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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요 14:8-14
8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0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1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요 14:8-14 / 빌립이 말하였다. `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보여주십시오. 그러면 저희가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9)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너희와 같이 있었는데 아직 내가 누구인지 모르느냐? 누구든지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본 것이다. 그런데도 너는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느냐? 10)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을 너희가 믿지 못하느냐? 내가 하는 말은 내 자신의 말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아버지께서 하시는 말씀이다. 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다는 이 사실을 믿어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내가 행하는 일을 보고 이 사실을 믿어라. 12-13)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행하는 일을 그도 행할 것이다. 아니, 그보다 더 큰 일도 이룰 수 있다. 그것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이다.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이나 구하라. 내가 그것을 이루어 줄 것이다. 아들인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루어 주는 것은 그것을 통하여 아버지께서 찬양을 받으시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14) 그렇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라.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제자들을 떠나는 것이 제자들에게 유익이 된다는 사실을 알려주심으로 제자들을 격려하십니다.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8-11) 7절의 말씀을 듣고 빌립이 질문을 합니다. 그런데 과거 빌립이 예수를 처음 만났을 때 그의 고백을 생각해 보면 이 질문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는 과거에 나다나엘에게 자신이 메시야를 만났다고 고백했습니다(1:45). 빌립의 질문은 마치 세상의 무신론자들이 하는 질문을 대신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보여 주면 내가 믿겠다.’ 그런데 이 질문을 제자들이 하고 있다는 점은 중요한 시사점이 있습니다. 제자들은 여러 해 동안 예수와 함께 하면서 말씀을 듣고 배웠고, 예수의 삶과 기적을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가시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로부터 최소한 하나의 결론에 도달해야 합니다. 예수와 하나님이 연합해 계시다는 사실이나 예수께서 행하신 일을 통해 그 분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신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12-14)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두 가지 일로 격려하십니다. 제자들은 주님이 행하신 일들을 하게 될 뿐만 아니라 더 큰 일들을 하게 될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이런 일들이 가능하게 되는 이유는 예수께서 하나님께 가시기 때문입니다. 이 일은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 이후에 이루어집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 이름으로’에 대한 바른 이해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은 단지 기도의 끝에 예수의 이름을 붙이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세 가지가 포함되어야 합니다. 첫째 기도는 예수님의 공로에 의지하는 것, 둘째 예수의 인격에 일치한 것을 구하는 것, 셋째 기도는 아버지의 영광이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이 세 가지가 포함될 때, 예수의 말씀처럼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가 적용될 수 있습니다. 예수의 말씀은 그대로 사도행전에서 제자들에게 이루어집니다. 예수를 통해 역사하셨던 하나님이 제자들 안에서도 그 능력을 행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의 비밀을 말씀하신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에 있습니다.
적용: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와 함께 하시는 예수를 보이는 삶입니다. 당신을 통해 그리스도의 향기가 전달되고 있는지 살펴봅시다.
주님은 우리의 능력의 원천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능력을 공급받을 때 우리는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능력 있는 삶과 좋은 영향력을 끼치는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 설 교 >
아버지 하나님
요 14:8-11, 시 139:1-16 / 이동휘 목사
1. 인류의 역사는 에덴 동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에덴 동산 한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었습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은 금단의 열매를 먹고 인류에게 죄와 사망을 물려주었습니다. 그리고 인류의 조상을 유혹하여 죄를 범하게 한 사탄은 저주를 받았습니다. 사탄은 ‘여자의 후손에 의해 그 머리가 상하게 될 것이고, 사탄은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창3:14-15)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여자의 후손에 의해 사탄의 머리가 상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인간의 죄가 사함을 받아 사탄의 종노릇하는데서 해방될 것, 사망에서 해방되어 영원한 생명으로 구원받게 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류가 사망의 저주에서 구원받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사탄은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시므로 에덴 동산에서 야기되었던 사망과 저주가 정복된 것입니다.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죄를 범한 인류의 조상 아담에게 ‘흙으로 돌아가라.’는 말씀으로 ‘사망’이 선고되었습니다.
(창3:19)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죄를 범하기 전 아담과 하와는 자기들이 벗은 줄을 몰랐었습니다. 이는 둘 다 벗었으나 수치심을 전혀 느끼지 않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를 범한 후에는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기는커녕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수치심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수치를 가리기 위해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습니다.
(창3: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를 범한 인류에게 ‘사망’을 선고하는 것으로 끝내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해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창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는 말씀은 인류의 죄를 위해 동물이 희생되었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인류의 죄 때문에 죄없는 동물이 희생된 것입니다. 이는 세례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소개할 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말했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희생되어 인류에게 ‘가죽옷’을 입히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인류의 죄를 가리어주셨다는 것입니다.
(요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세상에 오시기 전인 구약성경의 마지막 책, 말라기는 “저주”(with a curse)라는 말로 끝이 납니다. 말라기4:6입니다.
(말4:6)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그러나 신약 성경의 마지막 책, 요한계시록은 “다시 저주가 없으며”(No longer will there be any curse.)라는 말로 끝이 납니다. 요한계시록22:3입니다.
(계22:3)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인 요한 계시록에는 “다시 저주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죄사함을 받은 인간에게는 사망의 지배를 받는 저주가 다시는 없고, 첫 번째 에덴에서 잃어버린 모든 것을 다시 회복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계22:1-2)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하나님께서 인류의 조상이 잃어버린 에덴 동산을 예수 그리스도를 준비하셔서 천국을 준비해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준비하셔서(가죽옷) 모든 인류에게 영원한 생명의 선물(은혜)를 마련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생명을 비롯한 모든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이야기,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저 사람들의 활동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성경의 시작, 창세기는 “(창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는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도 마찬가지로 “(창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는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역사는 하나님을 빼면 그 인류의 역사는 종잡을 수 없는 수수께끼가 되고 맙니다. 때문에 세상과 인류의 이야기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세상과 인류는 하나님께서 그 창조하신 뜻과 목적에 따라 하나님께서 다스리십니다. 따라서 역사(History)는 ‘그 분의 이야기(His Story)’,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시편115:3입니다.
(시115:3)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세상 역사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들과 앞으로 행하실 일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역사와 인류의 문제는 하나님을 통해, ‘그 분의 이야기(His Story)’를 통해 풀 수가 있습니다.
2.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시 95:6)고 말하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에 의심 많은 유물론자가 “하나님은 어디서 왔는가?”라고 물자, 하나님을 믿는 제자는 “그럼 물질과 생명은 어디에서 왔는가?”라고 되물었습니다. 그러자 유물론자는 “순전히 우연”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제자는 “하나님의 결정”이라 대답했습니다. 유물론자의 주장대로 역사가 “순전히 우연”의 산물이라고 한다면, 역사는 뒤죽박죽되어 갈피를 잡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창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역사는 하나님의 좋으신 뜻에 따라 창조되었고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하나님께서 섭리하신다는 뜻입니다. 세상 역사와 인류에 대한 분명한 하나님의 뜻과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참새 두 마리가 동전 몇 푼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그 참새 한 마리도 그저 땅에 떨어지는 법이 없느니라. 하나님은 너희 머리카락도 다 세고 계시느니라. 너희는 많은 참새들보다 더 귀하니라.”(마10:29-31) 참새 한 마리에도 하나님의 뜻과 목적이 있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인생 하나 하나에게 어찌 하나님의 뜻과 목적이 없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택된 이스라엘 민족이 시작될 때, 즉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선택하신 데에는 하나님의 분명한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각 사람의 생명이 시작되는 때에도 분명한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다윗의 시편139:13-16을 보겠습니다.
(시139:13-16)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겨지지 못하였나이다.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다윗은 자신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주의 책’에 기록하셨다고 고백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다윗이 모태에서 조성되기 전부터 ‘주의 책’에 기록하시고 앞으로 다윗을 통해 하실 일들을 모두 다 기록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다윗은 태중에서부터 자신을 지으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다윗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아신다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본문 1-8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시139:1-8)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다윗뿐만 아니라 우리가 성경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정하신 특별한 목적을 위해 하나님이 준비하시고 ‘주의 책’에 기록하셨습니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고, 저와 성도 여러분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다윗은 사울 왕의 시기 질투를 받아 정적(政敵)이 되어 도피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 도피생활은 그야말로 고통스런 광야의 유랑생활이었습니다. 다윗은 이러한 피눈물나는 유랑생활로 인해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신이 유리방황한 날 수를 계수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이 흘린 눈물을 병에 담으시고 ‘주의 책’에 기록하셨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시편56:8입니다.
(시 56:8)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사오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다윗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시고 ‘주의 책’에 기록하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조만간에 공의로운 심판을 시행하실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이 각 개인의 처지를 일일이 감찰하시며, 인간의 언행 심사를 낱낱이 기록한 ‘주의 책’에 따라 하나님께서 상벌을 주시고 심판하시리라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그래서 구약성경 마지막 책인 말라기서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라기3:16입니다.
(말3:16)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다윗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시고, ‘주의 책’에 기록하신 하나님께서 결국 사울 왕을 심판하셔서 그는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비참한 죽음을 당하는 심판을 받았습니다. 성도 여러분의 언행심사를 낱낱이 ‘주의 책’에 기록하시고 여러분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시며 사는 모든 생활을 하나님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셔서 상급으로 축복하실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이 주님을 위해, 교회를 위해 수고한 모든 것을 ‘주의 책’에 기록하시고 장차 상급으로 축복하실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겸손과 눈물로 교회를 섬긴 것과 교회와 성도를 위해서라면 모든 시험을 참고 섬긴 것 등을 하나님께서 아시고 축복하실 것을 믿었습니다.(행20:17-21) 성도 여러분이 한 영혼 구원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며 눈물로 복음의 씨를 뿌린 모든 것을 ‘주의 책’에 기록하시고 그 흘린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시고 장차 상급으로 축복하실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뜻과 목적에 따라 세상에 태어난 것을 깨닫고 믿는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목적에 따라 사는 사람이 복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도 여러분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참으로 기뻐하셨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삶으로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엡1:3-6)
3. 이렇게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과 세상 역사를 창조하시고 섭리하실 뿐만 아니라, 공급자가 되시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을 만드시기 전에 천지만물을 먼저 만드신 것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인간이 가장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모든 환경을 준비해주신 것입니다. 아기의 탄생을 고대하는 부모는 아기를 위해 사랑스럽게 모든 것을 준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도 우리를 위해 이 세상을 사랑스럽게 준비하셨습니다. 육체를 가진 인간에 가장 좋은 환경과 그에 필요한 모든 자원을 풍요롭게 누릴 수 있도록 준비해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인간에게 이렇게 복을 주셨습니다. 창세기1:28-30입니다.
(창1:28-30)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 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풍성하게 주실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낭비하거나 파괴하지 않고 지혜롭게 사용하여 모든 것이 충만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육체를 가진 인생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풍요하게 베푸실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하나님의 영을 불어넣으셔서 하나님과 영적 교제를 가지고 영적 세계의 풍요로움을 누릴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창세기2:7입니다.
(창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인간에게는 생각할 수 있는 정신과 결정할 수 있는 의지와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있고, 하나님은 인간에게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다스릴 수 있는 통치권을 주시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목적들을 이루는 일에 우리와 함께 일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시편8:6입니다.
(시8:6)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다윗은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신다.” 는 그 사실에 완전히 압도당하여 “(시8:4)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라고 말합니다. 가장 작은 존재로서의 인간에게 베푸신 하나님 은혜에 겸손히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두 가지 유형의 사람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자신의 모든 필요를 하나님이 채워주신다는 사실을 발견한 사람들과,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심지어는 반역하면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은혜와 영광의 풍성함을 스스로 잃어버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상에서 풍족히 먹으며 누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재산을 탕진한 탕자처럼(눅 15:11-24), 스스로 독립해서 성공해보리라는 교만함으로 결국 돼지우리 속에서 굶주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풍족하게 공급하시는 아버지 집을 떠나 스스로 종이 되어 돼지우리에서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로 굶주린 배를 채우고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산다는 것은 어떠한 모습으로 산다 해도 탕자의 삶인 것입니다. 항상 아버지 하나님 안에 거하는 삶으로 영육간에 풍요로운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4.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부모가 자녀를 대하듯이 하나님은 그 택한 백성을 사랑으로 대하십니다(시 103:13).
(시103:13)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아버지로서 하나님은 결코 자녀를 잊으시지 않으십니다. 이사야49:15입니다.
(사49:15)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특히 자신이 선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을 ‘장자’로 부르시며 장자로서의 특권과 축복을 주셨습니다. 출애굽기4:22입니다.
(출4:22)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하나님은 자상한 부모처럼 이스라엘의 손을 잡고 애굽에서 이끌어내셨습니다. 예레미야31:32입니다.
(렘31:32)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렇게 장자로서 축복을 약속하시며, 그들을 인도하시며 광야에서 먹이시지만, 그들이 반역할 때마다 사랑하는 부모가 거역하는 자녀를 훈계하듯이 그들을 징계하십니다. 신명기8:5입니다.
(신8:5)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징계하시는 것은 그들이 사생자가 아니라 친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징계하시는 목적은 어그러지지 않게 하며 말씀에 순종하게 하여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히브리서12:5-13을 보겠습니다.
(히12:5-13)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참으로 아버지로서 하나님은 자녀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에게 친절을 베푸시며, 관대히 대하사 오래 참는 분이십니다. 이러한 아버지 하나님을 실제로, 그리고 눈에 보이게 드러내주신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14:9입니다.
(요14:9)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인간을 사랑하시되 죽기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절정입니다.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은 사랑이라는 한 단어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영, 성령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로 증거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확신시켜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셔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고 증거하신 것입니다.
(롬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갈4:5-6)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부모가 자녀들을 기뻐하고, 그들이 성품과 행실 면에서 성숙해갈 때, 그 부모는 자녀들이 부모를 영화롭게 하는 것으로 보고 즐거워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하나님 아버지도 순종하는 자녀들을 기뻐하시고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것을 즐거워하십니다. 또한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사랑하는 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로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받게 됩니다. 요한복음14:21-23입니다.
(요14:21-23)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가룟인 아닌 유다가 이르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에베소서3:14-21입니다.
(엡3:14-21)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예수 그리스도가 성도 여러분의 마음에 계셔서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하나님의 사랑을 충만하게” 경험하게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하여 성도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요15:7,16)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예수 믿음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하나님의 자녀되신 성도 여러분, 항상 아버지 하나님 안에 거하시는 생활로 무엇을 구하든지 열매가 풍성하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
요 14:8-11 / 최승윤 목사
우리가 갖고 있는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되어 있습니다. 구약은 39권, 신약은 27권, 해서 모두 66권입니다. 성경을 기록한 시간만 해도 약 1500년 정도가 됩니다. 오랜 세월 동안 40여 명의 저자가 기록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성경은 하나의 주제를 다양한 방식으로 그러나 일관성 있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주제는 바로 한 인물입니다. 그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경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요한 복음 5:39절에서 사도 요한은 그 사실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신, 구약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책이라면 우리가 성경을 읽고 배우고 묵상하는 과정을 통해서 여러 가지 고귀한 교훈을 얻을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성경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해야 합니다. 다른 교훈을 풍부하게 깨닫는다고 하여도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면 성경을 잘못 읽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성경에 기록된 모든 교훈, 모든 말씀들은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모두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배우고 확신하는 일에 거하라”라고 말하면서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언급한 것도 바로 그 이유입니다.
무엇을 배우고 확신해서 그 안에 거하라는 말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고, 확신해서 그 예수 안에 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영생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안에 참된 자유와 평안과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시고 가르쳐주신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면 하나님도 모르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면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도 없으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 수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풍성한 은총이 무엇인지 알 수도 없고, 알지 못하기 때문에 누릴 수도 없습니다. 성경에서 가르치는바 참된 믿음이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얼마나 구체적으로, 풍성하게 아는가? 그 예수를 얼마나 확실하게 믿고 있는가? 하는 것과 직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지점에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과연 어떤 예수를 보여주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에 대해서 썼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이후에 신약 성경에 있는 복음서를 기록한 저자들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일과 하신 말씀을 기록하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기록을 읽고 자신들 나름대로 이해해서 예수라는 한 인물에 대해서 쓴 책들도 부지기수입니다. 한 인물에 대해서 그렇게 다양한 이해와 해석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매우 놀라운 일이지만 결국 그 모든 것들은 한 가지 사실에 대한 다양한 이해요 해석입니다. 그것은 예수가 과연 누구인가? 예수는 과연 어떤 인물인가? 하는 것입니다.
단순하게 들리는 이 질문은 실상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도 “예수가 과연 누구인가?”라는 문제 때문에 사람들은 혼란스러웠고, 당혹스러워 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예수 때문에 분개했습니다. 예수를 죽이려고 했고, 결국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아서 죽였습니다. 사도 베드로, 사도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 그리고 선교의 역사 가운데 수많은 전도자들은 예수로 인해서 피를 흘려야 했습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예수에 대한 이해를 어떻게 하느냐 하는 문제로 수많은 논쟁들이 있었습니다. 그 논쟁의 결과로 정통이 되기도 하고, 이단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단으로 정죄를 받아서 평생을 떠돌았던 사람들도 있었고, 처형을 당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문제는 단순한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정체, 자신이 누구인가? 라는 문제를 명백하게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빌립이 예수님에게 물었습니다. “주여, 아버지를,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이 요구는 빌립 만이 아니라 신앙 생활을 진지하게 하려는 모든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요청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하나님, 제게 한 번만 나타나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하나님을 성실하게 믿고 따르겠습니다”이런 요구를 할 때가 있습니다. 소설가 박완서씨가 사랑하는 자기 아들이 자동차 사고로 죽은 다음에, 오랜 시간 동안 고통 속에 살면서 “하나님, 한 말씀만 제가 해주십시오”라고 했다고 합니다. 같은 맥락의 소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빌립의 요청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답을 하셨습니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너희와 같이 있었는데 아직 내가 누구인지 모르느냐? 누구든지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본 것이다. 그런데도 너는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느냐?”답답한 마음에 책망을 하셨지만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을 본 사람은 하나님을 본 자”라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을 나타내 보여주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아브라함과 모세를 비롯한 구약의 모든 성도들, 이사야 선지자를 비롯한 모든 구약의 선지자들도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다 라는 것을 그 시대 백성들에게 알려주었고, 보여주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이해할 때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타내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모든 것들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을 확실하게 드러내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의 성도들과 선지자들과 예수님과는 존재가 다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보여주셨던 방식과 질적인 차원은 다른 것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차원이었지만,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이런 식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혼란스럽고, 당혹스러웠던 것은 바로 예수님의 이런 모습이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사두개인들이 분개한 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한 분으로 주장하셨기 때문입니다. 가장 단적인 예가 요한 복음 10:30절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정체에 대해서 확실하게 말해달라고 요구합니다.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케 하려나이까? 그리스도여든 밝히 말하시오”(24절) 라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라고 선언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을 들었을 때 유대인들은 어땠을까요? 속된 말로 뒤집어졌을 것입니다.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자기 자신을 저렇게 알고 있다면 저것은 미쳤거나 귀신이 들렸거나 아니면 이단 중에 이단이다. 죽여 없애야 한다. 유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아서 죽였던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그들은 마땅히 한 일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은 그가 행한 선한 일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병든 자를 고치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시고, 귀신을 내어 쫓으시고, 가난한 자들을 도우셨던 그 일 때문에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백성들에게 가르치셨던 말씀, 산상수훈의 말씀,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 그 말씀을 백성들에게 가르쳤기 때문에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대제사장을 비롯해서 백성의 지도자들과는 달리 죄인들, 창기와 세리들과 함께 먹고 마셨습니다. 그와 같은 모습들이 그들의 눈에 거슬렸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가르쳤던 것과는 다른 교훈을 말씀하신 것, 안식일 규례를 파괴하신 것, 예루살렘 성전을 청소하신 것, 예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을 보고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것, 그 모든 것이 그 당시 지도자들의 눈에 거슬리고,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고, 시기심을 일으켰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것은 결국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선언하시고 드러내셨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예수가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선언하는 것을 그들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한 가지 사실은 유대인들이 죽인 예수를 다른 사람들이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의 예언이지만, 유대인들이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2000년 교회 역사 가운데 일어났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란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를 하나님으로 믿는 사람들입니다. 예수에 대해서 이런 저런 이해가 있고, 해석이 있고, 주의 주장이 있지만 그 모든 것을 털어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은 그 예수가 바로 하나님이요, 구원자시요, 주님이라고 믿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성경에서 가르치는바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는 아무런 갈등도 없고, 차이도 없고, 구별도 없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조금 모호하게 보이는 점, 이해할 수 없는 부분도 예수를 통해서 확연하게 드러났기 때문에 그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요, 그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라고 말을 알 수 있는 것도 바로 예수를 통해서 드러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구약 성경에서도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긍휼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지만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그 예수를 통해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분명하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보여주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심, 죄에 대해서 단호하시고, 엄격하시고, 징계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그대로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그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명명백백하게 드러났습니다. 구약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 출애굽 사건과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나타난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은 바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셨을 때 행하신 모든 기적을 통해서, 그리고 부활 사건을 통해서 확연하게 드러나고 증명되었습니다. 구약 성경의 선지서들 가운데 기록된 미래의 영광스러운 축복과 종말에 대한 심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미 우리 안에 주어진 것이요, 그 축복과 영광과 심판은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온전하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보여주시는 분이시지만 동시에 하나님 자신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은 하나님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하나님으로 하나님의 뜻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를 하나님으로 믿는 것이요, 예수께서 행하신 일을 하나님의 일로 믿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으로 동일한 권위를 갖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것이라면, 그 예수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것이요, 알아가야 하는 것이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그 뜻을, 하나님의 뜻으로 믿고 그 뜻을 따라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를 믿는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예수를 향해서 “하나님의 본체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했습니다. 사도들은 그 예수를 향해서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본 사람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를 아는 자들은 하나님을 아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하나님으로 믿는다는 것은 중간지대가 없습니다. 그것은 신념이요, 이념이요, 부정할 수 없는 확신입니다. "본래 신념이나 이념은 중간지대가 없습니다. 한쪽으로 치우친 것입니다." "치우치지 않은 것, 누구나 공감하고, 인정할 수 있는 중간지대는 상식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상식이 아닙니다. 진리의 문제요, 생명의 문제입니다. 어제가 다르고 오늘이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어제와 오늘과 영원히 동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 드린 것처럼 이 영광스럽고 위대한 지식이 어찌 우리의 이성적인 작용과 활동으로 만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성경을 배우고, 익히는 일에, 성경을 통해서 예수를 아는 일에, 우리의 이성을 사용해야 하는 것이지만 단지 이성의 작용으로만 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알게 하시고, 보게 하시고, 깨우치시고, 인도해 주셔야 되는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예수에 대한 정보는 풍성하게 알 수 있겠지만 그 정보가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우리에게 확신을 주고, 우리의 삶을 예수께 복종시키는 그 결과, 그 열매는 우리 안에서 일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이시라는 사실, 그것을 변함 없는 진리로 확신하고 있었기에 사도 베드로와 바울을 비롯한 모든 사도들은 이 예수를 믿고 전하다가 죽었습니다. 2000년 교회의 역사 가운데 면면히 내려오는 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신 이 예수를 믿고, 그 분의 가르침을 따라서 살기도 하고, 죽기도 했습니다. 역사적인 상황과 현실에 따라서 그들의 삶이 달라지기도 했지만 변하지 않은 것은 바로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사실, 그 분이 생명의 구원자요, 삶의 구원자요, 선한 목자요, 만 왕의 왕이요, 다시 오실 구원자요, 심판자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그 예수로 말미암아 웃기도 하고, 울기도 했습니다. 그 예수로 말미암아 고통과 고난을 당하기도 하고, 평안을 누리기도 했습니다. 그 모든 삶의 여정과 상황 가운데서 신실한 성도들은 오직 하나님이신 예수만을 붙잡고 의지하고 살았습니다. 상황과 현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상황과 현실 가운데서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놓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세상은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히브리서의 표현대로 하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믿음의 사람들이 참으로 인생을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주변 환경에 억눌리지 않고, 상황과 여건에 따라서 휘둘리지 않습니다. 세상의 이론과 학설과 주의 주장에 따라서 우왕좌왕하지 않으며, 자기 자신에게조차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내 생각과 내 의견과 내 주의 주장을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 복종시킴으로 나를 부인하고, 나로부터 자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들이 어떤 수준에, 어떤 단계에 있든지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만을 최상의 권위로 인정하고 모든 것에서 자유롭게 되어야 합니다. 그 자리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모호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배우고 익혀서 확신하는 자리까지 나아가야만 합니다. 그 진리 안에 머물러 살 수 있을 때까지 우리 모두는 쉬지 않고 거기까지, 그 자리까지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요구하는 참된 신앙입니다. 그런 믿음을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요구하고 계시는 것이요, 보고 싶어 하는 모습니다. 기독교 2000년의 역사는 그냥 아무런 의미 없이 흘러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세상의 주요, 교회의 머리가 되셔서 다스리시고 인도해 오신 역사입니다. 그 역사 가운데 다양한 이론과 이해와 주의 주장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모든 것을 털어서 진리라고 입증된 그 사실을 믿고 따랐던 사람들, 그 사람들의 삶과 아픔, 고난 가운데서 승리와 담대하게 자신을 그리스도께 드린 헌신의 기록입니다. 그와 같은 교회의 역사적인 전통 위에 저와 여러분들, 그리고 오늘의 교회가 서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단지 내가 혼자, 단독적인 모습을 만들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2000년 동안 흘러오면서 만들어진 수많은 위대한 문서들, 가르침들, 그리고 그 가르침을 진실이라고 믿고 흔들림 없이 살아온 사람들의 모습을 배우고 익히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들과 우리는 어떻게 같은가? 어디에서 다른가? 틀렸다면 어떻게 틀렸는가? 어디에서부터 틀어졌는가? 이런 역사적인 안목을 갖고 그들이 믿고 따랐던 진리를 오늘 우리가 사는 이곳에서 이루어가고, 발전시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세가 바로 사도 신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거룩한 공회”, Holy Catholic Church 를 믿는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고 따르겠다는 정신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따라서 지난 역사 가운데 교회에 허락해 주신 위대한 신앙의 유산들을 작은 것 하나라도, 내 안에서, 우리 가정 안에서, 내가 속해 있는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이루어가겠다는 정신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될 때 저와 여러분은 참된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누리고 드러내는 하나님의 영광스럽고 풍성하신 은총이 우리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우리를 통해서 흘러 넘쳐서 그 복을 모르는 사람들,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전해져야 합니다. 특별히 교회 안이나 교회 밖에 있는 작은 자들, 소자들, 힘없고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소망이 되어야 하고, 소망을 주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실 때 그렇게 사셨습니다. 군림하는 자세가 아니라 섬기는 자세로, 주장하는 자세가 아니라 낮은 모습으로, 상한 갈대와 같은 사람들, 꺼져가는 등불 같은 사람들에게 찾아가셔서 소망과 구원과 위로를 주셨습니다. 그 예수께서 지금 천상에 계셔서 자신을 믿고 따르는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 교회들을 통해서 그 일을 지금도 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행하고 계시는 그 아름답고 복된 일에 저와 여러분들이, 우리 교회가 관심과 애정을 갖고 동참하도록, 힘을 내서 살아가도록 오늘도 우리들을 부르시고 계십니다.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크신 은총을 베풀어주고 계십니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뜻과 진심을 이 땅에서 이루어가는 것이 저와 여러분들이 살아가는 목적이요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 땅에서 이루어 갈 수 있도록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에게 능력을 공급해 주시는 성령 하나님을 힘있게 의지하고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삶의 배후에 계신 하나님
요 14:8-11 / 이정익 목사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배후에 그리고 삶의 중심에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전면에 어떤 모습으로 모양으로 세상에 나타나시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인류 역사를 보면 눈에 보이는 하나님을 발견하려고 애쓴 흔적들이 많습니다. 그렇게 연구한 결과 신이 존재한다고 결론내린 이론을 유신론이라고 말합니다. 연구 결과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 내린 이론을 무신론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연구결과 존재여부를 알 수 없다고 결론 내린 이론을 불가지론이라고 말합니다. 이 연구는 지금도 끊임없이 연구되고 있지만 인간이 신의 존재여부를 입증한다는 것을 불가능한 일입니다. 혹 입증한다 해도 그것은 지극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어떻게 알고 믿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은총으로 알고 계시로 알고 믿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을 선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열심히 하나님을 증명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이제 십자가를 지실 때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복음서에서 각종 병자들을 열심히 고치셨습니다. 그 치유사역을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됨과 메시야 됨을 증명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는 죽은 나사로 살리심으로 자신이 생명의 주인임을 과시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2장에서는 마리야가 옥합을 깨트려 발에 붓는 일을 통해서 마리아가 자신의 장사를 준비한 것이라고 말하여 곧 십자가에서 죽임 당할 것을 예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지금 예수님의 예루살렘 행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위함입니다. 요한복음 13장에서는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유다 배반을 예고하고 베드로의 배신을 예고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4장 본문에서는 “너희는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나를 믿는 자는 하나님을 믿는 자요,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본 자라“고 말씀하며 자신이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임을 공개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믿고 보는 것이 하나님을 믿고 보는 것임을 선언합니다. 이 말을 제자들에게 이해될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본문을 보면 빌립이 용기 있게 질문을 합니다. “그 아버지를 보여주옵소서”, 그때 예수님은 “왜 자꾸만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하느냐, 나와 그렇게 오래 있었으면서도 알지 못하였느냐,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본 자니라, 내가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이 내 안에 거하는 것을 믿으라,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하는 일을 보고 하나님을 믿으라.”
신앙생활에서 이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과 경험과 계기가 참 중요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만난 경험이 있습니까. 어떻게 만나셨습니까.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영적으로 만나 주십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고도의 영적 교통의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제자들은 3년 동안 예수님과 동행했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왜 보여 달라고 했는가 하면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있었는데도 그 하나님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만나고 믿는 일은 이렇게 어려운 일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것은 하나님을 만나지 않고도 신앙생활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단 그 신앙에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늘 갈증이 일어나고 회의가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만나지 못한 목회자들이나 교회의 중직 자들이 때로 헛소리도 하고 인간적인 갈등도 유발하고 문제도 일으키는 것입니다. 또 전도를 하다 보면 간혹 하나님을 보여 달라는 분들이 있습니다. 보여주면 믿겠다고 곤란한 질문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무엇이 아쉬워서 인간에게 자신의 모습을 인간적인 수단으로 보여주시겠습니까. 사람들에게 눈으로 볼 수 있도록 보여주신다면 그게 무슨 하나님입니까. 하나님은 보여줄 수도 볼 수도 없는 창조주이시고 절대 신이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고 만나는 것은 순전히 은총이고 은혜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을 몇 가지 말할 수 있습니다.
1. 나타난 계시를 통해서
나타난 계시는 성경과 세상에 오신 예수님입니다. 성경은 이미 계시의 책입니다. 계시를 받아 쓰인 책입니다. 성경 속에 이미 하나님의 모습이 그대로 나타나 있습니다. 성경이 없었던 시대는 대부분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셔서 보여 주셨습니다. 구약시대에는 대부분 유치한 아이들을 상대하듯이 하나님이 나타나시고 보여주시고 재앙을 내리시고 심판하시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성경이 주어진 이후에는 그런 모습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모습을 이미 다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고 알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보고 알게 됩니다. 본문을 보면 “나를 본 자는 곧 하나님을 본 자요, 나를 믿는 자는 곧 하나님을 믿는 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옷을 입고 인간에게 직접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인간의 옷을 입고 오셔서 이 세상에 그대로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통해서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만나고 믿는 것입니다.
2. 사물을 통해서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하나님이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그 사물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간접적으로 나타나십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사물을 보면 그 속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보는 감각과 신비한 눈이 은총의 눈이고 영적인 눈입니다. 여러분, 자연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바다와 강과 그 터를 세우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의 자연의 아름다움과 질서의 오묘함을 보고 거기서 하나님의 흔적을 발견하고 창조의 신비를 보고 체험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절경과 신비한 산맥과 넓은 바다를 보십시오. 그 모습을 보면 저절로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하고 찬양이 흘러나오고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하고 찬송이 솟아나옵니다. 또 오묘한 것은 그 자연과 인간이 얼마든지 대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식물을 사랑하며 기르는 사람들에 의하면 자기가 기르는 식물과도 얼마든지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 식물과의 대화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고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그 자연이 하는 대화의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대화하고 사랑하며 기른 화초는 더 윤기 나게 잘 자란다고 합니다.
또 물도 사랑하는 대화를 하면 물이 막 움직이고 육각수가 만들어진다고 합니다. 그리고 말을 하지 않거나 나쁜 말을 하면 아무 반응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것은 새도 개도 짐승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집에도 사람이 살지 않으면 금세 거미줄이 쳐지고 온 집안에 먼지가 쌓입니다. 그런데 집에 사람이 살면 거미줄도 먼지도 곰팡이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을 그리고 자연을 깊숙이 들여다보면 곧 이 세상에는 모든 분야에 하나님의 흔적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틈만 나면 산으로 가서 묵상하고 기도하고 영적으로 충전을 하셨습니다. 오늘도 영혼이 피곤한 사람들이 모두 산으로 올라갑니다. 갔다 오기만 해도 마음이 시원하고 맑아집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화가가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창조입니다. 그 그림 속에는 화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림 속에서 화가를 찾을 수도 없고 볼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그림을 그린 화가가 존재하지 않습니까. 오히려 그 그림이 화가의 존재를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 그림 속에서 화가를 체험하고 화가의 흔적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로 하나님은 이 우주가 암시하고 증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우주를 창조하실 때 매 사물마다 하나님의 손길이 나타나고 흔적이 나타나고 발자취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고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이 우주를 보면 하나님의 흔적이 나타나 있습니다.
3. 우리의 삶속에서
하나님은 우리와 동떨어진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꾸준히 함께 하시고 우리의 삶에 개입하시고 동참하시고 간섭하십니다. 우리의 인생과 함께 하십니다.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그것으로 그냥 끝내버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계속해서 우리의 삶에 애프터서비스를 하고 계십니다. 계속해서 보완하시고 인도하시고 알게 하시고 간섭하시고 때로는 채찍도 가하십니다.
아브라함의 인생이 대표적으로 하나님이 그의 인생에 나타나신 경우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고향에서 떠나라고 구체적으로 간섭하셨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장소와 방향까지 안내하셨습니다. 롯을 떠나보내고 서운한 마음으로 아브라함은 이제 나는 혼자다 생각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저 넓은 땅을 바라보라, 그리고 저 높은 하늘을 보라, 내가 네 자손에게 저 하늘의 별처럼, 저 땅의 모래처럼 많은 자손을 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단 한번 나타나신 것으로 끝입니까. 아닙니다. 지금도 여전히 아브라함에게 하신 것처럼 오늘 우리의 삶에도 여전히 보이지 않는 손길로 개입하시고 안내하시고 인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오래전에 살았던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장황하게 자세하게 기록해 놓으신 이유입니다. 우리는 지금도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를 안내하시고 인도하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또 우리의 삶속에서 나타는 모든 사건들 속에서 함께 하십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개개인의 삶속에 그리고 삶속에 나타나는 숱한 사건들 속에 나타나고 계심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일생에 사사건건 일마다 때마다 고비마다 함께 하셨습니다. 야곱의 일생 동안 마찬가지로 때마다 개입하셨습니다. 요셉의 일생동안에도 다윗의 일생동안에도 개입하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고백했습니다. 그 말은 사건들 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는 것을 증명하는 고백입니다. 그리고 소돔의 심판도 역사상 단 한번 있었고 그 후에는 전무했느냐 하면 아닙니다. 그런 심판은 매번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한번 사례로 아주 족합니다. 그것을 보고 믿고 깨달으란 뜻입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때 하늘 문이 열리며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리시는 모습이 보이면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 사건은 한 번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오늘 지금도 여기서 우리에게서 그대로 재연됩니다. 그래서 세례는 형식이 아니고 성령의 임재하시는 성례인 것입니다. 또 구약시대의 예배에는 구름이 나타나고 음성이 들려지고 천상의 천사들의 노랫소리가 들려 졌습니다. 그것은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눈에 그 노랫소리가 성전가득 채워지는 구름의 모습이 보여야 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성경을 읽을 때 모든 기적, 심판, 은혜, 영적 경이로움 등은 단 1회성이 아니고 지금도 똑같이 이 땅에서, 우리의 삶속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들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심판이 이루어지고 있고 함께 하심도 여전히 나타나고 있고 인도하심도, 개입하심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을 보면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하고 개입하시는 흔적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우리의 영혼 속에서도 나타나십니다. 인간은 꾸준히 하나님께 영적 은혜를 구하고 은혜를 입는 존재들입니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들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영적 관계를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임하심도 영적으로 임하십니다.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께로 향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죽으면 영은 하나님께로 육신은 땅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인간은 영원을 준비하고 사모해야 합니다. 그것이 영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간의 존재입니다. 케네디 대통령 때 국가 조찬기도회가 백악관에서 열렸습니다. 그때 빌리 그래함 목사가 “영원을 준비하라”는 제목으로 설교했습니다. 설교가 끝난 후 케네디 대통령이 영원에 대해서 다음 기회에 더 깊은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했다는데 며칠 후 암살당해서 죽었습니다. 영원은 우리들이 준비하고 사모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때 인간은 인간의 값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모두 하늘로부터 왔습니다. 그래서 죽으면 우리의 영혼이 하늘로 천국으로 가는 것입니다. 하늘로부터 온 것은 다 영원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무신론자들은 별 소리를 다합니다. 그러면서도 오래 살기를 추구합니다. 이 세상에 무신론자가 어디 있습니까. 무신론자들이 심각한 실존적인 상황에 빠져 보십시오. 어디라고 신을 안 믿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사탄도 병들면 천사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말을 함부로 말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100%라는 확신이나 자신 있는 말을 싫어하십니다. 사람에게는 100%라는 말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100%라는 자신 있는 말이 어디 있습니까. 100라는 말은 교만의 말이고 자만의 표현입니다. 100%라는 말은 절대 무오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인간의 자만이나 교만을 싫어하십니다.
어느 의학공부를 하는 레지던트 둘이 서로 지지 않으려고 치료를 경쟁적으로 했습니다.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은 이 두 수련생이 환자의 걸음걸이만 보아도 무슨 병인지를 알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더 교만해지고 자만해지고 나는 이제 다 알 수 있다는 자기 확신에 빠졌습니다. 어느 날 그 둘이 회진하고 복도를 지나가는데 어느 환자가 배를 움켜쥐고 어쩔 줄 모르는 모습으로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서로 “저 환자는 무슨 병 같으냐”고 이야기 했습니다. 한사람은 척추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고 말 했고 또 한사람은 장염 환자 같다고 말 했습니다. 서로 자신 있다는 마음으로 환자에 다가가서 “왜 그러십니까, 어디가 아프십니까?” 하고 물으니까 환자가 소리치며 저리 비키라고 하더니 “화장실이 어디야“하고 소리쳤습니다. 인간이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면 다 이런 식입니다.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이 아니고는 누구도 채울 수 없는 영적 공간을 가지고 있는 존재들입니다. 영을 갈구하고 하나님을 갈구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때 우리들이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체험하게 되고 그 안에서 믿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4. 직접적으로
성경을 보면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이 여러 간접적인 방법들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에 직접적인 방법도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길을 가다가 도중에 하나님을 직접 만납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떨기나무에 불꽃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애굽으로 가서 백성을 이끌고 출애굽 하라는 계시를 받았습니다. 야곱은 광야에서 환상 속에서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는 계시를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은 고향에서 과감히 떠나라는 계시를 받고 고향을 떠났습니다. 노아는 심판을 대비해서 방주를 만들라는 계시를 받고 그 엄청난 홍수와 싸워 이겼습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만나셨습니까. 여러분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들이고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나서 3년 동안 함께 생활했지만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그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비로소 진정한 예수님을 만나고 그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수십 년간 신앙생활을 했다고 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교회의 중직들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목회자들 가운데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수단 방법을 너무 앞세워 목회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남들로부터 듣고 하나님을 믿는 삶도 가능합니다. 그리고 글을 통해서 알고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신앙생활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내가 직접 만나고 체험한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신앙의 삶은 차원이 다릅니다. 시각이 다릅니다. 색깔이 다릅니다. 맛이 다릅니다. 차원이 다릅니다. 깊이가 다릅니다. 그러기에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고 난 후에 엄청나게 달라진 모습으로 제자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런 축복이 함께 하기를 축원합니다.
믿음의 유익
임덕순 목사
오늘부터 예수님 믿으려고 교회에 오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어떻게 하면 믿음이 빨리 자랄 수 있고 예수님을 더 잘 믿을 수 있을까요?
속성 반으로 한 3개월 특수훈련을 받으면 될까요? 목사님이 직접 일대일로 가르쳐드리면 될까요?
아마 가장 신속한 방법은 하나님이 한번 짜잔 하고 나타나서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고 놀라운 분이신가를 직접 볼 수만 있다면, 아무리 무신론자라도 단번에 믿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도 ‘百聞이 不如一見’이라는 말이 있듯이 하나님을 한번만 보면 진짜 잘 믿을 수 있다는 생각을 제자들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빌립이 예수님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 아버지를 한 번만 보여주세요. 그러면 소원이 없겠어요.”
혹시 여러분도 그런 질문을 하고 싶지는 않으신가요?
이것은 당시의 제자들만의 질문이 아니라, 오늘 우리들의 질문이기도 합니다. 특히 20세기 이후에 인류에게 나타난 중요한 현상중의 하나는, 어떤 사건이나 실체를 논리적인 설명을 통해서 알려고 하기 보다는 감각과 경험을 통해서 알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논리적인 과정을 생략하고 자기가 직접 만나보고 만져서 체험하려고 한다는 것이 이 시대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신앙의 영역에서도 그렇습니다. 과거에는 신앙이란 말씀을 통해서 깨닫고 변화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성경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라고 하셨고, 모세도 엘리야도 이사야도 하나님을 체험한 것은 감각적인 부분으로가 아니라 말씀으로였습니다. 그래서 정통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중시했고, 성경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창조와 사랑과 공의와 약속을 설명해주고, 그 말씀으로 하나님을 알고 체험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 사람들은 더 이상 말씀을 통한 신앙성장을 원치 않습니다.
예배하는 자리에서, 기도하다가, 찬송을 부르다가,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직접 자기에게 나타나 만져주고 위로해주는 체험을 원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말씀보다는 찬양, 몸짓, 간증 등이 중시되는 시대를 맞았습니다.
이것은 사실 이 시대만의 특징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기본적인 갈망인데, 깊이 감추어져 있던 본질적인 그 욕망이 자유분방한 시대를 맞아서 튀어 나온 것입니다. 이것은 사회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인데, 논리적으로 토론을 해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냐를 따져서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 말하는 것은 무조건 옳다고 믿고 따르고,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의 말은 듣기도 싫어하고 무조건 배척하는 감성 우선의 시대가 된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가 그렇지요?
“하나님을 보여달라.”는 빌립의 질문은, 수 천 년 동안 약속하시고 이루신 그 말씀보다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손으로 만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빌립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9) 라고 하셨습니다.
물질로 이루어진 인간은 영이신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개기 일식이라는 천체현상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달에 가려서 태양이 찌그러지는 장면을 보려고 야단입니다. 그때라고 해서 아무나 맨눈으로 볼 수 있는게 아닙니다. 비록 일식중이어서 태양의 일부가 찌그러졌을지라도 맨눈으로 태양을 보면 실명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유리에 촛불로 그으름을 만들어서 시꺼멓게 한 뒤에 보아야 볼 수 있습니다. 몸속에 뼈가 부러진 것이나 돋아난 암 덩어리는 어떻게 볼 수 있지요? X레이나 CT라는 특수한 장비로만 보이는 것이지, 맨 눈으로는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태양이나 인간 몸 속의 이상 현상은 다 물질입니다. 그런데 물질도 육체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이 많습니다. 하물며 영이신 하나님을 인간의 육신적인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육체의 감각으로 느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세상 전체를 만드신 너무 크신 분이며 영이십니다. 그래서 이 조그만 인간, 육체 덩어리인 인간의 눈으로는 하나님을 절대 볼 수 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들이 당신을 볼 수 있도록 특별한 배려를 하셨습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 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라는 요1:18의 말씀처럼, 하나님과 함께 계시던 아들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세상에 와서 사람들과 함께 사시며 보여주셨고,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여 주셨습니다. 아버지 품속에 계시던 아들 하나님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는 것은 우리의 지각이지 이마 아래에 붙은 두 눈이 아닙니다.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지고 누리는 모든 것, 나를 에워싸고 있는 천지의 만물을 통하여 그것들을 만드시고 우리에게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셨습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라는 롬1:20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우리 주위의 모든 자연환경, 동식물, 우주의 신비, 인체의 신비로움, 인간 안에 있는 도덕성과 영성 등을 통하여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고 주관하시기 때문에 인간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외하여야 한다는 신호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 했는지 아십니까? 롬1: 21-23에 보면,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라고 지적하신 그대로입니다.
천지 만물을 보고 지각을 사용해서 창조주를 깨닫고 그 하나님께 경배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이 만드신 자기 만도 못한 동물과 벌레 모양을 조각해서 그것으로 우상을 삼아 그것을 만지고 절하고 섬기는 우상숭배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버리고 감정에 의지하는 생활은 결국 우상숭배로 전락하고 만다는 경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감성의 메시지 대신에 언어의 메시지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히1:1-2에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마지막 날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라고 하셨는데, 구약시대에는 선지자들을 통해서 진리의 부분들을 설명하고 예고 하셨는데, 마지막 신약시대에는 아들을 보내시어, 직접, 그리고 종합적으로 인간의 도와 구원의 진리를 말씀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누구냐 하면, 구약에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부분적으로 말씀하셨던 진리를 완전하게 드러내려고 오신 분이고, 사람들이 눈으로 볼 수 없던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하려고 인간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직접 볼 수 없지만,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행하신 예수님을 통해서는 사람이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9)라고 탄식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육신의 모습을 본 사람은 누구나 다 하나님을 본 것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았고 따라다녔고 주시는 음식을 먹고 가르치는 말씀을 들었지만, 결국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떠나갔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면서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신성을 보았고,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과 인류 구원의 의지와 하나님의 사랑을 보았고 체험했습니다.
육신의 눈으로는 물질 밖에 볼 수 없습니다. 우리의 지각을 통해서 하나님을 깨닫는 것입니다. 저분의 행하심을 보니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 맞구나, 죽은 자를 살리는 저 능력을 보니 저분이 창조주 하나님이 맞구나, 저분이 죄인을 위해서 대신 죽으시는 것을 보니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구주가 맞구나 하고 지각으로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고서도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전혀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믿지 아니하느냐”라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과 하나님의 특별한 관계를 말씀하십니다.
부부의 경우 아내는 남편에게 속하고 남편은 아내에게 속합니다. 그 누구도 그 둘 사이에 끼어들 수 없습니다. 부부가 어떤 일을 한다면, 남편이 하는 말은 아내의 말과 같고, 아내의 말은 남편의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독립된 인격체이지만 서로에게 속해 있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입니다.
성자이신 예수님과 성부이신 하나님도 독립된 인격체이십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아니고 아들은 아버지가 아닙니다. 그러나 아들은 오직 아버지에게만 속합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오직 아들에게만 당신의 뜻을 주셨고, 당신의 능력과 영광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통해서만 세상을 통치하시고 구원하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의 말이요, 나를 본 것은 아버지를 본 것이라’고 하신 말씀은 너무나 정확한 표현입니다. 우리 인간은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볼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의 혜택, 믿음의 유익이 무엇일까요?
첫째 혜택은 이미 말씀 드린 내용 속에 다 들어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그 누구도 볼 수 없는 하나님을 알게 되는 특혜를 얻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을 보게 된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알면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기 때문에 이것은 인생의 전환점이 됩니다. 내가 누구이고, 무엇을 해야 할 사람이며 어디로 갈 것인가를 아는 길은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알아야만 깨닫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것은 대단한 혜택입니다. 육신을 입은 인간이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 예수를 믿는 첫 번째 유익입니다.
둘째 혜택은 주님의 능력을 사용하는 유익입니다.
12절에 보면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떠나가신다고 하시니까 제자들은 두려웠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훌쩍 떠나가 버리시면 우리는 이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고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너무나 불안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우려를 아셨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떠나가는 것이, 저 쪽에 가서 너희들의 거처를 만드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쪽, 너희들 곁에서도 더 좋은 일이 생기는데, 그게 뭐냐 하면, 그동안 내가 했던 일들을 너희가 하게 될 것이고, 그보다도 더 큰일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하셨던 일이 무엇이지요? 병자들을 고치고 귀신들려 정신을 잃은 사람들을 제정신 찾아주고,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보다 더 큰 것은 무엇일까요? 주님이 떠나신 뒤에 과연 그들이 주님이 하신 일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었나요? 예수님이 떠나신 뒤에, 그들은 물위를 걷지도 못했고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은 후 제자들은 과거에 없던 놀라운 일을 했습니다. 그 일이 무엇이냐 하면, 말씀으로 사람들을 변화시킨 일입니다. 물론 성령 받은 후, 그들도 예수님이 하셨던 것처럼 병자를 고쳤고, 귀신들린 사람들을 치료했으며, 죽은 다비다도 살려냈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하시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더 큰일도 했습니다. 그게 바로 복음의 말씀으로 사람을 구원한 일입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일은 하늘에서 불을 내리는 일보다도 더 큰일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셨을 때는, 아직 예수님이 죽으시기 전이기 때문에 속죄의 공로가 만들어지기 전이었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오시기 전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죽으신 후에는 믿는 사람에게 적용할 공로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오셔서 도우십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설교 한번 하니까 3천명이 회개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핍박 속에서도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이 계실 때 하셨던 일보다 더 큰 일입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알려주시면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격려하시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 드린 대로 내 속에는 끊임없이 죄 된 생각과 행동을 뿜어내는 악의 샘이 있습니다. 누구에게도 이것을 막아낼 방법도 힘도 없습니다. 모두가 그 솟아나오는 죄에 오염되어 생각도 더러워지고, 미친 행동도 하기 때문에, 겉으로는 점잖은 사람, 성공했다는 사람도 어느 날 추한 꼴을 드러내고 망가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수만명의 군인을 호령하며 지휘하는 장군도 아니고, 나라를 통치하는 대통령도 아니라, 사실은 자기 안에서 솟아나는 죄악의 샘구멍을 틀어막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일이 누구에게 가능하냐 하면, 나를 위해서 대신 죽어주신 아들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가능해졌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성령이 함께 해주셔서 자신 안에서 샘솟는 악한 충동을 억제할 힘을 주십니다.
아들 하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어주신 후에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마다 죄를 용서해 주셨고, 솟아오르는 죄를 극복하고 성령이 주시는 새 힘으로 살아가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전도할 때, 죄에 파묻혀 살던 사람들이 죄를 이기고 새롭게 사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주님이 가셔서 성령을 보내셨기 때문이고, 그들이 주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죄도 이기고 남들도 구원하는 능력이 예수님의 능력입니다. 사람이 예수를 믿어서 얻는 특혜, 믿음의 유익은 죄를 이기고 남을 돕는 능력입니다.
셋째 혜택은 기도를 하면 응답해 주시는 유익입니다.
13절을 보면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라.” 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성령을 우리 곁에 보내어 우리를 돕게 하신 주님은 하나님 우편에 계시면서 우리를 통하여 보고를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물론 주님은 우리의 보고를 통하지 않고서도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예수님을 믿고 복음을 전하며 사는 우리를, 당신에게 보고하는 정식 채널을 삼으셨습니다. 주님은 믿는 사람들의 기도를 통하여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정보를 얻으시며, 그들의 요청에 의해서 세상을 통치해 가신다는 말씀입니다.
전쟁이 나서 어디에 군대를 파견하면,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은 전장의 상황에 대한 정보를 여러 곳으로부터 들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대통령이 신임하여 보낸 사령관으로부터 정식 보고를 듣기를 원하고, 그가 요청한 바에 의해서 전략을 세우고 지원을 보내는 것입니다. 그것처럼 하나님은 비록 보잘 것 없는 우리들을 당신의 사람으로 삼으시고, 우리의 기도 보고를 통하여 세상을 통치해 가십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 신자의 특권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세상에서 예수님의 사람으로 살기를 원하셔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의 일을 하면서 겪는 어려움이나 모든 상황을 주님께 말씀드리기를 원하시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주님께 요청하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비록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주님이 이들을 파송하셨다는 사실과 이 사람들의 기도에 의해서 세상을 움직인다는 사실을 세상에 보여주고 싶어서 그러십니다.
믿는 사람들의 특권은 기도로 하나님을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능력 있게 살 수 있는 비결은 예수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많은 물질을 소유하는 것도 아니고, 많은 지식을 갖는 것도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예수님께 소속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저 아는 정도가 아니라, 마치 부부가 아내는 남편에게 속하고 남편은 아내에게 속하듯이,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어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시게 하는 것입니다.
요일 3:24에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라고 하였고, 요15:7에서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하신 말씀처럼, 우리가 철저하게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의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세상의 많은 것들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은 정통 유대인이었고, 베냐민지파이고, 바리새인이고, 로마시민권자이고, 가말리엘이라는 최고 스승에게서 배운 학자였습니다. 그러나 가졌던 것들을 한순간에 배설물처럼 여기고 다 버렸습니다. 그래서 자랑하거나 의지할 것이 없어졌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예수님만 의지하기 위해서였고, 자기가 철저하게 주님께 속하면 주님께서도 자기 안에 계실 것을 믿었기 때문이고, 주님께서 자기를 통해서 일하시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 덕분에 “자신을 약화시킬수록 강해지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완전하게 알려주기 위해서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께서는 우리를 통해서 이 세상 모든 것을 보시고, 우리를 통해서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과 하시는 일을 생활 속에서 늘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능력 있는 신앙생활을 하려면,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려면, 내가 가진 것들을 의지하지 않아야 하고, 그것을 자랑하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음속에 있는 모든 교만을 버리고 어린아이처럼, 사도 바울처럼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오직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고 오직 주님의 능력으로 살겠다고 각오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그 사람의 생애에 주님의 능력이 중단되지 않는 복을 주십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꾸미며 자신의 능력을 극대화하기를 원합니다. 이력서를 써도 자기가 대단하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쓰고, 옷을 입어도 자기를 보다 더 잘 보이게 하려고 입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시게 하려면 겸손해야 합니다.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고 오직 예수님뿐이라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그 사람에게 능력이 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는 총체적으로 병든 사회입니다. 시간이 지나고 입장이 바뀌었다고 생각도 말도 다 바꾸면서 자기가 옳다고 남들을 비난하고 싸웁니다. 양심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가치는 무시한 채 나만 돈 벌고 잘 사는데 목적을 둔 나머지 사회 전체가 붕괴되고 있습니다. 미국사회만 그런 것이 아니라 한국도 그렇습니다. 죽은 양심은 수많은 멀쩡한 사람들의 목숨도 빼앗아갑니다.
이 죽은 양심, 죽은 사회를 살리는 일은 대통령이나 시장 등 한 두 사람을 갈아치우거나, 어떤 시위나 캠페인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하셨던 것보다 더 큰일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런데 그 일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통해서만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여야 하고, 성령께서 그 말씀으로 잠자는 영혼과 양심이 깨어나게 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이 일은 대단한 사람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모든 것을 예수님께만 의지하고 주님께만 속한 겸손한 사람들을 통해서 일어납니다.
우리가 겸손하게 주님만 의지하는 참 신자가 되어서 주님의 능력으로 자신을 구원하고 세상을 살리는 진정한 주님의 사람들이 되십시다.
나를 믿는 자는 더 큰 일을 하리라
요 14:8-15 / 민경설 목사
미국에 '나과디아'라는 국제 공항이 있습니다. 이 공항은 나과디아라는 사람의 이름을 따서 지었는데 이 분은 유명한 재판을 한 재판관입니다. 홀아버지가 어린 아이 세 명의 자녀들이 굶는 안타까움에 빵을 훔치다가 빵집 주인에게 들켜서 재판을 받게 됩니다. 사정을 들은 재판관은 사정은 딱하지만 훔치는 것은 잘못이기 때문에 빵 값의 10배인 10불의 벌금을 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벌금을 자신이 내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국에 지도자들이 얼마나 지도를 못하면 빵을 훔치기까지 하는가. 빵을 훔치게 한 우리가 잘못한 것이기에 우리가 냅시다." 그리고 그 재판정의 방청객과 배심원들에게 모금함을 돌려 57불을 걷어 그 돈을 아버지에게 주었다고 합니다. 나과디아는 후에 존경받는 뉴욕 시장이 되었고 미국의 국제 공항의 이름을 나과디아라고 까지 짓게 되었습니다. 새해를 시작하면서 믿는 우리도 이처럼 넉넉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갖기를 바랍니다.
예전에는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일본순사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아이가 울면 일본순사가 잡아간다고 하면 울움을 그치곤 했습니다. 그 시절에 아이들이 모이면 서로 만나서 자랑하기를 좋아합니다. 터무니없는 자랑거리에 부러움을 사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옛날 사진첩을 정리하는 데 어떤 순사가 말을 타고 있는 사진을 발견하고 사진 속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는 채 아이들에게 친척이라고 자랑을 하자 친구들이 놀라면서 맛있는 것을 가져다주며 부러워하곤 했습니다. 한 번도 본 적도 없고, 친척도 아닌 사람의 사진을 가지고도 당당하게 살았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조금만 믿는 것이 있어도 당당한데 만물을 창조하시고 지배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을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요14:12) 이보다 더 큰 축복은 없습니다. '믿는다'라는 말은 단순하게 '어떤 진리나 뜻에 동의, 신용, 의지한다'는 차원이 아니고 '말씀을 믿고 진리를 믿는다'는 말은 '진리가 내 속에 들어와서 나의 지, 정, 의와 하나가 되어 나를 움직여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이신 예수를 믿으므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가 내 속에 오셔서 나의 지, 정, 의를 움직여 가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떠한 믿음을 가져야 하는가를 알아 보겠습니다.
1, 예수님과 하나님은 하나이시라는 믿음입니다.
(요14:11)"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하나님 아버지가 하신 일이십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그 분 속에서 역사하는 분은 아버지이므로 예수께서 역사하시는 모든 힘의 원동력은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둘째,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신앙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보여주시기 위해서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세째, 예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지금 맡은 하나님의 일들을 끝까지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복받는 사람의 비밀은 변함없는 성실한 태도입니다. .
2, 예수를 믿으면 예수와 내가 하나가 된다는 믿음입니다.
(요14: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면 예수와 하나가 됩니다. 그러므로 구주를 영접하고 성령을 체험하면 내 속에 역사하시는 분은 주님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힘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주님이 나의 생명'이라고 말하게 됩니다. 주님은 내 속에서 그 분의 뜻을 나타내시기 원합니다. 신앙생활은 내 뜻이 아닌 주님의 뜻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내 안에 계신 주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3, 예수의 영이 우리 속에 계신다는 믿음입니다.
(요14:13-14)"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예수의 몸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고 예수의 영은 우리 속에 와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의 몸이 됩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시행해주십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서 구해야 합니다.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서는 내 이름을 잊어버려야 합니다. 나를 위해 예수를 이용하려 하면 기도가 응답되지 않습니다. - 아 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