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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라딘
'살라흐 앗 딘(صلاح الدين)'이라고 표기하는데 '앗'은 원래 정관사 '알'이고, 알을 구성하는 알레프(ا)와 람(ل) 중에서 람은 뒤에 태양 문자라 불리는 특정 문자가 올 경우에 그 문자와 동일한 발음을 가진다. 즉 딘의 ㄷ과 동일한 발음이 된다. 그리고 알레프는 단어와 단어 사이에 들어갈 경우에 보통 묵음이 된다. 따라서 '알'이 'ㅅ'받침처럼 발음되므로 '살라흣딘'이라고 읽힌다. 빠르게 발음하면 우리가 아는 표기인 살라딘과 가까워진다. 참고로, 킹덤 오브 헤븐에서 살라흐 앗 딘 역을 맡은 시리아 배우 가산 마수드는 "살라 훗 딘"에 가깝게 발음한다.
십자군 전쟁에서 이슬람군을 이끌었던 지도자이자 아이유브 왕조의 창시자이며 십자군 전쟁 당시 이슬람권의 손꼽히는 명장. 살라딘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이름을 전부 쓰면 '알 말리크 안 나시르 아부 알 무자파르 살라흐 앗 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 이븐 샤디 이븐 마르완 알 아이유비(الملك الناصر ابو المظفر صلاح الدين يوسف ابن ايوب ابن شاﺬي ابن مروان الايوبي)'. 이를 해석하자면 '승리의 왕(알 말리크 안 나시르), 승리의 아버지(아부 알 무자파르), 신념(이슬람)의 정의인(살라흐 앗딘), 아이유브 일가의 마르완의 아들인 샤디의 아들인 아이유브의 아들 유수프'. 즉 유수프(يوسف)가 본명이다. 쿠란의 등장 인물인 유수프 (요셉)와 아이유브 (욥)가 이름에 들어있다.
살라흐 앗 딘은 이라크 북부의 티크리트에서 쿠르드족 군인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대부터 모술과 알레포의 영주인 이마드 앗 딘 장기(عماد الدین زنكي, Imad ad-din Zangi)와 그의 아들 누르 앗 딘(نور الدين, 일명 누레딘)을 섬겼다. 누르 앗 딘은 시리아의 다마스쿠스를 중심으로 지하드의 기치 아래 무슬림들을 단합시켰고, 십자군과의 전쟁에서도 많은 승리를 거두며 '성왕(聖王)'으로 칭송받았다. 살라흐 앗 딘의 아버지 아이유브는 지략으로, 아이유브의 동생인 시르쿠는 뛰어난 용병술과 무용으로 많은 공을 세웠기 때문에 살라흐 앗 딘 역시 젊어서부터 누르 앗 딘의 측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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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이집트의 지배자
살라흐 앗 딘의 이름이 처음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이집트 정복 때였다. 살라흐 앗 딘은 삼촌 시르쿠의 부관으로 이집트군과 십자군을 동시에 상대하며 4차례에 걸친 어려운 전쟁 끝에 이집트를 정복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정복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총사령관인 시르쿠가 식사 중 폭식하다가 급사하면서(...) 권력의 공백이 생겼고, 이집트 관리들에 의해 살라흐 앗 딘이 이집트의 새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이집트 관리들이 살라흐 앗 딘을 지지한 것은 그가 순전히 삼촌의 빽으로 성공한 우유부단한 젊은이라고 판단해서였지만, 그들의 기대와 달리 살라흐 앗 딘은 대단히 민첩한 대응으로 순식간에 이집트 전역을 자신의 땅으로 만들었다. 이후 살라흐 앗 딘은 겉으로는 누르 앗 딘에게 충성을 바치는 한편 군대를 보내 수단과 예멘 일대까지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한다. 이후 살라흐 앗 딘의 세력이 지나치게 커지자 이를 경계한 누르 앗 딘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이집트로 쳐들어가려고 했지만 60세가 넘은 고령이었던 탓에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고, 그의 사망으로 혼란해진 틈을 타 오히려 살라흐 앗 딘은 누르 앗 딘의 아들의 보호자로 자청하고 누르 앗 딘의 미망인과 결혼하여 조금씩 지지기반을 다지다가 누르 앗 딘의 영토를 날름 집어삼켜 버렸다.
예루살렘 왕국은 살라딘이 이집트를 차지했을 때부터 살라딘을 경계해 동로마 제국과 연합하여 이집트로 해군을 통해 원정대를 보냈지만 별 재미를 못보다가 폭풍우로 다 날려먹었다. 누르 앗 딘의 죽음 이후 시리아로 살라딘이 세력을 넓히자 십자군 계열 국가에서 기사를 파견해 견제하려다 살라딘이 생각보다 많은 군대를 가지고 온 것을 보고(초기에는 살라딘이 700여 명의 기병만 데리고 급히 왔었다.) 도망쳤다.
3.2. 하틴 전투와 예루살렘 회복
살라딘에게 항복하는 예루살렘 국왕 기 드 뤼지냥
이후 누르 앗 딘 세력의 잔당을 처리하고 세력을 확장하여 북아프리카, 이집트, 아라비아, 예멘, 시리아, 이라크 북부에 이르는 거대한 영토를 가진 제국을 만들었다. 그 역시 누르 앗 딘의 정책을 이어받아 지하드의 기치를 계속 내걸었지만, 이집트에서 거병한 1174년부터 이라크 북부의 모술을 점령하는 1186년까지는 십자군과는 휴전 상태를 계속 유지하면서 다른 이슬람 반발 세력들을 흡수, 통합하는 시기로 삼았다.
하지만 르노 드 샤티용의 무력 도발로 인해 휴전은 깨졌고, 하틴 전투에서 예루살렘 왕국 왕 기 드 뤼지냥 휘하의 십자군 주력을 궤멸시키고 예루살렘을 함락시킴으로써 예루살렘 왕국을 멸망시켰다. 그 여파로 3차 십자군 전쟁이 일어났고, 3차 십자군에 불행히도 '사자심왕(Lion Hearted)' 리처드 1세가 있었기 때문에 전투에서는 그다지 재미를 못 봤다. 하지만 십자군은 하나로 뭉치지 못했고 전략적인 안목 또한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에 전투에서의 승리에 비해 많은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3차 십자군은 해안 여러 도시들을 다시 점령했지만 안정적으로 확보했다고는 말하기 어려운 상태였으며, 예루살렘 진격을 시도했을 때도 보급로 확보 문제와 내부 불화로 예루살렘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중간에 포기해야 했다.
3.3. 3차 십자군과의 싸움
3차 십자군이 야파에서 살라흐 앗 딘의 공격을 물리친 직후, 프랑스의 '존엄왕' 필리프 2세가 리처드의 동생 존과 짜고 리처드의 프랑스 내 영토를 박탈하여 리처드도 더 이상 원정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래서 리처드는 살라흐 앗 딘에게 '부활절까지 돌아올 테니 그때 결판을 내자'라고 약속하였고 살라흐 앗 딘도 그에 응했다. 아쉽게도 살라흐 앗 딘은 약속일인 부활절 3주 전에 다마스쿠스에서 병사했다. 리처드도 프랑스와의 전쟁 중에 유시에 맞아 죽었다.
두 군주의 관계는 꽤 신사적인 편이었다. 물론 약간의 경쟁심도 있었겠지만... 리처드가 병에 걸렸을 때 살라흐 앗 딘은 자신의 의사에게 치료받을 것을 권유했으며, 약으로 쓰라고 시원하게 눈 속에 덮어놓은 과일을 리처드에게 보냈다. 리처드가 말을 잃었을 때 살라흐 앗 딘은 대신하라고 말 두 마리를 보냈다. 삼국지급 의리.. 리처드 또한 살라딘을 고평가하면서 살라딘을 예우했으며, 사절단으로 찾아온 살라딘의 일족 사람들에게도 정중하게 대했고 살라딘의 조카에게 기사 작위를 선물로 주기도 했다.
리처드는 살라흐 앗 딘에게 자신의 누나 조안을 살라흐 앗 딘의 형제에게 결혼시킴으로서 이슬람과 가톨릭을 화해시키고 예루살렘은 결혼 선물로 하자고 제안했다. 양측의 성지였던 예루살렘을 양측의 공동 영지로 지정해 서로가 싸우지 말고 잘 사자는 의미였고, 살라딘은 이를 실제로 고려하였는데 (...) 어떻게 회복한 예루살렘인데!!라며 결사 반대한 참모들 때문에 성사되지는 못하였다. 애초에 살라딘은 성도 탈환이라는 기치 하에 일어난 지하드 덕에 세력을 확장했기 때문에 자칫 반란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건 기독교 세력도 마찬가지로 반대가 무척 컸고, 이슬람도 기독교도 혼인성사 문제 때문에 한쪽의 개종 문제가 생겨서 결국 취소되었다. 그 이후 리처드는 예루살렘의 지정학적 문제 때문에 가급적 협상을 통해 예루살렘을 손에 넣으려고 했다.
한편, 살라딘과 리처드는 실제로 얼굴을 마주대고 만난 적은 없고 사신이나 편지로 교류했다. 둘은 서로를 상대방 진영에서 가장 훌륭한 인물이라고 칭찬했다. 리처드가 돌아올 땐 예루살렘을 탈환하겠다고 하자 살라흐 앗 딘은 "기왕 뺏길 거면 당신 같은 훌륭한 사람에게 뺏기는 게 낫다"고 대답했다. 이때의 휴전 조건이 예루살렘 순례자를 박해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는데, 가톨릭 쪽에서도 십자군 전쟁의 명분을 살렸다고 할 수 있고, 이슬람 쪽에서는 살라흐 앗 딘의 치세 이후로 순례자를 박해한 적이 없으므로 문제 될 것이 없는, 그런 대로 원만하면서도 별 내용 없는 타협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사자심왕 리처드와 협정을 맺은 후, 리처드와 약속했던 부활절 3주 전에 몸 상태가 악화되어 병상에 누웠는데 병세가 호전되지 못하고 결국 죽고 말았다. 살아 생전 굉장히 검소했던 탓에 그의 장례식 때는 돈이 없어 일가친척의 지원을 받아 장례를 치뤘다. 다마스쿠스를 방문한 독일 제국 황제 빌헬름 2세가 살라흐 앗 딘의 무덤이 초라한 목제 관인 것을 보고 대리석으로 된 고급 관을 기증했으나 여전히 그의 시신은 목제 관에 안치된 상태이다.
3.4. 최후 및 사후
일세를 풍미했던 그의 유언은 "이제야 유수프가 그의 감옥에서 해방되는구나"였다.
한편, 스탠리 레인 풀(Stanley Lane Poole, 1854~1931)의 살라딘(Saladin: All-Powerful Sultan and the uniter of Islam, 1898)에서는 위와는 다른 유언을 하고 있다. 전문은 다음과 같다.
(...)화요일 저녁, 그 충실한 서기와 대법관은 성으로 들어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하지만 그들은 술탄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다. 술탄 옆에서는 신학자가 신앙 고백과 코란 구절을 반복해 읽고 있었다. 마침내 그가 "그분은 유일신이신 하느님이시며 (영계와 속계를 아시는) 자비와 동정의 신이시라"는 구절을 읽자 술탄도 "그 말이 맞다"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분을 믿는다"는 구절에 이르자 병자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고, 그의 영혼은 하느님께로 올라갔다.(...)
2014년 9월, 천하의 광신도 집단 다에시가 살라흐 앗 딘의 요새를 폭파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다에쉬가 쿠르드족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지라 이에 대한 보복으로 반달리즘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4. 능력
자신의 능력과 카리스마만으로 이슬람 세계의 통합을 이뤄낸 인물답게 전략가로서의 면모가 굉장히 뛰어났다.
당시 십자군의 주요 도시들은 레반트 해안가를 따라 길쭉하게 형성되어 있었는데, 이 때문에 전선이 길게 형성될 수밖에 없었다. 전적으로 살라흐 앗 딘이란 거인에게 의존했던 아이유브 왕조인지라 살라흐 앗 딘은 여러 개의 부대를 편성해서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하는 전략을 사용한 적이 드물었다. 대부분의 전투는 자신의 주력군을 이끌고 각 거점을 순차적으로 공격하는 식으로 이루어졌고, 자연히 길게 뻗은 전선을 오가는 것이 큰 문제가 되었다.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십자군이 다양한 소국가들로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에 살라흐 앗 딘은 예루살렘 왕국만 신경 쓰지 못하고 에데사 백국, 안티오크 공국, 트리폴리 백국 등 많은 가톨릭 소국들에게 신경을 분산시켜야 했다. 더군다나 이때의 십자군은 협소한 영토에 병력난, 물자난에 시달렸던 12세기의 십자군들과 달리 꽤나 강성한 세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살라흐 앗 딘은 가톨릭계 소국가들 뿐만 아니라, 장기 왕조의 여러 공국들에게도 늘상 신경써주어야 했다. 누르 앗 딘의 세력은 대부분 흡수했지만 모술에 중심을 둔 장기 왕조의 다른 왕자들은 건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때는 무력으로 어떤 때는 조약을 통해 기독교 소국들 및 이라크의 장기 왕조계 소국가들과의 관계를 조율해야 했는데 그 과정에서 전술적인 패배는 있을지언정 전략적으로 큰 실패를 경험한 적은 없다.
5. 인품에 대한 평가
살라딘이라고 추정되는 그림
가톨릭교도측에서 보면 압도적인 적의 수괴였지만, 놀랍게도 당시 가톨릭 세계에도 좋은 평가를 받았던 인물이다. 관련 소설 'Amulet' 등을 보면 십자군의 누구보다도 신사적이고 기사적인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에서도 살라흐 앗 딘을 지옥이 아닌 림보에 있는 것으로 그리고 있다. 또 3차 십자군 이전까지는 적인 십자군 포로도 함부로 죽이지 않았다. 예외가 있다면 살라흐 앗 딘의 누이를 포함한 민간인들을 공격하였으며 메카와 메디나까지 약탈하려고 시도했던 르노 드 샤티용 정도. 그는 예루살렘 탈환에 큰 영향을 준 전투인 하틴 전투가 끝난 후, 살라흐 앗 딘에게 직접 처형당했다. 물론 당장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그 주변에 있던 라틴 국가들을 점령하던 시절에는 그야말로 재앙 취급을 받았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기록자인 기욤 드 티레은 그의 관용함을 기록하기도 했지만, 그 관용에서 나오는 병크를 크게 묶어 까는 것을 잊지 않았고, 어떤 수도사의 기록에서는 '적그리스도가 오기 전의 마지막 재앙' 중 한 명재앙되기 참 쉽죠?으로 기록하기도 했다. 특히 그 시기에 나온 살라흐 앗 딘을 그린 기록을 본다면 푸른 피부를 가진 악마처럼 그리는 기록도 있다. 즉, 살라흐 앗 딘이 호의적으로 기록되기 시작한 건 엄연히 3차 십자군 전쟁 이후라는 것.
당시 유럽의 음유시인들의 작품을 보면 가관인데 리처드 1세에게 호의적인 작품엔 살라딘은 흑마법사를 동원해 악령을 말로 만들어 리처드에게 선물로 주는 등의 꼼수를 부리다 도망가는 게 일이다. 프랑스에게 적대적인 작품엔 2차 십자군 당시 프랑스 왕비가 게으름 부리는 프랑스 왕에게 실망하고 용맹한 살라딘에게 반해 청혼하려다 붙잡힌다. (2차 십자군 당시 살라딘은 어린 학생이었다) 어떤 작품에서는 살라딘은 호기심에 포로로 잡힌 트리폴리 백작의 아들에게 기사 작위를 받으려 한다. 트리폴리 백작의 아들은 이교도에게 기사 작위를 줄 수 없다고 거부하지만, 포로 신세에 살라딘 자신에게 강요받아 기사 작위를 줬다고 하면 아무도 책임을 묻지 않을 것이란 말에 살라딘에게 기사 작위를 내린다. 목욕을 하고, 흰 옷을 입는 등 기사 작위식을 받는 동안 살라딘은 의식 하나 하나에 진심으로 감탄하여 기사 작위식을 끝낼 무렵엔 프랑크 의식을 가진 진정한 기사가 된다. 개중 압권인 것은 살라딘이 죽기 직전 스스로에게 프랑스어로 세례를 내려 기독교인으로서 죽고 예루살렘에 묻혔다는 것.
그러나 풀려난 포로들이 곱게 유럽으로 돌아가지 않고 대부분 다시 십자군에 합류해서 살라흐 앗 딘과 싸웠기 때문에, 이 점에서는 가톨릭으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반면 오히려 무슬림들 쪽에서는 무자비한 바이바르스를 더 높게 평가하기도 한다. 물론 살라흐 앗 딘도 사람인지라 리처드를 상대로 고전할 때에는 포로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고 죽였다. 심지어 포로로 잡힌 십자군 기사들 중 여성이 있었는데도 같이 죽여버리라고 했을 정도. 그나마 갑옷을 벗기기 전엔 여성인 줄도 몰랐다고 한다.
사실 살라흐 앗 딘은 19세기 이후 '반식민지 운동'에 의해 유명해진 면도 있다. 살라흐 앗 딘의 네임밸류는 적이었던 유럽인들에게는 유명했을 뿐, 19세기 이전까지 이슬람 세계에서는 그렇게까지 인기가 많은 영웅은 아니었던 듯하다. 유럽 열강이 이슬람 세계를 야금야금 정복, 일제 치하의 우리가 그랬듯이 과거의 영웅이 재발견된 것이다. 물론 유럽에서는 여전히 유명했지만... 당시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던 영웅은 몽골의 침략을 막아낸 바이바르스였다. 소수민족인 쿠르드 출신의 영웅 따위... 사실 같은 시기에 진정한 지하드를 이끄는 사람으로서의 위용은 살라딘의 '선구자' 격인 누르 앗 딘이 압도적으로 고평가 받았을 정도. 재미있는 점은, 정치적인 행보에서 살라흐 앗 딘과 누르 앗 딘은 큰 차이점을 보이지 않는 다는 것이다. 두 사람 다 자신의 군사행동을 지하드임을 강조했고, 점령한 지역에 이슬람식 정치 및 교육체계를 확고히 하는데 힘을 썼다.
십자군 원정 당시에는 무슬림들 사이에서 좋지 않은 시선도 있었다. 살라흐 앗 딘의 온정을 '연약함'으로 표현하고 저항하는 적군을 보내준 것을 겁을 먹은 것이라고 깠던 것이다. 이는 기존의 지배자였던 누르 앗 딘의 세력을 흡수한 살라흐 앗 딘을 왕위 찬탈자라고 간주하던, 누르 앗 딘 계열 역사가들의 감정이 이입된 경우다. 대표적인 인물이 모술의 이븐 알 아시르.
살라흐 앗 딘은 또한 정과 눈물이 많은 다정다감한 성격이었는데 대표적인 일화로 프랑크족 여인의 아이가 유괴되어 노예시장에 팔려가자 사연을 들은 살라흐 앗 딘이 노예시장에 기병들을 보내 아이를 찾아오게 한 것이다. 여인은 눈물을 쏟으며 크게 감사하였다고 한다.
또한, 예루살렘 공성전 당시에는 이벨린의 발리앙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도록 허용해서 예루살렘 방어전을 지휘하게 했다. 사실 이건 방어전을 지휘하라고 들여보낸 것은 아니다. 발리앙은 어디까지나 가족을 구하기 위해서 가는 것이고 예루살렘에서 살라흐 앗 딘에게 적대적인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을 약속했었다. 그러나 마땅한 지휘관이 없던 예루살렘에서 사람들이 발리앙에게 살라흐 앗 딘과 맞서도록 설득했고, 발리앙은 이에 대해 사과 편지를 보내면서 다시 자기 가족들은 예루살렘에서 나가도록 통행을 허용해 달라고 했다. 약속을 깬 측의 뻔뻔스러운 부탁이었지만 살라흐 앗 딘은 발리앙의 아내가 타고 갈 말을 보내주는 것으로 답했다.
살라흐 앗 딘은 예루살렘을 함락한 후에도 예루살렘의 가톨릭교인들을 약간의 몸값만으로 도피할 수 있게 허가해주었고, 그것도 병자나 노인, 아이 등은 무료로 보내줬다. 몸값이 부족한 사람에 대해서는 자신이 직접 몸값을 내어주기도 했다고. 게다가 계속되는 예루살렘 왕국의 무리한 요구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무료로 보내주었고, 가는 길에 노잣돈까지 쥐어주었다. 그래서 "예루살렘 대주교는 막대한 재산을 싹싹 긁어서 떠나는데 그놈에게까지 낮은 몸값을 받고 호위병을 붙여줘야 하느냐"는 등 무슬림들 반발이 심했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이후로 계속되던 십자군 전쟁에 그의 지나친 관대함이 문제라는 지적도 크다. 그로부터 100년쯤 지나 바이바르스가 아크레를 점령할 때, 살라흐 앗 딘과 정반대로 이 도시에 살던 십자군이나 가톨릭교인들을 다 죽이거나 노예로 만들어 팔아버리면서 살라흐 앗 딘의 관대함이 결국 나중에 무슬림들의 피를 흘리게 한 어리석은 행위라고 비난할 정도였다.
그 중 특히 짐은 관대하다 급의 포스를 풍기는 예는 다음과 같다.
살라흐 앗 딘은 격무에 지쳐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던 도중 한 노예(맘루크)가 와서 서류를 내밀고 서명을 요구했다. 살라흐 앗 딘은 "나는 너무 지쳤다, 나중에 다시 와라"라고 말했지만, 맘루크는 물러서지 않고 "지금 서명해야 합니다!" 하며 서류를 살라흐 앗 딘의 코 앞까지 밀고 흔들며 재촉했다. 살라흐 앗 딘은 궁여지책으로 "잉크가 없어서 서명할 수가 없잖아." 하고 말했고, 맘루크는 "저기 잉크병 있잖아요" 하고 응수했다. 살라흐 앗 딘은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나 "아 잉크병이 저기 있었구만..."이라며 손수 잉크병을 들고 와 서명을 했다.
- 바하 알 딘, 살라흐 앗 딘의 비서.
하지만 여기에서의 노예 '맘루크'를 말 그대로의 노예로 생각하면 곤란하다. 맘루크가 원래 노예 계급이었던 건 사실이지만, 오히려 신분이 미천하고 정통성이 부족하여 반란을 통해 권력을 잡지 못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에 군주에 대한 충성심이 높은 친위대로 각광을 받아왔다. 군주의 친위대 역할을 수행해야 하니 이들은 철저하게 군사훈련을 받았고, 전쟁이 거듭되는 사이 군인 노예로 큰 군사적 힘을 지니게 되어 일종의 특권계층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러니까 일개 노예가 살라흐 앗 딘에게 깝죽댔다고 보는 것은 오류. 그래도 최고 지도자를 저렇게 대하고도 질책 한 번 받지 않고 넘어갔다는 점에서 살라흐 앗 딘 치하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또 그의 관용을 엿볼 수 있는 일화가 있는데, 어느 겨울날, 어떤 사람이 온실에서 기른 장미꽃 한 바구니를 살라흐 앗 딘에게 바치자 감동한 살라흐 앗 딘이 2백 브장을 그 사람에게 하사하겠다며 왕실 재정관에게 명하여 즉시 어음을 끊게 했는데, 실수로 2백 브장이 아닌 3백 브장으로 기재하였고 실수를 알아차린 재정관이 즉시 잘못 기재한 어음을 파기하고 다시 지급하려 하자, "아니, 그럴 것 없다. 4백 브장 짜리로 다시 끊으라. 그대의 펜이 나보다 더 후해서야 되겠느냐."라면서 오히려 가격을 올려 하사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6. 현대의 살라흐 앗 딘 평가
대인배라고 알려져 있던 덕에 과거 유럽에서도 평이 좋은 편이었다. 살라흐 앗 딘은 이라크 북부의 소수민족 쿠르드족 출신으로 알려져 있으며, 아르빌에는 살라흐 앗 딘 대학도 있다. 사담 후세인은 자기 자신에게 살라흐 앗 딘의 이미지를 덧씌우기를 즐겨했다. 그러면서 살라흐 앗 딘의 출신 민족인 쿠르드족은 잔혹하게 학살하는 이중성을 보였으니... 시리아 다마스쿠스에는 살라흐 앗 딘의 동상이 서 있는 살라흐 앗 딘 광장도 있다.
살라흐 앗 딘은 이슬람에서 '무함마드', '알리'와 함께 항상 거론되는 최고의 영웅이며, 이런 그의 상징성 덕분에 제1차 세계대전 종전 뒤 시리아를 점령한 프랑스군의 앙리 구로 장군은 그의 무덤에 찾아가 가톨릭교도의 승리를 선언한 일이 있다.
살라흐 앗 딘, 당신은 우리를 쫓아냈지만 우리는 다시 돌아왔소. 여기 서 있는 내 존재가 바로 이슬람에 대한 가톨릭의 승리를 증언하는 것이오.
다마스쿠스의 살라딘 동상 (1997년작)
살라흐 앗 딘은 중세 이래로 유럽에서 기사도 정신을 지닌 영웅으로 찬사받아 왔지만, 정작 이슬람권에서는 꽤 오랜 세월동안 잊혀진 인물이었다. 이슬람 교도들은 본래 관대한 성격의 살라흐 앗 딘 보다도 무자비하면서도 막강했던 바이바르스를 십자군 전쟁의 영웅으로 꼽곤 했다. 살라흐 앗 딘이 다시 이슬람 역사 속의 영웅으로 재조명을 받게 된 현상은 비교적 근현대에 들어서 시작되었다.
이집트 출신의 역사학자이자 이슬람학자인 Abdul Rahman Azzam은 한편 그의 2009년 살라흐 앗 딘 평전에서 기존 문화비평계와 역사학계는 왜 이슬람, 아랍권 내에서 살라흐 앗 딘이 신화적인 입지까지 올라갔는지 상당히 기본적인 사실을 간과하고 멀리서 그 이유를 찾고 있다고 주장했다. 상술한대로 사실 적에게 배푼 관용은 적대적 입장에서 싸웠던 기독교 세계와 서구의 후예들에게 더 와닫는 이야기지 무슬림들 본인들에게 그렇게까지 와닫지 않는 반면, 군사적으로도 리처드 뿐만 아니라 전임자인 누르 앗 딘이나 후임인 바이바르스에 비해 딱히 압도적이라 할 것도 없다. 그렇다면 왜 다른 십자군 전쟁기의 이슬람권 지도자들을 재치고 살라흐 앗 딘이 후대, 특히 19~20세기에 와서 그렇게 추앙 받았는가 하니 바로 아바스 왕조의 분열 이후 정치적으로 산산조각나 시아파, 튀르크인, 십자군들에게 농락 당하던 이집트-시리아 일대를 재통합했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현대 이집트-팔레스타인-시리아 일대는 다마스쿠스가 우마이야 왕조의 수도였을 시절부터 통일 이슬람 제국의 핵심 국력의 원천이 된 땅들이었으며, 아바스 제국의 분열과 십자군의 침공 이전 이슬람 제국의 약화 또한 이슬람 수니파에 있어 이단이라 할 수 있는 시아파 파티마 왕조가 이집트를 먹고 강대한 세력으로 성장하여 아바스 왕조를 노리면서 저 지방들의 연결이 끊어졌던 점이 컸다. 살라흐 앗 딘, 그리고 그 전임자인 장기 왕조가 부상한 시대는 십자군의 침공으로 인해 팔레스타인 해안지역 일대가 전부 이교도에 넘어가면서 이 아랍 이슬람 제국들의 심장부의 분단이 영구화 될 가능성이 커 보였던 시절이었다. 이런 와중 돌풍처럼 나타난 살라흐 앗 딘은 시아파를 척결하여 이집트를 수니파 정통으로 되돌려 놓고 아이유브 왕조를 세워 장기 왕조의 위업을 계승하여 십자군 왕국들의 척추를 부러뜨리고, 저 지역들의 정치적 통합을 복구하면서 훗날 몽골의 침략이란 거대한 돌풍에도 불구하고 맘루크 왕조, 그리고 오스만 제국으로 이어지는 보편 이슬람 제국의 명맥이 이어질 기반을 마련했다. 19세기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이슬람, 아랍권 세계 내의 지정학적 보편성이 산산조각나고, 20세기 아랍 민족주의가 뜨고 지는 것에 열광하다 실망하며, 결국 아랍 세계가 지속 된 내부 불화와 분단으로 인해 갈수록 오히려 더 서구에게 더 무시받고, 종속적으로 떨어져가는 현실을 겪은 현대 아랍 민중과 지식인들에게 있어 이런 살라흐 앗 딘이 남긴 지정학적 통합이란 역사적 유산은 그 다른 어떤 요소보다 더 강렬한 신화적 매력이라는게 아잠박사의 주장이다.
7. 대중문화에서의 살라흐 앗 딘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 지옥편에서는 제1옥에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등 다른 비기독교인 위인들과 함께 있었다. 다만 홀로 외로이 서있어서 아웃사이더 같아 보인다. 다만 신곡에서의 제1옥이 림보라는 점을 생각하면 상당히 대우받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대표적인 "선량한 비가톨릭"이다. 그 외에도 그의 기사도적인 면 때문인지 서구의 십자군 기사문학 등에도 종종 그 이름이 등장했다고 한다. 이 중에서는 프랑스의 국왕 루이 7세와 잉글랜드 국왕 헨리 2세의 왕비였던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와의 염문설도 나오지만 루이 7세의 왕비 자격으로 그녀가 참여했던 2차 십자군은 1147~1148년에 있었고 당시 20대 중반의 엘레오노르와 달리 살라흐 앗 딘은 겨우 열 살의 소년에 불과했으니그냥 기사문학 특유의 뻥으로 봐야 할 것이다.
조반니 보카치오의 저작인 <데카메론>에서도 살라딘이 긍정적인 이미지로 나온다. 십자군 전쟁 이전 적국인 유럽을 정탐하다가 그가 비범한 인물임을 알아본 한 기사에게 후하게 대접을 받았는데, 이후 그 기사가 십자군 전쟁에 참여했다가 포로가 되자 그를 알아보곤 그때 받았던 호의를 갚기 위해 더더욱 융숭하게 대접해 주고 휘하 마법사의 마술로(...) 고국으로 보내주기까지 한다.
독일의 극작가인 고트홀트 레싱이 쓴 희곡 '현자 나탄'에선 나탄에게 종교의 진리에 대해 묻는 역으로 나온다. 그런데, 여기에선 어째 찌질하게 나온다(...). 나탄의 재산을 갈취하기 위해 '기독교, 이슬람, 유대교 중에 어느 종교가 참종교인가'를 물어 본 것. 이에 대해 나탄은 반지 설화를 인용하며 어떤 종교든지 간에 '공평하고 편견 없는 사랑'이 중요하다고 가르쳐 준다.
불스원의 차량용 에어컨 살균제(훈증캔)의 브랜드이기도 하다.
김종훈의 헤븐 투 헬에서 지옥편에 등장할 예정이다. 살라딘의 이미지로 봐선 주인공의 책사로 활약할 가능성이 아주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