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원래 천으로 태어났습니다.
그 천이 기계 위에 올려져 조각 조각 내어지고
재봉틀 위에 놓여져 내 온몸을 이리 저리 실로 박아 대더니
보기 좋게도 남자용 야구모자가 되었습니다.
난 여러 모자들과 함께 백화점 진열대위에 오른 것은
태어나고 이틀 후였습니다.
"이거 얼마죠?"
모자코너 점원에게 그렇게 묻고는 나를 이리 저리
꿰 뚫어 보는 사람은 참으로 잘 생긴 20대 청년이었습니다.
난 그 잘 생긴 청년에게 선택됨이 무척이나 행복했습니다.
그는 나를 사서는 그대로 머리에 눌러 쓰고는 거리로 나서는 것이었습니다.
난 그 후로 하루종일 그 청년의 집안 옷걸이에 걸려 지내기도 하고
어느 날은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그의 머리를 감싸 안고 다녀야만 했는데,
내 안쪽에 그의 땀으로 가득 차 내 몸에서 역겨운 냄새가 나기도 하였습니다.
참 생김새하고는 다르게도 나의 잘 생긴 주인은 깨끗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럴 때 마다 난 밖의 공기를 마음놓고 흡수하였고 하늘을 바라보고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내 몸에서 그 역겨운 기분을 없애려고 안간힘을 쓰곤 하였습니다.
그렇게 무더운 여름이 지나고 선선한 가을이 왔습니다.
가끔 그의 머리에 얹어져서 거리를 걷다보면 떨어지는 낙엽이
나에게 내려 앉았다, 바람에 날려 가며 말을 걸곤 하였습니다.
"모자야 넌 좋겠다..난 이제 죽어 가는데..."
나는 그럴 때면 죽는다는 뜻이 뭔지도 모르면서도
그 낙엽에게 어떤 위로의 말을 해 줘야 할 것만 같았습니다.
"응..낙엽아 나도 썩 좋은 것만은 아니야...나름대로 서럽단다
난 너처럼 바람이 부는 대로 날아가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단다"
난 정말로 바람이 부는 대로 날아가고 싶었습니다.
매일 매일 반복된 생활이거나, 종일토록 볕 안 드는 방안 구석,
옷걸이에 걸려 지내는 나의 신세가 너무 한심스럽기까지 하였습니다.
'언젠가 나도 날고 싶어...저 낙엽처럼 저 새들처럼...'
나 자신의 삶이 정말이지,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친구 몇 명과 먼 곳으로 가을여행길에 올랐습니다.
그 날 새벽 이 모자, 저 모자 써 보더니 마침내 나를 선택한 그가
자신의 머리에 꾹 눌러 쓰고 차에 올랐습니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열려진 차창으로 불어치는 바람이 너무도 상큼했습니다.
그 때, 나는 소리쳤습니다.
'그래..이 정도의 바람이라면 나도 새처럼 날 수가 있어..야호'
그러나 그렇게 내가 소리치며 환호할 때, 그의 친구가 말했습니다.
"야...창문 닫아라..숨 막힐 지경이다"
그 한 마디에 나의 꿈이 산산이 부서질 것만 같았습니다.
난 몹시도 슬퍼서 눈물을 글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내가 그렇게 슬퍼서 눈물을 글썽이며
멀리 하늘로 날아 오를 계획이 수포로 돌아 가 버렸음을 안타까워할 때
그의 친구 한명이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는 것을 본 그가
고개를 돌리며 소리쳤습니다.
"야..안돼...창문 열어 줄께..여기에 토하면 안돼...."
동시에 그는 창문을 전부 열었습니다.
순식간에 차안으로 들이 치는 바람에 숨이 탁 막혔습니다.
나는 그 바람을 붙잡고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던
그의 친구 머리를 스치며 차창 밖으로 빠져 나왔습니다.
"앗..내 모자..."
'안녕...'
나는 날았습니다.
멀리 멀리 바람개비가 돌듯이 날 땐
정말이지, 어지러워 정신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야호....'
하늘높이 날아 올라 바람에 몸을 맡겼습니다.
그 때, 바람이 말을 걸어 왔습니다.
"모자야 안녕...어디에 내려 줄까"
"안녕 바람님"
그러나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바람님...제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모자답게 살고 싶어요"
바람이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그래 내가 알고 있는 한도 내에서 가장 너답게 살 수 있는 곳에 널 내려 주마"
그렇게 나는 바람에 몸을 맡기며 하늘높이 날아 올랐습니다.
그리고는 나의 손을 놓았습니다.
난 날개 부러진 새처럼 아래로 아래로 떨어져 내렸습니다.
"잘 가라..모자야...."
"안녕, 바람님..또 봐요"
내가 떨어진 곳은 어느 집 베란다였습니다.
그 때 창안에서 밖을 내다보던 어느 소년이 나를 보고는 소리쳤습니다.
"엄마 밖에 모자가 떨어 졌어요"
그 말에 소년의 어머니가 창을 열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어..이게 어디서 날아 왔을까?"
"엄마 나 줘 보세요"
소년은 머리는 하얀 붕대로 동여 매어져 있었습니다.
소년은 나를 받아 들더니 자신의 머리에 조심스럽게 썼습니다.
"엄마 어때요?..나 모자 안 사도 되겠어요"
"미안하구나...꼭 네가 갖고싶은 모자를 사 주고 싶지만..우리 형편에...."
"아니에요. 난 이 모자가 너무 좋아요..하나님이 주신 선물일거예요"
어머니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였습니다.
그제야 나는 바람이 말한 나다운 삶을 알 것 같았습니다.
그 뒤에 나는 그 소년과 항상 같이 했습니다.
난 멋이 아닌 소년의 머리를 보호하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오늘 아침 웬지 모르게 그 때 나를 보며
몹시도 기뻐하던 소년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 오릅니다.
지금 난 잘 생긴 청년의 머리 위에 씌워져 있습니다.
"어머님 다녀 오겠습니다"
"그래라..조심하구...아니 이제 그 모자 좀 버려라..너무 낡았어"
"아녀요..어머니 전 이 모자가 너무 좋은걸요..저를 이 모자가 살린 것 같아요"
청년은 그렇게 말하면서 나를 쓰다듬었습니다.
"그래..난 네가 고맙다..이렇게 건강해 줘서...어여 갔다 오렴"
"네...어머니"
청년은 서둘러 집을 나서려고 현관문을 열었습니다.
순간 거센 바람이 집안으로 들이 닥쳤습니다.
나는 그 바람을 타고 날아가고 있습니다.
"내..모자...."
'안녕..잘 지내요'
바람은 나를 집안을 통해 열려진 베란다문 밖으로 떠 밀었습니다.
멀리 청년이 나를 쳐다 보고 있었습니다.
마치 울 것만 같았습니다.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낡고 늙어 버린 자신이
또 어디엔가 가장 모자답게 살 수 있는 곳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바람에게 말했습니다.
"바람님 가장 모자답게 살 수 있는 곳으로 절 데려다 주세요"
"후후...모자야, 그래서 내가 널 데려 온거야"
"와..그래요...고마워요.우선 높이 높이 날고 싶어요"
"그래...자 날 꼭 잡거라"
나는 바람에 의해 높이 높이 날아 올랐습니다.
세상이 점점 아주 작게 보였습니다.
저 아래세상, 어느 곳에 꼭 내가 필요한 곳이 있다고 생각하니
참으로 마음이 따스해졌습니다.
한참 그렇게 높이 오르다가 바람이 말했습니다.
"모자야 저기 저 곳이야..너답게 살 수 있는 곳..."
"네 이제 다시 헤어져야 할 시간이군요"
"그래 난 항상 네 곁에 있단다..모자야"
"네 또 봐요...바람님..그리고 고마워요..안녕..."
"그래 모자야...안녕..."
내가 바람의 손을 놓자, 다시 아래로 곤두박질쳤습니다.
내가 떨어진 곳은 어느 쓰레기더미였습니다.
그 때 누군가 다가 왔습니다.
그 사람은 남루한 행색에 얼굴이 햇빛에
너무도 많이 그을린 가여운 노파였습니다.
손에는 여러 가지 폐품이 들여져 있었습니다.
"어..모자네...좀 낡았지만 깨끗한데..."
그녀는 나를 들어 탁탁 털더니 자신의 머리에 눌러 썼습니다.
나는 웃으면 말했습니다.
"안녕하세요..할머니..제가 햇빛을 가려 드릴게요"
그렇게 난 나다운 삶이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아름다운 가을이었습니다.
첫댓글 동화네요?..우리 아이들에게 들려 줘야 겠어요...잘 읽고 갑니다.
아이들에게 들려 줄 정도의 글이었으면 좋겠네요...^^고맙습니다.
와- 사촌동생에게 들려줄 동화예요. 찡한데요. 오늘 이런글을 많이 봐요^ㅇ^
읽어 주시고 기분 좋은 댓글도 달아 주시고 정망 고맙습니다...^^
와, 아름다운 동화이네요. 마음 한켠이 찡하니 울리네요. 잘 읽었습니다. 아서님 ^ㅇ^
고맙습니다..이화비밀비님..^^..
와우...님소설은 항상 시점이 특이해서 너무 좋아요....내용도 스토리도 정말 전 생각도 못해봐서..님 단편방에서 떠나지 마세요~ㅎ
떠나면 어디로 떠나야 하죠?..전 갈대가 없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