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아름다워(535) - 3∙1절에 만난 윤동주
금년으로 독립운동의 상징인 3∙1절 98주년을 맞는다. 3∙1절 아침 일찍 태극기를 게양하고 기념식 실황중계(KBS)를 지켜보니 이어서 기념특집으로 ‘시인과 독립운동’이 예고된다. 때마침 주민센터에서 윤동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빌려와 읽던 중이어서 혹시 윤동주를 다룬 내용인가 하였더니 예상대로다. 그에 앞서 주발의 방송프로그램(도전, 골든 벨)에서 윤동주 시인의 사연(고등학생들에게 ‘생전에 시집 한 편 내지 못하다가 29세에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옥사한 시인은 누구인가?’라고 묻는 문제)을 접하여 그처럼 유명시인이 생전에 시집을 내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인터넷을 살피니 3∙1운동이 일어나기 2년 전인 1917년에 12월 30일에 태어나 광복되기 6개월 전인 1945년 2월 16일에 떠난 짧은 생애의 흔적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그러고 보니 금년은 그의 탄생 100주기다.
빌려온 윤동주 시집은 1955년 그의 10주기를 맞이하여 정음사가 편찬한 초판본을 2016년에 원형 그대로 다시 펴낸 것인데 책에는 그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서시(序詩)를 비롯하여 별 헤는 밤, 자화상, 병원, 십자가 등 주옥같은 시들 외에 유명, 무명의 그의 유고들을 한데 모아 1부에서 5부로 나뉘어 실었다. 1부는 그가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할 무렵에 77부 한정판으로 출판하려던 자선(自選)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그대로 실었고 2부는 그 후 도쿄 유학시절 6개월의 시, 3부는 습작기 작품들, 4부는 동요, 5부는 산문, 책 말미에 그의 삶을 회고한 친우 정병욱과 동생 윤일주가 쓴 후기가 들어 있다.
동생 윤일주가 쓴 ‘형의 생애’를 통해 윤동주의 삶을 살펴보자.
‘2월 16일 동주 사망, 시체 가져가라’ 이런 전보 한 장을 던져주고 29년간을 시와 고국만을 그리며 고독을 견디었던 사형 윤동주를 알제는 빼앗아 가고 말았으니 1945년 일제가 망하기 바로 6개월 전이었다. 1917년 동주 형은 조국을 잃고 노기에 찬 지사들이 모이던 북간도 명동에서 교원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생가는 할아버지가 지은 기와집, 함경북도 회령이 고향인 할아버지는 어려서 간도에 건너와 황무지를 개척한 일꾼이요 교회의 장로였다. 동주의 아명은 해환(海煥), 아래로 누이와 두 동생이 있었다. 어려서 아동잡지 ‘어린이’의 애독자였고 명동소학을 거쳐 1932년 용정은진중학교에 입학하여 3년을 마치고 1935년 평양숭실중학교로 전학하였다. 신사참배문제로 숭실중학이 폐교되어 다시 용정으로 돌아와 광명중학 4학년으로 편입, 1938년에 의사가 되기를 원하는 아버지의 뜻을 꺾고 연희전문 문과에 진학하였다.
1931년 12월, 연희전문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는 졸업장과 함께 정성스럽게 쓴 시고집(詩稿集)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소중히 들고 왔다. 그가 마지막 집을 떠난 것은 1942년 7월, 도쿄의 릿쿄대학으로 유학을 간 후 교토의 도시샤대학으로 옮겼다. 1943년 7월, 귀향일자를 알리는 전보를 받고 역에 나갔으나 형은 나타나지 않았고 출발 직전 경찰에 잡혀갔다. 1944년 6월, 함께 잡혀간 고종사촌 형(송동주)과 2년 언도를 받고 한 달에 한 장씩만 허락되는 엽서 대신 1945년 2월에 서두의 전보로 집안사람들의 가슴에 못을 박았다. 형무소를 찾은 아버지와 당숙에게 전한 일본인 간수의 말, ‘동주선생은 무슨 뜻인지 모르나 큰 소리를 외치고 운명하였습니다.’ ‘백골 몰래 또 다른 고향에’(*윤동주 시, ‘또 다른 고향’ 마지막 구절 중) 가신 나의 형 윤동주는 한줌의 재가 된 체 아버지의 품에 안겨 고향에 돌아왔다. 10년이 흘러간 이제 그의 유고를 상재함에 있어 시집 앞뒤에 군것이 붙는 것을 싫어하던 형을 생각할 때 졸문을 주저하였으나 생전에 무명하였던 고인의 사생활을 전할 책임을 느끼어 감히 붓을 들었다.’
3∙1절 기념특집 ‘시인과 독립운동’에서 전한 윤동주의 삶이 뜻깊다. 독립기념관 전시실에는 나라 사랑 저항시인으로 5명을 소개하고 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이상화, ‘님의 침묵’의 한용운, ‘그날이 오면’의 심훈, ‘광야’의 이육사, ‘서시’의 윤동주 시인이다. 이번특집에서는 저항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의 표상으로 시인 소강석, 강희근, 탤런트 김예령, 가수 윤형주 등이 제작에 참여하여 윤동주를 행적과 정신을 심층적으로 다루었다. 3월 1일과 2일, 이틀에 걸쳐 방송된 1부 ‘윤동주는 저항시인이었다‘와 2부 ’행동하는 시인, 별이 되다’의 내용을 보며 메모한 것을 간추려본다.
‘윤동주는 해방 후 가장 사랑받는 시인으로 님은 갔지만 떠나지는 않았다. 그는 예언자적 저항시인이고 시를 통한 독립운동의 고뇌, 결심이 담겨 있다. - 특집방송에 참여한 소강석(시인이며 목사)의 말
윤동주는 직관으로 바로 이해가 되고 박수 칠 수 있는 시들을 썼다. 순결하고 수난의 시기를 온몸으로 겪은 희생의 표본이다. - 특집에 참여한 강희근 시인의 말
소년 시절에 별 같은 아름다움을 꿈꾸던 윤동주는 소녀의 감성으로도 쉽게 와 닿는 친근한 시인이다. - 김예령 탤런트의 말
윤동주의 시는 죽은 후의 모습을 예언하듯이 적어놓았다. - 윤동주의 6촌 동생인 윤형주 가수의 말
윤동주는 상냥하고 친절한 학생이었다. - 동지사대학 재학 중 교련수업에 불참한 것을 잘 몰랐다는 일본 동급생의 기억
징병제도에 반대하고 유학생모임 등에서 독립정신을 고취한 윤동주의 판결문에는 독립국가 건설이라는 죄목이 들어 있었다. - 호사카 유지(귀화한 일본계 정치학자) 세종대 교수의 말
10년이면 언어가 다른데 70여년이 지나서도 그대로 감정이입이 되는 윤동주의 시어가 감미롭다. - 일본 히메지 돆쿄대학에서 윤동주의 시를 공부하는 학생들의 말'
치안유지법위반으로 투옥되어 2년을 언도 받고 수감 중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사망한 그의 죽음을 둘러싼 의문은 아직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있다. 시를 통해 조선 민족과 문화의 부활을 꿈꾸며 쓴 그의 저항 시는 조선에는 희망이요 일본에는 위협이었다. 일본 도쿄와 교토에 ‘서시’를 새긴 윤동주의 시비가 세워져 있고 일본 고등학교 현대문 교과서에 ‘서시’가 수록되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일본어판 시집이 나오고 동지사대학에 세워진 시비를 찾는 일본인들이 연간 만 명에 이른다. 윤동주의 외할아버지는 간도지방의 지사인 김약연 목사로 그는 ’나의 행동이 곧 나의 유언’이라고 말할 만큼 올곧은 삶을 살았고 할아버지는 의사되기를 바라는 아버지를 설득하여 윤동주가 연희전문 문과에 진학하도록 허락한 선각자였다.
교통과 통신이 열악한 시절에 3∙1 운동 참여자는 전국적으로 수백만 명, 그 희생자도 수천 명에 이른다. 혹자는 총칼로, 혹자는 군자금으로, 더러는 맨몸으로 국내외 각지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한 선열들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특집방송의 마지막 멘트가 마음에 와 닿는다. ‘온몸으로 역사의 과제를 받아들인 시인은 오늘 우리 곁에 살아 있다.
* 윤동주의 친구 정병욱이 쓴 1955년판 '하늘과 바람과 병과 시' 후기의 일부를 덧붙인다. 곳곳에 윤동주의 시 구절들이 들어 있는 문장이다.
'다가오는 새 시대를 믿고 앞날의 역사를 내다보는 영감의 시인 윤동주. 모든 시인들이 붓을 꺾고 문학을 포기하며 현실과 담을 쌓아 헛된 한숨만 뿜고 있을 때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줄 알면서도 오직 혼자서 꾸준히 주어진 길을 걸어온 외로웠던 시인 윤동주. 급기야는 조국과 자유와 문학을 위하여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어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며 원수의 땅에서 마지막 숨을 거둔 순절의 시인 윤동주. 그는 드디어 원수의 발굽에 짓밟혔던 일제말기 조국의 문학사를 빛나게 하는 역사적 시인으로서 움직이지 못할 자리를 잡게 되었고 독재와 억압의 폭력에 끝까지 항거하여 싸운 온 세계의 레지스탕스 대열에 조국의 문학이 어엿이 낄 자리를 차지하는 영광을 누리게 하였다.'
첫댓글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겠다는 윤동주님의 다짐이 새삼 마음을 새롭게 합니다. 마음을 들여다보기에 좋은 글...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