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이호성 국제기구 개발담당
“어떻게 네가 나이키를 배신할 수 있니?”
워싱턴에 살다 한국으로 귀국한 선배가 출장 차 D.C.를
방문했 때 저녁자리에서 나를 보자마자 한 말이다.
내가 입고 있던 흰색 후드티가 나이키가 아닌
경쟁사 오니츠카 타이거(아식스) 제품이라는 것에 놀란 것이다.
중학생이던 99년 이후 나는 나이키 제품을 입고 신었다.
친구나 지인들은 한참 시간이 지나서 다시 만나도,
호성 = ‘나이키 & 신발’로 기억할 만큼 나의 나이키 그리고 신발 사랑은 남달랐다.
이렇게 특정한 것에 열정을
가지고 좋아하는 사람을
한국에서는 ‘덕후’라고 부른다.
원래는 집안에서 취미생활이나
한다는 다소 부정적인 의미로
70년대 생겨난 일본어 단어를
한국식으로 줄여서 부르는 게
‘덕후’이다.
그런데 요새는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 전문성을 쌓는다는 긍정적인 의미로
더 많이 쓰이는 것 같다.
그리고 덕후질이 일과 하나가 된다는 의미의
‘덕업일치’라는 새로운 사자성어도 자주 등장한다.
신발을 좋아하는 나는 일반인의 눈에 비추어 보았을 때 말 그대로 ‘신발 덕후’이다.
영어로는 ‘Sneakerhead’이다.
학부 때 전공은 건축이었지만, 신발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학교과제로 신발 뮤지엄을 설계했고,
신발과 건축의 관계에 대해
현대건축사 시간에 발표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학부 졸업 후 직장생활을 거쳐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신발에 대한 열정은 현실이라는 벽에 부딪혀 서서히 잊어져 갔다.
그러다 4년 전 스페인 빌바오 구겐하임 뮤지엄을 방문하면서
잊고 있던 신발에 대한 열정을 재발견하게 되었다.
국제개발 업무와 매우 상업적인 세상의 신발을 연결시키기는 어려워,
출장 혹은 휴가로 세계 곳곳을 누비고 다닐 때
신발들을 들고 다니면서 신발사진 찍기를 취미로 시작했다.
이렇게 방문한 도시를 배경으로 찍은 신발사진들을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신발 덕후질을 몇 년 동안 지속적하고 있다.
(작년 가을부터 1년간 조금 뜸하긴 했지만)
인스타 계정의 신발사진들을 본 사람들은 ‘나이키로부터 협찬 받고 찍는 거냐?’
아니면 ‘나이키로부터 아직 연락 못 받았냐’ 라는 질문들을 한다.
많은 노력을 들이다 보니 그럭저럭 전문성이 엿보여
이런 질문들을 받는 게 아닐까 싶다.
4년 반 동안 일한 팀에서 옮겨볼까 하고 일자리를 알아보던 중
나이키에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자리가 나왔다.
과업지시서만 읽어봐도 가슴이 뛰고
신발 관련된 일을 한다는 상상에 너무나도 설렜다.
하지만 아무리 자신 있고
아이디어가 많다고 해도,
덕후질로 하는 신발사진
포스팅 외에는 나이키에서
요구하는 실무 경력이 없었다.
그런 내가 과연 경쟁력이 있을까
냉정하게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마감시간이 지나
제대로 지원도 못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도 직장경력이 8년이 되는데,
지금까지 쌓아온 경험과 직접적인 업무 연관성이
없는 곳에서 다시 시작하기에는 부담이 따랐다.
현실적인 조건들(보수, 안정성 등)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느낀다.
오랜만에 구직활동을 하면서 가슴을 따라 ‘덕업일치’의 삶을 추구할 것인지,
아니면 냉정하게 취미는 덕후질의 세계로 제한하면서
‘덕업병행’의 삶을 살아야 할지 고민되는 2019년 가을이다.
또래들 중에도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친구들이 많지 않은가 싶다.
<성이호성 국제기구 개발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