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7년 가해 11월21일 화요일
[(백)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수도회] 기꺼운 봉헌을 통한 영원한 동행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즈카 2,14-17
† 복음 마태 12,46-50
◈ 오늘의 묵상
오늘 예수님께서는 뜻밖의 행동을 하십니다. 모처럼 어머니와 친척
형제들이 찾아왔는데도,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라고
반문하신 다음,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성모님과 친척들을 무시하려는 의도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아니지요. 혈연관계를 부인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혈연보다도 더 중요한, 하느님과 새로운 관계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세례를 받음으로써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한 분이신 주님을 믿고 그분의 뜻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신앙
공동체의 일원입니다. 우리는 모두 혈연만큼 강한, 신앙으로 굳게
맺어진 새로운 형제자매라 하겠습니다. 그런 만큼 우리가 저마다
하느님의 뜻을 전하고 실천하려면 서로 도와주고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아울러 오늘 묵상하고 싶은 점은, 세례를 받았다는 자체로 하느님
나라가 보장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행동이 따라야 한다는
것이지요. 오늘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실천이 따르지 않은 채, 그저 입으로만 신앙을 고백하는 데 그친다면,
주님의 참된 자녀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뜻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며, 신앙으로 맺어진 새로운
형제자매들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묵상해야 하겠습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세상의 기준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입니다.
2017년 가해 11월21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제1독서
<딸 시온아, 즐거워하여라. 내가 이제 가서 머무르리라.>
○ 즈카르야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2,14-17
복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46-50
어렸을 때의 제 모습을 떠올려보면 숫기도 없고 또 자신감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고 싶은 것 역시 자신 있게 할 수가 없었는데,
그러다보니 누구에게 말을 거는 것 역시 너무나도 힘들었습니다. 어렸을
때 이성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지요. 소위 짝사랑이라는 것을 하게도
됩니다. 숫기 없는 저였지만 저 역시 이성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고,
마음에 드는 아이가 생겨서 짝사랑도 했습니다. 하지만 단 한 마디의
말도 걸어보지 못한 채 마음 앓이만 했습니다. 그 아이의 앞에만 서면
얼굴이 벌겋게 되면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더군요. 어떻게든 관심을
끌어보려고 기타도 배워보았지만 좋아한다고 말 할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친한 친구들에게도 그런 말을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당시의
친구들은 신학교까지 들어간 제가 이성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줄 알고 있습니다.
지금 이렇게 사제로 잘 살고 있는 것을 보면, 이것 역시 성소라고 하면
성소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그런데 우연히 옛날 사진을 보게
되었습니다. 벌써 30년 전의 사진입니다. 이 사진 속에는 제가 짝사랑을
했던 여자 아이가 있더군요. 사진 속의 이 아이를 유심히 쳐다보게
되었습니다. 그 사이에 패션이 많이 변했다고는 하지만, 당시 입고 있는
옷과 머리 모양 등이 왜 이렇게 어색하게 보이는지 모르겠더군요. 또한
그렇게 예쁜 얼굴도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마음을 두고
관심을 가졌던 이유가 무엇인지를 곰곰이 생각하게 됩니다.
시간에 따라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 역시 변하는 것이 아닐까요?
미녀의 기준 역시 그렇다고 하지 않습니까? 세계 역사를 바꿀 수 있을
정도로 동서양을 대표한다는 절세미인 양귀비, 클레오파트라가 지금의
미녀상과 비교하면 아주 볼품없다고 합니다.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생각과 판단이 무조건 정답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계속해서 변화되는 세상의 기준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변화지 않는 주님의 기준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가족이 찾아오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라고 하십니다. 세상의 기준은 혈연관계를 아주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얼마나 잘 따르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하느님과 특별한 관계가 형성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기준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을 실행해 나갈 때, 우리는 세상의 기준에서 차츰 벗어나 주님의
기준을 따르는 우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과의 특별한 관계
안에서 참 행복을 얻게 될 것입니다.
삶의 진정한 길은 순간순간을 낭비하지 않는 기적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은 기적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되풀이되지 않습니다
(마가렛 제임스).
클레오파트라와 양귀비.
감사하는 습관
어느 군대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그 날은 저녁식사 반찬으로 돈가스가 나오는 날이었습니다. 병사들이
식당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알고
보니 돈가스를 1인당 2개씩 나누어 준다고 하여 신이 난 것이었습니다.
병사들은 매우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소스가 없다는 이야기에 이내
표정이 어두워졌습니다. 부식 담당 병사가 실수로 돈가스 한 상자와
소스 한 상자가 아닌 돈가스 두 상자를 가져온 것입니다. 여기저기
병사들의 불평이 들렸습니다.
"맛도 없게 소스도 없이 돈가스만 2개를 먹으란 말이야?"
그때 한 선임병이 말했습니다.
"다들 그만 불평하자. 분명히 어떤 부대에서는 지금쯤 돈가스 없이
소스만 2인분 먹고 있을 거야."
우리에게도 많은 선택의 기회가 찾아옵니다. 불평과 감사 중에서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어떠한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다는 것, 조금만
생각하면 너무나도 많은 감사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불평만을
바라보면 세상의 어떤 것도 불평의 이유가 됩니다. 그렇다면 불평과
감사 중에 무엇을 선택하는 사람이 행복할까요?
행복은 내가 선택할 수 있나 봅니다.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입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기꺼운 봉헌을 통한 영원한 동행 - 기 경호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가해 11월21일 화. 복되신 동정 마리아 자헌 기념,
마태 12,46-50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50)
기꺼운 봉헌을 통한 영원한 동행
오늘은 성모님께서 성령의 영감으로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의 부모는 자식을 낳으면
아들은 40일 만에, 딸은 80일 만에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봉헌하는
의식을 가졌습니다. 성모 마리아의 부모도 아기 마리아를 안고 봉헌
예식을 가지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기념하는 성모 마리아 자헌은 부모에 의해 봉헌된 것과는
다른 봉헌입니다. 열심한 유대인들은, 남녀 구별 없이, 기간에 구애받지
않고 성전에서 살면서 봉사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나자레오”라 불렀습니다. 부모가 어린아이를 성전에 데리고 가서
그렇게 살도록 봉헌하는 일도 있었지요.
이러한 봉헌된 삶은 부모가 자녀를 가지기 위해 서원을 한 경우, 또는
어려서부터 굳은 신앙을 자녀에게 심어주고, 하느님 공경을 몸소 익히며,
성전의 일을 돕는 삶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 마리아는 세 살 때에
자신의 원의로 스스로 성전 생활에 봉헌하셨다고 전해옵니다.
교회 전승에 따르면, 마리아는 부모님이 이미 봉헌한 약속에 따라, 세
살 때에 다른 소녀들과 함께 손에 등불을 들고 성전으로 인도됩니다.
마리아는 성전의 열다섯 층계를 올라가 대사제들이 일 년에 한 번
자리하는 지성소에 앉았다고 전해옵니다. 봉헌되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봉헌하신 것이지요.
우리도 스스로 자신을 봉헌하시어 하느님 가까이 머물며 하느님의 뜻을
기꺼이 실행한 성모 마리아의 삶을 본받아야겠습니다. 성모님은 어떻게
자신의 일생을 봉헌하셨을지 생각해봅니다. 그분은 말씀을
받아들이시고, 말씀을 되새기셨습니다. 그분의 봉헌의 뿌리와 힘은
하느님의 말씀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모님은 말씀을 들으셨을 뿐 아니라 그 말씀에 철저히 그리고
헌신적으로 순종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봉헌의 삶은 말씀을 따르는
삶임을 보여주신 것이지요. 봉헌은 물질을 봉헌하는 것도, 일시적으로
흉내만 내는 것일 수 없습니다. 봉헌은 오직 하느님의 뜻만을 생각하고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진심어린 되돌림입니다.
성모님의 봉헌은 바람처럼 스쳐 지나가버리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동행’이었습니다. 성모님은 ‘임마누엘’이신 주님을 품고 그분과 함께
일생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의 우리를 향한 구원의 순례에 늘
함께하셨습니다. 임마누엘이신 주님을 품은 임마누엘의 어머니로서
‘영원의 봉헌’을 하신 것이지요.
오늘도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신 성모님을 본받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12,50) 주님의 참 형제 자매들이
되도록 힘써야겠습니다. 떠밀려 내놓은 삶이 아니라 기꺼이 주님께 내
삶을 되돌려드리는 참 봉헌의 날이길 기도합니다. 아프고 힘들고,
불의와 차별과 배척으로 고통받는 이들 곁으로 다가가 ‘영원한 동행’을
이어가야겠습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 50)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가해 11월21일 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 50)
우리 모두는 은총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은총을 통해서만 비로소 우리는 봉헌에이르게됩니다.
봉헌은 우리의 삶을 의미있는 삶으로 바꾸어줍니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삶은 끝없는 봉헌의 여정이었습니다.
마리아를 살게한 것은 분명 봉헌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봉헌입니다.
봉헌을 통해 우리와 하느님 사랑은 더욱 깊어지는 실천이 됩니다.
하느님께 드리는 가장 아름다운 선물은 봉헌입니다.
우리또한 마리아처럼 하느님께 바치는
봉헌이 우리의 일상이 되길 기도드립니다.
메말라가는 우리의 마음을 풍성하게 하는
봉헌은 가장 살아있는 실천의 빛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뜻은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봉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의 첫 시작도 가장 마지막도 봉헌이길 바랍니다.
가장 아름다운 은총은 우리자신의 봉헌입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수원] 주님의 가족들 / 조욱현 토마스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가해 11월21일 화요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복음: 마태 12,46-50: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오늘 축일은 예루살렘 성전 가까이에 세워진 성당의 축성을 기념하는
이 날, 성모님이 원죄 없이 잉태되실 때 충만히 내리신 성령의 감도로
성모님이 어린 시절부터 하느님께 바치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전승에 의하면, 성모님의 부모인 요아킴과 안나는 마리아가 세 살 되던
해에 성전에 봉헌하였다고 한다. 세 살 된 마리아가 선전으로 올라갈
때, 계단에는 성모님의 발자국 마다 장미가 피어났다고 한다.
예수님께서는 되돌아오는 악령에 관한 말씀을 하셨다. 여기에는 선한
영 일곱과 악한 영 일곱이 있다. 선한 영은 지혜, 분별, 경륜, 용맹,
지식, 경건, 하느님을 두려워함의 영이며, 악한 영은 어리석음, 오류,
무모함, 비겁, 무지, 불경과 하느님을 두려워함과 반대되는 교만의
영이다. “자기보다 더 악한 영 일곱을 데리고 그 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그리하여 그 사람의 끝이 처음보다 더 나빠진다. 이 악한 세대도
그렇게 될 것이다.”(45절)고 하셨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반박하기 위해, 악마는 교활하게, 예수님의 육에
따른 친척들을 등장시킨다. 그리하여 사람들의 눈길을 그 친척들에게
향하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신성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려 했다.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 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47절) 이 말은 인간에게서 태어난 이가 하느님의 아들일
수 없다는 말이며, 땅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 어떻게 하늘에서 왔다고
하느냐는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악마인 그 자를 보시며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48절)고 하신다. 그리고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49절)고
하신다. 즉 그분은 순종하는 이들을 가리키신다. 순종하는 친족관계로
당신과 맺어진 이들에게 가족관계에 따른 모든 이름을 붙인다. 당신의
말씀을 실천하는 따르는 사람들을 가리키신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50절) 신앙으로써 주님의 형제자매가 될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분의 어머니가 될 수 있을까? 바로 복음을 전함으로써 그분의
어머니가 된다. 이것은 주님을 낳아, 듣는 이들의 마음에 그분을
불어넣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삶을 통해 이웃의 마음에 주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이 생겨나도록 하는 사람이 어머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셨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천하셨기 때문에 복되신 분이시다. 그리스도는 진리이시며
육신이시다. 그리스도는 마리아의 마음속에서 진리이시며, 마리아의
태중에서 육신이시다. 그분의 어머니이신 것은 그 진리를 말씀을
실천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도 말씀을 실천하며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 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마리아를 닮는 우리가 되도록 하여야
한다.
- 수원 교구 상하 성모세 성당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서울]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2017년 가해 11월21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 마태 12,46-50
성소후원회 회원 분들과 의정부 한마음 청소년 수련장에서 피정을
하였습니다. 하루를 마치면서 성모님의 일곱 가지 고통을 묵상하며
묵주기도를 하였습니다. 신앙 때문에, 신앙 안에서 고통과 슬픔을 온
마음으로 받아들였던 신앙의 어머니들을 함께 묵상하였습니다.
황사영의 부인 정난주 마리아의 이야기를 묵상하였습니다. 남편
황사영은 순교하였고, 정난주 마리아는 2살 된 아들과 제주도로 유배를
갔습니다. 정난주 마리아는 관비가 되어서 유배를 갔기 때문에 2살
아들 황경한과 헤어져야 했습니다. 제주도 최초의 신앙인이었던
정난주 마리아는 그 모든 슬픔을 가슴에 담고, 신앙의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최방제 프란치스코 신학생의 어머니 황 안나의 이야기를
묵상하였습니다. 함께 유학을 갔던 김대건 안드레아와 최양업 토마스는
사제가 되어서 조선으로 돌아왔지만 아들 최방제 프란치스코는 먼
타국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자식을 먼저 하느님의 품으로 보내야
했던 어머니의 슬픔은 말할 수 없이 컷을 것입니다. 다른 두 아들까지도
먼저 하느님의 품으로 보내야 했던 황 안나는 오직 충실한 신앙으로
모든 것을 참아냈다고 합니다.
안중근 토마스의 어머니 조성녀 마리아의 이야기를 묵상하였습니다.
조성녀 마리아는 아들 안중근 토마스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네가 만일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고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조소거리가 된다. 너의 죽음은 너 한사람의 것이 아니라
한국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가는 것이다. 네가 국가를 위하여 이에
이르렀으니 즉 죽는 것이 영광이다. 모자가 이 세상에서는 다시
상봉치 못하겠으니 그 심정을 어떻게 말할 수 있으랴 천주님께 기원할
따름이다.” 조성녀 마리아 역시 신앙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월호 희생자들의 어머니들을 묵상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아이들을
차가운 바다에 묻어야 했던 어머니들의 고통을 생각합니다. 그 무엇도
어머니들의 슬픔을 대신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마지막 남은 다섯
분의 미수습자 가족들도 이젠 사랑하는 사람들을 가슴에 묻고 고인들을
위한 장례를 하기로 했습니다. 지난 3년 동안 유족들의 마음은 깊은
슬픔이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보아야 했던 성모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상’입니다. 단지 그 모습만으로도
지극한 아픔이 느껴졌습니다.
묵주기도를 마치면서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지난 추석부터
몸이 많이 아프셨습니다. 한 평생 가족들을 위한 삶을 사셨습니다.
방황하는 아들 때문에 수많은 밤을 뜬 눈으로 보내셨습니다. 사업이
어려워진 아들 때문에 늘 노심초사 하셨습니다. 수도자와 성직자의
길을 걷는 자식들을 위해서 매사에 겸손한 모습을 보여 주셨고, 기도
중에 함께 해 주셨습니다. 이 땅의 모든 어머니들은 하느님께서 보내
주신 ‘수호천사’입니다. 그분들은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사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형제와 어머니가 되실 수
있었습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서 성모님의 의견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성자 예수님을 성모님께로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자신을
선택하신 예수님을 사랑으로 돌보셨습니다.
지금 내 곁에 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신발, 옷, 책, 전자제품, 악기,
운동기구, 친구, 가족, 이웃’들입니다. 이 모든 것들을 제가 선택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저를 선택해 준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선택한 것이라고 하면 애착이
있을 수 있고, 욕심이 생길 수 있고, 상실에 대한 아쉬움이 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나를 선택해 준 것이라고 생각하면 감사 할
수 있습니다. 제 곁을 떠난다고 해도 속이 상하거나, 아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내 것’이라는 패러다임을 ‘하느님의
것’이라는 패러다임으로 바꾸기 위해서입니다. 그럴 때 부유한 것보다
가난한 것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건강한 것 보다 아픈 것도 은총으로 생각 할 수
있습니다. 삶의 중심에 ‘하느님의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선택하셨다고 믿는다면 우리를 가로막는 많은 벽들이 사라질
것입니다. 외롭지만 우주에서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지구는 하느님의
선물이며, 하느님 나라는 바로 이곳에서 시작될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청주] 참된 가족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7년 가해 11월21일 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마태12,46-50)
참된 가족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며 잘났건 못났건, 경건한
사람이건 죄인이건 상관없이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입을 수 있고
하느님의 백성이 될 수 있음을 선언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기위한 예수님의 행동은 오해를 사기도 했고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생겨났습니다. 가족과 친지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미쳤다는 소문이 들리자 그를 붙잡으려 나서기도 하였습니다
(마르3,21). 예수님께서 의인과 죄인,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별하거나 거부하지 않으시고 그들과 함께 섞이고 어울렸기
때문입니다. 열린 마음으로 모두를 받아들이신 예수님의 마음이 우리
안에서도 살아있기를 희망합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을 하고 계시는데, 어떤 이가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마태12,48)고 반문하시며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들이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이 말씀은 하느님 나라의 참된 가족에 대한
기준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형성되는 새로운 가족은 더 이상 혈연관계에 기반을
두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데에 기반을 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족 공동체를 형성하고 결속시키는 데 초석이 되는 것은
혈연, 학연, 지연이나 좋은 감정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의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혈연관계에 있는 사람들도
하느님의 뜻을 실행할 때 비로소 그분의 참다운 가족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10,37).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으려면 그분의 뜻을 행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성모님의 삶을 보면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가브리엘
천사에게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하고 응답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을 지닌 복된 분으로서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모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참된 가족에 속하십니다. 비록 예수님과
혈연관계에 있지 않더라도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그분의 가족이 됩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해를 형님으로 달을
누님으로 고백했습니다. 해와 달은 생겨난 뒤로 하느님을 거역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우리 역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면 예수님의 참된
가족이 됩니다. 믿음으로 형성되는 새 가족의 품위를 지켜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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