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飜譯書> 논픽션, 閔妃暗殺」 ②-1
플로로그--- 이케가미 혼몬지(池上本門寺)의 묘지에서
1984년(昭和59년) 6월 말 어느날 오후, NHK 사회교양부(당시) 中田 整一(나카타 세이이치)와 나를 태운 차는, 京浜(케이힌)제2국도를 달리고 있었다.
“혼몬지(本門寺) 옆까지 왔어요.” 中田(나카타)가 창밖을 보면서 말했다. “좀 들려볼까요. 진귀한 사람의 묘에 안내하지요”
아침부터 줄곧 내린 가랑비도, 개인 것 같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법회의식(法會儀式)」으로 유명한 이케가미 혼몬지(池上本門寺) 절 이름은 어릴 때부터 들어 알고 있었으나, 이 절에 와본 적은 없었다.
「일련종(日蓮宗)의 절」로 알고 있을 뿐, 지금부터 700년쯤 전에 일련상인(日蓮上人)이 여기에서 죽은 것도, 정문 편액(扁額)인 「本門寺」라는 문자가 혼나미 고에쓰(本阿弥 光悅)의 글씨(모각)라는 것도, 이날 처음으로 들었다. 정문으로 들어가, 높은 돌층계를 오르면서, 中田는 또 “이것은 가토기요마사(加藤淸正)가 시주한 돌계단이라고 합니다” 라고 설명해 주었다.
산문(仁王門)을 빠져 들어가, 대웅전으로 가는 똑 바로 뻗은 콩 돌 자갈길 바로 앞을 오른 쪽으로 돌아, 도쿄(東京)도에서 가장 오래 되었다는 5층탑에서 다시 왼편으로 꺾었다. 이 언저리 수목이 욱어져 어두컴컴하다. 장마가 그칠 때쯤이라고 하지만 비구름은 무겁게 드리워 진 체였으나, 가령 맑은 하늘이라도 햇볕은 거의 지표까지 닿지 못할 것이다. 묘지의 거무스름한 돌담에 머리를 기대선 수국(水菊) 꽃이, 해질녘이 가까워 젖은 대기 속에서 기묘하고 탐스럽게 피어오르고 있다.
5층탑 부근에서 「力道山의 묘」라는 화살표가 눈에 띄었다. 이 유명한 프로 레슬러는, 남쪽인지 북쪽인지 모르지만 조선반도 출신이 아니던가--- 本門寺가 가토기요마사(加藤淸正)와 인연이 깊은 절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그가 豊臣秀吉(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을 주도한 지휘관이라는 생각이 떠오른 나는, 역도산과 다시 한번 해후하는 우연을 기묘한 인연이라 생각하면서 걸었다.
“여깁니다” 하고 中田가 묘 앞에 멈춰 섰다. 좁은 정면에 비하여, 길이가 있는 좁고 긴 묘지였다. 입구의 사슬을 벗기고 안으로 들어가자, 여기도 또한 좌우 양쪽에 묘지 수목이 우거진 가지를 뻗고 하늘을 덮어 음울하다. 그렇지만 지상에는 등롱(燈籠)도 비석도 없으며, 터널의 막다른 막바지와 같은 안쪽 정면에 화강암 묘석이 단지 1기, 이쪽을 날카롭게 노려보는 듯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 앞으로 나가 묘석에 새겨진 한 줄의 문자를 읽는다.
東光岡本柳之助墓 (토우코 오카모토 유노스케의 묘)
東光이란 아마도 호일 것이다. 호를 제외하고 「오카모토 유노스케」라는 이름을 새삼 읽어 보았으나, 나에게는 마음에 와 닿는 것이 별로 없다.
“들은 적이 없습니까, 이 이름을” 中田가 말했다. “竹橋事件(다케바시지켄)의 주모자로 알려진 사내입니다. 그 사건은 아시지요?”
나는 가볍게 머리를 끄덕였다. 하지만 상세하게 알지는 못한다. 明治(메이지) 초기 쯤 이었던가, 무엇인가 불만을 품은 일단의 장병이 천황에 대한 직소(直訴)를 기도(企圖)하였다가 실패하고 다수가 처형되었다는 정도로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이 묘에 잠들어 있는 오카모토 유노스케도 그때 처형된 한 사람일까---
“아니지요. 오카모토는 살아 목숨을 부지 했습니다” 하고 中田가 말했다. “오카모토는 竹橋事件 한참 후에, 조선왕비 살해사건으로 다시 재판에 회부되어”
네!?--- 나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높이고, 너무나 뜻밖이어서 귀를 의심하면서 물었다.
“저--- 그것은 민비사건(閔妃事件) 입니까”
“아, 그렇습니다.” 中田는 내가 민비(閔妃)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에 좀 이외의 표정을 떠올리고 말했다. “岡本는, 민비를 살해하기 위해 왕궁에 밀고 들어간 일본인의 한 사람이 었다기 보다 그 지휘를 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민비 사건은, 내가 여러 가지로 월전부터 관심을 가져 온 사건이었다. 그러나 아직 자료도 읽지 않은 시기였으므로, 민비에 대한 관심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때까지 나는 「왕비를 죽인 일본인집단」 이라고 들었을 뿐, 사건을 구체적으로 상상하는 실마리가 없는 상태였다. 무대는 가본 적도 없는 한국의 서울이고, 시대는 이 또한 내가 아무런 지식도 갖추고 있지 못한 이씨조선 말기다. 가해자인 일본인은 군인인지 민간인인지 신분도 모르고, 그 가운데 한사람의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나에게 있어, 사건은 깊은 안개에 둘러싸인 것과 같이 몽롱했다.
그것이 지금, 왕비를 죽인 범인의 한 사람이, 뜻밖에 1기의 묘의 형태로 안개 속에 모습을 드러내어, 성명을 명시하고, 대결을 걸어오듯이 내 앞에 서 있다.
민비에 대한 나의 깊은 관심은, 국립교토(京都)국제회관 관장(당시) 後宮 虎郞(우시로쿠 토라오)와 처음으로 대면하던 날 시작된다. 내가 後宮와 만난 용건은, 한국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 그러나 그가 1972년(소화47년)부터 3년간 주한대사로 서울에 살았던 사람이므로, 용담(用談) 후 차를 마시는 시간에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서울시대의 추억 중에, 가장 강한 인상으로 남는 것은?”하고 물었다.
“참 여러 가지가 있는데요.....” 하고 後宮는 과거를 되돌아보는 듯한 조용한 미소로 대답했다.
“역시 박대통령 부인이 사살된 사건이지요. 그것은 1974년8월15일, 한국에서는 광복절이라고 하는 독립해방기념일 식전 회장에서 일어났던 사건입니다.” 회장은 중앙국립극장으로, 무대는 번쩍번쩍 눈부실 정도로 밝게 조명되어 있었으나, 객석은 효과를 올리기 위해 일부러 으스름하게 되어 있어....., 그 어둠은 범인에게 매우 좋은 조건이었지요.
그날은, 각국 대사가 초청되어 있었지요. 나는 2층 앞에서 두 번째 줄 자리였으므로, 무대 위에서 일어난 일은 잘 보였습니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아사히신문(朝日新聞) 축쇄판으로 이 사건을 다시 읽었다. 당일, 15일 석간에 「박대통령 저격당하다」라는 큰 표제어로 시작하였고, 보도는 연일 계속되고 있었다. 그리고 19일 석간에는, 오케스트라⦁박스에 오른쪽 팔꿈치가 잡힌 범인이, 연단 위의 박대통령에게 단총을 겨누고 있는 사진(뉴스⦁위크의 로저스 기자 촬영)이 실려 있었다.
後宮는 무대의 돌발사건을 보는 순간, <범인의 국적은>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대통령 부인 육영수(陸英修)여사는 총탄을 맞은 듯이 밖으로 실려 나갔으며, 범인은 바로 체포되어 회장은 대 혼란이 일어, 도저히 범인의 국적을 확인할 상황은 아니었다. 부득이, 後宮는 일본대사관으로 돌아갔다.
얼마 안 있어, 한국외무부에서 제1보가 날아들었다.
범인은 일본인---.
“큰일이 일어났다. 하고 몸이 조여드는 듯 한 느낌을 받았습니다.”고 後宮는 말한다. “이 사건이 일한관계에 어떤 악영향을 끼칠까, 머리를 싸매고 있었는데, 평소 친하게 지내던 미국대사가 전화로, 「범인은 일본인이 아니고, 재일한국인」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일본이 온전한 입장이 되는 것은 아니다. 사건이 일어난 지 얼마되지 않아 한국정부가 「범인은 일본여권을 소지했다」고 발표한 이래, 일본대사관은 시민의 데모에 둘러싸였다. 머리에 총탄을 맞은 대통령 부인은 그 후, 사망했다.
일본정부 측의 “재일 한국인의 범행이었으므로, 일본정부에는 법률상, 도의상의 책임은 일체 없다”는 발언이 보도되고, 그것이 한국 측을 자극하여, 김대중(金大中) 납치사건 이래 뒤틀린 양국관계에 더욱 어두운 그림자를 떨어뜨렸다.
일본대사관에 대한 시민의 데모는 이어졌다. 그들이 말하는 것은 「범인을 키우고, 권총을 ‘공급’한 것은 일본이다」 「범인이 한국인이라는 말은 하지 말라. 문세광(文世光)은 일본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며, 한글도 읽을 수 없는 한국인이란 말이 되는가」 「일본정부는 박대통령에게 사죄하라」 등이었다.
8월19일 대통령부인 국민장에는 田中 角榮(타나카 카쿠에이)수상(당시)이 참석했다.
그러나 수상의 방한에도 반일감정은 호전되지 않았고, 21일에는 200명의 데모대가 일본대사관에 밀어닥쳤다. 그날 저녁 무렵 일본정부는 「유감의 뜻」을 표명했다.
“그때의 한국대중의 일본에 대한 분노는 격렬했습니다.” 하고 後宮는 말했다. “일본은 또다시 우리 국모를 살해했다---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려왔습니다. 角田(츠노다\저자)씨, 아시는지요. 이 의미를”
대통령 부인을 「국모」라고 하는 것은 안다. 그러나 “또다시”란 무엇을 뜻 하는가---. 언제이든가, 일본인이 조선의 왕비를 죽였다고 어디에선가 들은 적이 있는 것같으나, 내 기억이 너무나 막연하여, 대답할 수가 없었다.
“많은 일본인이 왕궁에 난입하여, 민비라는 왕비를 죽인 사건이 있었던 것입니다” 後宮가 말했다. “오래 된 이야기지요. 메이지(明治)28년(1895년)이었으니까. 일본에서는 대부분의 사람이 알지 못하겠지만, 한국인은 일본과의 사이에 무엇인가 불쾌한 일이 일어나면, 이 「민비암살사건」을 생각해 내어, 뜨거운 감정으로 화제를 삼고, 그 결과 일본인에 대한 나쁜 감정을 부채질하게 됩니다.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그러면”하고, 나는 놀라서 반문했다. “한국에서는 누구나 그 오래된 사건을 알고 있습니까”
“네, 누구든지, 중학생이라도 알고 있지요. 아무튼 소설이나 TV, 영화 같은데서 되풀이하여 다루고 있으니까..... 「忠臣蔵(추신구라/역자 주 : 1702년에 구 아코번(舊赤穂藩)의 무사 46인이 주군의 원수를 갚은 사건을 제재로 한 조루리(浄瑠璃)와 가부키(歌舞伎) 등의 작품을 말한다)」을 모르는 일본사람은 없겠지요? 「민비 암살사건」은 한국의 「忠臣蔵」과 같은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