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세계는 일화(一花)이며 중생은 일신(一身) - 고암 수님 -

[사람들]

온 세계는 일화(一花)이며 중생은 일신(一身)

심정즉(心淨則) 국토정(國土淨)이다.

가섭 존자에게 아난이 묻기를

“세존께서 존자에게 따로 전하신 게 있습니까?” 하니 가섭 존자는 “아난아!”하고 불렀습니다.

아난이 “네”하고 대답하니 존자가 말씀하시기를 “문 앞의 찰간(刹竿)을 넘어뜨려라.” 하셨습니다.

대중 여러분, 가섭 존자의 이 일의 기연(機緣)을 여러분은 어떻게 아십니까?

대중 여러분! 만약 여기 가섭 존자의 기연을 당하여 한마디 할 사람이 있다면 오늘 이 자리에서

2500년 전 영산회상(靈山會上)이 아직도 흩어지지 않고 엄연히 현존하고 있음을 볼 것이며,

세존(世尊)의 정법안장(正法眼藏) 열반묘심(涅槃妙心)이 바로 그 사람에게 부촉 되어 있음을 알 것입니다.

또한 제불(諸佛) 광명이 혁혁하게 빛나고 장엄 된 국토가 시방(十方)에 확통(廓通)하여

그 속에 온 중생이 진리의 자리에 앉아서 법륜(法輪)을 굴리는 것을 알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본인은 오늘 이 자리를 빌려서 여러분과 모든 동포 형제에게

가섭이 부르고 아난이 대답한 명백한 도리를 다시 깊이 살피는 바 있기를 부탁합니다.

형이 묻고 아우가 대답하여 구름 걷힌 청천(靑天)에 태양이 빛나듯이

실로 노정(露呈)된 도리에는 실로 구원(久遠)한 겁(劫) 밖의 봄소식이 전개되어 있습니다.

이는 본래의 것입니다. 긍정해서 있거나 부정해서 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에서 보건대 우리의 현실에는 너무나 심한 도착현상(倒錯現像)이 있는 것을 보는바 입니다.

무엇보다 인간 정신의 황량(荒凉) 현상입니다.

지금 세계에는 난무하는 물량과 조직의 분류(奔流) 속에 비인간화의 현상은 가속화하고

여기에서 참인간과 인간이 서야 할 땅을 찾는 아우성은 도처(到處)에 메아리치고 있으며

급기야는 공동(空洞)이 난 인간상 앞에 저속한 동물적 허상(虛像)을 대립시켜

인본사상의 이름 아래 우상화하고 있음을 보는 바이며

또 한편에서는 경제적인 낙후 극복에 몸부림치는 나머지 물량 위주의 배금사상(拜金思想)은

더욱 고조되어 모든 사회구조와 인간 의식 깊숙이 스며들어 가고 있음을 보는바 입니다.

이와 같은 역사와 문화의 창조적 주체로서의 인간의 추락과 인간 정신의

공허(空虛)‧방황(彷徨)‧망상(妄想) 정립(鼎立) 현상은

인류 역사의 중대한 암영(暗影)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상이나 물량에 앞선 인간존재는

진리의 구현자로서의 인간 실상에 착안하고 이에 뿌리박아야 할 것입니다.

이곳을 잃어버린 인간은 자기 상실의 끝없는 선로(旋路)이며,

그 역사는 방황이며 대립이며 투쟁이며 그 가치는 이기(利己)며,

그 생활은 관능(官能)의 충족일 수밖에 없는 것은

금일의 세계와 우리 주변의 현실에서 보는바 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이러한 인간상실(人間喪失), 정신황량(精神荒凉),

인간의 자독(自瀆) 현상을 엄중(嚴重)히 경계(警戒)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러기에 본인은 여기 가섭 존자가 보인

인간존재 인간권위의 진리를 다시 한번 참상(參詳) 하기를 강조합니다.

다시 부언할 것은 세계현상에 관한 것입니다.

실상의 안목에서 보건대 온 세계는 일화(一花)이며 중생은 일신(一身)입니다.

민족도 국경도 피부색도 문화의 이동도 이것은 왕성한 생명의 나무 색깔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계는 하나의 생명의 질서 위에서 자신과 신뢰와 협동으로

인간신성(人間神聖)을 보장하며, 나아가 그가 지닌 생명의 내실공덕(內實功德)을

남김없이 발현할 때 이 땅에는 평화와 번영이 구현되는 것입니다.

만약 이와 반대로 불신과 아집으로 대립한다면 이 하나밖에 없는 세계수(世界樹)는

쇠약하고 고사(枯死)하며 그 속의 모든 중생은 도탄의 구렁에 빠질 것은 필연입니다.

실로 어떤 나라도 독존(獨存)하는 것은 아니며 세계는 강자의 독무대가 아닙니다.

강자도 약자도 공동의 세계수(世界樹)위에 존립하는 것이니

따라서 세계는 영욕도 성쇠도 모두가 함께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여야 할 것입니다.

자국흥(自國興)을 위하여 타국망(他國亡)을 불고(不顧)하는 망상은 성립할 수 없으며

공존 협조가 세계존속과 번영의 유일한 공도(共道)인 것을 다시 확언합니다.

또한 오늘날 우리나라는 국토통일의 염원을 향하여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중입니다.

이는 말할 나위 없이 민족의 지상과제이며 무상(無上)의 성업(聖業)입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이러한 과업의 달성에는 무엇보다 먼저 양심과 성실에 돌아가

모든 국민의 마음속 장벽이 철폐되어야 하며 사회 각 계층 간의 간격이 해소되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국력은 총화(總和)를 이룰 것이며 이 무장애력(無障碍力)의 총화 앞에 국토를 가로막은

민족의 분열은 해소되고 국토통일은 기어코 올 것입니다.

본인은 세계정세와 환경 여건이 우리의 통일에 깊이 상관하고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국가적 민족적 환경 여건의 형성은 우리 자신이 중심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공명정대한 우리의 신념과 결단 앞에 우리를 둘러싼 국제정세는

우리를 중심 하여 전개된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주체적이며 능동적인 자세를 확고하게 견지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안으로 국민 각자 마음속에 대립 없는 순연본심(純然本心)이 살아나고

국가와 사회구조 속에 민주적 국력이 배양 축적되어 넘쳐흐를 때

평화통일의 염원은 현실화한다는 사실은 명심하여야 하겠습니다.

대중 여러분, 형제 여러분! 2500년 전 인도 왕사성에서

가섭 존자가 천명(闡明)한 종문일착자(宗門一着子)는 실로 만고의 광명입니다.

이 만고광명(萬古光明) 무상진리(無上眞理)는

일체중생 국토성취(國土成就)를 위하여 불조(佛祖)께서 우리에게 부촉 하신바입니다.

우리는 이 땅 위에 진리를 확보할 책임이 지워진 자이며

일체 생명을 두호(斗護)하고 그가 지닌 무한한 지혜 덕상(智慧德相)과 위력(威力)을 계발하며

그가 서야 할 국토를 이룩할 의무를 지닌 자들입니다.

여기에서 본인은 이제 불자 여러분에게 새로운 분발을 요구하는 바가 있습니다.

대개 법(法)은 ‘활(活)’로써 진체(眞體)를 시현 합니다.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일체 명상(一切名相)을 거부합니다.

부단한 자기부정을 통하여 창조의 연속으로 깊은 진실면목(眞實面目)을 발현합니다.

그러므로 불자의 믿음은 결코 관념적인 신앙(信仰)이나

추상적인 고원(高遠)한 법에 체(滯)하여 있을 수 없습니다.

믿음은 모름지기 구체적인 현실 위에서 발현되어야 하며 행동으로 창조와 직결되어야 합니다.

동시에 여기에는 움직이는 역사와 방향 지울 사명감,

이를 주도할 선교방편(善巧方便)이 부단히 연마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본인은 거듭 불자 여러분의 새로운 반성을 요청하는 바이며

종무 당국은 종무 수행을 통하여 이를 구현하도록 각별한 유념을 부탁합니다.

이로써 우리는 이 땅 위에 광명 정토를 이룩하고 구원한 진리의 구현을 통하여

불조(佛祖)의 크나큰 은혜에 보답할 것을 굳게 서원하고 우리의 정진력을 바칩시다.

끝으로 여러분과 함께 이 모임을 하게 하신 부처님의 가호에 감사하면서

우리 조국의 평화 번영과 불일내(不日內) 개최될 남북적십자 회담의 성공을 기원하며

아울러 북한 동포에게 불보살의 각별하신 가피력(加被力)이 드리워지기를 지축(至祝) 합니다.

여러분 위에 길이 부처님의 위광(威光)이 함께 하심을 빌며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백두산(白頭山)은 외외(巍巍)하고

동해수(東海水)는 창창(蒼蒼).

-고암 스님- 1972년 9월3일자 종정 취임 법어

고암 스님은… 1899년 10월 5일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식현리 425번지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윤문 선생, 모친은 하원행(河原幸) 여사. 스님의 속명은 지호(志豪 또는 之壕).

어려서 한문을 익힌 스님은 적성 공립보통학교를 마치고, 합천 해인사에서 제산 스님을 은사로 불문에 들었다.

1917년 세수 19세 때였다. 해인사 강원에서 공부하던 스님은

1919년 3ㆍ1운동 당시 독립 만세 비밀운동을 전개했다. 이후 해인사 불교 강원을 졸업하고,

1922년 용성스님에게 구족계와 보살계를 수지 했으며, 훗날 용성스님에게 전법게를 받았다.

스님은 1923년 7월 해인사에서 수선 안거 한 이래 직지사 천불선원, 통도사 극락선원, 덕숭산 정혜선원,

도봉산 망월선원, 백양사 운문선원, 천성산 내원선원, 오대산 상원사선원 등에서 정진했다.

이때 제산, 혜월, 만공, 용성스님 회상에서 공부의 깊이를 더했으며,

유점사, 표훈사, 마하연, 묘향산 등 북녘 선원에서도 정진했다.

고암 스님은 해인사, 백련사, 표훈사, 직지사, 범어사 선원의 조실,

그리고 나주 다보선원장, 해인사 용탑선원 조실로 대중을 제접했다.

스님은 1967년 7월 제3대 종정, 1972년 7월 제4대 종정, 1978년 5월 제6대 종정으로 취임하는 등

한국불교 최고의 어른으로 후학을 인도했다.

스님은 1988년 10월 25일(음력 9월 15일) 오후 8시 가야산 해인사 용탑선원에서 원적에 들었다.

세수 90세. 법랍 71세였다.

[불교신문 3326호/2017년 9월 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