낸다.
언젠가 해외 성지순례를 갔다가 관광객들이 많은 지역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때 가이드가 한 가지 주의사항을 주시더군요. “잘 따라오셔야 하는데요. 종종 사진을 찍으시다가 일행을 놓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때는 당황하지 마시고, 그냥 그 자리에 계세요. 이곳이 워낙 복잡하다보니 서로 찾다가 길을 어긋나는 경우가 많거든요.” 길을 잘 모르는 사람이 길을 찾겠다고 돌아다니다보면 도저히 가지 않을 것 같은 아주 엉뚱한 곳으로도 갈 수 있기 때문이지요. 어린 자녀와 함께 시장을 가는 엄마가 말합니다. “엄마 손 꼭 잡아야 해. 그래야 길을 잃어버리지 않는단다. 만약 손을 놓쳐서 엄마가 보이지 않게 되면 낯선 사람 쫓아가지 말고 그냥 그 자리에 가만히 있어. 그러면 엄마가 얼른 너를 찾을 거야.” 비 슷한 이야기지요? 맞습니다. 성지순례 때의 주의사항이나, 부모가 어린 자녀에게 하는 주의사항이나 비슷합니다. 낯선 사람 쫓지 말고, 자기가 모르는 길을 이곳저곳 기웃거리지 말고 그냥 그 자리에 가만히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길을 잃지도 않고 편안하게 지금의 상황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 주의사항들이 어쩌면 주님께 나아갈 때에도 해당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주님을 찾겠다고 하면서 오히려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에 기웃거리고, 주님과는 정반대인 죄를 쫓게 되면 분명히 참된 길로 나아가는 길을 잃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을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들 때는 그냥 그 자리에 머물러서 나를 찾고 있는 주님을 맞이해야 합니다. 그 방법이 무엇일까요? 바로 미사에 더 적극적으로 참석하고, 기도와 묵상에 힘써야 하는 것이며,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랑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우 리가 해야 할 근본에 충실할 때 비로소 주님을 알아 뵙고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직접 뽑으신 열 두 명의 제자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물론 나중에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 이스카리옷도 있었지만, 이들 모두 주님을 알아 뵙고 그분을 인정하면서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능력과 재주가 뛰어나서 제자가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스스로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주님의 뜻을 따르는 근본에 충실하려는 마음이 주님을 알아 볼 수 있도록 한 것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얼마나 주님을 알아 뵙고 있으며, 그분과 함께 하고 있을까요? 주님을 도저히 찾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 때, 다시금 나의 근본에 충실해야 할 것임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진정으로 만족하는 유일한 길은 당신이 위대한 일이라고 믿는 일을 하는 걸이다. 위대한 일을 하는 유일한 길은 당신이 사랑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찾듯 사랑하는 일을 찾아라(스티븐잡스).
백스트리트 보이즈와 엔싱크(‘좋은생각’ 중에서) 한 매니저가 보이그룹을 만들려고 오디션을 통해 5명을 뽑았다. 그 중에 한 남자가 있었는데 춤과 노래가 뛰어났다. 하지만 남자는 싫증을 내고 팀을 떠났다. 자기 정도의 실력이면 다른 기회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그룹은 18개월 동안 온갖 자잘한 콘서트를 하더니 이윽고 유럽에 진출하여 대히트를 쳤다. 그룹의 이름은 '백스트리트 보이즈' 대중음악산업의 기록이란 기록은 다 갈아치웠다. 남자는 운이 없었다면서 땅을 쳤다. 매니저는 남자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줬다. 또 다른 보이그룹에 남자를 집어넣었다. 남자는 이번에도 열심히 하는 듯 보였다. 하 지만 몇 달이 지나도 인기가 없자 남자는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면서 또다시 그룹에서 탈퇴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그룹은 세계적으로 각광을 받기 시작했고, 앞서의 그룹과 마찬가지로 엄청난 돈과 인기를 거머쥐었다. 이 그룹의 이름은 '엔싱크' 였다. 남자는 말했다. "운이 없었을 뿐이야. 이번에는 제대로 될 거야. 난 실력이 있으니까!" 남자는 새 그룹을 만들었다. 이번에는 도중에 그만두지 않고 끝까지 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십년이 지나도록 좋은 소식은 들리지 않고 있다. 운과 노력... 어떤 것이 더 중요할까요? 우리의 인생설계는 이렇게 -이기정신부- 모태교육에서부터 뭔가를 배우며 자라는 이유는 인생구축 때문입니다. 인생구축을 위해 사회조직 속에서 자리 잡기까지 계속 노력해야합니다. 인생설계는 인생을 제대로 마치고 영원세상에서 환영받기까지라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완전한 인생설계를 할 수 있도록 핵심조건을 주셨습니다. 12명을 뽑아 사도단을 정하시고 함께 지내시며 교회를 설계하신 거지요. 인생설계는 복음을 믿고 알리고 악을 이겨내기로 짜야한다는 조건입니다.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마르코 3,14~15)” < 새 계약과 양심의 관계 > -전삼용신부- 미국의 개척기 때의 사람인 윌리엄 펜에 관한 일화입니다. 그는 다른 백인들과는 달리 인디언들을 존중해 주었으며, 늘 그들에게 친절을 베풀었습니다. 어느 날 인디언들이 그에게 농담으로 다음과 같은 제안을 했습니다. “펜, 자네가 원하기만 한다면 우리 땅을 모두 가져도 좋네. 하지만 하루 동안 걸어서 돌아오는 땅만 주는 걸세.” 펜은 그들의 말을 믿고서 다음 날 해가 떠오르자마자 길을 떠나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해가 떨어지자 인디언들에게로 다시 돌아 왔습니다. “여보게, 자네들 말대로 오늘 아침부터 걸어서 이제 돌아왔네. 약속대로 땅을 주게나.” 인디언들은 놀랐습니다. 농담으로 말한 것이었는데, 펜이 자신들의 말을 믿고 실행해 준 것이 놀랍고 한편으로는 고맙기까지 했습니다. 그리하여 인디언들은 약속대로 그가 걸어서 돌아온 땅을 그에게 떼어 주었습니다. 결국 그 땅으로 인해 윌리엄 펜은 펜실바니아의 창설자가 되었고, 오늘날 그 땅은 필라델피아 시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출처: 한태완 목사 설교자료집]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나뉩니다. 구약은 옛 계약이고 신약은 새로운 계약입니다. 그리고 계약에는 ‘약속’이 들어있습니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겠다는 약속이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구약이나 신약이나 우리 또한 수행해야 하는 ‘계명’이 있습니다. 그 계명을 지켜야만 계약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펜이 상대가 원하는 대로 따라주었기 때문에 땅을 차지하게 된 것처럼, 우리 또한 하느님께서 주시는 계명을 따라야만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은 이스라엘과 하느님이 맺은 옛 계약입니다. 구약에서 주어졌던 계명은 ‘십계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십계명을 알면서도 누구하나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구약은 폐기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당신 피로 세우신 새로운 계약, 즉 신약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오늘 독서에서는 이 새로운 계약의 특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가장 두드러진 특징인 새로운 계약은 하느님과 단체가 아닌 하느님과 개개인의 계약이라는 것입니다. 누구도 구원되는 이들 틈에 끼어있다고 해서 자신도 덩달아 구원받지 않습니다. 자신의 행위에 따라 구원을 받게 됩니다. 신약에서의 계명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입니다. 이 계명만 지키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계명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해 주는 걸까요? 만약 우리에게 모든 부속품을 다 주고 비행기를 조립해 보라고 하면 할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원리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법’, 즉 ‘토라’라고 하는 것이 모세 오경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바로 ‘말씀’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바로 우리를 온전하게 조립할 수 있는 ‘원리’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만 살아가면 그리스도의 삶대로만 살아가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 온전히 조립되게 됩니다.
그런데 새로운 계약의 특징은 그 ‘말씀’이 우리 마음 안에 들어있어서 더 이상 그 원리를 배우거나 물어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들의 생각 속에 내 법을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리라. ... 그때에는 아무도 자기 이웃에게, 아무도 제 형제에게 ‘주님을 알아라.’ 하고 가르치지 않으리라. 그들이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모두 나를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그 원리를 ‘양심’이라 부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들도 양심대로만 산다면 구원의 가능성이 열려있는 것입니다. 반면 잘못임을 알고도 불의하게 살았다면 그것 때문에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그 법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아는 것을 실천할 줄 아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누가 미워하지 말아야 하고,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하고, 남의 재산을 탐내지 않아야 하고, 부모에게 효도해야 하는 등의 가르침을 모릅니까? 믿는다는 것은 바로 이 알고 있는 것을 실천해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설계도만 믿는다고 비행기가 저절로 조립되지는 않습니다. 그 설계도대로 움직여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약속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그리스도의 모범대로 실천하기만 하면 됩니다. 양팔 가득 선물을 들고 오시는 주님 -양승국신부- 소년원 아이들을 만나러 다니던 시절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혈기왕성한 한창 나이의 녀석들이 갇힌 공간 안에서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었습니다. 주 말마다 저희는 짧은 종교집회시간이지만 힘겨워하는 아이들의 얼굴에 잠시나마 미소를 돌게 하려고 갖은 애를 썼습니다. 가급적 교리를 쉽고 재미있게 끌어가기 위해 매주 다양한 프로그램을 짜서 갔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프로그램이 알차고 재미있다하더라도 동기부여를 위해서는 ‘선물’처럼 효과적인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을 만나러 갈 때 마다 간식거리며 생필품이며 이런 저런 선물들을 잔뜩 포장해서 싸매고 갔습니다. 가져간 선물들은 프로그램 시작 전에 탁자 위에 쭉 올려놓습니다. 그러면 프로그램에 임하는 아이들 눈빛부터 달라집니다.
선물을 받기 위한 녀석들의 노력은 정말이지 눈물겨웠습니다. 그런 적극적인 아이들의 모습에 선물을 준비해간 저희들도 신이 나서 프로그램을 진행하곤 했습니다. 선물을 배달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가장 큰 보람은 어떤 것일까요? 거금을 투자해서 아주 좋은 선물들을 정성껏 준비해간 사람들에게 있어 가장 큰 기쁨은 무엇일까요? 선물 수신자들의 받고자 하는 적극적이고 열렬한 태도일 것입니다. 애써 잔뜩 싸짊어지고 갔는데 상대방 표정이 심드렁하다든지, 그 따위 허접스런 선물은 필요 없다는 냉랭한 태도를 보인다면 준비한 측에서 얼마나 상심이 크겠습니까?
하 느님과 우리 인간 사이의 관계 안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 인간 각자를 위해서 양손에 가득 아주 값진 선물인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는데...그 은혜로운 부르심에 대한 우리 각자의 태도는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따 지고 보니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란 선물 중의 선물을 우리에게 선사하기 위해 하느님께서는 일생동안 지속적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생명에로 부르셨습니다. 세례성사로 부르셨습니다. 성체성사로, 사제성소로, 수도성소로, 한 가정의 가장으로, 오늘 아침 새 생명에로....
매일 우리에게 다가오는 다양한 측면의 부르심은 다름 아닌 우리를 구원에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적극적인 초대입니다.
심드렁한 표정이나 억지로가 아니라 최대한 기쁜 얼굴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환호하면서 하느님께서 주실 선물 앞에 활짝 우리 팔을 벌려야겠습니다. 하느님의 적극적인 구원의지 앞에 가장 필요한 것은 우리 인간 측의 적극적인 호응입니다. 거룩한 삶의 놀이 -주님과의 친교와 우정- -이수철신부- 어제 오늘 말씀 묵상 중 몇가지 깨달음이 생생합니다. 기도하다보면 건성으로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특히 생각없이 반복되는 묵주기도, 성무일도, 주모경 등 수두룩합니다. '어, 이런 기도가 하느님께 상달되겠나? 제대로 된 기도가 얼마나 되겠나? 대화 중 말 많고 진실성이 없으면 아예 듣지 않듯이 하느님도 이런 기도는 듣지 않으시겠다. 그대로 소음 공해 같은 기도가 아니겠나. 그 많은 기도가 단지 소리들로 끝나는 공허한 기도도 많겠구나. 그럴바엔 하느님 쉬시도록 침묵하는 편이 낫겠다. 아, 기도를 잘하기 위해서 깊은 침묵이 필요하겠구나. 깊은 침묵에서 저절로 흘러나오는 진실한 기도요, 침묵 자체가 하느님 마음에 참여하는 기도이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새삼 말로서의 기도이전에 하느님과의 내적 깊은 친교와 일치가 우선이라는 생각이 절실했습니다. 본원에서의 인사명령지를 보던 중 깨달음도 강력했습니다. 나이 70세가 되니 본당 일선 사목에서 물러나 수도원으로 돌아오는 선배수도사제들입니다. '아, 세월을, 시간을 이길수는 없구나. 세월과 화해하며 사이좋게 지내는 일이 참 중요하겠다. 세월이 흐르면서 저절로 때가 되면 물러나게 되는구나. 아름답게 퇴장하는 일이, 퇴장후의 삶이 문제구나. 이래야 삶의 무대에서의 마지막 퇴장인 죽음도 아름답게 맞이하겠다. 현직의 삶보다 퇴장후의 은퇴의 삶이 중요하겠다!‘ 하는 생각이 가슴을 쳤습니다. 세월 흘러 나이들어가면서 점차 보수(保守)적이되고 안주(安住)하게 되면서 마음의 순수(純粹)도 잃고 분별력(分別力) 역시 무디어 질 수 있겠다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역시 주님과의 긴밀한 내적 친교 중 깨어있는 삶이 얼마나 핵심적인지 깨닫습니다. 또 하나는 '놀이'와 관련된 깨달음입니다. 사실 예전 어린 시절의 삶은 놀이라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어찌보면 삶은 놀이와 같습니다. '삶은 놀이, 참 재미있는 생각이다. 놀이는 모두가 재미있어 하지는 않는다. 내 경우는 축구가 재미 없어 축구 시간 내내 재미없이 뛰어다니기만 했고 빨리 끝나기만 기다렸다. 축구가 재미있는 아이들은 축구시간 내내 신나게 뛰겠지만 그렇지 못한 아이들도 많지 않겠나. 교대 시절 무용은 F학점에 재수강 한 적도 있다. 삶의 놀이와 경기도 재미없이 질질 끌려가다가 인생 끝나는 경우도 있겠다. 또 마냥 놀이가 재미있는 것도 아니다. 한 때의 재미있는 놀이지 시간 지나면 놀이 역시 재미없어 질 수 있다. 특히 고령화 시대, 심신이 노쇠하여 가면서 날로 삶의 놀이에 재미를 잃어갈 때가 문제겠구나. 삶은 놀이인데 삶의 놀이에 재미를 잃으면 무슨 재미로 사나?‘ 새삼 주님과의 깊은 내적 친교를 통한 주님과의 거룩한 놀이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묵상하니 오늘 말씀의 열매도 풍성합니다. 주님과의 친교와 우정이 문제의 답입니다. 날로 주님과의 친교와 우정이 깊어지면서 주님과의 놀이는 물론 주변과의 놀이의 차원도 달라질 것이며 삶의 놀이의 기쁨과 재미도 살아날 것입니다. 첫째, 성소에 대한 부단한 깨달음입니다. 성소 즉, 부르심에 대한 부단한 깨달음이 삶의 놀이에 대한 기쁨의 샘입니다. 부르심은 순전히 은총입니다. 주님이 먼저 우리를 부르셨기에 주님을 따라 나선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따라 나선 듯 하지만 깊이 들여다 보면 주님이 먼저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역시 부르심의 경우, 삶의 문장에서 주님이 주어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의 사도들만 아니라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 모두에 해당됩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시어,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 부르심과 응답이 한 셋트입니다. 우리의 부르심과 응답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번으로 끝나는 부르심과 응답이 아니라 평생과정입니다. 주님은 매일 우리를 성당에서의 미사와 성무일도에 부르시며 또 수시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바로 이 부르심과 응답의 여정은 그대로 회개의 여정과 일치합니다. 이 부르심에 충실히 응답할 때 비로소 순종과 겸손의 덕이요 주님과의 내적 친교와 우정도 날로 깊어질 것이며 삶은 기쁨의 놀이가 될 것입니다. 둘째, 제자직에 대한 부단한 깨달음입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신자들입니다. 제자의 어원은 라틴어로 '배우다(to learn)'는 뜻입니다. 부단히 주님이자 스승이신 주님께로부터 배우고 그 배움을 육화하는 일이 제자들이 할입니다. 주님과 함께 머물면서 말씀의 영과 생명과 빛으로 충전시키는 관상적 공부와 휴식이 기본이며 이 기본에 충실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이래서 성당에서의 미사와 성무일도, 묵상이요 수시로 주님 안에 머무르는 관상기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주님은 이 점을 분명히 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였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사도직 이전에 제자직임을 깨닫습니다. 주님과 함께 지내면서 배우고 채워야 사도직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관상과 활동의 리듬 따라 주님과의 친교와 우정을 깊이할 때 삶은 기쁨의 놀이가 됩니다. 주님은 히브리서에 말하는 대로 '더 나은 약속을 바탕으로 세워진 더 나은 계약의 중재자'입니다. 주님과 함께 머물 때, 히브리서에 인용된 예언서의 새계약이 고스란히 실현됩니다. "나는 그들의 생각 속에 내 법을 넣어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리라.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주님과의 친교와 우정을 통해 날로 우리 마음 깊에 새겨지는 주님의 가르침의 법이요 하느님의 백성에 대한 깊어지는 자의식입니다. 더불어 증대되는 삶의 놀이의 기쁨입니다.
셋째, 사도직에 대한 부단한 깨달음입니다. 관상은 활동으로 표현되기 마련이듯 제자직은 사도직을 통해 완성됩니다. 주님과 친교와 우정의 기쁨을 이웃과 나누는 것이 바로 사도직입니다. 제자직과 사도직은 분명히 구별됩니다. 사도의 어원은 그리스어로 '선교를 위한 파견(to go out on a mission)'입니다. 사명을 띠고 파견되는 것입니다. 주님께 복음을 배우고 치유 받았으면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고 치유의 은총을 베풀어야 합니다. 결국은 우리를 통해 주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다음 대목이 제자들의 사도직에 대한 분명한 언급입니다. -그들은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다.- 전반부가 제자직에 관한 것이라면 후반부는 사도직에 관한 것입니다. 흔히 베네딕도회 수도자를 '안으로는 수도승, 밖으로는 선교사'라 하는데 바로 위의 대목과 일맥상통합니다. 안으로 주님과 친교와 우정을 깊이하는 제자직의 수도승이요 밖으로는 사도직을 충실히 수행하는 선교사입니다. 이 둘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한 실재의 양면입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이자 사도들은 모두 주님하신 것과 똑같이 파견되어 복음을 선포하시며 치유와 구마활동을 하셨습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를 부르시어 당신 복음을 가르치시고 영육을 치유하신 후 거룩한 삶의 놀이 터에 당신의 사도로 파견하십니다. "자애와 진실이 서로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맙추리라."(시편85,11). 아멘. -조재형신부- 오늘부터 2박3일 동안 ME 주말 봉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ME는 "Marriage Encounter"의 줄임말입니다. ‘혼인의 재발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로 사랑해서 결혼한 부부는 화목한 가정을 이루어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자녀를 낳아서 키우고, 자녀들이 자라는 것을 보면서 보람을 느낄 것입니다. 결혼한 부부가 머무는 가정은 지친 몸을 편안하게 쉴 수 있도록 해 주는 보금자리가 될 것입니다. 매일 아침 부부는 눈을 뜨면서 서로의 사랑을 확인할 것입니다. 처음 약속했던 것처럼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성하거나, 병들거나, 항상 서로 아껴주고 사랑하면서 살려고 합니다.
하지만 겉으로는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많은 가정은 서로 다른 별에서 온 사람들이 만난 것처럼 소통에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갈등이 커지면 다투게 되고, 행복하고 아름다운 가정이 깊은 상처를 남기고 깨지기도 합니다. ME는 지금 행복한 부부가 더욱 행복해 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는 프로그램입니다. 지금 대화가 부족해서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는 부부가 서로를 이해하고 경청하면서 독백이 아닌 대화를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프로그램입니다. 우리는 서로가 틀린 것이 아니라, 서로가 다른 성격 유형을 지녔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체험을 함께 나누는 프로그램입니다.
사제들도 신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부부처럼 한 집안에서 살지는 않지만 더러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사제가 신자들과 어울려 식사를 자주하면 기도하지 않는다고 하고, 늘 성당에 있으면 일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모든 일을 신자들과 상의해서 하면 추진력이 없다고 하고, 혼자서 결정을 하면 독단적이라고 합니다. 강론이 길면 지루하다고 하고, 강론을 짧게 하면 준비가 부족하다고 합니다. 사회문제를 이야기하면 정치적이라고 하고, 신앙 이야기를 하면 현실을 잘 모른다고 합니다. 사제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기껏 준비한 강론을 하는데 주보를 보거나, 조는 분들이 있습니다. 피정을 준비했는데 오셔야 될 분들은 오지 않습니다. 성당의 시설물들을 사용하면 제자리에 갖다 놓지 않습니다. 미사 전에 미리 와서 기도를 하면 좋겠는데 미사 시간이 돼서야 성당에 오고, 늦게 오는 분들도 있습니다. 성당의 재정에 관심을 가지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는 분들도 많습니다.’ 이렇게 사제와 신자들도 서로의 다름을 틀림으로 생각해서 오해를 하고, 위기를 겪기도 합니다. 이번 주말 봉사를 통해서 경청과 대화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체험하고 싶습니다.
국립 현충원에는 나라를 위해서 헌신하다가 사망한 사람들의 무덤이 있습니다. 그 무덤에는 각자의 이름과 직책 등이 적혀있습니다. 저도 예전에 동작동에 있는 국립묘지에 갔던 기억이 납니다. 하얀 비석에 검은 글씨로 이름이 적혀있는 묘비들이 세워져있었고, 그것이 참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지난번에 큰 병원에 갔었습니다. 병원 현관에 병원 건립을 위해서 도움을 준 사람들의 명단이 붙어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신앙인들의 이름은 어느 곳에서 볼 수 있어야 하나 생각합니다. 기부금을 낸 사람들의 명단에, 자선과 나눔을 한 사람들의 명단에, 누군가를 도와준 사람들의 명단에 신앙인들의 이름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 지금 슬퍼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주님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명단에 신앙인들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질투하고, 남에게 해를 끼치고, 가난한 사람들을 무시하고, 자신의 욕심만을 채운 사람들의 명단에 신앙인들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잊고, 모를 지라도 하느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함께 복음을 전할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복음서는 그 제자들의 이름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베드로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시몬,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보아네르게스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그리고 안드레아,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우리들 각자의 이름이, 언젠가 하느님 나라에 기억되고 기록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지금 내의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제자로서 충실해야 합니다. 주어진 능력과 재능을 하느님을 위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나는 그들의 생각 속에 내 법을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리라.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산에 오르신 예수님 -반영억신부-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마음에 두셨던 사람을 가까이 부르시고 그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습니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마르3,13-14). 성 경에서 산이란 하느님이 계시는 곳, 하느님의 뜻이 밝혀지는 곳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산에 오른다는 것은 하느님이 계신 곳으로 하느님의 뜻을 받으러 간다고 말할 수 있으며 오늘 우리에게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원하시는 사람을 불렀습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15,16). 는 말씀대로 입니다. 산에 오르셔서 부르셨다는 것은 아버지 하느님의 뜻대로 처신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런데 부름 받은 사람의 모습을 보면 특별히 잘난 사람이 없습니다. 오히려 사나운 사람이 섞여 있었습니다. 신중하게 뽑으셨는데 가리옷 사람 유다가 거기 있었고, 남을 등쳐먹는다는 공적인 죄인 세리 마태오, 열혈당원 시몬, 천둥의 아들이라 불리는 야고보, 성질 급한 요한, 다혈질 적인 베드로 등 그야말로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의 속을 아셨을까요? 아니면 모르셨을까요? 저 같으면 아마도 그런 사람은 제쳐 놓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품고 가십니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셨습니다. 세 리 마태오와 열혈당원 시몬은 당시 상황에서 도저히 함께할 수 없는 적대관계에 있었습니다. 세리들은 이스라엘 점령세력인 로마인들과 협력하는 반면에 열혈당원들은 로마인들에게 저항하여 무력 투쟁을 하던 이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적대관계에 있던 이들까지도 하느님백성공동체로 모아들이셨습니다. 갈등과 적대관계의 극복뿐만 아니라 차별과 소외와 배척을 넘어서 모든 사람을 하느님 품 안에 모으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마음도 그렇게 커졌으면 좋겠습니다. “함께 지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동안 어떤 생활을 해왔든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부름을 받고 예수님과 함께 새 생활을 하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함께 지냈다는 것은 단순히 공간적인 의미를 말하지 않습니다. 함께하면서 주님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오상의 비오 신부님은 과거는 하느님의 자비에 미래는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고 오늘을 사랑으로 살라고 하였습니다. “함 께 지내는 것”은 그분 가까이 머물면서 그분을 믿고, 배우며, 닮아 가는 삶을 의미 합니다. 제자들은 스승으로부터 지식만 전수받는 것이 아니라 스승의 삶을 배워야 합니다. 스승과 공동운명체가 됨으로서 스승의 사명에 참여하게 되고 복음을 선포하고 마귀를 쫓아내는 권한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석에 쇳가루가 오래 붙어 있으면 그 쇳가루도 자력을 지니듯이 열두사도도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그분에게서 생명력을 받아 그분처럼 복음을 전하고 구원사업을 펼치게 됩니다. ‘유다’라는 말은 “찬미하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뜻을 가진 유다가 왜 주님을 찬미하지 못하고 배반자가 되었을까? 그는 예수님과 함께 지내기를 제대로 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몸은 같이 있어도 마음은 따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몸과 마음이 그분과 함께 있지 않으면 유다처럼 되지 않으리라고 장담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분과 함께 있지 않고 어떻게 복음을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과 함께 지내야 듣고 보고 체험한 바를 전할 수 있습니다. 사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누리는 기쁨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마귀를 쫓아내는 권한은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주어지는 것입니다. 복음을 선포하고 선포하는 바를 살면 그 안에 능력이 주어집니다. 저희는 왜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하고 제자들이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지 않고서는 그런 것을 쫓아낼 수 없다”(마르9,28-29).고 말씀하셨고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 르8,33). 하며 꾸짖으셨습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곧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는 것이고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는 사람은 이미 사탄을 쫓아낸 것입니다. 세상이 쓸모없다고 제쳐놓은 사람들도 예수님께서는 결코 소홀히 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의 생각을 접고 하느님의 능력을 사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사랑합니다. 마음에 두셨다 -인영균신부- 오 늘 예수님은 열둘을 뽑아 사도로 삼으십니다. 산에 올라가시어 당신 “마음에 두신 이들을” 가까이 부르셨다고 합니다. 내가 보는 성경은 분도출판사에서 출간한 ‘200주년 성서’입니다. 여기서는 주교회의에서 나온 새 성경에서 “원하시는 이들”이라는 표현을 “마음에 두신 이들”이라고 좀더 아름답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리스어 ‘텔로’(θ?λω 원하다)는 어떤 지성적인 이해나 심의나 신중함 없이 내면에서 자연적으로 우러나오는 바람을 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원의는 당신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직관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보고 ‘아 이 사람이구나!’라는 마음의 울림을 듣고 부르신 것이지요.
예 수님의 마음은 하느님의 모태입니다. 여기서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이 떠오릅니다.“주님께서는 나를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셨다. 나는 주님의 눈에 소중하게 여겨졌고 나의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 주셨다”(이사 49,5). 예언자의 이 확신이 우리의 확신이 되었으면 합니다. 주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우리가 당신을 부르기 전에 이미 부르셨습니다. 이는 무엇보다는 “당신과 함께 있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있음은 우리의 힘이요 지혜요 바탕입니다.
우 리한테 남은 것은 이 부르심에 자발적으로 능동적으로 응답하는 것뿐입니다. 주님의 의지와 우리의 의지가 하나가 되어야 우리는 참된 사도로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두 에너지가 하나가 될 때, 그러니까 신적 에너지와 인간적 에너지가 한 몸이 될 때 그 힘은 무한대입니다. 우리에게 입이 있는 까닭은 -김찬선신부-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 더러운 영들이 주님더러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하고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입을 다물라 하시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더러운 영들이 주님더러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지식의 과시일까요,믿음의 고백일까요? 그 답은 뻔합니다. 믿음의 고백이라면 더러운 영이 아니고 깨끗한 영이겠지요. 그렇다면 더러운 영이 어찌 예수님의 신성을 알아볼 수 있을까요? 그것은 더러운 영도 능력은 영적인 능력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영적인 존재이고, 영적인 능력을 가졌기에 신성을 알아보는 것이니, 그것을 뭐 대단한 것으로 생각하거나 좋은 것으로 착각할 필요 없습니다. 사랑의 능력이 대단한 것이지 영적인 능력이 대단한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들은 예수님의 신성을 알아볼 뿐 사랑치 않고,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오는 것이 하나도 반갑지 않습니다. 세상을 너무도 사랑하는 그들에게 하늘이 다가오는 것은 축복이나 구원이 아니라 재앙이고 파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더러운 영이 주님 앞에 와서 무릎을 꿇는 것은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 역시 좋게 이해할 수 없지요. 그렇다면 이는 비굴하고도 교활한 양동작전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더러운 영은 주님 앞에 온 것부터 마음에서 우러나와 온 것이 아니고 주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도 진정한 승복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자기가 있는 곳에 오지 않으셨으면 자기가 찾아갈 리가 없지요. 자기를 쫓아내려 오신 주님을 마지못해 마중 나온 것일 뿐입니다. 무릎 꿇은 것도 더 힘센 분 앞에 왔으니 그 힘에 굴복한 것이기도 하고, 거짓 복종으로 주님의 준엄한 명령을 피해볼 속셈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주님을 공격합니다. 당신의 정체를 내가 아니 나를 가혹하게 쫓아내시면 당신의 정체를 사람들이 다 알도록 까발리겠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로서의 삶을 철저히 사시려는 주님께서 자기를 내쫓으시면 자기는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것을 들추어내겠다고 협박하는 겁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실 때 악령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이렇게 또 저렇게 해보라고 하며 이미 주님을 공격했던 수법입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그 입 다물라고 일갈하십니다. 그리고 이 일갈은 우리에게도 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도 지식을 자랑하려거든 그 입 다물라! 공갈 협박이나 하려는 그 입은 다물라! 너희가 입이 있음은 믿음을 고백하라고 있는 것이요,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있는 것임을 알아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만일 예수를 진정 우리의 구원자로 체험하였다면 복음에서 치유 받은 사람들이 늘 그러하듯 하느님께는 영광 찬미 드리고 이웃에게는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라고 우리의 입이 있는 것임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시어,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 (마르 3,13) 우리가 성소(聖召)라 할 때 사랑의 어울림을 통한 복음선포 -기경호신부- 오늘 복음은 다시 우리의 부르심에 대해 생각하도록 초대하고 있다. 부르심은 무엇보다도 먼저 사랑의 초대이다. 루카 복음의 소명 사화(5,1-11)를 보면,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시기 전에 ‘먼저’ 따뜻한 사랑과 배려를 보여주신다. 그분은 감당할 수 없는 하느님의 사랑 앞에서 두려워 떨고 있던 시몬을 부르시자 그는 아무 말 없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나섰다. 다른 제자들도 이런 식으로 불림 받았다. 오늘 복음에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셨다’(3,13)는 것은 그분의 사랑의 심장에 자리 잡았던 사람들을 제자로 삼았다는 뜻이다. 이렇듯 우리의 부르심도 자신의 의지로 응답한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분의 사랑의 부르심임을 기억해야만 할 것이다.
-한상우신부-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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