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퓰리처의 두 얼굴]
퓰리처는 신문으로 장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생각해낸 사람이다.
영화 <시민 케인>의 실존 인물인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1863∼1951)와의 치열하고도 숙명적인 보도 전쟁을 통해 황색 저널리즘이라는 용어를 탄생시킨 일화는 유명하다. 핵심은 간단하다.
누가 더 자극적이고 파괴력 있는 기사를 발굴해내는가. 범죄와 추문에 골몰하고 만평과 사진 등으로 지면을 화려하게 장식해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선정주의(Sensationalism)는 이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상업주의'라는 언론의 가장 기본적인 속성으로 굳어졌다.
퓰리처 이전의 신문은 단순히 정부의 새로운 정책이나 소식을 전하는 매체였다. 하지만 퓰리처는 달랐다. 그는 신문에 대한 고정관념을 완전히 깼다. 스포츠를 실었으며, 여성 기자를 배출했다. 신문에 만화나 삽화를 넣기도 했다. 또한 사람들이 즐길 거리만 모아 일요판을 따로 발행했다. 신문에 오락성과 상업성을 접목한 것이다.
고공행진을 달리던 퓰리처에게 도전장을 내민 신문이 마침내 나타났다. 퓰리처의 신문을 복제하고선 말이다. 바로 <뉴욕 저널>이다. 신문사의 경영인은 한때 퓰리처의 수습기자로 활동했고,퓰리처의 신문을 격찬하던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였다. 바로 옆 건물에서 퓰리처의 복제판을 만들던 허스트는 퓰리처의 <뉴욕 월드> 절반 가격으로 <뉴욕 저널>을팔았고, 퓰리처의 직원들을 고액으로 스카우트했다.
두 신문사 간의 양극화는 더욱 심해졌다.
과장된 기사, 기사 빼돌리기는 물론 함정을 설치해 잘못된 정보로 상대 기자를 유인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두 신문사의 과열된 경쟁보도와 선정적인 내용을 두고 ‘황색 언론(Yellow Journalism)이라고 불렀다.
지나친 취재비용과 과도한 스카우트에 두 신문사는 엄청난 타격을 받았다. 이후 신문의 방향을 다시 바꾼 퓰리처는 “내가 부패와 타협하면 나를 무시해라. 신문은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가르치는 도덕교사”라는 말을 하며 끈질긴 고집으로 진실을 밝혀냈다. 국가권력, 정치인, 로비스트,악덕 기업인들의 공격에 맞서 부패 추방 캠페인을 벌였다. 파나마 운하 건설과정에서 부정행위를 감추려는 시어도어 루스벨트대통령에 맞선 사건은 유명하다. 또한 선거 연임에 나선 루스벨트 대통령이 정권을 연장하기 위해 전쟁 위기설을 확산시켰다고 폭로해 세간을 놀라게 했다. 루스벨트는 퓰리처에게 “구속 시키겠다”며 협박했지만 퓰리처는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루스벨트는 낙선했다. 언론인으로서 전투적 저널리즘을 지킨 것이다.
퓰리처는 지금도 두 얼굴을 지닌 인물로 기억된다. 현대 저널리즘을 창시했지만, 언론의 역기능까지 탄생시킨 장본인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