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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장 통치자들과 권세들 그리고 망가진 제도들
이 글을 쓰는 동안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칸타타 "오 거룩한 성령과 물 세계"(O heilges Geist und Wasserbad)음반을 틀어 놓고 있다. 이 음반은 매우 복합적인 문화 인공물로서 3세기가 동시에 어우러진 작품이다. 이 칸타타는 1715년에 작곡되어 1976년에 녹음되고 다시 2008년에 발명된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 스포티파이(spotify)를 사용하여 내 컴퓨터에서 울려 나오고 있다. 이 곡을 고른 이유는 좀 엉뚱하지만 이것이 문화 인공물로서는 반쯤,아니 4분의 3쯤 죽어 있기 때문이다.
바흐의 칸타타는 내가 말하지도 알아듣지도 못하는 독일어로 부른 것이기에 나에겐 부분적으로 죽은 음악이다. 이 점은 배경음악으로서 유용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많은 작가들처럼 나도 누가 영어 가사로 노래를 부르고 이;ㅆ으면 글쓰기에 집중할 수가 없다. 그래서 누군가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내가 전혀 배운 바 없는 '경기')로 부르는 노래가 내게는 딱 안성맞춤이다. 물론 이 경우 칸타타의 본래 의미 대부분은 나의 감상에서 상실되고 만다. 남아 있는 것은 음악뿐이고 그 음악만으로도 영광스럽지만 음악과 가사의 의미가 함께 번영하도록 되어 있던 본래의 구성과는 비교할 수 없다.
현대의 많은 미국인에게 이 칸타타는 가사뿐 아니라 음악도 사실상 죽어 있다. 음악은 자체의 규칙과 역할을 가진 경기라고 할 수 있는데 바흐의 바로크 음악의 경우 특히 몇 가지 규칙이 매우 복잡하다. 베이스가 "보~힌"이라는 음절을 계속 반복해서 노래할 때 지금 진행되는 경기는 독일어 "wohin?"(어디로?)를 말하는 것뿐 아니라 반복이라는 음악적 경기인데 본래의 청중에겐 충분한 의미를 전달했을 것이다. 나는 이런 음악적 경기에 관해 배웠기 때문에 어느 정도 감상할 수 있지만 내 이웃들 대부분에게는 이것이 그저 난해하게만 들릴 것이다. 그들은 현대의 팝 음악이나 힘합이라는 경기의 규칙은 알지만 바흐 음악 세계의 규칙과 역할은 전혀 알지 못한다. 곡에 음악적 의미와 가사적 의미를 부여하는 구조를 잘라내 버리면 바흐가 정성들여 작곡한 칸타타는 이중으로 상실된다.
이 칸타타는 또 다른 면에서 거의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나는 지금 이 곡이 쓰일 당시 염두에 두었을 연주 상황과는 동떨어진 방식으로 그 곡을 듣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듣는 칸타타는 여섯 악장이 연속으로 이어진 하나의 곡으로, 엄격하게 연주되는 음악 공연이다. 그러나 원래의 환경은 연주회장이나 스튜디오가 아니라 특정 장소, 특정 시간의 교회였다. 바흐는 이 곡을 1715년 삼위일체 주일 예배를 위해 작곡했는데 예배 장소는 아마도 그가 '콘체르트마이스터'(음악감독)으로 있었던 독일 바이마르시 궁정 예배당이었을 것이다. 예배당 안에서 그날의 칸타타는 성경 봉독, 설교, 성찬식과 연계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원래의 '연주'에는 각 악기 주자와 가수들뿐 아니라, 성직자들과 회중도 포함되었을 것이고 회중석에서는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아마도 기침소리도 났을 것이다. 내가 지하 사무실에서 이 글을 쓰고 있는 컴퓨터 모니터 양쪽에 놓인 한 쌍의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이 아름답지만 현장에서 유리된 음악을 들을 때 나는 바흐가 택한 곡조와 가사를 원래의 청중에게 생생히 전달하였던 예배 현장의 분위기를 쉽게 잊어버릴 수 있다. 게다가 나는 예복을 차려입은 그 지방의 남녀 귀족들이 가득 찬 궁정 예배당 안에 퍼져 있는 파워와 특권과 지위와 위엄의 제도적인 맥락을 전혀 감지하지 못한다.
인공물이 본래의 제도와 그 구조의 맥락에서 떨어져 나오면 칸타타가 배경음악으로 쓰이거나 축구공이 어떤 미래지향적 고고학 전시회에 놓이는 것처럼 그 본질적 의미가 상실된다. ('마태 수난곡' 음반에 대해 어느 구매자가 아마존에 올린 리뷰에서 바흐의 최고 합창곡이라 할 수 있는 이 강렬한 긴장과 감정을 표현한 곡을 대단히 듣기 '편안한' 음악이라고 순진하게 적은 것을 본 적이 있다. 편안하다니!) 물론 뭔가 얻는 것도 있을 것이다. 깨끗하고 정확한 현대의 녹음 덕택에 바흐의 정교한 음악에서 원래의 회중은 놓쳤을지 모르는 것들을 들을 수 있고, 교회 제단 저 위의 접근할 수 없는 곳에 높이 걸려있던 성화가 박물관 벽에 눈높이로 전시되면 자세히 감상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인공물이라도 그것이 생명을 얻도록 누군가 구조를 만들어 주지 않고, 그것이 제대로 사용되도록 어떤 제도가 편안한 보금자리를 제공하지 않으면 그것들은 살아 있는 사람들의 영역에서 고고학의 영역으로, 더 나쁘게는 배경음악의 신세로 전락한다. 그것들이 시대를 초원해 소리없이 손짓하고 있을지라도 미래 세대는 그 특정한 장소와 시간 속 인간이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 이를테면 1715년 삼위일체 주일 바이마르 대공의 궁정 예배당에 있는 예배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인공물이 말하는 바를 거의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번영하는 제도에 연결된 인공물만이 생명력을 갖는다. 그리고 문화들만이 그러한 제도를 유지할 수 있고 번영하는 삶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위기에 처한 제도
모든 인간과 마찬가지로 모든 제도는 죽음의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제도도 쇠퇴하고 소멸하기 때문이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시대에 번영하던 음악의 세계는 이제 과거 영광의 그림자로 남아, 예배자들이 가득 들어찬 교회에서 혁신적이고 즉흥적인 경배로 드려지기보다는, 나이 든 청중을 대상으로 세속 연주회장에서 공연하는 상대적으로 소수의 전문가들의 영역이 되었다.
제도도 사람들처럼 복합적인 원인으로 사망에 이를 수 있고 실제로 그렇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제도는 인공물이 망가져서 소멸할 수 있다. 제도의 생명에 핵심이 되는 인공물이 더 이상 쓸 수 없게 되거나 사람들의 관심과 노력을 불러 일으킬 만큼 매력적이거나 타당한 대상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일은 대부분 더 강력한 경쟁자가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는 경우에 일어난다. 고무 타이어를 댄 쇠바퀴가 등장해 나무 바퀴를 대체하게 되자 수공예로 아름답게 제작된 나무 바퀴는 더 이상 마차와 짐차의 유용한 부분이 아니라 향수를 자아내는 잔디밭의 장식물이 되어 버렸다. 우리 시대에는 역사상 가장 빠른 속도로 인류의 언어들이 사라지고 있는데, 몇 안 되는 국제어가 지배하는 세계 속에서 무수히 많은 민족들이 그들의 모국어가 더 이상 살아남을 수 없다고 결론 내리고 있다.
제도는 무대가 사라져서 소멸하기도 한다. 살아 있는 전통으로서 바흐의 종교 음악이 쇠퇴한 것은 부분적으로는 먼저 그것이 사용되던 공중 예배 의식이 쇠퇴한 것과 다음으로 20세기와 21세기에 와서 '고전' 음악을 감상하는 청중의 저변이 무너진 데서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스포티파이의 완벽한 바흐 음반 목록이 보여주듯이 그의 음악적 인공물들은 아직도 우리 곁에 가까이 있고 어떤 의미에서는 전보다 더 접하기 쉬워졌다. 오르간, 악보, 음반 등 바흐이 엄청난 창작 활동의 자취는 아직 많이 남아 있다. 지금 없어진 것은 이런 인공물들이 일상적으로 사용되던 바흐 시대의 환경이다. 클래식 음악을 전공하는 사람들, 바로크 음악의 규칙과 역할을 익힌 사람들은 많고 사실 일자리 규모에 비해 너무 많지만 그들이 공연할 무대는 충분치 않다. 문화사에서 우리의 이 짧은 순간만 볼 때, 음악 공연을 위한 가장 큰 무대는 <아메리칸 아이돌> 같은 텔레비전 쇼인데 2012년 최종회에 2,100만 명의 시청자를 끌어모았고 그전 십 년간 매주 3,000만 명이 시청했다. 이에 비해, 그 십 년 동안에 클래식 공연을 관람한 성인은 매년 2,100만 명에 불과했다. 바흐의 칸타타는 아직 인공물로서 존재하지만, 예배를 위한 칸타타는 말할 것도 없고 제도로서의 칸타타 공연은 허우적거리고 있다. 무엇보다도 무대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안정적인 무대를 갖는 것은 제도의 존속을 위해 특히 중요하다. 그 이유는 번영의 패러다임을 지닌 많은 사람들, 즉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선 상태의 모범이 되는 개인과 공동체가 무대를 통해 공급되기 때문이다. 내가 바흐의 첼로 모음곡이나 평균율 클라비어곡의 푸가를 거실에서 연주할 때 나는 바흐와 서양 음악의 유산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지만 대개는 나만의 즐거움이나 (희망사항이기는 하지만) 내 가족과 친구 몇 사람의 기쁨을 위한 것일 뿐이다. 그러나 내가 연주회장에 가거나 더 바람직하게는 독일의 어느 큰 교회당에 가서 몇 주 혹은 몇 달 혹은 몇 년간 연습하여 기량을 쌓은 사람들의 바흐 연주를 듣고 또 수백, 수천 명의 청중, 더 바람직하게는 예배자들과 함께 그런 경험을 한다면 나는 이 문화적 전통의 가장 풍부하고 가장 큰 파워를 지닌 형태를 만나는 것이다. 이 경험은 내 집에서 개인적으로 이루어지는 서투르지만 진지한 모방의 원천이 된다.
어떤 제도도, 어느 특정 문화영역에 숙달하는 것을 자기들의 필생의 업으로 삼는 '전문가'들에게만 맡겨서는 융성하기가 매우 어렵다. 미식축구가 미국인의 생활에서 파워 있는 제도가 될 수 있는 것은 슈퍼볼만이 아니라 뒤뜰에서 하는 즉흥적인 경기가 있기 때문이고, 금요일 밤 텍사스의 작은 마을에서 벌어지는 경기와 13만 명의 팬들 앞에서 펼쳐지는 서부 대학리그의 Pac-12 경기 사이에, 톰 브래디의 필드를 가르는 장거리 패스와 딸에게 던지는 아빠의 패스 사이에 있는 모든 다양한 수준의 기술과 경기력의 스펙트럼 때문이다. 가수 머라이어 캐리부터 <아메리칸 아이돌> 우승자 그리고 샤워를 하며 흥엉거리는 미국인들 사이에도 다양한 수준의 스펙트럼을 찾아볼 수 있다. 오늘날 유럽 곳곳의 조용한 길을 저녁 무렵 걷다 보면 한 세기 전 디트리히 본회퍼의 가족처럼 한 식구가 모여 클래식 음악을 연주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이러한 프로와 아마추의의 양극 사이의 스펙트럼이 제도의 번성에 기여한다.
그러나 한 제도의 무대가 사라지거나 우리가 공유하는 상상력의 세계에서 밀려나면 그 제도는 사양길로 접어든다. 일간 신문들은 20세기 미국인의 생활에 중심적인 제도로서 정치와 언론에 전문적 활동의 무대를 제공했고 언론은 이 무대에서 자신의 규칙과 역할을 정립하고 나아가 미국의 정치와 문화 전반에서 의제를 설정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무대가 빠르게 사라지고 인터넷이라는 매우 다른 무대가 그 자리를 내주고 있다. 그런 가운데 이제까지 신문의 도음으로 가능했던 개인과 공동체의 번영의 특정한 모습도 사라져 가고 있다. 인쇄 매체에 대한 접근권을 가진 전문 저널리스트들이 십억이나 되는 트위터 사용자들로 대체되고 있기 때문에 민간 영역이나 개인의 번영에 더 유리할 수 있다. 그러나 전문 언론이 지켜온 진실 보도와 증거 확보의 모범에 대한 접근성을 잃어버리면서 대중의 담론 수준이 쇠퇴할 수도 있다. 인터넷이 만연한 상황에서 어떤 제도들이 등장할지 아직 말하기는 이르겠지만 과거 시대의 미디어에 속했던 일부 제도들은 분명히 사라질 것이다.
인공물이 상실되고 무대가 사라지면 번영에 구조와 반향을 마련해 주었던 규칙도 기억에서 멀어지거나 타당성이 약화될 것이다. 예컨대 저널리스트들은 그동안 객관성이라는 (다소 비현실적인) 말로 요약되는 일련의 규칙에 자부심을 가졌었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도 어느 상황에 대하여 특히 심히 다툼이 있는 정치적, 문화적 사안에 대하여, 완전히 '객관적인' 견해를 가질 수 없다. 그러나 저널리스트들은 서로 상충되는 견해를 함께 써 줘야 한다는 의무에 관하여, 보도 내용의 진실성을 확보하기 위해 필요한 정보 제공자의 수와 성격에 관하여, 또 정보 제공자의 비밀을 보호하는 것과 정보 제공자들이 자기 이름을 밝히고 말하기를 꺼려하는 암시와 추정의 대변자가 되지 않는 것 사이에서 미묘한 균형을 취해야 하는 문제 등에 관하여 잘 정립된 규범을 따라 왔다. 이러한 언론의 무대가 그 수에 있어서나 문화적 의미에 있어서 쇠퇴하면 저널리스트들이 여러 세대를 통해 지켜 온 규칙들이 쓸모없게 된다. 그래서 아직 규칙에 충실한 언론 기관들은 그러한 규칙에 구속되지 않는 매체들에 먼저 등장해서 뉴스 시간을 휩쓸고 있는 풍분들을 보도하는 데 곤란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마지막으로, 제도가 소멸하면 역할도 사라지는데 이는 특정한 종류의 파워가 사라진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인간 능력의 독특한 영역들이 더 이상 표현될 기회를 찾지 못한다. 제도와의 연결을 통해 재능이나 기술이 발전되고 개발될 수 있는 제도적 배경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한때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는 데 필요한 풍부한 배경을 제공했으나 이제는 완전히 사라져 버린 직업과 활동들에서 이러한 손실을 가장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자동차가 등장하자 사람들의 일상적 동반자였던 말의 시대가 막을 내렸다. 말이 사라지자 마구간 청소라는 더럽고 지겨운 일이 없어졌을 뿐만 아니라 수천 년 내려온 말과 사람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는 독특한 영역도 끝이 났다. (우리 집은 펜실베니아주 랭커스터 카운티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데 그곳에는 아미시 그리스도인들이 마차와 농기구들로 구성된 제도를 보존하고 있어서 우리가 종종 자전거를 타고 아미시 마을을 가 보면 그곳 생활의 여러 부분에서 젊은이들과 어르신들 그리고 말 사이의 관계를 맺어 주는 풍부한 기술과 상호작용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우리 문화가 거의 완전히 잊어버린 것이다). 물론 말의 시대가 끝난 이유가 자동차의 인공물적 측면 때문만은 아니다. 종국적으로 말을 몰아낸 것은 주간 고속도로 같은 자동차의 제도적 무대, 많은 도로들에 적용된 가축 이동 금지 같은 규칙, 그리고 정비공에서 카레이서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하나님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여러 새로운 기회와 새로운 역할 들이었다.
제도들의 성쇠에 대해 우리는 어떤 입장을 가져야 하는가? 제도들은 우리 주위에서 탄생하고 번성하고 소멸하여 사라진다. 제도의 쇠락이 무조건 다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러 세대에 걸쳐 존속했던 문화적 양식이 사라지는 것을 너무 서둘러 경축하지는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어떤 제도화된 우상숭배와 불의의 양식이 더 건전한 인공물, 무대, 규칙, 역할의 체게와 대체될 때 그로 인하여 인간의 (그리고 말과 같은 비인간 창조물과 창조세계 다른 영역들의) 번영을 위한 가능성을 보존해 온 다른 제도가 그 제도의 소멸에 의해 위험에 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도가 소멸될 때 사라지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 파워, 즉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는 잠재력이다. 억압적인 제도가 쇠락하고 특히 그것을 대체하여 포괄적인 번영에 적합한 제도들이 등장할 때 우리는 당연히 이를 경축한다. 그러나 우리는 제도 자체가 쇠퇴하기를 절대 바라서는 안 된다. 그것은 당신의 형상을 지닌 존재들이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원래 창조 의도를 실현하는 인공물과 무대와 규칙과 다양하게 세분화된 역할들이 이 땅에서 사라지기를 바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제도는 실패한다
한 문화적 패턴이 제도로 자리 잡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시간이 3세대라면 최대의 기간은 수백, 수천 년의 단위로 측정될 수 있다. 거의 매일 아침 나는 공동 기도서를 가지고 아침 기도를 드리는데 이 책은 토머스 크랜머(Thomas Cranmer)가 16세기에 펴낸 것과 지엽적인 일부만 다를 뿐이다. 거의 모든 일요일 아침에 나는 토머스 크랜머도 구조와 목적을 즉각 알아볼 수 있을 그런 무대에 않아서 규칙 즉 '예전(liturgy)'을 따라 수백 년 혹은 수천 년 된 인공물을 사용하여 역할을 수행한다. 우리 교회와 같이 '예전을 중시하는' 교회의 예배 형식은 첫 세기 그리스도인들의 예배 의식과 별로 다르지 않고 또한 유대인들이 바빌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후 수백 년간 회당에서 드려 온 예배 의식과도 그다지 다르지 않다. 살아 있는 제도로서 교회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살아 있는 모든 피조물처럼 환경에 반응하지만 그런 변화에도 불구하고 우리 교회 공동체가 일요일 아침마다 경험하는 무대, 인공물, 규칙, 역할과 천 년도 더 전에 경험하던 것들 사이에는 본질적인 영속성이 존재한다.
어느 제도가 여러 세대를 통해 존속했다고 해서 그것이 절대 쇠퇴하거나 소멸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사실 우리 교회 성도들이 속한 예전을 중시하는 교파는 지난 백 년간 내리막길을 걸어왔고 특히 지난 십 년간 재정, 입교자 수, 교인 수, 문화적 영향력 등 거의 모든 면에서 빠르게 쇠퇴했다(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교회만은 예외적으로 계속 부흥해왔다). 우리 교파의 무대가 사라지고 있다. 우리 교회로 가는 길에 한때 우리 교파에 속했다가 이제는 부흥하는 어느 초교파 교회에서 쓰고 있는 건물을 지나게 된다. 우리 교파의 인공물들은 오늘의 문화에서 점점 더 낯설어지고 이 시대 젊은이들에게 점차 호소력을 잃고 있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그들을 우리 교파가 가진 번영의 고유한 형태를 이어갈 수 있는 규칙과 역할로 끌어들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교파는 역사적으로 풍부한 번영의 전통과 연결되어 있지만 한편으로는 시초부터 훨씬 바람직하지 못한 전통과 제도에도 매여 있었다. 즉 성(sex) 또는 파워를 향산 자신의 욕구를 다스리지 못하는 강한 성력의 왕에 의해 시작되어 위험을 두려워하는 특권층을 위한 피난처로 이용되고 결국 현대의 전체주의화, 세속화 물결에 빠져들었다. 이렇게 사로 다른 형태의 파워와 신 행세 간 타협의 결과로 우리 교파 안에 일종의 우상숭배를 낳았고 다른 모든 우상들처럼 이 오래된 우상들도 약속은 지키지 못하면서 점점 더 거창한 희생을 요구하면서 우리 교파는 약화되고 방향을 잃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교단이 죽어 가는 이유가 단지 이런 실패들뿐만은 아니다. 모든 제도는 실패한다. 이것이 이스라엘 민족의 기원이 되는 최초의 삼대에 대해 별로 바람직하지 않은 이야기들이 가득 들어 있는 성경의 첫 번째 책이 우리에게 전해 주는 핵심 교훈 가운데 하나다.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의 출발은 인간적 타협과 실패로 점철되는데 그것은 문자 그대로 우상숭배였다. 아브라함의 집안은 분명히 가족의 신상을 계속 가지고 다녔다(창 31:34). 또한 아브라함이 사라의 여종 하갈과 동침함으로써 하나님이 약속하신 번식의 힘을 스스로 행사한 것은 문자 그대로 신 행세였다.
하나님이 직접 숨을 불어 넣으신 제도마저도 얼마나 연약하고 깨어지기 쉬운 것인지는 창세기뿐 아니라 신약성경의 첫 대목에서도 나타난다. 복음서에 그려진 제잗르의 모습을 보면 큰소리치거나 제 이익을 챙기지는 않았지만 그 대신 혼돈에 빠지고 갈팡질팡한다. 세상을 뒤집어 놓은 부활과 승천과 성령 강림 사건 이후에도 바울과 바나바는 인사상의 문제로 갑자기 갈라서고 베드로와 바울은 누구와 함께 밥을 먹는가 하는 문제로 사람들 앞에서 다투기도 하며 거의 모든 신약 서신의 저자들은 바울이든 베드로, 요한, 야고보, 유다이든 간에 그들이 세운 공동체에 끼어드는 이단과 분열의 어리석음의 문제들에 직면하여 이성을 잃어버리는 모습을 보여 준다. 누가가 아름답게 묘사한 예루살렘 교회의 초기 모습도 데오빌로와 그가 속한 공동체에게는 처음 사랑을 얼마나 빨리 잃어버릴 수 있는지에 대해 그리 모호하지 않게 상기시켜 주었을 것이다. 사도행전의 첫 장들도 소수 민족 사람들을 공평하게 대하는 문제로 야기된 분재오가 재정적 속임수에 대해 다루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하여 첫 세대가 보여 준 하나님 형상을 지니는 독특한 방식과 그만큼 독특한 우상숭배와 불의의 모습이 다음 세대들에 각인될 만큼 오래 지속된 모든 제도는 세 번째 세대에 이르면 모든 제도는 실패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것은 성경 역사뿐 아니라 다른 역사에서도 들어맞는데 미합중국의 세 번째 세대는 이 나라가 기초한 문서에 담긴 우상숭배와 불의를 해결하기 위해 처참한 남북전쟁을 겪어야 했다.
어떤 제도들은 하나님의 보편적인 또는 특별한 은혜로 말미암아 이 땅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하나님 형상을 지니는 사명을 감당하여 실패를 극복하고 창조성과 번영을 유지할 수 있는 반면에 어떤 제도들은 실패하고 소멸하거나 또는 그보다 더 나쁜 결과에 이른다.
좀비 제도들
미국 대중문화가 공유하는 상상의 세계에는 죽음보다도 더 고약한 운명이 있다. 완전히 죽지 않은 자들이 세상을 돌아다니는데 그들은 인육에 굶주려 잇고 생각도 감각도 없고 무자비하고 인정사정도 없다. 살아 있지 않기에 그들을 달래거나 구슬릴 수 없고, 죽음을 넘어섰기에 쉽게 죽일 수도 없다. 좀비는 치명적 파워에 대한 비유다. 번영을 가져오지 않는 파워는 소리도 없고 움직임도 없으면서 모든 생명과 사랑을 집어삼키려고 위협한다.
좀비 영화를 보면서도 대부분 사람들은 전에는 인간이었으나 지금은 살아 있는 시체가 실제로 땅 위를 돌아다닌다고 믿지는 않는다. 불행히도 제도권에는 좀비에 상응하는 존재들이 너무나 확실하게 존재한다. 이런 제도들은 죽기를 거부하고 또 죽일 수도 없는 경우가 많다. 무대들, 인공물들, 규칙들과 역할들의 복합체가 세상의 포괄적인 번영에 아무것도 기여하지 못하면 역사의 희미한 기억 속으로 아무도 슬퍼해주는 이 없이 사라져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계속해서 남아 있는 것이다. 바흐의 음악이나 신문이라는 언론 매체는 번성했던 제도라 해도 이제는 거의 빈사 상태에 있어서 진정으로 살아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고집스럽게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영화관 밖에서 좀비를 찾아내기 가장 쉬운 곳은(아직 종이 신문을 찾을 수 있다면) 신문의 경제면이다. 21세기 초 일본과 유럽의 상당수 은행이 부실 채권을 안고 있었다. 이들이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은 은행권에 수십억 달러의 손실이 발생했다고 선언해야 하는 현실보다 은행권이 정상적으로 기능하는 듯 보이는 것을 더 선호하는 정부 기관들의 부당한 관대함 때문이다. 가상의 좀비와 다릴 이 '좀비 은행들'은 각국의 중앙은해 같은 외부 지원에 의존하지만 가상의 좀비처럼 그 목숨을 끊기 어렵다. 좀비 은행이 비틀거리며 다니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엉망인 대차대조표를 세상이 다 보도록 노출시키는 것보다 훨씬 더 나은 점이 많아 보이기 때문이다.
좀비 은행은 경제건 다른 부문이건 그 나라의 번영에 기여하는 바가 없다. 실제로 이들은 자립이 불가능하기에 정부 수입의 상당 부분을 축내고 있다. 그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건실한 척한다. 잘나가는 지역에 위치한 본사 건물과(출입하는 사람들을 거의 볼 수없는 경우에도) 여러 곳에 있는 지점들이라는 인상적인 무대를 갖추고 있다. 그들도 은행업의 인공물들을 유지하는데, 좀비 은행에도 계좌를 개설할 수 있고 심지어 대출도 받을 수 있으며 통상적인 은행 영업시간에 말쑥하게 차려 입은 중역들이나 창구 직원을 만날 수도 있다. 하지만 좀비 은행에서는 은행 업무의 규칙과 역할이 실제로는 부식 상태에 있다. 은행 업무의 규칙에 따르면 부실 채무는 대차대조표상에서 '상각되어야' 한다. 대출금이 상환될 가능성이 없으면 그 사실을 인정하고 자산을 감축하거나 삭감해야 하는 것이다. 좀비 은행들에서는 이런 원칙이 무시되고 새로운 불문율이 등장한다. 손실을 있는 그대로 밝히면 이 은행들은 존속할 수 없으므로 영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진실을 교묘하게 감추는 것이다. 규칙이 바뀌었으므로 창구 직원들부터 최고 경영자에 이르기까지 모두의 역할도 왜곡된다. 직원들은 은행 업무의 몸동작을 계속하지만 실은 이런저런 방식으로 거짓에 기여하고 있다. 한때는 은행업이었던 것이 이제는 은행업의 외형만을 갖추게 된다. 결과는 물론 번영이 아니고 쇠락이다. 이 세상에서 진정한 번성과 파워를 가꾸고 창조하도록 지음 받은 인간이 몰락하여 번성과 파워를 가장하게 된다.
어떤 면에서 좀비 은행들은 그들의 영향력을 대놓고 과장하는 반쪽짜리 진실을 담은 자료들을 정부 관리들이 용인하게 만들 정도의 파워는 가지고 있는 제도라고 할 수 있겠지만 분명히 말해 두자면 좀비 은행은 파워를 창조하지 않는다. 그 대신에 이들은 서서히 그리고 확실히 경제 체제에서 파워를 빼낸다. 시간과 돈이라는 자원은 파워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데 점점 더 많이 투입되는 반면 진정한 부와 기회를 창조하도록 실제로 파워를 사용하는 데에는 점점 더 적게 투입된다. 좀비라는 이름을 따온 가상의 이야기들에 나오는 괴물처럼 좀비 은행들은 자신의 파워를 자체의 이익을 위해서만 사용하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정직, 근변, 창의력이 보장받을 수 있는 직업이 아니라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일자리에 고용함으로써 다른 제도의 힘마저 소모하고 훼손한다. 아마 좀비 은행의 최대 해악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수천 명의 사람들로부터 에너지와 창의력을 빼앗아 가는 데 있다. 할 일을 주지만 그들의 수고가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게 한다.
좀비 은행 말고는 다른 좀비 제도가 없다면 좋겠지만 사실 그러한 존재는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발견된다. 좀비 제도는 자체의 실패에 관한 진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리고 지대를 걸을 수 있는 특권을 계속 향유하기 때문에 그들은 계속 존재하면서 오히려 진정한 샬롬을 창조하는 제도들을 밀어낸다. 좀비 제도는 오로지 자신의 유지에만 매달리고 다른 사람들의 번영에는 관심이 없다.
그래서 <더 오피스>에 나오는 던더 미플린과 워넘 호그 제제 회사같이 분명하게 생산적 일이 이뤄지지 않는 좀비 사업체들이 있다. 시장의 원리와 단절되어 있고 '지대 추구'만 하는 정부 기관은 특히 좀비화의 위험이 큰 영역이다. 말하기는 뭣하지만 청년 시절에 내가 가까이에서 경험한 좀비 제도는 바로 차량등록사업소였는데 자기 일에 별 기대가 없는 직원들이 흐릿한 형광등 아래서 시무룩한 얼굴로 느릿느릿 불만스러운 시민들의 민원을 처리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몇 년 후 청치적 고려로 임명된 소장이 정력적으로 이 기관에 사명감과 고객 봉사 정신을 불어넣어 최근에 고향의 그 차량등록사업소를 찾았을 때는 긍정적인 의미에서 환상적인 친절과 능률에다 일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한 분위기를 경험했다).
최약의 경우는 좀비 교회를 만나는 것이다. 모든 교회는 자원봉사자들에 의해 설립되고 유지되기에 거의 모든 교회가 한때는 진정한 번영에 기여하는 성공적인 제도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현상 유지라는 명제가 위험을 기피하는 풍조를 만들고 그 결과 계속된 학습과 발전이 저해 된다. 좀비 교회는 어두운 곳에 등불이 되기보다는 등불을 꺼트리지 않기 위해 존재하고, 외부보다는 내부를 지향하고,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만을 위하고 밖에 있는 사람들을 돌보지 않는다.
제도의 생명에 관한 역설은 개인의 생명에 관한 역설과 똑같다.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만이 진정한 삶을 누린다. 자체의 부패와 쇠퇴를 정면으로 인정하는 제도만이 좀비의 운명을 피할 수 있다.
우상숭배의 제도, 불의의 제도
최선의 제도는 하나님이 태초에 뜻하신 대로, 하나님 형상을 지니는 것의 최상의 결과를 풍성하게 이룰 수 있는 여지를 만든다. 그러나 에덴의 동쪽에 있는 이 세상의 어떤 것도 하나님 형상의 부패를 피하지 못했고 분명 제도들도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제도들이 인공물, 무대, 규칙, 역할을 가지고 유지되어 온 양식은 하나님 형상을 지니는 양식일 뿐 아니라 신 행세하기와 신 만들기의 양식이 되어서 시간과 공간을 넘어 문화의 구조 속에 짜여 들어가 버렸기 때문이다. 이 제도들이 샬롬을 시험하는 포괄적 번영을 이루는 데 끊임없이 실패하면서 그들의 매트릭스 안에서 일부는 터무니없는 수준의 신적 자율성과 풍요를 누리지만 다른 일부는 하나님 형상을 지닌 인간들이 누려야 할 가장 기본적인 존엄마저 강탈당했다.
다시 인도 구디야탐의 대금없자가 그의 특권적 위치에서 자신에게 돈을 빌린 가난한 가정들로부터 지대를 뜯어 가는 것을 생각해 보자. 한 사람의 대금업자와 수탈당한 몇몇 가족들만으로는 불의의 그림을 다 그릴 수 없다. 왜냐하면 수천 개 마을에서 수천 명의 대금업자들이 모두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착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담보 노동'이라는 체제는 확실히 정착된 인공물, 무대, 규칙, 역할의 요소를 갖추고 여러 세대를 이어 온 하나의 제도다. 이 제도를 고치려면 못된 업자 한 사람을 무대에서 끌어내린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수없이 많은 다른 업자들이 튼튼하게 자리 잡은 수탈의 틀 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하려고 기다리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구디야탐에서 월드비전이 그렇게 인내심을 가지고 그렇게 폭넓게 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회학자 마이클 에머슨(Michael Emerson)과 크리스턴 스미스(Christian Smith)는 미국의 인종과 종교 ㅁ누제에 관한 그들의 중요한 저술 <신앙에 의한 분열(Divided by Faith)>에서 백인 복음주의 개신교도와 흑인 개신교도를 구분 짓는 가장 큰 차이는 신학도 아니고 심지어 인종 간 화해를 위한 의지도 아니고, 복음주의자들의 미흡한 제도적 사고방식이라고 말한다. 복음주의자들은 미국에서 노예제와 인종 차별의 유산 같은 사회 문제의 해결책을 강구할 때 개인적인 일대일의 관계만을 생각한다. 그래서 너무나 많은 백인 복음주의자들이 다른 인종 친구 몇 명만 사귀면 마치 인종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생각한다. 이런 사고방식은 인조오가 인종 차별이 인공물과 무대와 규칙과 역할이 복잡하게 얽혀 잇는 제도적 실체라는 사실을 간과하는 것이다. 소수 사람들과의 우정이 이 무대 밖에서 이뤄지고 일시적으로 규칙과 역할의 제약을 뛰어넘을지라도 피부색에 기초하여 하나님 형상을 지니는 것을 왜곡하고 신 행세를 허용하는, 여러 세대에 걸쳐 내려온 틀을 바꾸지는 못한다. 흑인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이 미국의 유감스러운 인종적 상황을 변혁시켜 나가려면 지금도 그 상태를 영속화시키고 있는 뿌리 깊은 차별의 틀과 구조를 깨기 위해 계속 도전해야 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반면에 백인 복음주의자들은 인종 차별 문제를 20세기의 인종 간 분리 법령이나 합법적으로 흑인과 백인이 분리된 학교 등 이미 해체된 몇몇 인공물에 국한시켜 이해하기 때문에 인종 차별이 지속되는 제도적 현실임을 간과한다.
인종 차별의 인공물들은 대부분 사라졌다고 할 수 있다 더 이상 급수대에서 '백인 전용' 같은 표시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인종 차별은 결코 인공물만의 문제가 아니다. 인종 차별주의가 신 행세를 하는 사람들에게 부여했던 특권도 이제 겉으로 드러나는 지배권의 행사가 종식됐다고 해서 결코 사라진 것은 아니다. "문화를 변화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더 많은 문화를 만들어 내는 것"이라는 문화 발전의 기본 법칙은 제도에도 적용된다. 새로운 제도가 만들어질 때까지 구제도의 힘은 몇 세대에 걸쳐 지속될 수 있다. 이들 새 제도가 사회에서 완전히 뿌리내리려면 적어도 3세대의 시간이 필요하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 당선은 미국이 인종주의 역사에서 벗어나는 이정표가 되었지만 그가 2008년에 이제 막 성년이 된 유권자들의 지지로 당선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들은 민권운동 시대로부터 세 번째 세대, 즉 그 소란했던 시대의 자녀들의 자녀들이다. 최악의 불의한 제도가 그 세력을 잃는 단계에 이르려면 최소 3세대가 지나야 한다. 링컨의 다음과 같은 무서운 선언은 하나님 은혜로 남북전쟁 자체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만약 하나님이 지난 250년 동안 예속된 사람들의 대가 없는 노역으로 쌓은 재물이 다 사라지고 채찍 맞아 흘린 피 한 방울 한 방울이 칼에 맞아 흘리는 피 한 방울 한 방울로 똑같이 갚아질 때까지 이 전쟁의 고통이 계속되기를 원하신다 해도, 3천 년 전에 기록된 것처럼 "여호와의 심판은 진실하여 다 의로우시다"라고 해야 한다."
그러나 남북전쟁 이후 150년이 지난 오늘날, 250년이란 시간은 미국에서 하나님 형상을 지닌 사람들이 피부색과 상관없이 번영할 수 있는 문화적 제도를 창조하는 과업을 위해서는 그렇게 비관적으로 들리지 않는다. 우리가 인종 문제에서 생각보다 더 많이 진전했다고 보이는 날들도 많다.
불의와 우상숭배는 다르지 않다. 인간의 제도는 신 행세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신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이것이야말로 성경적 신앙의 왜곡까지 포함한 모든 인간 종교에 대한 성경적 관점이다. 신의 형상을 만들려는 인간의 열심은 한편으로는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가진 위엄에서 나오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의 타락한 우상숭배에서 나오며, 인간이 창조주와 화해하고 다시 연합하고자 하는 열망을 표시다. 인간의 모든 종교는 뛰어난 미술, 음악, 건축, 문학이 증명하듯이 부분적으로는 하나님 형상을 나타내는 요소들을 담고 있다. 또 모든 인간 종교는 어느 정도의 번영을 이뤄 내는 제도를 유지한다. 그러나 성경적 관점에 따르면 인간 종교가 은혜롭게 자신을 내주시고 계시하시는 하나님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노력에 의해 만들어지는 바로 그만큼 그 종교는 불가피하게 우상숭배라는 속임수에 가담한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비난하신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당신의 형상을 지닌 구별된 백성으로 만들기 위해 주신 토라에 대한 그들의 집착 때문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토라에 갖다 붙인 것들, 즉 차별을 만들어 내는 특권과 지위와 배제 때문이었다. 이 부가물들은 하나님의 '작은 자들' 즉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들 중에 가장 연약한 사람들에게는 '감당하기에 너무나 무거운 짐'이었고 바리새인들에게는 다른 사람들을 '죄인'이라고 매도하면서 자신의 의로움을 뽐내게 하는 것이었다.
우상숭배와 불의는 항상 함께 간다. 불의는 사람들에 대한 착취를 정당화하기 위해 우상숭배가 필요하고, 우상은 사람의 뜻을 이뤄 주지 못하면서 계속 더 큰 희생을 요구하기 때문에 불의로 이어진다. 우리가 제도라 부르는 견고한 ㅁ누화적 양식도 마찬가지다. 거짓 신이 모든 불의한 체제의 뒤에서 어슬렁거리는데 그 신들 중에는 민족주의의 신, 인종주의의 신, 여성 혐오의 신과 더불어 재물, 정욕, 권력같이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키면서 일부 사람들에게 신 같은 능력을 약속하는 것들도 있다. 그리고 거짓 신에 대한 경배를 계속하는 제도들은 결국 가장 연약한 자들을 방기하고 만다. 우상의 요구에 응하기 위한 제단 위에서 여러 세대에 걸쳐 자행되는 작은 자들의 희생은 모든 사람과 모든 피조물이 다 같이 번영할 수 있는 길이 있었음을 우리가 다 잊어버릴 때까지 계속된다. 이것이 한마디로 죄인데 이것은 죄라고 구별되는 몇 가지 행동이 아니라 모든 인간행동에 자리 잡고 심지어 우리의 선의의 활동에도 들어가 있는 행동 양식이다. 죄를 제도적 현실로서 바라볼 때에만, 즉 제도의 구체적 인공물 속에 내장되어 있고, 위협적으로 거대하고 눈에 보이는 무대들에서 실행되며, 자유롭게 하는 대신 노예화하는 규칙들을 강요하면서, 자연스럽게 분화된 역할들을 억압적이고 경직된 구조의 지위와 특권들로 바꾸는 죄에 주목할 때에만 우리는 우상숭배와 불의가 끼치는 피해를 이해할 수 있다.
통치자들과 권세들
1세기 지중해 세계는 좀비에 대해서는 몰랐지만 인간의 제도들과 모든 자연계의 뒤편에 돌아다니는 어둠의 세력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헬라인들은 이것을 '스토이케이아(stoicheia)'라고 불렀는데, 영어 성경에는 'elements' 또는 'elementary principles'라고 번역되었다. 바울 서신에서 이에 대한 언급이 몇 차례 나오는데 골로새서 2:8에서는 '코스모스의 스토이케이아'(the stoicheia of the kosmos. 개역개정은 '세상의 초등학문')라는 말로 골로새 교회 교인들을 부지중에 사로잡고 있는 것들을 표현했다. 스토이케이아는 바울의 후기 서신에 함께 나오는 두 단어 즉 '아르카이'(archai)와 '엑수시아이'(exousiai)와 연결되는데 영어로는 "the principalities and the powers" 또는 "the rulers and authorities"로 번역되었다. (개역개정에는 "통치자들과 권세자들")
이들 용어의 정확한 뜻에 관하여 활발한 논의가 벌어지고 있는데, 그냥 지나치기 쉽지만 사실은 의도적으로 언급된 이 초등 학문, 통치자들, 권세자들이라는 말에는 몇 가지 분명한 의미가 담겨 있다. 첫째, 이들의 현재 모습은 하나님을 반대한다. 이들이 정확히 무엇이든 간에 이 파워들은 진정한 파워의 원천에 도전한다. 그리고 십자가상의 결정적 대결에서 이 파워들의 본색이 드러났는데, 이들은 속임수이며 "약하고 천박"하고(갈4:9)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의 파워 앞에 무력하다.
둘째, 이 파워는 단순한 "혈과 육" 이상의 것으로 "하늘에" 존재하는데 톰 라이트가 현대식으로 표현한 "통제실" 즉 세상의 주권을 장악하기 위한 싸움이 벌어지는 그곳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영" 또는 "하늘에 있는" 존재라는 것이 땅에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이들의 파워는 인간을 종노릇하게 한다.
셋째이자 아마 시사하는 바가 가장 큰 것으로, 바울은 골로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스토이케이아'를 이교도들이 '날과 달과 절기와 해'(갈 4:10)를 지키는 것과 "먹고 마시는 것"(골2:16)에 관련시켰다. 이것들은 이교도 문화 양식의 근저에 있는 것으로서, 즉 이교도들의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은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져 내려온 시간과 의식의 깊은 구조인 것이다.
그러므로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보기에, 단순히 땅에 있는 현실을 넘어서는 어떤 파워 있는 형태의 생명이 있어서 하나님 형상을 지닌 자들을 종으로 삼고 그들의 시야를 차단하고 생명으로부터 단절시킨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온 사자나 천사와 마찬가지로 인격적 특징을 갖는 이 "통치자들과 권세들"이 인간의 일상적 경험 너머에 있는 악마적 존재이지만 그 통치는 인간의 삶을 형성하고 제약하는 기초적 양식의 형태로 인간 존재 안에 체화되어 있다고 보았다. 한마디로 그들은 제도적이다. 이들은 규칙과 역할을 정하고 특정한 인공물을 통해 알려지고 특정한 활동 무대와 관련되어 있다. 하나님 형상을 지니는 제도는 번영에 이르게 하지만 이들 통치자들과 권세들은 사람들 위에 군림하면서 하나님 형상을 격하시키고 축소시킨다.
바울은 골로새서 2:15에서 이 통치자들과 권세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에 대해 말한다.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그가 몇 절 앞에서 언급한 부활이 보복하는 사건으로 더 적합해 보이는데도 그리스도의 승리가 십자가를 통해 이뤄진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왜 십자가가 이 악마적이고 눈에 안보이나 세상에 두루 존재하는 강한 세력들에 대해 승리하는 장소였는가?"
그 해답은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 그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에서 찾을 수 있을 듯하다. 즉 십자가가 얼마나 제도적인에 관해서다. 예수님 시대의 주요 제도들 즉 로마의 점령군과 총독, 로마의 분봉왕 헤롯, 예루살렘 산해드린 공회와 대제사장이 이끄는 종교 집단은 예수님을 재판하고 정죄하는 데 주요 역할을 한다. 이 과정에서 이들은 모두 극도의 타락상을 보인다. 고발하는 측 증인들의 진술은 엇갈린다. 이 심야 재판은 로마와 유대의 법 절차를 모두 무시한다. 이 제도들은 번영을 보장하고 무고한 자를 보호하는 대신 오직 자기 보신과 강자 보호만을 위해 존재한다. 책임 있는 판단을 내려야 하는 관원들이 그 책임을 회피하고 다른 사람에게 사건을 넘기는 모습은 별로 놀랍지도 않다. 산헤드린 공회는 본디오 빌라도 총독에게, 빌라도 총독은 헤롯왕에게, 헤롯은 다시 빌라도에게로 떠넘기고 마지막으로 빌라도는 군중에게 넘긴다. 이 제도들의 가장 영향력 있는 행위자들도 진실에 대해 옳다고, 거짓에 대해 틀리다고 말하지 못한다. 예수님의 표현에 따르면 그들은 "회칠한 무덤"으로서 생명을 가져오지 못하고 죽음을 거래한다. 이들이 바로 좀비들이다.
이것이 곧 바울이 십자가를 그의 시대 그리고 모든 시대에 통치자들과 권세들에 대한 진정한 승리를 거두는 장소로 본 이유라고 나는 믿는다. 십자가는 1세기 유대 땅의 지배적 제도들의 정체를 밝힘으로써 그들을 '무장해제'(무력화)시켰다. 그들은 불의의 도구이고 우상숭배의 구현이다. 모든 우상처럼 그들은 십자가 앞에서 그들이 가진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성부의 아들의 희생이라는 가장 높은 대가를 요구한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의 진정한 성격이 드러나고 하나님의 진정한 성격도 드러난다. 공개적으로(바울이 말한 대로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즉 모든 사람이 바라보는 가운데 우리는 거짓 신의 파워와 진정한 하나님의 파워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게 된다. 맬컴 머거리지(Malcolm Muggeridge)는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예수의 지상 사역의 절정인 십자가 사건은 마귀의 제안인 권력에 대한 귀류법(reductio ad absurdum, 어떤 주장에 대해 그 함의하는 내용을 따라가다 보면 이치에 닿지 않는 내용 또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보여서 그 주장이 잘못된 것임을 보이는 간접 증명법)이다. 마찬가지로 빌라도가 십자가 위에 예수에 관해 써 붙인 반어적 명칭인 "유대인의 왕"은 예수님의 진정한 정체, 곧 "하늘의 보좌에서 뛰어내린 하나님의 전능하신 말씀"을 제대로 맞추지 못한 오발탄이다. 로마 군인들의 조롱도 과녁을 제대로 맞히지 못한다. 그들은 예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머리에 가시관을 씌우고, 손에 갈대 홀을 쥐게 한 뒤, 그 앞에 엎드려 인사하며 "유대인의 왕 만세!"를 외쳤다. 그 군인들은 자신들의 생각처럼 그저 곧 십자가형을 당할 가난한 미치광이 남자 하나를 조롱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권력을 부리는 모든 사람을 조롱거리로 만들고 나아가 권력 그 자체를 조롱거리로 만들고 있었다. 그리하여 가시는 모든 왕관 속으로 파고들 것이고, 모든 자색 옷 속에는 상처 입은 육체가 있게 될 것이다."
물론 우리는 머거리지가 관찰한 것을 수정할 수 있다. 십자가에서 조롱받은 것은 창조적이고 하나님 형상을 지니게 하는 일반적 의미의 '파워'(권력)가 아니고 우상숭배적인 파워, 통치자들과 권세들이 휘두르는 그 파워였다. 십자가에서 보여 준 진정한 파워는 상처와 가시에 찔리는 고통을 기꺼이 감당하는 파워, 그리고 생명의 구원을 위하여 독생자를 포기하는 파워였다.
십자가 이후의 삶, 십자가의 고통과 희생을 헛되게 하지 않는 부활 이후의 삶이란 이 세상의 초등 학문들, 즉 두려움과 죽음을 가져오는 삶의 양식들이 무력화된 세상에서 산다는 뜻이다. 아무리 세상의 제도들이 굳세게 뿌리내리고 있다 하더라도, 그리고 아무리 과장된 약속과 탐욕스러운 요구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더라도 십자가는 그것들을 파내서 멸망시켰다. 좀비들은 공포에 떨게 지배력을 잃었고 이 살아 있는 시체는 무덤에 들어가셨다가 돌아오신 분에게 제압당했다. 그분은 자신이 구원하러 오신 하나님 형상을 지닌 사람들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주기 이해 오늘도 살아 계신다.
이제 우리에게 남아 있는 일은 하나님 형상을 따라 지음 받고 회복되 ㄴ우리가 진정한 파월를 행사하라는 부르심을 따라 일어나는 것이다. 지금 실패의 징후들을 드러내고 있는 그런 제도들 속에서도 말이다. 세상의 제도들을 착휘하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 붙잡히지 않으면서도 그 속에서 지도력을 발휘하고, 좀비가 되어 버린 제도들을 처치하거나 아니면 부활시키면서도 우리들 자신이 좀비가 되지 않으며, 숨을 헐떡이며 죽어 가는 제도들에 다시 생명을 불어 넣는것이 가능할까? 이것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희망의 유일한 근거가 있다. 이미 십자가에서 이루어졌다면.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