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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05. 묵상글 (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 새로 사랑하자!.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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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05.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9.05 03:08
- 새로 사랑하자!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주님께서는 왜 유대교와 단절하지 않으셨을까?
이는 당신의 새로운 포도주를 담을 수 있도록 부대가 새로워지길 바라시지만
부대 자체를 폐기하지 않으셨다는 방증이 되겠습니다.
비슷한 맥락의 말씀을 하신 적도 있으시지요.
율법을 없애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려고 오셨다고.
이것을 저에게 적용하면 이런 것이 될 것입니다.
저의 사고방식이나 정신이 고루하고 낡았습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이런 저를 아예 존재조차 없애려 하지 않으시고,
다만 저의 고루한 사고방식과 낡은 정신이 새로워지길 바라실 겁니다.
회개를 바라시고 쇄신을 원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바라시는 회개와 쇄신도 다른 것이 아니라
사랑의 회개와 사랑의 쇄신을 바라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겠다고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잖습니까?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 34)
그런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어찌 새 계명이겠습니까?
이미 너 자신처럼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이 있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사랑하라는 계명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라는 말씀을 까먹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계명이 제일 중요함을 잠시 까먹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요즘은 제가 이것을 까먹거나 놓치지 않는 편이지만
전에 자주 이것을 까먹고 놓칠 때는 이렇게 저 자신에게 얘기하곤 했습니다.
다시 사랑하자!
새로 사랑하자!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오래전에 하셨고 오랫동안 우리와 함께 있던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오늘 새롭게 말씀하시는 것처럼 듣는 것이고 새롭게 실천하는 것입니다.
오래전에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고,
제가 들은 것도 오래전부터 수없이 들은 말이지만
오늘 처음 말씀하시는 것처럼 제가 새롭게 들으면
그리고 새로 사랑하기로 결심하면 저는 새 부대가 되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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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05.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단식 논쟁>
“그리스도 예수님이 새로움의 답이다”
“기쁨으로 주님 섬겨드려라.
춤추며 당신 앞에 나아가라.”(시편100,1)
오늘 복음은 단식논쟁과 더불어 새것과 헌것에 대한 깊은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단식하면 떠오르는 일화가 슬며시 웃음짓게 합니다. “먹고 겸손한 것이 안먹고 교만한 것보다 낫다.” 아주 오래전 옛 장상의 유머스러우면서도 영성 핵심을 담고 있는 말마디입니다. 또 베네딕도 규칙의 다음 두 가르침도 좋아합니다.
“단식을 사랑하라(Jeiunium amare)”<성규4,13>
“순결을 사랑하라(Castitatem amare)”<성규4,64>
단식뿐 아니라 순결도, 겸청도, 겸손도, 순종도, 침묵도, 고독도, 가난도, 공부도, 즉 모든 덕목을 하느님을 사랑하듯 자발적 기쁨으로 사랑할 때 참 멋지고 아름다운 수행자의 삶이겠습니다. 오늘은 노자 도덕경의 지혜도 수행생활에 좋은 가르침이 됩니다.
“만족할줄 알면 욕됨이 없고, 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않아서 오래 갈 수 있다.”<도덕경>
더불어 생각나는 시편 성구, “너희는 멈추고 하느님 나를 알라”(시편46,12ㄱ)는 말씀처럼 멈춰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도 많으니 멈춤이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은 단식이 논쟁의 핵심입니다. 분명히 할 바 단식은 절대 규정이 아니라 상대적 수행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단식, 기도, 자선의 3대 전통적 수행입니다. 단식이 기도와 자선으로 이어져 참으로 사랑의 개방적 수행이 되어 내적으로 자유로워질 때 정말 이상적이겠습니다. 단식을 사랑하라 할 만큼 단식은 중요하니 8가지 악덕중 즉 탐식, 음욕, 탐욕, 분노, 슬픔, 나태, 허영, 교만에서 보다시피 맨먼저 자리잡은 탐식의 제동에 단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탐식의 과식후에는 성욕도 기승을 부리고 수행생활에 큰 장애를 초래합니다. “먹자고 하는 일인데”, “먹는 재미없이 무슨 재미로 사느냐”는 말이 회자될만큼 주변을 봐도 범람하는 음식점이요, 오고 가는 택배도 먹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먹는 것과 쓰레기는 비례하니 먹는 것이 죄가 되는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들 같습니다. 먹는 것이 전부라 할 만큼의 세상이지만, 또 “못먹어서가 아니라 잘 먹어서” 병도 많은 세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식 자체는 절대적이 아닌 상대적 수행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은 단식이 절대적이라도 되는 것처럼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 시비를 걸고 나옵니다. “요한의 제자들이나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고 기도하는데 왜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분별의 지혜가 빛나는 명품 답변입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을 할 수야 없지 않느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이 단식을 할 것이다.”
단식을 상대화 하면서 단식에도 때가 있음을 알려줍니다. 시도 때도 없이 보이는 단식으로 어리석게 축제인생을 고해인생으로 만들지 마라는 것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주님과 함께 삶의 축제를 즐기라는 것이니, 이 또한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인 예수님이 주시는 삶의 지혜입니다.
이어지는 새것과 헌것의 비유가 우리의 끊임없는 발상의 전환을, 사고의 패러다임의 전환을 요구하니 참 신선한 충격이 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새 포도주 같은 새로운 복음의 진리를 받아들이기 위해 낡은 사고 방식의 부대를 새 부대로 바꾸라 말하십니다.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로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담아야 한다.”
이래야 꼰대 소리를 듣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발상의 새로운 전환이 얼마나 힘든지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은 흡사 완전히 굳어 신축성과 유연성을 상실한 극우의 보수주의자들을 두고 하는 말씀같습니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 한다.”
나이들면 누구나 이런 극단의 보수주의자가 될 위험이 다분하며 모두의 보편적 가능성입니다. 그러니 품위있는 복음적 삶은, 개혁적 중도 보수의 삶은 얼마나 힘든 노력을 요구하는지요! 참으로 나이들어 늙어갈수록 겸손한 ‘배움의 여정’, ‘성화의 여정’에 시종여일 충실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에 대한 답은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늘 새로운 포도주, 늘 새로운 부대의 삶에 오늘 콜로새서의 그리스도 찬가가 참 좋은 답이 됩니다. 바로 어제와 오늘의 콜로새서의 <그리스도 찬가>는 매주일 수요일 저녁성무일도때마다 바치는 찬미가입니다. 어제 공부하며 얼마나 부요하고 풍부하며 우리의 발상의 전환에, 패러다임의 변화에 결정적 새로움을 주는지 깊이 깨닫고 배웠습니다.
콜로새서 1,12-20절 까지 우주적 그리스도와 교회의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이뤄지는 하느님 아버지의 창조와 구원 업적의 웅장한 파노라마가 늘 새로운 감사와 감동, 감격을 선사하며 저절로 패러다임의 전환을, 발상의 전환을 이뤄주는 영감의 샘이 됩니다. 오늘 시간되면 매주간 수요일 저녁성무일도시 세 번째 <그리스도의 찬가>를 깊이 음미하시며 불러 보시기 바랍니다. 어느 하나 생략할 수 없는 금과옥조의 진리를 담고 있는 그리스도 찬가입니다.
“성도들이 광명의 나라에서 받을 상속에 참여할 자격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드리나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형상이시며, 만물에 앞서 태어나신 분이시로다.”
“그분을 통해서 그분을 위해서 만물이 창조되었고, 그분은 만물보다 앞서 계시고, 만물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속하는 도다.”
“그리스도는 당신 몸인 교회의 머리이시고, 모든 것의 시작이시며, 만물의 으뜸이 되시고자, 죽은 자들 가운데서 최초로 살아나신 분이시로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의 피를 통해서 평화를 이룩하시어, 하늘과 땅의 만물을 당신과 화해시켜주셨도다.”
몇 대목을 나눴습니다만, 요한복음(1,1-18), 빌립비서(2,6-11)와 더불어 우리에게 늘 새로운 발상의 전환을 이뤄주는 콜로새서(1,12-20)의 그리스도 찬가들입니다. 무엇보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늘 새 부대의 마음에, 진선미(眞善美)와 신망애(信望愛)의 새 포도주로 가득 채워 주십니다.
“주님, 좋으시다, 영원하신 그 사랑,
당신의 진실하심, 세세에 미치리라.”(시편100,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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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05.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단식논쟁을 통해서, ‘새로운 때’가 도래했음을 선포하십니다. ‘신랑’이 와서 함께 있는 때가 도래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혼인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을 할 수야 없지 않으냐?”(루카 5,34)
사실, 바리사이들과 요한의 제자들은 레위기 16장 29-31절에 따라, 구약의 속죄일을 지키기 위해 단식을 했습니다. 곧 잘못을 벗고 정결해지기 위해 1년에 한 번씩 단식을 했습니다. 그리고 열심한 바리사이들은 월요일과 목요일, 1주일에 두 번씩 단식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제자들은 단식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겨 그 이유를 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단식을 거부하신 것이 아니라, 지금은 그 “때”가 아님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밝혀주십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신랑’이라고 부르십니다. 그리고 ‘신랑’이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새 옷에서 조각을 찢어내어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부대에 담지 않는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루카 5,36-38)
이처럼,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낡은 옷에다가 기울 수 없는 ‘새 옷’이며, 낡은 가죽 부대에 담을 수 없는 ‘새 포도주’에 비유하십니다. 이는 당신과 함께 새 시대가 도래 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이제 ‘새 포도주’를 담을 ‘새 부대’가 필요할 때입니다. 새 부대는 ‘변화된 삶’을 의미합니다. 곧 새 포도주를 담을 변화된 삶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신랑’은 이미 와 있고 혼인잔치가 열렸습니다. ‘신랑’ 없이는 열릴 수 없는 잔치입니다. 참으로 기뻐해야 할 때입니다. 새 시대가 왔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새 시대’를 담을 ‘새 부대’가 필요할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새 시대’, 새로운 ‘하늘나라’는 예수님과 함께 ‘이미’ 왔습니다. 우리는 이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고, 우리의 삶 안에서 하느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그리스도께서 가져다 준 ‘이 하늘나라’를 우리의 삶 안에서 그분의 영과 더불어 완성으로 나아갑니다. 우리는 이 축복의 삶을 향유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루카 5, 38)
주님!
제 마음이 새 부대이오니, 사랑의 술을 부으소서!
당신 사랑에 취해, 제 마음 기뻐 흥겨워지게 하소서.
당신의 사랑에 젖고, 당신 향기 품게 하소서.
제 삶이 포도주 잔이 되어, 만나는 이마다 사랑을 건네게 하소서!
당신의 축복과 기쁨, 당신의 생명과 진리를 건네게 하소서.
한반도 방방골골 진리와 정의와 평화가 넘실거리고, 새 포도주로 달구어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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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05.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작년에 와서 ‘안마의자’를 마련했습니다. 지난번에는 리모컨이 안 되어서 바꾸었습니다. 이번에는 리모컨 전원은 들어오는 작동이 안 되었습니다. 서비스 센터에 연락했더니 수리 기사를 보내 준다고 했습니다. 1시에서 3시 사이에 온다고 해서 기다렸습니다. 3시가 넘어도 오지 않기에 기사에게 전화했습니다. 기사는 서비스 센터에 부품이 없어서 못 간다고 연락했다고 합니다. 서비스 센터에서 제게 연락해야 하는데 그 과정이 생략되었습니다. 2시간 기다리면서 생각했습니다. 연락이 제대로 안 된 것이 짜증이 나기도 했고, 서비스 센터에 전화해서 고칠 때까지는 월 비용을 내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시간에 대해 강박관념이 있는 편이라서 다른 일을 하기도 힘들었습니다. 서비스 센터에서는 미안하다는 전화를 했고, 부품이 와서 수리가 될 때까지는 비용을 받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부품이 한국에서 온다고 하니, 오는 대로 수리해 주기로 했습니다.
신앙은 하느님과의 약속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곤경 중에 하느님을 불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땅에서 구해 주셨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약속의 땅으로 갔습니다. 광야에서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을 지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우상을 섬기지 않고, 오직 하느님만을 섬기겠다고 했습니다. 신앙은 하느님과의 약속을 어겼던 이스라엘 백성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성서는 그런 이스라엘 백성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아담은 하느님과의 약속을 어겼고, 선과 악을 아는 나무를 먹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금 송아지를 만들어서 섬겼습니다. 다윗은 충성스러운 부하를 죽음으로 내몰았고, 그의 아내를 탐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지옥까지라도 가겠다고 했던 베드로는 3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십니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셨습니다.
역사의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을까요? 복음을 선포하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은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 하느님의 의로움 드러나는 나라입니다. 세상의 기준과 세상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가 아닙니다. 이 하느님 나라는 명예, 권력, 재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만들어가는 나라입니다. 이 하느님 나라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은 새로운 권위를 지닌 예수님의 말씀과 표징입니다. 안식일을 위해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라는 가르침입니다. 돌아온 아들을 따듯하게 품어주는 자비로운 아버지처럼 우리도 거룩하고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는 가르침입니다. 죄를 범한 여인에게 돌을 던지기 전에 나의 가식과 위선을 돌아보라는 가르침입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는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일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우리의 몸이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이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누가 나의 이웃인가를 생각하기보다는 누가 지금 상처받고 있는 이의 이웃인가를 생각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표징을 따라가는 것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어렵습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 의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사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시기를 청합니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십자가를 지고 비참한 모습으로 죽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복음이 되셨습니다. 다락방에 숨어있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두려움과 걱정을 떨쳐버리고 다락방에서 나왔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교회도, 신앙도, 희망도 의미가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부활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소생입니다. 부활은 애벌레가 나비가 되어 높은 하늘을 날아오르듯이, 삶의 변화입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의 변화입니다. 어둠에서 빛으로의 변화입니다. 의혹에서 믿음으로의 변화입니다. 욕망, 시기, 질투, 원망의 삶에서 헌신, 나눔, 용서, 사랑의 삶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습니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변화된 삶을 살고 있다면 우리는 언제나 부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새 술을 새 부대에 담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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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05.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사랑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압니다.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9월 4일 목요일- 서른여섯 번째 주간 (호명환 번역): 현존 수양
사랑은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압니다. 자, 시작해 봅시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매일 묵상은 그리스도교 관상 전통에 뿌리를 두고 리처드 로어와 CAC 운영진, 그리고 객원 교수들의 묵상 글을 제공해 주어 우리의 영적 수양을 심화시켜 주고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동정(compassion)을 구현하도록 도와줍니다.
로렌스 수사는 파리의 어느 이웃 수녀원에 살았던 수녀와 지속적인 편지를 주고받았습니다. 이 편지에서 그는 그 수녀에게 수양에 정진하라고 권고합니다:
수녀님은 지난 번 편지에서 새로운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분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수녀님뿐이 아닙니다. 정신은 방황할 가능성이 매우 높지만, 의지는 우리의 모든 힘을 관장하는 주인이기에, 이 의지가 정신을 되돌려 최종 목적지인 하느님께로 인도하게 해야 합니다.
정신이 돌아서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법을 일찌감치 배우지 못했다면 산만하고 분주하기만 한 건강치 못한 습관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이러한 습관은 극복하기 어렵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대개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를 세속적인 것들에게로 잡아 끕니다.
저는 이에 대한 해결책이 하느님 앞에서 우리의 실수를 인정하며 겸허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해진 침묵 기도 동안, 저는 많은 말을 하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긴 담화는 종종 분심을 일으킵니다.... 그저 하느님 현존 안에 그대의 정신이 머물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십시오. 만일 정신이 때때로 방황하거나 집중하지 못한다 해도 실망하지 마십시오. 괴로워하는 것은 정신을 집중하게 하기보다는 정신을 더 산만하게 만들 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정신을 제 자리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 우리의 의지를 사용해야 합니다. 그대가 이런 수양에 정진한다면 하느님께서 그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정해진 시간 동안 그대의 정신을 제 자리로 되돌리고 더 편안하게 유지하기 위한 쉬운 방법은 낮 동안 마음이 너무 방황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정신을 하느님 현존 안에 두기 위해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가끔씩 하느님을 마음에 품는 것이 익숙해지면 기도하는 동안 고요함을 유지하거나, 적어도 정신이 방황할 때 그 정신을 제 자리로 되돌리는 것이 쉬워질 것입니다.
로렌스 수사는 어느 여성 평신도에게 보낸 그의 편지에서 이렇게 권고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가끔씩 그분(들)을 잠깐이라도 생각하고 자그만 사랑을 마음에 품으라고 하시며, 때로는 은총을 구하고, 때로는 고통을 나누며, 때로는 그분께서 베푸셨고 지금도 베푸시는 축복에 감사하라고 부탁하십니다. 하루 일과 한가운데서도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이 자그만 것들을 마음에 품으려고 노력한다면 그대는 그대가 할 수 있는 한 종종 사랑으로 그대 자신을 위로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식사와 대화 중에도 하느님께 가끔씩 그대의 마음을 올려드리십시오. 그러면 아주 작은 깨달음이라도 언제나 큰 기쁨이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크게 부르짖지 않아도 됩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우리에게 더 가까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부탁컨대, 제가 권고한 것을 기억하십시오. 밤낮으로 모든 활동 속에서, 심지어 쉬는 시간에도 하느님을 자주 마음에 떠올리십시오. 하느님은 언제나 그대 가까이에, 그대와 더불어 계십니다. 그분들(하느님)을 홀로 내버려 두지 마십시오. 그대를 찾아온 벗을 홀로 있게 내버려 두는 것은 무례하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왜 그분들(하느님)을 저버리고 그분들(하느님) 홀로 내버려 두시는 건가요? 사랑을 잊지 마십시오. 하느님을 자주 생각하고 끊임없이 그분들(하느님)을 사랑하십시오.
우리 공동체 이야기
로렌스 수사님은 여러 차례 제 삶의 여정에 찾아왔습니다. 몇 년 전 피정 때 그분을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는데, 그 이후로 그분의 이름이 가끔씩 떠올랐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제가 하는 모든 행위와 제가 하는 모든 일이 하느님 현존 안에 깊이 뿌리내려 있음을 상기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결과나 효과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현재로서는 병중에 있는 사랑하는 아내를 돌보는 일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아내의 고통과 괴로움을 함께 나누는 것이 저를 다시 하느님 현존 속으로 이끌어 줍니다. 우리는 절대 혼자가 아닙니다.
—Roland W.
References
Nicolas Herman, Brother Lawrence of the Resurrection, Practice of the Presence, trans. Carmen Acevedo Butcher (Broadleaf Books, 2022), 87–88, 94, 97.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Bruce Tang, untitled (detail), 2019, photo, Japan,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지금 이 순간과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주의를 기울이면, 거룩함이라는 것이 단순하고 평범한 리듬 속에 살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여기에는 웅장한 대성당이 필요없고, 다만 주방 식탁 하나만 있으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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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05.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네 곁에, 사랑의 일을 하며 네 안에 현존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다 아시겠지만, 예수님 시대에는 마시기에 알맞게 숙성된 포도주는 병에 보관하지 않고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부대에 담아 보관하였습니다. 마시기에 알맞게 숙성되었을지라도 포도주가 여전히 약간의 발효를 하기 때문에 신축성이 있는 가죽 부대에 담으면 포도주에서 이산화탄소가 나와 가죽 부대를 부풀리기 때문에 그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번 쓴 가죽 부대는 이미 어느 정도 부풀려져서 굳어 버리기 때문에 새 포도주를 넣으면 부서져 버리게 되어 있어서 새 포도주는 헌 가죽 부대에 넣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요는 우리 마음이 오래된 가죽 부대처럼 경직되고 굳어져 있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정관념이나 편견으로 경직되어 있는 마음이 아닌 유연하고 융통성 있는 마음, 삶의 여정 안에서 만나게 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로운 마음을 지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우리 신앙은 우리에게 무조건적으로 사랑과 용서, 자비의 삶을 살아가라고 요구합니다. 우리 삶 내내, 죽을 때까지 말입니다.
우리 믿음은 동정심과 용서의 삶으로 성큼성큼 나아갈 것을 요구합니다.
우리 믿음은 우리에게 세상적 권력이나 이득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 즉 하느님을 위해 살아갈 것을 요구합니다.
우리 믿음은 에고의 의지를 내려놓고 다른 이들을 위해 살아가라고 우리를 초대합니다.
우리 믿음은 에고의 자존심에 대해서 죽고 그리스도의 가난, 즉 그리스도의 자기-비움(kenosis)을 닮으라고 우리를 초대합니다.
우리 믿음은 우리 형제자매들을 위해 우리 생명을 내어주라고 초대합니다.
이 모든 것 중에 가장 어렵고 힘든 것은 우리의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한다는 초대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제시해 주시는 새로운 삶의 방식입니다. 이 새로운 삶의 방식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신축성이 있는 새로운 정신과 마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인격인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이처럼 어려운 요구를 해 오시지만, 사실 이는 결국 '나'의 기쁨과 행복, 해방을 위한 초대인 것입니다.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른 이들을 위한 삶을 살라고 초대하시는 것은 맞지만, 궁극적으로는 그것이 바로 우리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어 살아갈 때 완성해 갈 수 있는 인간(人間) 삶의 이치를 설명해 주시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정적인 생각의 틀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복음의 초대, 예수님의 초대에 우리는 응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겠지요?!
이번 주 CAC 매일 묵상에서 가르멜 수도회의 로렌스 수사님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지요?! 로렌스 수사님에 의하면 복음이 요구하는 바들을 삶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하기 위해서는 하느님 현존을 의식하는 수양을 꾸준히 해 나가야 합니다. 자주 하느님 현존을 의식하고 그 사랑 안에 머물기 위해 우리의 의식을 그쪽에 두는 훈련을 하라는 것입니다.
어제 묵상 글에서 로렌스 수사님의 다음의 권고를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가끔씩 그분(들)을 잠깐이라도 생각하고 자그만 사랑을 마음에 품으라고 하시며, 때로는 은총을 구하고, 때로는 고통을 나누며, 때로는 그분께서 베푸셨고 지금도 베푸시는 축복에 감사하라고 부탁하십니다."
복음이 요구하는 것이 참으로 어렵고 힘든 것이긴 하지만, 이 간단한 수양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간단한 수양이긴 하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수양은 아닐 겁니다. 우리는 우리가 무언가 힘든 일이나 단식, 혹은 선행과 같은 어떤 큰 선을 행하거나 공로를 세워야 그에 걸맞는 은총을 받을 수 있다는 우리의 인과응보적 정신구조를 지니고 살아갑니다.
아마도 예수님께 와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왜 단식을 하지 않느냐고 묻는 사람들의 정신구조가 바로 이런 정신구조가 아닐까 합니다.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우리가 무언가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신랑이 '내' 곁에, '나'와 함께, '내' 안에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인식하며 그분 사랑의 힘에 의탁하는 일일 것입니다.
달리 말해, 어렵고 힘든 복음의 초대에 응하는 것은 우리의 힘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이 힘으로 가능하기 때문에,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우리 안에 현존하시는 사랑의 하느님을 의식하여 그 힘이 우리 안에서 작용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모든 종교의 경전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문구가 무언지 아십니까?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문구랍니다. 우리 성경(구약과 신약을 통틀어서)에서는 대략 365번이나 이 문구가 나온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네 곁에, 사랑의 일을 하며 네 안에 현존한다.)"(마르 6,50; 마태 14,57; 요한 6,20).
사랑의 하느님 현존을 수양하는 방법으로 저는 새벽에 일어나서 자그만 의식을 거행(?)합니다. 따뜻한 차를 마시는 일입니다. 예전에 한 번 언급해 드린 바 있습니다만... 차를 마시기 전에 성호를 긋고 하느님께 이 차를 주신 데 대해 감사를 드리고 나서, 차와 찻잔에도 고마움의 인사를 합니다. 그리고 차와 찻잔에 미소를 지어 줍니다. 그러고 나서 미소를 머금고 차를 마시면서 고마운 마음을 마십니다. 이렇게 하다 보면 모든 것이 다 고마운 일임을 의식하게 됩니다....
짧고 사소한 의식인 것 같지만 이 의식을 치르고 나면 마음이 훈훈해지고, 하느님 현존을 제 마음 깊이 느끼게 됩니다....
요즘은 특별히 제 책상 앞에 놓인 마돈나 수녀님(Sr. Madonna, OSC: 위 사진)의 사진을 보며 차를 마십니다. 수녀님의 미소 띤 얼굴을 보면 제게게 미소가 번지기 때문입니다.
마돈나 수녀님이 저에게 특별한 사랑을 주셨던 분이셨기에 더더욱 저에게 더 환한 미소가 전해지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한참 젊은 사제였을 때 제주클라라 수도원에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수녀님이 저에게 해 준 이야기가 가끔씩 생각납니다. "비록 우리가 독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남자는 여자가 필요하고 여자는 남자가 필요해요. 우리는 서로가 필요한 존재이기 때문이예요요! 우리는 절대 홀로 있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예요.ㅎㅎ"
우리가 서로가 필요하고 서로를 돌보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런 관계성의 하느님에게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느님과 이런 따스한 관계성 속에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인식하게 된다면, 우리는, 확신컨대, 그 어렵고 힘든 복음의 초대에 하느님 사랑의 힘으로 응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호명환 신부
* 오늘 아침에 마돈나 수녀님 사진을 올리려다 묵상 글이 날아가 버려서 다시 묵상 글을 쓰게 되었는데, 내용이 조금 달라졌네요... ㅎㅎ... 오늘도 여러분 한 분 한 분 주님의 현존을 물씬 의식하고 느끼는 시간이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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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05.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때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을 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루카 5,33-35)
단식은 세례로 벗겨지는 낡은 옷을 가리킨다
이 말씀에서 단식은 사도가 벗어야 한다고 가르친 낡은 옷을 가리킵니다. 사도는 “여러분은 옛 인간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 버리고 새 인간을 입은 사람입니다”(콜로 3,9)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새 인간은 세례의 성화로 새로 난 사람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몸으로 육신의 행실을 함으로써 옛 인간의 행실과 새 인간의 행실을 섞는 일이 없도록, 이 옷에 관한 가르침이 이어집니다. 거듭난 ‘내적 인간!' (로마 7,22)은 얼룩덜룩한 예전의 모습 대신 그리스도와 같은 색이 되어야 합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그분을 닮고자 애써야 합니다. 그분을 위해서 세례를 받아 깨끗해진 몸이니까요.
그런즉 신랑을 기쁘게 하지 못하는 마음의 칙칙한 덮개를 벗어 버립시다.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리지 못합니다(마태 22,12 참조). 신랑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 평화로운 영흔, 순수한 마음, 맑은 생각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암브로시우스-
✝️ 성인 / 영적 글 묵상✝️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20
버림과 그대로 둠은 어떻게 열매를 맺는가
여행 중에 예수께서 어떤 마을에 들르셨는데 마르타라는 여자가 집으로 모셔 들였다(루카 10,38).
설교 21에서 엑카르트는 “우리가 그분 안에서 신적인 방법으로 태어나기를!"이라는 기도로 끝을 맺었다. 본 설교에서 엑카르트는 우리의 신적인 탄생이라는 주제를 계속해서 다룬다. 본 설교에서 우리는 사람이 됨과 동시에 하느님이 된다는 것이 무엇과 같은지를 살펴보았다. 사람이 됨과 동시에 하느님이 된다는 것은 다음을 의미한다: 우리가 진실로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났음을 믿고 우리 자신의 신성을 믿기만 한다면, 우리는 훨씬 더 아름다운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고귀한 삶이고 이것이야말로 복스러운 삶이다. 누구든지 저마다 자신에게 마음을 쓰는 만큼 이웃에게도 마음을 쓴다면, 자기가 지난 사랑이 순수하고 맑고 단순하여 선과 하느님만을 겨냥한다면. 이것이야말로 고귀한 삶이 아니겠는가? 그러한 삶이라면 다른 장소와 다른 시간에도 손을 뻗을 것이다. 그러한 삶은 모든 장벽을 뚫고 나가서, 성도들의 사람과 신비적인 공동체를 경축할 것이다. 바로 이 성도들의 사귐과 신비적인 공동체 안에서 아름다움이 풍부하게 공유될 것이다. 이제까지 전 인류가 행했던 모든 덕이 완전히 여러분의 것이 될 것이다. 마치 여러분이 몸소 그 모든 덕을 행하기라도 했다는 듯이 말이다. 그러한 삶 속에서 우리는 아들이 그랬듯이 사랑과 성령을 몸소 낳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지녀야 할 사랑이 바로 성령이다. 이렇게 하는 가운데 우리는 하느님도 낳을 것이다. 왜냐하면 엑카르트는 “하느님은 사랑이다 라고 말할 뿐 아니라 “사랑이 하느님이다”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가장 순수하고 가장 공평한 차원의 사량은 다름 아닌 하느님이다. 엑카르트는 수많은 영성신학자들과 달리 피조물을 사랑하는 것과 하느님을 사귀는 것을 이분법적으로 구별하지 않는다. 사랑의 차이는 우리 안에 있을 뿐이다. 우리의 사랑이 진실로 버림과 그대로 둠의 사랑이라면 벗과 피조물을 향한 모든 사랑의 행위는 어느 정도 성령을 마시는 것이다. 사랑할 마음이 일어나는 모든 순간은 성령이 일으키는 순간이다. 모든 사랑의 순간은 하느님이 불어넣은 순간이라고 엑카르트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4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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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성 프란치스코의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
1“당신은 기적을 일으키시는”
거룩하시고 유일하신 주 “하느님이시나이다”(시편 76,15).
2당신은 힘세시나이다.
당신은 위대하시나이다(참조: 시편 85,10).
당신은 지극히 높으시나이다.
3당신은 전능하시나이다.
당신은 “거룩하신 아버지”(요한 17,11), 하늘과 땅의 임금님이시나이다(참조: 마태 11,25).
4당신은 삼위이고 한 분이시오며 신들의 주 하느님이시나이다(참조: 시편 135,2).
5당신은 선(善)이시고 모든 선이시며 으뜸선이시고
6살아 계시며 참되신 주 하느님이시나이다(참조: 1테살 1,9).
7당신은 지혜이시나이다.
당신은 겸손이시나이다.
당신은 인내이시나이다(참조: 시편 70,5).
8당신은 아름다움이시나이다.
당신은 안전함이시나이다.
당신은 고요이시나이다.
9당신은 즐거움이시며 기쁨이시나이다(참조: 시편 50,10).
당신은 우리의 희망이시나이다.
당신은 정의(正義)이시며 절제이시나이다.
10당신은 우리의 흡족한 온갖 보화이시나이다.
11당신은 아름다움이시나이다.
당신은 온화이시나이다. 12“당신은 보호자이시나이다”(시편 30,5).
당신은 수호자요 방어자이시나이다.
13당신은 힘이시나이다(참조: 시편 42,2).
당신은 피난처이시나이다.
당신은 우리의 희망이시나이다.
14당신은 우리의 믿음이시나이다.
15당신은 우리의 모든 감미로움이시나이다.
16당신은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시나이다.
17위대하시고 감탄하올 주님,
전능하신 하느님, 자비로운 구원자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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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05.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램프의 요정 지니가 나타나서, “100억과 너의 인생 30년을 바꾸자.”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선 저는 무조건 받지 않을 것입니다. 100억을 받고 30년을 빼앗긴다면 거의 90세 가까이 되니 당연히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20대 청년들은 어떨까요? 30년 동안 100억을 도저히 모을 수 없으니 기꺼이 바꾸겠다고 하는 청년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50대가 되어서 남은 인생을 펑펑 놀면서 마음껏 살겠다고 말이지요.
어느 신문에서 본 설문 조사가 생각납니다. 고등학생 대상으로 10억 원을 준다면 1년간 감옥에 갇혀 있을 수 있겠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얼마나 감옥에 갇혀 있을 수 있다고 말했을까? 자그마치 55%가 감옥에 갈 수 있다고 응답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돈을 시간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 즉 집값, 취업 등으로 계속 어려움을 겪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돈이 최고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램프의 요정 지니에 의해 인생 30년을 팔아 100억을 벌었지만, 기억에 없는 젊음을 두고두고 후회하지 않을까요?
지금 자기가 생각하는 중요하다는 것, 그것이 정말로 후회를 남기지 않을 것인지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돈 때문에, 명예 때문에, 그밖에 세상에서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들로 인해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을 잃어버린다면 커다란 후회를 남기게 될 것입니다. 큰 기쁨과 행복을 상실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단식이나 전통적인 기도 관습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먹고 마시며 지내는 것을 문제 삼습니다. 당시 경건한 유다인에게 단식은 중요한 종교 행위였기 때문에, 예수님 공동체의 자유로운 모습은 의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습니다. 그 종교 행위는 자기만족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그 하느님이 바로 앞에 있는데도, 따르지 않는다면서 옳지 않게 보는 모습이 어떻게 바르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신랑’으로 제자들을 ‘혼인 잔치의 손님’으로 비유하시지요. 혼인 잔치가 기쁨의 자리인 것처럼, 메시아이신 예수님과 함께 있는 동안은 단식이 아니라 기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에는 제자들도 단식할 것이라 하십니다. 바로 주님이 중심이라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새 옷 조각과 헌 옷의 비유, 새 포도주와 헌 부대의 비유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가져오신 새로운 시대와 새로운 하느님 나라의 질서는 단순히 옛 제도와 율법적 틀 안에 끼워 넣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 안에서 주님의 뜻을 이 세상에 철저하게 실천하는 것입니다. 진정 주님과 함께하면서 참 행복의 길에 들어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경쟁의 라틴어 어원 ‘competere’는 ‘함께 추구하다’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리카르도 페트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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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05.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박윤식 [big-llight]
■ 참된 신앙은 교리 그 자체보다 그 동기를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 제자들은 먹기만 하는군요.”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단식은 음식을 끊는 행위이다.
먹기 싫어 그러는 게 아닌 먹고 싶어도 참는 거다.
그러므로 ‘동기’가 중요하다.
그래야만 인내가 생긴다.
예수님은 ‘신랑을 빼앗겼을 때 단식하라.’신다.
신랑은 예수님 자신이니까.
당신의 십자가 수난에 동참하려면 단식부터 해야 한단다.
이처럼 진정한 변화를 느낄 때, 그분의 이끄심을 체험한다.
예수님은 단식보다 단식의 동기를 더 중히 여기라신다.
단식은 절제를 위한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라는 말씀일 게다.
비단 그게 단식뿐이랴?
모든 게 그 원인을 알면 활동은 훨씬 자유로워진다.
그게 정녕 힘이 되고 용기를 주는 것일 게다.
단식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해야겠다.
예로부터 많은 종교가 음식에 대해 쾌나 까다로웠다.
지금도 ‘못 먹는 음식’을 규정한 종교가 많이 있을 정도이니까.
그러나 사실 따지고 보면, 음식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닐 게다.
다만 그것을 먹는 이에게는 다소 책임이 있으리라.
어쩌면 음식의 절제는 보통은 자유로움을 준단다.
그만큼 매사가 기쁜 삶으로 바뀐단다.
본능을 절제함으로써, 예수님 수난에도 동참할 수 있다.
사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경건한 이들이었다.
다만 율법에 충실하고 신앙심이 깊었지만,
하느님의 옛 약속이 새로워지고 있음을 깨닫지를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요한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과 기도를 하곤 하는데,
당신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군요.”라며 따졌다.
신약의 주인인 예수님의 현존을 기쁨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율법의 규정은 예수님으로 완성될 게다.
그렇지만 그들은 율법을 엄격히 지키기에만 몰두했지 하느님 구원계획을 몰랐다.
누가 뭐래도 세상에 활기를 불어넣는 참된 신앙은?
이웃 섬기는 모습,
반복되는 일상을 늘 새로운 마음으로 맞는 그 자세일 게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모든 것이 새로워진다.
나의 믿음과 생활이 그리스도 한 분
을 향하여 있고, 그분께서 우리의 중심에 있는지를 살펴보자.
이렇게 우리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 주님 말씀으로 성숙되는지를,
정녕 진지하게 살펴야 한다.
어쩌면 자신만의 생각을 고집하며 완고하게 사는 모습인지를
자주 살펴보는 삶에서 믿음의 성숙함이 드러날 게다.
우리의 의무적인 단식은 재의 수요일과 성금요일이다.
물론 개인적인 단식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사실 예수님은 단식과 그 동기도 중히 여기셨다.
그렇지만 단식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라는 가르침이다.
먹는 자유를 절제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돌아보라는 거다.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고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오로지 당신 계명을 지키려면 주위의 어떠한 구속과 눈치 볼 것도 없이
스스로를 감당해 낼 수 있는 새 부대가 되어야 한단다.
새 계명을 위한 새 부대가 된 이는,
모든 계명을 지키면서도 그 자체만으로 행복한 사람일 게다.
신앙생활의 모든 활동도 마찬가지이다.
사실 단식은 주님 섬기는 한 방법일 뿐 그 이상은 아니다.
단식 그 자체에만 매달려,
본질을 망각한 어리석은 이가 되지 않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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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추가 안내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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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05.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김태훈 리푸죠 신부님.
제가 있는 수도회에는 수련 수사들이 저녁 식사 뒤에 성모상 앞뜰을 거닐며 묵주 기도를 함께 바치는 전통이 있습니다.
참 아름다운 전통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수련 수사가 제게 물었습니다. “왜 묵주 기도를 걸어 다니면서 해야 하나요?”
그 순간 저는 한 대 맞은 듯이 멍해졌고 대답을 못 하였습니다.
그제야 묵주 기도를 걸으면서 하는 이유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관습을 따를 때 그 행동의 목적과 이유를 묻지 않은 채 ‘관습이니까’라며 무작정 따를 때가 많습니다.
게다가 그러한 관습을 따르지 않는 사람을 비판하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단식하지 않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판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을 할 수야 없지 않으냐?”(루카 5,34)라고 말씀하십니다.
단식은 기도와 자선과 함께 유다인들의 중요한 신심 행위였습니다.
이 행위들로 유다인들은 경건함과 거룩함을 추구하였습니다.
거룩함은 하느님의 속성이기에 결국 이 행위들의 근본 목적은 하느님을 닮고 그분과 함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신 지금은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백성들 가운데 현존하고 계신 새로운 때입니다.
또한 혼인 잔치의 비유로 말씀하시듯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 곁에 함께하시는 기쁜 때입니다.
단식의 근본 목적이 하느님을 닮고 그분과 함께 있는 것이라면 마땅히 지금은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것이 그 목적을 이루는 것이며 참된 거룩함입니다.
언제나 기준은 하느님입니다. 깨어 있지 않고, 우리가 하는 일이 근본적으로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지 깨닫지 못할 때 우리 자신도 모르게 길을 잃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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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05.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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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8&id=2116401&menu=4770
위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리스트에서 “서하”를 찿아 들어가세요.
게재가 안되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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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05.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새 것과 옛 것이 함께할 수 없음을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무엇이 더 좋고 무엇이 더 나쁜
즉 새 것이 좋고 옛 것은 나쁘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오늘 복음 마지막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누군가에게는 옛 것이 더 좋기 때문입니다.
둘의 사이는 좋고 나쁨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서로 다름으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새 것과 옛 것이 함께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끊임없이 새 것이 생기고
그렇게 생겼던 것은 자연스럽게 옛 것이 됩니다.
그래서 사실 어디부터가 옛 것이고
어디까지가 새 것이라고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좋고 나쁨을 생각한다면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됩니다.
하나를 선택한다는 것은
다른 하나를 버린다는 것이고
결국 둘이 함께할 수 없습니다.
이 모습이 우리가 흔히 일치라고 말하면서
하는 행동입니다.
함께하기 위해서는 같아야하고
그것을 위해서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선택되지 않은 다른 하나는
함께한다기보다는 무시당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옛 방식에 익숙한 사람들은
새 방식이 익숙하지 않아서 불편합니다.
그러다보니 옛 방식을 고집하게 되고
그 방식에 머물기 위해서 때로는 힘을 쓰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함께할 수 없음은
그러한 일치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모두가 똑같을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함께 살다보니
어느 정도의 일정한 규칙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 그것은 일정한 규칙을 넘어
모든 상황에서 똑같이 행동할 것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서로 다르다는 것이 인정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힘이 작용합니다.
우리는 그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너는 너의 방식을 살고
나는 나의 방식을 살 수 있습니다.
각자의 방식을 살면서도
충분히 함께살 수 있습니다.
즉 함께한다는 것은
모든 것이 똑같아야함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나의 방식과 너의 방식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는지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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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05.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5,33-39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꼰대’같은 모습을 나무라십니다. 자기들만 옳고 다른 이들은 틀렸다고 생각하는 독단, 자기들이 정한 기준에 따라 의로움과 거룩함을 함부로 판단하려 드는 교만이 문제였지요. 그런 모습이 예수님과 제자들을 싸잡아 비난하는 말에서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 이는 아주 교활한 거짓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엄격주의에 입각한 요한의 제자들이나 바리사이들처럼 일주일에 두 번 이상 자주 단식한 것은 아니지만, 유다인으로써 율법에 따라 지켜야 할 단식일을 어기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식을 자주 하지 않는 것이 마치 큰 잘못인 것처럼 호도합니다. 또한 늘 시끄럽게 몰려다니며 죄인들과 어울려 흥청망청 먹고 마시기만 하는 무절제한 사람으로 몰아가지요. 실상 예수님의 제자들은 시도 때도 없이 예수님을 찾아오는 군중들을 상대하느라, 매일 먼 길을 걸어다니며 사람들을 찾아다니시는 예수님을 따라 다니느라 제대로 끼니를 챙겨 먹을 시간 조차 없었는데도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 앞에서 제자들 편을 드시며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으십니다. 단식은 그저 ‘자주’ 한다고 해서 좋은 게 아니지요. 언제, 왜 해야하는지를 알면서 그 뜻과 의미를 실현하기 위해 해야 진정한 단식인 겁니다. 우리가 단식을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단식하신 것처럼, 하느님 이외의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세속적인 욕망을 모두 내려놓고 내 마음을 하느님과 그분 뜻으로 가득 채우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즉 단식은 하느님과 더 긴밀하게 일치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그 점을 망각하고 단식이라는 ‘행위’ 자체에만 집착하다보면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처럼 단식하는 ‘횟수’만 신경쓰게 됩니다. 그리고 그 숫자로 자기 의로움을 과시하며, 다른 이들을 심판하고 단죄하려는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하느님과 가까워지기 위해 한 단식 때문에 오히려 하느님과 그분 뜻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당신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의 시대가 시작되었는데, 그래서 굳이 단식이라는 어렵고 간접적인 수단을 통하지 않아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름으로써 얼마든지 하느님과 일치될 수 있는데, 왜 율법을 통해서 하느님을 흐릿하게만 보는 구약의 틀에 갇혀있느냐는 것입니다. 계속 그런 상태로 머물러 있으면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신앙생활 전체가 무너지고 말지요. 그런 점은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도록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라는 분명하고도 확실한 방법을 알려주셨는데, 십계명을 어기지 않는 것에만, 죄를 짓지 않는 것에만 집착한다면 말이지요. 그러니 이제 계명 자체에만 얽매여 주눅든 채 살지 말고, 사랑의 계명을 적극적으로 실천하여 그 기쁨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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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1.”은 박 베드로 형제님이 보내주신 자료입니다.
## 공유하신 분께서 강론글이나 묵상글 수합과정에서 과년도의 자료를
사용하신 것도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 1. ================================================
♣복음말씀의 향기♣ No4337
9월5일 [연중 제 22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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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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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서울대교구 왕원동 대건안드레아(목동성당 보좌)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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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결국 ‘내 생각만 옳다! 내 방식이 최고다! 우리가 제일 앞서 있다!’는 우월의식, 선민의식이 그들의 가장 큰 문제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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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중서간(獄中書簡)!
듣기만 들어도 가슴이 싸하게 아려오고, 코끝이 찡해지는 표현입니다.
오래 전 함께 살았던 문제아들 가운데, 이제는 성인이 , 아무리 노력해도 인생이 잘 안 풀린 친구들이 가끔씩 저에게 옥중서간을 보내줍니다.
요즘 보기 드문 손편지입니다.
한자 한자 정성을 다해 꾹꾹 눌러썼습니다. 달필 중에 달필입니다. 교도소 안에 문예반도 있는지, 내용도 수준이 상당합니다. 자신의 지난 부족했던 삶에 대한 회한과 앞으로 남은 인생에 대한 굳은 결심과 각오가 생생하게 느껴지며 큰 감동을 줍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옥중서한을 쓰셨습니다. 대체로 에페소서, 필립피서, 필레몬서, 콜로새서, 이 네 개의 편지를 옥중서한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만, 정말로 바오로 사도가 직접 쓰셨을까? 하는 친저성(親書性)에 논란이 있지만, 옥중서한 한편 한편은 참으로 매력적인 편지들입니다.
모든 것이 제한된 깊은 감옥에서의 큰 고통 속에서도, 담장 너머 그리스도 신자들 신앙의 성장을 위해 끊임없이 격려하고 고무하는 교회 지도자의 모습들에서 큰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옥중서한이라고 분류하고 추정하는 근거가 되는 성경 구절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 안에 수인이 된 나 바오로는 권고합니다.”(에페소서 4장 1절),
“내가 갇혀 있는 것이 그리스도 때문이라는 사실이 온 부대와 그 밖의 모든 이들에게도 분명히 알려졌으며…”(필리피서 1장 13절)
“그리스도 예수 때문에 갇혀 있는 나 바오로와 교우 디모테오가 우리의 사랑하는 협력자 필레몬 그대와…”(필레몬서 1장 1절)
“여러분은 갇혀 있는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 은총이 여러분과 함께 있기를 빕니다.”
(콜로새서 4장 18절)
콜로새는 소아시아 지역 리쿠스 계곡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이 지역은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간선도로에서 30킬로 이상 떨어져 있는 오지였기에, 긴요한 용무가 없는 한, 사람들은 이곳을 지나쳐갔습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콜로새를 한번도 방문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오지 콜로새에도 주님의 복음이 전파되었고, 그리스도교 교회가 설립되었습니다. 지리적으로 오지인데다, 에페소 교회와도 꽤 거리가 있었던만큼, 이 교회 그리스도교인들의 신앙과 삶에 약간의 고립과 문제가 있었습니다.
초기 콜로새 교회가 안고 있던 문제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이단적 요소였습니다. 아무래도 초기 교회다보니 그리스도교 신앙과 유다교 신앙, 그리스 철학이 뒤죽박죽된 일종의 종교 혼합주의 성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단을 선포하는 지도자들의 가르침 중에 크게 그릇된 것은 자기들만이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단언했습니다. 자신들은 다른 지역 그리스도교 교회 신자들보다 예수 그리스도와 구원을 훨씬 더 깊이있게 이해하고 있다고 자부했습니다.
결국 ‘내 생각만 옳다! 내 방식이 최고다! 우리가 제일 앞서 있다!’는 우월의식, 선민의식이 그들의 가장 큰 문제점이었습니다. 더 큰 위험성은 그들이 예수님의 신성을 배척한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콜로새 교회 공동체를 위협하는 이단적 교의, 특히 종교 혼합주의, 그리고 그릇된 사고방식의 위험성을 지적합니다.
오늘 우리 한국 교회 주변에서도 많은 이단들과 이단적 가르침들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또한 한국 사회 안에서도 백성들을 큰 혼란 속으로 몰고 가는 그릇된 가르침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와 사회의 지도층 인사들의 균형 잡힌 가르침이 절실히 필요한 순간입니다. 방황하는 백성들이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구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명확한 가이드 라인을 제공하는 것, 많이 배우고, 많이 연구하고, 많이 기도한 사람들에게 지워지는 중요한 책무입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한 콜로새서 구절은 ‘그리스도 찬가’라고 불립니다. 우주의 창조주이자 우주 구원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장엄하게 찬미하고 기리는 노래입니다. 그리스도 찬가에서는 예수님을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 ‘모든 피조물의 맏이’로 선포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전체 자연 질서 위에 계신 분이시며, 만물은 그분 안에서, 그분을 통해서 창조되었음을 강조합니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 안에 온갖 충만함이 머무르게 하셨음을 선언합니다. ‘온갖 충만함’은 하느님의 완전성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의 완전성이 인간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내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결국 이 장엄한 찬가는 역사 속 인물인 나자렛 예수님을 하느님의 육화하신 아드님으로 선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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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어차피 우리네 삶이란 것은 ‘놓아버리기’의 연속입니다!>
‘burnout’이란 단어가 있습니다. 거듭되는 과로와 스트레스로 인한 심신의 탈진상태를 말합니다. 오늘날 많은 현대인들이 이 burnout 증후군으로 고생하고 있습니다.
신체적, 정서적 극도의 피로감은 무기력증이나 자기혐오, 직무 거부로 연결됩니다. 마치 연료가 다 타버린 것처럼 갑자기 일할 의욕을 잃고 업무에 적응할 수 없게 되는 현상입니다.
이럴 때 중요한 것이 ‘한 걸음 옆으로 비켜서기’입니다. 때로 죽도록 집착하고 갖은 애를 쓰며 견뎌내는 대신, 그냥 한 걸음 ‘쓱’ 옆으로 비켜서는 것이 의외의 좋은 결과를 가져다줍니다.
때로 옆으로 비켜선다는 것, 놓아버린다는 것, 참으로 자존심 상하는 일이며, 어려운 일이지만 어차피 우리네 삶이란 것은 ‘놓아버리기’의 연속입니다. 일, 명예, 돈, 사람, 관계, 욕심, 자리...
사실 우리가 그토록 목숨을 걸고, 또 절대적인 것이라고 여기던 것들도 사실 그리 오랜 세월 지나지 않아 상대적이란 것을 깨닫게 됩니다.
진정한 새로움을 발견하고 싶다면, 인생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기를 원한다면 잔뜩 움켜쥐고 있는 것을 놓아버려야만 합니다. 한 걸음 옆으로 비켜섬을 통해 우리는 아직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미지의 세계로 여행을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새로움 중의 새로움이신 예수님, 너무나 ‘특별하신’ 예수님이시기에 그분을 제대로 받아들이기 위한다면 가급적 많이 비워내야만 합니다.
기존의 인생관, 과거에 큰 의미를 부여했던 것들, 절대적이라고 여겼던 인간적 가치들, 변화무쌍한, 그래서 세월의 흐름 앞에 어쩔 수 없이 빛을 바래가는 그 모든 것들로부터 나를 이탈시키면 시킬수록 새 포도주이신 예수님께서 더 많이 우리에게 오실 것입니다.
결국 새 포도주이신 예수님을 더 크게 받아들이기를 원한다면 지금보다 자세를 훨씬 더 많이 낮춰야만 합니다. 겸손의 덕으로 우리의 온 몸과 마음을 무장해야 할 것입니다.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루카 5, 3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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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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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는 제사인가, 잔치인가?>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따져 묻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 그들의 눈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율법을 어기는 방종한 이들처럼 보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을 할 수야 없지 않으냐?” 예수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이 바로 인류가 그토록 기다려온 신랑, 즉 메시아와 함께하는 기쁨의 혼인 잔치라고 선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바리사이들은 이 기쁨에 동참하지 못하고, 차가운 율법의 잣대만 들이대고 있었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잔치의 본질’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모든 잔치의 본질은 ‘기쁨’과 ‘사랑의 나눔’입니다. 잔치의 모든 규칙과 예절은 바로 이 기쁨과 사랑을 더 풍성하게 하기 위한 도구일 뿐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가톨릭 교회의 가장 큰 잔치인 ‘미사 성제’는 어떻습니까? 혹시 우리도 잔치의 본질인 기쁨과 사랑은 잃어버린 채, 차가운 규칙과 형식에만 갇혀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강론은 우리 전례가 왜 점점 형식화되고 유연성을 잃어가는지에 대해 묵상하고자 합니다.
17세기 러시아 정교회에서는, 총대주교 니콘이 당시 오역과 오류가 많았던 전례서를 그리스 원문에 가깝게 개혁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개혁의 내용은 대부분 아주 사소한 것들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십자성호를 그을 때 손가락 두 개를 쓸 것인가, 세 개를 쓸 것인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수백 년간 이어져 온 ‘옛 예법’만이 유일한 진리라고 믿었던 수많은 신자들, 이른바 ‘옛 신자들(Old Believers)’은 이 개혁을 악마의 소행으로 규정하고 격렬하게 저항했습니다. 그들에게 전례의 형식은 사랑과 일치라는 목적보다 더 중요했습니다. 결국 이 사소한 규칙의 차이는 교회의 대분열을 낳았고, 수많은 옛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시베리아로 도망가거나, 심지어는 ‘배교하느니 죽겠다’며 마을 전체가 불속으로 뛰어들어 집단 자살하는 끔찍한 비극을 맞이했습니다.
이 비극은 오늘 우리 본당 안에서도 작은 모습으로 재현될 수 있습니다. 작은 실수를 참아내지 못해, 아예 신자를 냉담 시키는 경우도 발생합니다. 대부분 전례를 ‘잔치’가 아닌 ‘제사’로 보는 것에서 기인합니다. 제사에서는 실수하면 안 되지만, 잔치는 기쁨이 목적이기에 어느 정도 실수는 품어줄 수 있습니다.
프랑스의 신학자 장 바니에(Jean Vanier)가 세운 장애인 공동체 ‘라르슈(L'Arche)’의 이야기는, 사랑이 어떻게 딱딱한 전례 규칙을 생명의 예식으로 바꾸는지를 보여주는 감동적인 실화입니다.
라르슈 공동체의 미사는 종종 소란스럽고 예측 불가능합니다. 발달 장애를 가진 한 형제가 갑자기 제대 위로 올라가 춤을 추기도 하고, 누군가는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기도 합니다. 엄격한 전례 규칙의 잣대로 보면, 그것은 ‘신성모독’에 가까운 행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장 바니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의 전례는 완벽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살아있습니다. 왜냐하면 이곳에서는 가장 약한 이들이 환대받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완벽한 예식이 아니라, 사랑으로 가득 찬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렇습니다. 바리사이들이 그토록 중요하게 여겼던 율법과 단식 규정들은 ‘낡은 가죽 부대’였습니다. 그것은 옛 계약 아래에서, 하느님께 대한 의무를 다하는 엄숙한 ‘제사’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새 포도주’, 즉 사랑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이 새로운 사랑은 더 이상 낡은 제사의 부대에 담길 수 없었습니다. 새 포도주는 이제 전례가 슬픔의 제사에서 기쁨의 ‘혼인 잔치’로 바뀌었음을 의미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 어머니를 의심하며 겉돌던 시절, 어머니께서 주시던 단팥빵과 흰 우유는 저를 향한 어머니의 사랑을 느끼는 기쁨의 잔치였습니다. 바로 그 기쁨 뒤에 순종이 따라왔습니다. 기쁘지도 않은데, 어떻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순종이 가능하겠습니까? 우리의 전례가 계속 규칙만을 강조하며 이 기쁨을 잃어버린다면, 그 안에서 어떻게 우리가 사랑으로 순종하고 세상으로 파견될 수 있겠습니까?
‘로마의 사도’, ‘기쁨의 성인’이라 불리는 성 필립보 네리(St. Philip Neri, 1515-1595)의 삶이
그 답을 보여줍니다. 그는 종교개혁 이후 딱딱하고 엄격해진 교회의 분위기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미사 전에 사람들을 모아놓고 유쾌한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함께 소풍을 가고, 음악회를 열었습니다. 그는 심지어 미사를 집전하기 직전에 우스갯소리가 담긴 책을 읽으며 웃기도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의 행동이 사제로서의 품위를 떨어뜨린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성인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는 딱딱한 규칙보다, 살아있는 기쁨과 사랑이 하느님께 더 큰 영광을 드린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의 삶은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미사는 우리가 지켜야 할 의무 목록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신랑 예수님과 나누는 가장 친밀하고 기쁜 사랑의 대화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가 신자들과의 미사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아십니까? 여러 교황님들께서 그의 성덕과 로마에서의 영향력을 높이 사 추기경으로 임명하려 하셨습니다. 특히 교황 클레멘스 8세(Pope Clement VIII)는 그를 추기경으로 서임하겠다는 뜻을 여러 차례 전했습니다. 그는 추기경의 붉은 모자(galero)를 가져온 사절 앞에서 그 모자를 공중으로 휙 던지며 “천국, 천국, 저는 천국을 더 좋아합니다!(Paradiso, paradiso, preferisco il paradiso!)”라고 외쳤습니다.
그에게 신자들과의 미사는 바로 이 천국의 혼인 잔치와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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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작년에 와서 ‘안마의자’를 마련했습니다. 지난번에는 리모컨이 안 되어서 바꾸었습니다. 이번에는 리모컨 전원은 들어오는 작동이 안 되었습니다. 서비스 센터에 연락했더니 수리 기사를 보내 준다고 했습니다. 1시에서 3시 사이에 온다고 해서 기다렸습니다. 3시가 넘어도 오지 않기에 기사에게 전화했습니다. 기사는 서비스 센터에 부품이 없어서 못 간다고 연락했다고 합니다. 서비스 센터에서 제게 연락해야 하는데 그 과정이 생략되었습니다. 2시간 기다리면서 생각했습니다. 연락이 제대로 안 된 것이 짜증이 나기도 했고, 서비스 센터에 전화해서 고칠 때까지는 월 비용을 내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시간에 대해 강박관념이 있는 편이라서 다른 일을 하기도 힘들었습니다. 서비스 센터에서는 미안하다는 전화를 했고, 부품이 와서 수리가 될 때까지는 비용을 받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부품이 한국에서 온다고 하니, 오는 대로 수리해 주기로 했습니다.
신앙은 하느님과의 약속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곤경 중에 하느님을 불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땅에서 구해 주셨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약속의 땅으로 갔습니다. 광야에서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을 지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우상을 섬기지 않고, 오직 하느님만을 섬기겠다고 했습니다. 신앙은 하느님과의 약속을 어겼던 이스라엘 백성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성서는 그런 이스라엘 백성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아담은 하느님과의 약속을 어겼고, 선과 악을 아는 나무를 먹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금 송아지를 만들어서 섬겼습니다. 다윗은 충성스러운 부하를 죽음으로 내몰았고, 그의 아내를 탐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지옥까지라도 가겠다고 했던 베드로는 3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십니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셨습니다.
역사의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을까요? 복음을 선포하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은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 하느님의 의로움 드러나는 나라입니다. 세상의 기준과 세상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가 아닙니다. 이 하느님 나라는 명예, 권력, 재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만들어가는 나라입니다. 이 하느님 나라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은 새로운 권위를 지닌 예수님의 말씀과 표징입니다. 안식일을 위해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라는 가르침입니다. 돌아온 아들을 따듯하게 품어주는 자비로운 아버지처럼 우리도 거룩하고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는 가르침입니다. 죄를 범한 여인에게 돌을 던지기 전에 나의 가식과 위선을 돌아보라는 가르침입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는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일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우리의 몸이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이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누가 나의 이웃인가를 생각하기보다는 누가 지금 상처받고 있는 이의 이웃인가를 생각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표징을 따라가는 것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어렵습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 의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사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시기를 청합니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십자가를 지고 비참한 모습으로 죽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복음이 되셨습니다. 다락방에 숨어있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두려움과 걱정을 떨쳐버리고 다락방에서 나왔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교회도, 신앙도, 희망도 의미가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부활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소생입니다. 부활은 애벌레가 나비가 되어 높은 하늘을 날아오르듯이, 삶의 변화입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의 변화입니다. 어둠에서 빛으로의 변화입니다. 의혹에서 믿음으로의 변화입니다. 욕망, 시기, 질투, 원망의 삶에서 헌신, 나눔, 용서, 사랑의 삶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습니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변화된 삶을 살고 있다면 우리는 언제나 부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새 술을 새 부대에 담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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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바오로수도회 김태훈 리푸죠 신부님]
제가 있는 수도회에는 수련 수사들이 저녁 식사 뒤에 성모상 앞뜰을 거닐며 묵주 기도를 함께 바치는 전통이 있습니다. 참 아름다운 전통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수련 수사가 제게 물었습니다. “왜 묵주 기도를 걸어 다니면서 해야 하나요?” 그 순간 저는 한 대 맞은 듯이 멍해졌고 대답을 못 하였습니다. 그제야 묵주 기도를 걸으면서 하는 이유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관습을 따를 때 그 행동의 목적과 이유를 묻지 않은 채 ‘관습이니까’라며 무작정 따를 때가 많습니다. 게다가 그러한 관습을 따르지 않는 사람을 비판하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단식하지 않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판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을 할 수야 없지 않으냐?”(루카 5,34)라고 말씀하십니다. 단식은 기도와 자선과 함께 유다인들의 중요한 신심 행위였습니다. 이 행위들로 유다인들은 경건함과 거룩함을 추구하였습니다. 거룩함은 하느님의 속성이기에 결국 이 행위들의 근본 목적은 하느님을 닮고 그분과 함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신 지금은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백성들 가운데 현존하고 계신 새로운 때입니다. 또한 혼인 잔치의 비유로 말씀하시듯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 곁에 함께하시는 기쁜 때입니다. 단식의 근본 목적이 하느님을 닮고 그분과 함께 있는 것이라면 마땅히 지금은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것이 그 목적을 이루는 것이며 참된 거룩함입니다.
언제나 기준은 하느님입니다. 깨어 있지 않고, 우리가 하는 일이 근본적으로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지 깨닫지 못할 때 우리 자신도 모르게 길을 잃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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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5,33-39: 단식의 정신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33절) 이러한 희생과 단식이 하느님 앞에 죄에 대해 속죄하는 경건한 마음으로 하고 이웃을 이해하고 무엇인가 함께 하는 사랑의 정이 있었다면 별문제가 없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 단식하는 의미가 그런 것이다.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완성되지 않는 재는 지키지 않은 것과도 같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34절) 예수께서는 세상에 계시는 동안을 혼인 잔치의 기간으로, 그리고 당신을 신랑으로 비유하신다. 제자들을 손님으로 표현하신 것은 그들이 교회의 구성원이며 잔치의 주관자들이고, 잔칫상에 앉을 이들을 부르는 사자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단식을 할 수 없다.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배불리 먹기 때문이다.(요한 6,53 참조)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35절) 신랑을 빼앗기는 날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서 떠나가신 날이다.
“아무도 새 옷에서 조각을 찢어 내어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36.37절) 형식적인 율법에 매인 사람은 그리스도의 제도를 받아들일 수 없다.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받아들이기 힘들다. 하느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도 항상 새로운 자세로,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가난한 마음, 즉 이전의 내가 아닌 진정한 하느님의 자녀로서 자세를 가지고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한다. 묵은 나라고 하는 낡은 부대에는 하느님의 말씀을 담을 수가 없다. 이제 진정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으로 변화하여 그분의 말씀을 담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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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의 벗이니까요>
루카 5,33-39 (단식 논쟁 - 새 것과 헌 것)
그때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을 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또 비유를 말씀하셨다. “아무도 새 옷에서 조각을 찢어 내어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만 아니라, 새 옷에서 찢어 낸 조각이 헌 옷에 어울리지도 않을 것이다.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한다.”
<당신의 벗이니까요>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을 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루카 5,34)
당신께서 기쁘시니
함께 기쁩니다
당신의 벗이니까요
당신께서 슬프시니
함께 슬픕니다
당신의 벗이니까요
당신께서 활기차시니
함께 활기찹니다
당신의 벗이니까요
당신께서 아프시니
함께 아픕니다
당신의 벗이니까요
당신께서 외치시니
함께 외칩니다
당신의 벗이니까요
당신께서 침묵하시니
함께 침묵합니다
당신의 벗이니까요
당신께서 저항하시니
함께 저항합니다
당신의 벗이니까요
당신께서 순명하시니
함께 순명합니다
당신의 벗이니까요
당신께서 쓰러지시니
함께 쓰러집니다
당신의 벗이니까요
당신께서 일어나시니
함께 일어납니다
당신의 벗이니까요
당신께서 멈추시니
함께 멈춥니다
당신의 벗이니까요
당신께서 나아가시니
함께 나아갑니다
당신의 벗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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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지금은 메시아와 함께 기쁨을 누리는 ‘메시아 시대’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을 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또 비유를 말씀하셨다. ‘아무도 새 옷에서 조각을 찢어 내어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만 아니라, 새 옷에서 찢어 낸 조각이 헌 옷에 어울리지도 않을 것이다.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한다.’"(루카 5,33-39)
1) 바리사이들의 단식은 ‘메시아가 오시기를 기다리면서 참회하는’ 단식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라는 바리사이들의 말은, 메시아를 기다리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의 단식은, 스승의 극기고행을 흉내 낸 단식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회개의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 극기고행을 하는 생활을 했는데, 그의 제자들은 그냥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 따라 한 것입니다. 물론 그들의 단식에도 바리사이들의 단식처럼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참회한다는 뜻이 들어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의 단식에 대해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증언했는데, 그의 제자들은 그 증언을 믿지 않았던 것인가?”라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 가운데 몇 명은 요한의 증언을 받아들여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긴 했는데(요한 1,35-37), 대부분의 제자들은 그 증언을 안 믿고, 그냥 세례자 요한 곁에 머물러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스승의 증언도 안 믿으면서 왜 남아 있었을까?”라고 다시 물을 수도 있는데, 우리 입장에서는 이해가 안 되는 일이지만, 어떻든 그들은 세례자 요한이 죽을 때까지 그냥 그렇게 지냈습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을 할 수야 없지 않으냐?” 라는 말씀은, 메시아가 이미 와 있으니 ‘메시아를 기다리는’ 단식을 하면 안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당신이 메시아라고 암시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암시하신 말씀이기도 하고, 단식이라는 신심 행위 자체는 긍정하신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참여하기 위해서 회개하는 단식을 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이미 부활하셨고 승천하셨기 때문에 더 이상 ‘신랑을 빼앗길 날’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쪽에서 ‘신랑을 떠나는 일’은 자주 생깁니다. 바로 그런 때에 회개하는 단식을 하게 됩니다.
2)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라는 말씀은, ‘메시아 시대’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선언입니다. 율법이 사람들을 지배하던 시대, 즉 구약시대는 메시아 예수님께서 오심으로써 끝났고, 지금은 메시아 시대, 즉 신약시대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는 율법과 상관없이 하느님의 의로움이 나타났습니다. 이는 율법과 예언자들이 증언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오는 하느님의 의로움은 믿는 모든 이를 위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아무 차별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로마 3,21-24)
“사실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로마 3,28) 바오로 사도의 말은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뜻은 아니고,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충실하게 살면” 구원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만 잘 지키면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낡은 시대의 낡은 생각일 뿐입니다. 사실 구약시대가 율법을 잘 지키는 것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쳤던 시대는 아니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계명과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계명은, 시대를 초월해서 ‘가장 큰 계명’이고,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근본정신입니다.(마태 22,37-40)>
3)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 ‘예루살렘 사도 회의’는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기 위해서 노력한 일들 가운데에서 가장 대표적인 일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왜 우리 조상들도 우리도 다 감당할 수 없던 멍에를 형제들의 목에 씌워 하느님을 시험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주 예수님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믿습니다."(사도 15,10-11) 사도들은, 몇 가지 필수 사항 외에는, ‘할례’처럼 사람들을 억압하는 멍에로 작용했던 구약시대 율법들을 모두 폐지하기로 결정했습니다.(사도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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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불을 위하여 등잔이 있다>
새것과 헌 것은 충돌하게 마련입니다. 헌 것이 다 나쁜 것도 아니고 새것이 다 좋은 것만도 아닙니다. 그것이 어떻게 쓰이느냐가 중요합니다.
‘등잔을 위하여 불이 있지 않고 불을 위하여 등잔이 필요한 이치’입니다. 단식은 슬픈 일이 있어서, 뜻이 있어서 합니다. 슬픈 일이 없는데, 오히려 기뻐해야 할 날에 단식을 하는 것은 그 의미를 잃어버립니다. 단식은 단순히 밥을 굶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단식을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단식을 하셨듯이 하느님으로 가득 찬 나머지 하느님 외에는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기 위해 세상적인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느님으로 채울 수 있을 만큼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합니다. 단식은 하느님께로 가는 방법의 하나일 뿐 목적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차지하도록 준비시켜주고 함께 그 길을 걸어가는 수단입니다. 수단을 목적으로 정당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루카5,37-38)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자신들의 전통과 아집, 지식 때문에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하신 말씀입니다. 묵은 것은 익숙한 것이기에 편안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편안함이 우리를 마비시키기도 합니다.
과거의 경험과 지식에 안주하여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마치 내 것이 전부인양 생각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묵은 것이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새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는 항상 준비되어있어야 합니다.
나이 든 사람들이 쉽게 노여움을 타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여러 이유가 있지만, 자신이 경험한 삶의 경륜과 지식이 최고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말에 동조하고 아첨하는 사람만 좋아하는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기도를 많이 하고 오래 단식한다는 이유로 스스로 성스럽다고 믿고 있지만 거룩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찾지 않고 자기 자신만을 찾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은총과 하느님의 뜻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거룩한 체하지 않았고, 하느님의 부름을 받고 성령으로 가득 차 있어서 거룩했습니다.
사목자들이 구교신자들이 많은 지역에서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그곳에는 성직자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남다르기도 하지만 아주 고집스런 분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어느 신부도 알고, 어느 수녀도 알고, 누구는 예전에 어떻게 했는데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있다는 등 말도 많고 아는 것도 많은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일수록 정작 본인은 새영세자만도 못한 신심을 지니고 있고 자신의 틀 안에 갇혀서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의 경륜을 보아서는 모두를 품을 것 같은데 그 속이 밴댕이요, 좁쌀입니다.
우리는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의 삶과 이후의 삶은 분명히 달라야 합니다. 따라서 주님의 말씀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도 배려하면서 믿음의 쇄신을 이루어야 합니다.
성 아우구스띠노는 어머님께 말했습니다. “여인이여! 당신이 전에 부르던 아우구스띠노는 이미 죽었고, 지금의 나는 그리스도님과 함께 사는 아우구스띠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참 변화라는 것은 영적인 몸으로 변하는 것이고 그리스도님의 수난의 모습을 닮는 것이요, 영광으로 변하는 것입니다”(성 아타나시오).
새로운 가르침은 새로운 틀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모든 새로운 가르침은 “다시 근본으로 돌아가는 가르침”입니다. 시련과 역경, 모든 혼돈 속에서 다시금 주님을 삶의 중심에 모실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밥을 굶기 위한 단식을 하지 말고 근본을 회복하는 단식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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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양 요셉 신부님]
<일신 일일신 우일신(日新日日新又日新)>
개구리가 좋아하는 온도는 23℃ 정도라고 합니다. 그 정도의 온도에서 개구리는 가장 활발하게 잘 움직이지요. 그런데 온도를 23℃ 에 맞춰놓고 불을 서서히 달구면 데워지는 물에서 개구리는 나오려고 하지 않고 발버둥을 치다가 죽어버린다고 합니다.
푹 삶아져 죽을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는다는 개구리 이야기는 자기의 것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나가는 지혜도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 같습니다.
자기의 지금까지의 경험과 지식에 안주해 버리면 발전은 있을 수가 없지요. 어떻게 보면 그것은 죽음의 길인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대표적인 식자층이 오늘 복음에 나오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입니다. 이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듣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했고, 메시아의 도래 시기를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였습니다. 그들은 이제 곧 메시아가 오실 것이라는 확신에 찬 삶을 살았지요. 그런데 정작 예수님이 오셨을 때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수천 년 동안 기다려온 메시아였지만 그들이 기다려온 메시아는 하느님의 뜻 안에서의 메시아가 아니라 그들만의 관습과 경험과 지식 안에서의 메시아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것을 벗어나지 못했지요.
오늘도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과 단식에 대한 논쟁을 벌이고 있습니다."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합니까?" (루카 5,33)
단식하지 않는다고 따지는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들어 설명하시고 당신이 메시아이심을 다시 한번 드러내 보이십니다.
즉, 신랑인 당신이 오셨고 신랑의 친구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하시지요. 그러나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자신들의 전통과 아집과 지식 때문에 거기에서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오히려 자기들 고집에 더 사로잡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새 옷에서 조각을 찢어 내어 헌 옷을 깁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새 술을 헌 가죽 부대에 담는 사람도 없다." (루카 5,36-37)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옛 것만을 고집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질책하시지요. 그렇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제일 조심해야 될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과거의 경험과 지식에 안주하여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마치 내 것이 전부인양 이웃을 판단하고 인정하지 않는 것, 이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나이 든 사람들이 쉽게 노여움을 타는 이유가 그것이지요. 자신의 말에 동조하고 아첨하는 사람만 좋아하는 함정에 빠질 수 있는 것도 그런 사람들이 지닐 수 있는 한계입니다.
우리는 자꾸 새롭게 발전해 나가야 합니다. 발전하지 않으면 퇴보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 계신 신자분들 중에도 모태에서부터 지금까지 신앙 생활을 해 오신 분도 계실 터이고 영세 받은 지 벌써 십 년, 이십 년이 되는 분들도 많이 계실 것입니다. 연륜이 깊은 분일수록 정말 한 해 한 해 새롭게 발전해 가고 있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래 된 본당에 가보면 아주 고집스런 신자분들이 있습니다. 어느 신부도 알고, 어느 수녀도 알고, 누구는 예전에 어떻게 했는데 주교가 되었다며 말도 많고 아는 것도 많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일수록 정작 본인은 새 영세자만도 못한 신심을 가지고 있고 자신의 범주를 벗어나는 것은 결코 포용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기가 일쑤입니다.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장할 수 없습니다.
며칠 전에 한 음식점에 갈 일이 있었는데 저는 나오는 음식을 보고 ‘음식을 이렇게도 만들 수가 있구나!’ 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여러 가지 다양한 음식들이 나왔는데 재료는 보통 음식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모양은 전혀 달랐습니다.
그 예로 한 가지만 말씀드려 본다면 이렇습니다. 하얀 큰 접시에 게 요리가 나왔습니다. 게 요리라고 할 것도 없는, 튀겨서 통째로 먹는 작은 게가 식사하는 인원수대로 나오는 요리였습니다.
그런데 접시 위의 모습이 새로웠습니다. 하얀 접시 위쪽에 레몬 소스로 동그랗게 달 모양을 그려 넣고 아래쪽에는 분말 녹차로 지평선을 그렸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게 4마리를 이렇게 저렇게 움직이는 모습으로 다양하게 연출해 놓았는데 맛을 보기 전에 눈부터 먼저 즐거워지는 것이 여간 새롭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아마 보통 식당에 가면 이런 게는 접시 가득 튀겨서 놓고 마음껏 먹으라고 내놓았을 겁니다. 여기서는 겨우 4마리를 내 놓았을 뿐인데도 기억에 아주 선명하게 남을 정도로 산뜻한 요리가 되었습니다. 이 요리들이 저에게는 아주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자꾸 생각하고 노력하면 발전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지요.
이는 저도 염두에 둘 일입니다. 똑같은 미사를 드려도, 똑같은 강론을 해도, 똑같은 레지오 훈화를 해도 자꾸 발전하는 모습으로 가야 합니다.
끊임없이 생각하고 노력하는 사람은 발전하게 되어 있지요. 그러나 매번 ‘그게 그거지.’하는 마음으로 구태의연하게 제자리에 서 있는 사람에게는 발전이란 있을 리 없습니다.
더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저앉아 있으면 하느님께 나아가는데 별 도움이 안될 것입니다. 사람을 성장시키고 변화시키는 것은 끊임없이 배움의 기회를 갖는 것입니다.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익히고 알아나가야 합니다. 끊임없이 배움의 기회를 넓히고 끊임없이 새롭게 다가갈 수 있도록 노력할 때 우리는 관습과 전통, 또 과거의 지식에 안주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오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그들만의 중심 사고에서 또 그들만의 과거 경험과 지식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려고 했다가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받아들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어이없는 짓을 저지르고 말았지요. 끊임없이 배우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며 남의 입장을 배려할 때 나의 성장도 함께 동반되어 보다 깊이 있는 신앙 생활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나 중심의 세계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마음으로부터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는 노력은 하느님께 나아가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혹시라도 나만의 세계를 구축해 놓고 이웃에게는 쉽게 열지 않는 모습이 나에게 있다면 그것은 퇴보라는 것을 빨리 깨닫고 바꾸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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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유다 사회는 단식과 더불어 자선과 기도를 통하여 일상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준비를 하였지요. 늘 같은 행위를 반복하면서도 하느님을 만나 뵙고자 하는 마음은 새로움으로 가득 찼던 것이 유다 사회의 일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다 사회는 왜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데 그렇게 완고하고 폐쇄적이었을까요? 누구보다 하느님을 갈망하면서, 왜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데는 그렇게나 더딘 모습을 보여 주었을까요?
유다 사회를 떠나 가만히 우리네 삶으로 시선을 옮겨 와 봅니다. 습관이 되어 편한 하루하루의 삶, 굳이 바꾸지 않아도 무리 없는 삶의 방식들, 애써 찾지 않아도 배부를 수 있는 여유. 이 모든 것에 익숙해져 있는, 어쩌면 더 이상 세상이 바뀌지 않기를 바라는 자기중심적 사고와 실천들.
그 속에서 바라고 기다리는 새로움은 실은 묵고 묵은, 더 이상 낡을 수 없을 만큼 닳고 닳아 버린 골동품이 된 것이겠지요. 하느님을 기다린다지만, 실은 케케묵은 제 욕망의 민낯을 기다리는 것이겠지요.
새 포도주와 새 부대의 만남은 헌 것을 버리고 무조건 새로워져야 한다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새 것과 헌 것이 만나지 말며, 새 것은 새 것과 만날 수 있도록 식별하고 적절한 조화를 이루는 것이 문제지요.
제 삶이 새롭지 않은데, 새 것을 기다린다는 모순을 깨닫는 것, 삶은 파도의 물결처럼 출렁이고 번잡한 욕망으로 가득한데, 제 삶의 고요를 바라는 황당함에서 깨어나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새 것에서든 헌 것에서든, 태초부터 여태껏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그분께서 계시는 곳은, 솔직한 모습으로 기쁘게 한잔하는 축제의 장이어야 합니다. 괜스레 저만을 위한 축제를 기다리면서 제 욕망에 젖어 혼자서만 배시시 웃는 철부지는 되지 말아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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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묵은 포도주는 달고, 새 포도주는 떫다.>
우리가 이번 연중 제22주간 월요일부터 연중 마지막주간 토요일까지 평일미사의 복음으로 줄곧 루카복음을 봉독하게 되었다고 해서 복음의 모든 부분을 연이어 듣지는 못한다. 이 말은 평일미사에 제공된 복음을 읽고 한정된 부분만으로 복음의 참뜻을 깨우치려들면 무리가 생긴다는 뜻이다.
이러한 시도는 늘 복음의 참뜻을 위협한다. 한정된 어느 한 단락의 복음만 가지고 전체를 이해한다는 것은 ‘장님 코끼리 만지는 식’이 된다. 그러다 보면 때로는 예수께서 공들여 설파한 복음전체의 내용뿐만 아니라 복음사가들의 편집의도를 곡해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미사의 그날 복음으로 제공된 부분의 앞뒤 문맥을 함께 살펴야 하며, 진정한 신자라면 ‘매일미사’ 책에 너무 의존하지 말고, 신구약 합본성서를 늘 곁에 두고 빠진 부분을 함께 읽어야 한다.
오늘 복음의 첫 부분이 그렇다. 매일미사 책에 실려 있는 오늘 복음의 시작은 “그때에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라고 되어 있는 반면, 성서의 원문에는 “이 말씀을 듣고 그들이”라고 되어 있다.
어느 표현이 복음의 앞뒤 문맥을 더 잘 말해주는가? 두말 할 것 없이 성서원문이다. 따라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무슨 말씀을 듣고 예수께 반론을 제기하는 지는 앞부분을 살펴야 알 수 있는 일이다.
아무튼 권위 있는 가르침과 기적행적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명성이 순식간에 나자렛과 카파르나움을 넘어 사마리아와 유다지방 일대 방방곡곡에 퍼져나갔다.(4,37.44; 5,15)
급기야 이를 확인하고 감찰할 양으로 예루살렘에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께서 계신 곳으로 파견된 것이다.(5,17)
그들은 이미 예수의 말씀과 행동에 반감을 가지고(5,21), 못 마땅하게 여겨 트집을 잡기 시작하였으며(5,30), 오늘은 복음에서와 같이 단식문제로 예수께 시비를 걸고 있다. 이런 배경을 염두에 두고 오늘 복음을 묵상한다면 잘 이해할 수 있겠고, 좋은 결론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두 단락으로 구성된 오늘 복음은 단식에 관한 말씀과 옷과 포도주를 소재로 한 이중비유를 담고 있다. 물론 후반부의 이중비유는 전반부의 단식에 대한 부연설명으로 이해해도 좋다.
오늘 담론은 예수님과 적대자들 사이의 논쟁으로 보아도 타당하다. 단식이란 회개의 표징으로서 용서와 자비의 기다림이다. 구약성서와 유대교에서 단식은 약속된 메시아의 도래와 불가분의 관계로 결합되어 있다. 메시아이신 예수께서 이미 도래하셨으니, 예수님의 제자들이 단식을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ipso facto) 모순이다. 제자들은 물론 세상이 온통 메시아 도래의 기쁨에 차 있기 때문이다.
먹고 마시는 일은 기쁨으로 가득 찬 잔치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예수의 제자들에게도 단식의 날이 오게 될 것인즉, 예수께서 더 이상 그들 곁에 계시지 않을 때가 바로 그때가 될 것이다.(33-35절)
‘새 옷과 헌 옷, 새 포도주와 묵은 포도주, 새 부대와 헌 부대’를 소재로 한 이중비유는 단식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한층 더 또렷하게 밝혀준다.
예수님의 메시아로서의 도래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말한다. 이제 헌 것은 가고 새 것이 도래한 것이다. 모든 것이 새로워졌고 새 하늘과 새 땅(2베드 3,13; 묵시 21,1)이 도래했다.
새로이 도래한 하느님 나라를 헌 것을 가지고 맞을 수 없는 일이다. 묵은 포도주는 달고, 새 포도주는 떫기 마련이다. 여기서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삼척동자도 다 아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를 향한 준비는 마음의 ‘어느 한 조각’으론 불가능하다. 예수께서는 우리들에게 삶과 태도의 전적인 회개와 변화를 촉구하시는 것이다. 당장은 맛이 좀 떫고 불편하더라도 하느님나라에 통용될 새로운 법칙을 배워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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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새로 사랑하자!>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주님께서는 왜 유대교와 단절하지 않으셨을까?
이는 당신의 새로운 포도주를 담을 수 있도록 부대가 새로워지길 바라시지만 부대 자체를 폐기하지 않으셨다는 방증이 되겠습니다.
비슷한 맥락의 말씀을 하신 적도 있으시지요. 율법을 없애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려고 오셨다고.
이것을 저에게 적용하면 이런 것이 될 것입니다. 저의 사고방식이나 정신이 고루하고 낡았습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이런 저를 아예 존재조차 없애려 하지 않으시고, 다만 저의 고루한 사고방식과 낡은 정신이 새로워지길 바라실 겁니다.
회개를 바라시고 쇄신을 원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바라시는 회개와 쇄신도 다른 것이 아니라 사랑의 회개와 사랑의 쇄신을 바라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겠다고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잖습니까?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 34)
그런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어찌 새 계명이겠습니까?
이미 너 자신처럼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이 있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사랑하라는 계명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라는 말씀을 까먹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계명이 제일 중요함을 잠시 까먹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요즘은 제가 이것을 까먹거나 놓치지 않는 편이지만 전에 자주 이것을 까먹고 놓칠 때는 이렇게 저 자신에게 얘기하곤 했습니다.
다시 사랑하자!
새로 사랑하자!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오래전에 하셨고 오랫동안 우리와 함께 있던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오늘 새롭게 말씀하시는 것처럼 듣는 것이고 새롭게 실천하는 것입니다.
오래전에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고, 제가 들은 것도 오래전부터 수없이 들은 말이지만 오늘 처음 말씀하시는 것처럼 제가 새롭게 들으면 그리고 새로 사랑하기로 결심하면 저는 새 부대가 되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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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루카5,35ㄴ)
<본질(새것)로 나아가자!>
오늘 복음(루카5,33-39)은 '단식 논쟁과 새것과 헌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이 믿는 이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우리가 본질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하고, 본질인 새것이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 '다른 사람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하는데, 왜 당신의 제자들은 단식하지 않고 먹고 마시기만 하느냐?'고 말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십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을 할 수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루카 5,34-35)
'단식의 본질'은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그 사랑에 머무는 것입니다.
그 큰 사랑에 동참하고, 그 사랑을 너와 나누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단식의 본질'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하면서 종종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처럼 '견월망지' 할 때가 많습니다. 신앙의 본질이요 핵심인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은 바라보지 않고, 그곳을 가리키는 어떤 형식이나 규정에만 얽매여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단식했다. 기도했다. 미사참례했다. 말씀필사했다.' 하는 그 행위 자체에만 머물러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행위들은 우리를 본질로 나아가게 하는 행위요, 본질 안에 머물러 있게 하는 행위들입니다.
9월1일 새벽에 아프카니스탄에서 큰 지진이 발생했는데, 어제 속보에 의하면 사망자가 2,250명을 넘었다고 합니다. 세상에 우리가 드러내야 할 본질, 곧 하느님의 사랑이 보이질 않습니다. 엄청난 뉴스인데도, 중국 소식과 김정은 소식과 우리나라 정쟁 소식만 보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이러한 모습을 '배척'이라고 했습니다.
배척을 치우고, 하느님의 사랑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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