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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문
김 선 희
남자가 집으로 가기 위해서는 옆집 문 앞을 지나쳐야 했다. 그는 옆집 문손잡이를 살짝 아주 살짝 소리도 나지 않게 조심스럽게 돌려보곤 했다. 옆집 사람이 이사 온 이후 생긴 습관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날처럼 옆집 문손잡이를 돌리는데 기대도 하지 않던 문이 열렸다. 남자는 문을 밀고 들어가야 하는가 고민하면서도 자신이 이미 문을 밀고 있어 놀라고 문안으로 들어서며 이미 문안으로 들어선 것에 더욱 놀라며 옆집으로 들어갔다. 어두운 안이 보였다. 구조는 남자의 집과 똑같았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1층 같은 반지하의 나란한 집 구조를 다르게 만들만큼 사람들은 부지런하거나 창의적이지 못했다. 복도가 긴 집이었다. 남자는 집을 처음 보러올 때가 떠올랐다. 자신의 집과 똑같게 다른 집이었기에 집을 보러 온 것만 같았다. 남자가 휴대폰을 보았다. 안심해도 될 시간이었다.
계단 두 개를 내려간 반지하의 집은 반지하 답지 않게 채광이 좋았다. 현관을 들어서면 길게 복도가 이어졌다 오른편으로 두 개의 방이 똑같은 크기로 자리하고 있었고 그 옆으로 욕실이 붙어있었다. 세면대도 없는 욕실에 세탁기까지 놓아야 해서 좁은 욕실이 더욱 좁았다. 수도를 따로 내거나 세탁기를 놓을 공간이 더 있을 수 없었다. 집이 지닌 유일한 단점이었다. 복도 끝에는 주방이 있었고 거실이라 불리지만 이름보다는 옹색한 공간도 있었다. 집에 처음 들어섰을 때 남자는 복도를 따라 책꽂이를 놓는 상상을 했다. 상상 혹은 계획대로라면 남자의 집은 들어서면 세 개 혹은 네 개의 책꽂이를 따라가야 거실이 나올 것이었다. 두 개의 방 중 하나에는 오로지 책꽂이와 책과 책상만 둘 것이고 환한 창은 암막커튼으로 막아버리겠다는 구체적 계획을 남자는 집을 보는 중에 만들어버렸다. 하지만 남자는 본가에서 책을 하나도 옮겨오지 않았고 남자의 복도는 그대로 빈 벽으로 남았다.
집은 한적한 주택가 골목 안쪽이라 조용했다. 낮이 이렇게 조용하면 밤은 더욱 조용하지 않겠는가 싶은 기대도 들었던 남자의 마음처럼 방 두 개는 괴괴한 침묵에 가라앉아 있었다. 남자는 방 한가운데 책상을 놓고 벽면을 책꽂이로 두르고 그 외의 일상은 모두 다른 방에 두고 방 하나에는 자신과 책만 있게 하겠다고 그런 생각을 길게 이었다. 생활이 스미지 않은 방이라니 상상도 아니고 공상이나 망상이 아닌가 싶을 정도라서 가벼운 흥분마저 일었다.
집을 보러 왔을 때 집주인은 신발을 신은 채로 집에 들어섰고 방한가운데 서서 그저 가만히 있었다. 집주인이 신발을 벗지 않았으므로 남자도 굳이 신을 벗어야할 필요를 느끼지 않고 그대로 따라 들어갔다. 그리고 집주인처럼 가만히 서서 집을 둘러보았다. 사실 움직일 필요도 없을 만큼 작은 집이라 눈으로 보는 것이 전부였다. 이전 세입자가 빠져나간 집은 고요했다. 집주인은 여느 주인과는 달랐다. 보통의 집주인들은 세입자가 될지도 모르는 상대가 조용할수록 더욱 열을 내어 집에 대해 설명하곤 했다. 볕이 잘 드는 집이라 장마철에도 제습기가 필요하지 않다는 말이나 여름에 선풍기만으로도 충분할 만큼 시원하다는 말은 봄에 많이 하는 말이었다. 외벽이 두툼해서 외풍 없고 따뜻한 덕분에 난방비가 적게 든다는 말은 가을에 하는 말이었다. 집에 덧붙이는 말들은 대체로 비슷했고 사람들이 주거공간에 바라는 것은 생각보다 크지도 거창하지도 않음을 보여주었다. 남자는 부동산에 열쇠를 맡기고 세입자가 들기를 기다릴 여유가 있는 집을 구할 형편은 아니었다. 그만큼 소란스런 집주인을 만날 수밖에 없었기에 조용한 집주인도 조용한 집만큼 마음에 들었다.
주방은 간소했다. 새로운 세입자를 기다리며 새로 한 것이 분명해 보이는 싱크대는 집을 보다 오래되어 보이게 했다. 싱크대 혼자만 간결하고 새로웠다. 천장은 날림의 집들이 그러하듯 보통으로 낮아서 본가의 높은 천장이 복이었음을 새삼 깨달았다. 흰색 싸구려 벽지로 덮인 흰 벽은 흰 벽으로만 있었다면 나름으로 충분했을 테지만 천장 모서리마다 체리 색 몰딩으로 덮여있어 촌스러웠다. 이사를 경험한 적이 없는 남자는 모든 것이 낯설었고 어떤 것도 평가할 수 없었다. 능숙한 척 수돗물을 틀어보고 보일러의 연식을 묻고 화장실을 살펴야 했지만 그저 집 여기저기를 힐끔거렸다. 집을 보러 다니는 일에는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집주인은 방 두 개의 크기가 같아서 두 사람이 각기 살기 좋다며 혼자냐고 물었다. 남자는 혼자라고 대답하며 괜히 콧날이 시큰했다. 고아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집이라기에는 옹색하여 방이라 불러할 집을 보러 다니던 남자는 서울 살면서 독립이라니 무슨 허영이냐고 스스로를 혼내며 본가로 돌아오는 일을 자주 했던 터였다. 비슷하게 값이 싸고 고만고만 초라한 집들을 돌아보고 본가로 오면 그렇게 안온할 수가 없었다. 애초 독립에 가까운 이사를 하려는 이유마저 흐려지는 편안함이었다. 이사 없이 20여 년째 한 집에 살아와서 그만큼 어지럽고 그만큼 정든 집안을 보며 안도감이 들기도 했다. 방을 보러 다닌 것에 지친 나머지 독립을 꿈꿀 만큼 지긋지긋하던 본가에 대한 미움이 사라지기도 했다. 남자가 변덕에 가까운 자신의 마음이 우스워서 다 그만두고 싶어질 때 지금의 집을 만났다. 독립하겠다는 말이 주변에서 잊힐 만큼의 시간이 흘렀을 때였다. 방 두 개는 그래도 집이라 해도 될 것이었다. 그렇게 남자의 첫 이사가 결정되었다.
남자는 안쪽 방에서 인기척을 느끼고서야 자신이 자신의 집 현관에 서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럼에도 남자는 조금의 놀람도 없이 서 있었다. 새삼스러울 정도였다. 방에서는 길게 기침이 이어졌다. 몇 번 스친 옆집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옆집 사람은 기침이 잦았고 길었다. 한 번 기침이 터지면 오래도록 기침을 이어갔는데 처음 들을 때는 옆집에 폐병 환자가 이사를 온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쿨룩대는 기침으로 시작해서 혀가 뽑힐 것처럼 세게 그리고 오래 이어지는 기침 소리를 듣고 있으면 남자는 명치가 아프고 머리가 울리는 기분이었다. 소리가 들리면 기침을 할 때 느끼는 통증을 전해 받는 것만 같아서 베개를 머리 위에 올리고 최대한 소리를 듣지 않으려 했다. 옆집 현관에서 듣는 기침소리는 남자가 자신의 집에서 듣는 소리보다 더 가깝지도 더 멀지도 않았다.
남자가 집을 계약하며 반했던 집이 지닌 조용함은 비어있던 옆집에 사람이 이사 오면서 깨졌다. 오래된 적벽돌 건물은 외부의 소음은 의외로 잘 막아주었지만 옆집과의 거리를 막아주지 못했다. 옆집과 남자의 집은 본래 하나의 집이어야 했던 공간을 나누어 두 개의 집으로 만든 탓에 두 집 사이의 벽이 얇았다. 남자와 옆집 사람이 사는 층만 B101, B102로 호수가 나뉘어 있었다. 1층부터는 방이 4개에 한 층에 한 세대가 살았다. 불필요하게 긴 복도는 두 집을 합하면 거실로 포함되는 부분일 터였다. 지하 1층에 지상 2층 그리고 옥탑까지 얹은 다세대 건물이었지만 반지하 세대로 통하는 입구가 따로 있어서 다른 층에 사는 사람들과 마주칠 일이 거의 없었다. B101, B102로 이름 지은, 얇은 벽을 두고 데칼코마니처럼 찍어낸 두 개의 집은 대칭 구조였지만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은 대척점에 있었다.
옆집 사람은 찾는 사람이 많았다. 택배 기사였다. 남자의 집과 숫자 하나만 다른 주소가 적힌 상자와 봉투가 일주일에도 몇 번이고 배달되었다. 옆집 사람은 낮 시간동안 집을 고스란히 비우는 통에 택배기사는 남자의 집 문을 자주 두드렸다. 초반에 택배기사들은 비어있는 옆집 문을 오래 두드리고는 이어 남자의 집 문을 두드렸다. 남자는 집을 울리는 소음을 견디며 가만히 있었다. 아무도 없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없던 것처럼. 택배기사들은 짧은 욕을 하며 옆집 사람에게 전화를 했고 무뚝뚝하게 부재를 확인했다. 그리고 옆집 문 앞에 택배 상자를 놓고 지하 계단을 둘 올라 파란 대문을 닫고 갔다. 어느 순간부터 택배기사들은 옆집 문을 습관처럼 몇 번 두드리고 문 앞에 물건을 던지듯 놓고 가버렸다. 계단 두 개를 오르는 발길은 언제나 뛰는 듯 쿵쾅거렸고 지하와 지상을 막는 파란 대문은 쇳소리를 내며 닫혔다. 남자는 방바닥에 누워 소음을 견뎠고 울림에 흔들렸다.
어느 날 남자는 옆집 문 앞에 택배 상자와 봉투가 던져지는 소리를 세며 하루 내내 바닥에 누워있었다. 다섯 번이었다. 그리고 그날부터 택배 물품을 확인했다. 이후 남자의 일과가 되었다. 남자는 택배기사들이 더 이상 오지 않을 시간을 끈질기게 기다리다가 옆집 문 앞으로 나가 택배 물품들을 확인했다. 송장번호와 주소가 적힌 종이에는 물품명까지도 친절하고 자세하게 적혀 있었다. 옆집 사람은 물품명을 숨겨야 할 만한 품목을 주문하지는 않는 듯 했다. 샴푸나 화장품, 비누 따위의 생필품에서부터 생수, 과자, 옷, 책 등등 구입 품목은 다양했다. 거의 대부분의 쇼핑을 인터넷 쇼핑으로 대체하는 모습이었다. 이윽고 남자는 옆집 사람이 아침에 케라시스 샴푸로 머리를 감고, 아이리스 생수를 마시고, 생리대는 바디피트를 쓴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서 책을 주문하는데 안타깝게도 택배 상자 겉면의 정보만으로는 주문한 책이 무엇인지까지 알 수 없었다. 밤늦게까지 잠들지 않는 옆집 사람은 독서로 밤을 보내는 것일까 남자는 궁금하기도 했다. 어떤 책을 읽는지 궁금했지만 남자는 택배 상자를 내려다보기만 할 수 있을 뿐 그 상자를 열어볼 수는 없었다.
남자가 서 있는 옆집 현관 한쪽에는 빈 택배 상자들이 쌓여 있었다. 수요일 저녁에 배출해야 하는 종이 상자는 날을 계속 놓쳤는지 상당한 양이었다. 택배가 오는 정도를 생각하면 이해가 되는 양이기도 했다. 말끔하게 착착 접어 묶어 세워둔 모습이 옆집 사람의 성격을 보여주는 것도 같았다. 좁은 현관을 더욱 좁게 하는 건 택배 상자 때문만이 아니었다. 신발이 많았다. 한쪽에 놓인, 플라스틱으로 조잡하게 칸을 나누어 쌓은 신발장은 이미 꽉 차 있었고 현관 바닥에도 신발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신발만으로도 옆집 사람의 취향이 선명했다. 낮은 굽의 하얀 운동화는 단정하고 편해보였다. 가느다란 굽이 인상적인 검은색 구두는 발목을 감싸는 끈이 달린 화려한 디자인이었다. 운동화는 편하게, 구두는 화려하게. 정확하게 나뉘는 취향대로 정리된 신발은 한 사람에게 이렇게 많은 양의 신이 필요한가 하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 게다가 신발들은 서로 비슷비슷해서 굳이 이렇게 닮은 모양의 신을 여러 켤레 사야할 이유가 있을지 의문마저 들었다. 남자는 자신의 발치에 놓인 신발들 중 하나에 자신의 발을 가만히 대보았다. 옆집 사람은 발이 작았다. 남자는 이미 옆집 사람의 발 치수도 알고 있었다. 며칠 전 택배 상자 겉면에는 선택 옵션 225, 화이트, 한정수량 깜짝 특가라 쓰여 있었다. 225 사이즈는 어느 정도 크기의 발일지 감이 오지 않아 280 사이즈인 자신의 발을 내려다보았던 남자는 지금 225 사이즈와 280 사이즈 차이를 정확히 알게 되었다. 쥐면 뿌듯하게 손을 채울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어 남자는 오른손을 쥐었다 폈다.
현관 구석에는 15kg짜리 고양이 사료가 푸대 째 놓여있었다. 남자는 고양이 사료를 배달한 택배기사가 했던 욕을 기억했다. 듣기 민망할 정도의 노골적인 욕설이 이해될 만큼 커다란 푸대였다. 프로베스트캣이란 이름이 쓰인 사료 푸대는 다른 덧입힌 포장도 없이 푸대 째로 배달되었다. 질긴 비닐 푸대 앞에 선 남자는 옆집 사람이 고양이를 키우지도 않으면서 15kg이나 되는 고양이 사료를 어디에 쓰려는가 싶어 의아해했다. 남자는 푸대를 바라보며 개를 마취제로 재워 상자로 배달하는 입양 서비스에 대한 인터넷 기사를 떠올렸다. 고양이까지 택배로 담을 수는 없을 것이라 생각하며 남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갔던 때가 있었다. 지금 보니 사료는 반 넘게 줄어있었다. 옆집 사람의 부지런한 산책의 결과일 것이었다. 그 옆으로 겹쳐 쌓은 높이가 적어도 30센티는 될 양의 빈 햇반 용기가 놓여있었다. 남자가 버린 것이었다.
남자는 본가에서 독립해 지금의 집으로 이사 온 이후 한 번도 집에서 밥을 해먹지 않았다. 사실 요리를 할 만한 주방은 아니었다. 새로 해 넣은 싱크대는 개수대와 그릇 몇 개를 올려놓을 공간이 전부였다. 가스레인지도 없었고 옵션으로 더해져 있는 냉장고는 냉동칸도 따로 있지 않은 작은 사이즈였다. 냉장고의 작은 크기에 반해 세탁기는 12kg짜리 통돌이 세탁기라서 좁은 욕실에 불편함만 더해주었다. 남자는 밥을 해먹을 일이 없었기에 냉장고가 클 필요가 없었지만 세탁을 자주할 일이 없었기에 세탁기가 커야할 이유도 없었다. 그 외에 가전제품은 역시 옵션인 전자레인지와 남자가 가져온 전기 주전자가 전부였다. 텔레비전조차 없었다. 남자는 전자레인지에 햇반을 데워 데우지도 않은 3분 카레를 그 위에 부어서 한 끼를 넘기거나 역시 햇반을 데워 참치캔을 뜯어 한 끼를 때우는 식으로 식사를 해결하곤 했다. 3분 미트볼이나 3분 짜장으로의 변주가 있었고 고추참치나 야채참치로의 변화도 있었다. 식사는 하루 한 번이었고 식사 후 빈 햇반 용기를 꼼꼼히 씻어 말려서 쌓아놓았다. 남자는 벌레가 생기는 것이 상상만으로도 끔찍했기 때문에 빈 햇반 용기와 참치 캔을 꼼꼼하게 닦았다. 남자의 냉장고는 생수통 외에 들어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단조로운 식생활이었다.
씻어 말린 참치 캔은 매주 목요일 새벽 2시가 되면 골목에 내놓았다. 캔은 폐지보다 비싼 값에 팔리기 때문에 폐지를 모으러 골목을 다니는 할머니들은 이를 경쟁적으로 가져갔다. 재활용 청소차가 지나는 수요일을 피한 것은 할머니들이 캔을 챙길 수 있게 하기 위한 남자의 배려였다. 플라스틱은 할머니들의 관심 밖이었기에 한 번에 모아 내놓을 요량으로 현관 한 쪽에 쌓이기 시작했다. 햇반 용기는 어느새 무릎 높이가 되었다. 남자는 이를 파란 대문 바깥에 내놓았다. 정확히 수요일 저녁이었다. 나온 김에 편의점으로 담배를 사러 가다가 그날따라 일찍 집에 돌아온 옆집 사람과 골목에서 마주쳤다. 남자는 인사도 없이 엽집 사람을 지나쳤지만 대문이 삐걱이며 열리는 소리에 맞추어 뒤를 돌아보았다. 옆집 사람은 남자가 보는 것은 모르는 것 같았지만 조금 머뭇대다가 햇반 용기를 뭉치 째 들고 들어갔다. 남자는 빈 햇반 용기에 무슨 용도가 있을지 의문이었지만 말릴 이유도 물을 까닭도 없었기에 그대로 편의점으로 갔다. 그때의 것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인지 그 이후로도 내놓은 햇반 용기도 옆집 사람이 챙긴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옆집 현관에는 햇반 용기가 쌓여있었다. 남자는 수요일이 아니더라도 옆집 사람이 올 것 같을 때에 맞추어 햇반 용기를 대문 앞에 내놓았다. 쓸모가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상당한 양이 현관에 놓인 걸 보니 옆집 사람이 그간 꾸준히 챙긴 것도 같아서 남자는 내심 기분이 좋았다.
이미 어두운 바깥에 맞춰 역시 어두운 현관 앞에 제법 서 있었던 탓인지 내부가 더 자세히 눈에 들어왔다. 현관을 따라 이어진 긴 복도에는 놀랍게도 책꽂이가 줄지어 놓여 있었다. 남자가 처음 이 집을 보러 왔을 때 상상하고 계획했던 것처럼 네 개의 책꽂이가, 첫 번째 방문 바로 옆까지 맞춘 것처럼 놓여 있었다. 5단짜리 책꽂이에는 빼곡하게 책이 꽂혀 있었는데 한 달에 한 번 알라딘에서 책을 사는 정도로는 채울 수 없는 양이었다. 남자가 이사를 계획 했을 때 제일 많이 든 걱정은 책 짐이었다. 남자의 독립에 사람들의 걱정이 뒤이었다. 책 짐은 나르고 날라도 티가 나지 않고 무겁기는 또 무거워서 이사 때 가장 힘든 종류의 짐이라는 말들이 들렸다. 그에 제풀에 기가 죽어 본가의 책을 옮겨오지 않았던 남자와 다르게 옆집에는 책이 가득한 것에 남자는 놀라웠다. 옆집 사람의 이사가 분주하고 하루 내내 걸렸던 이유는 책 짐 때문이었구나 싶었다. 남자는 약간의 옷가지와 이불 한 채 그리고 전기주전자와 스탠드, 몇 권의 책을 이삿짐의 전부로 삼았다. 천천히 옮겨오겠다는 생각은 생각으로 그쳤고 남자의 집은 거의 비어있는 상태였다. 단출하고 조용하고 초라하기까지 했던 남자의 이사와는 다르게 옆집 사람은 이사 당일 내내 시끄러웠다. 하루 종일 짐 나르는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와 말소리가 벽을 통해 남자에게 전해졌고 남자는 이날 하루만 시끄러운 것일 거라고 자신을 진정시켰다. 평소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천장만 바라보고 누운 채로 남자는 옆집에서 넘어오는 소음을 고스란히 듣고 있었다. 위층도 그 위층도 조용한 건물이니 옆집 사람도 분명 그럴 것이라는 근거 없는 확신과 자신처럼 조용한 사람만 세입자로 들일 거라는 집주인에 대한 까닭모를 믿음으로 그날 하루치 소음을 버텼다.
확신과 믿음은 다음날부터 이어진 소음으로 깨지고 말았다. 옆집 사람이 크게 시끄러운 사람이라기보다 집과 집 사이의 벽이 얇은 문제였고 남자 쪽에서 내는 소리는 거의 없다보니 옆집 사람은 벽이 얇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남자는 소음이 넘어오는 것에 맞추어 더욱 조용히 움직였다. 옆집 사람이 없을 때 소리가 날 일들을 해치우기도 했다. 그런 까닭에 옆집 사람은 방음이 잘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만 같았다. 조심스러울 일이 없었고 그렇게 소음이 넘어오는 것임을 남자는 시간을 두고 차츰 깨달았다. 깨달음이 있기 전까지 남자는 옆집 사람이 내는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만큼 자신의 소리를 죽여 나갔다. 내가 싫은 것은 남도 싫은 법이니 더욱 기척을 죽이는 것으로 옆집의 소음에 소극적으로 대항했다. 주황색 귀마개를 주물럭거려 귀를 막기도 하고 베개를 머리 위에 올리곤 꾹 누르고 버티기도 했다. 들리는 소리는 막을 길이 없었다.
소리는 정보가 되었다.
옆집 사람은 아침이면 오래 기침을 이어가며 깨어났다. 알람을 여러 번 다시 맞추며 시간을 미루다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 같았다. 알람이 길지 않은 간격으로 멈추었다 다시 울리곤 했다.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어하는 것으로 보아 옆집 사람이 저혈압은 아닐까 남자는 추측했다. 샤워기 물소리가 길게 이어지는 것으로 미루어보면 물을 맞으며 정신을 차리려 애쓰는 것이라 짐작 하기도 했다. 드라이기 소리도 길었다. 아침에 나는 가장 큰소리였다. 옆집 사람의 긴 머리카락을 떠올리며 남자는 이해하기로 했다. 남자는 당연하게도 드라이기가 없었다. 아침마다 양쪽 방을 부산하게 왔다 갔다 하는 소리가 이어지다가 문 열리고 닫히는 소리, 열쇠로 문을 잠그는 소리, 대문이 열리고 닫히는 금속성의 소리가 지나가면 B101, B102 모두에게 정적이 찾아왔다. 남자는 옆집 사람의 첫 번째 알람에 깨었다가 옆집 사람이 대문을 닫는 소리에 안도하고 천천히 다시 잠들곤 했다. 초반에는 다시 잠드는데 시간이 걸리기도 했으나 언제부터인가 남자는 옆집 사람의 아침 준비를 듣다가 다시 잠들게 되었다. 옆집 사람은 아침 일찍 나가서 저녁 늦게 들어왔고 규칙적인 일과 습관을 지니고 있었다. 바쁜 사람인 것 같았다.
남자는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하루 종일 누워 천장을 바라보는 것 그리고 물을 끓여 커피를 마시는 것, 마신 커피가 이뇨작용을 활발히 해서 길고 긴 소변을 보는 것이 남자의 주된 일과였다. 그것만으로도 남자는 일상이 넘치는 것만 같았다. 남자가 그나마 까다롭게 구는 것은 오로지 커피뿐이었다. 그렇다고 베토벤처럼 원두를 일일이 60알씩 세어 한 잔을 끓이거나 커피 거품을 보고 날씨를 예측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생두를 사다가 로스팅을 하거나 특정 산지의 원두를 고집하지도 않았다. 신맛이 강하지 않은 원두를 사다가 그때그때 그라인더로 갈아 드리퍼에 여과지를 올려 뜨거운 물을 붓는 것이 전부였다. 소박하다면 소박할 수 있는 고집이라고 남자는 생각했다. 한 때는 관리가 까다로운 융 드리퍼로 커피를 내리기도 했고 에어로프레스를 사다 원두를 바꿔가며 여러 잔 맛을 보기도 했다. 여섯 잔인가를 연속으로 마신 후에 심장이 빠르게 뛰고 왼쪽 관자놀이에 바늘이 박혀드는 기분이 들었을 때 남자는 생각했다. 우아한 자살의 방법을 찾았다고. 그런 모든 고집을 남자는 지금 사는 집 바깥에 두고 왔다.
이제 남자에게 남은 철칙은 두 가지 뿐이었다. 원두를 미리 갈아놓지 않는 것, 끓인 물을 다시 끓여서 커피를 내리지 않는 것. 이 두 가지만 지켜도 텅 빈 집이 커피 향으로 가득할 수 있었다. 남자는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주전자와 드리퍼 그리고 여과지만 있으면 되는 핸드드립 방식이 가장 간단했다. 모카포트로 뽑아내는 진한 커피가 간절할 때도 있었지만 남자의 집에는 가스레인지가 없었고 커피를 위해 가스레인지를 설치하는 것은 과한 일이었다. 물론 어느 날의 남자는 내일은 꼭 가스레인지를 설치하고 본가에 잠들어 있는 모카포트를 가져오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그런 날의 남자는 보통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아니 평소보다 더욱 일상을 낭비했으며, 유일하게 부지런한 일과인 커피를 내려 마시는 것조차 하지 않고 오래도록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런 날일수록 다양한 의지들이 무너져 내렸다. 남자는 흰 벽을 타고 내려앉는 일상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남자에게 의지가 넘칠 때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였다. 해야 할 일과 하지 않은 일과 하고 싶은 일을 떠올려가며 목록을 늘렸다 줄이며 그저 누워있었다. 옆집 사람이 부재한 낮 시간은 사방이 조용하고 골목을 지나는 사람들의 기척만 멀리서 들려서 그야말로 평화로웠다. 남자는 안쪽 방에 언제나 깔려 있는 이부자리 위에서 내키면 이불을 둘둘 말아 안고 있기도 하고 괜히 머리끝까지 이불을 쓰고 있기도 했다. 그러나 보통은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려 꼭꼭 덮은 채로 누워있었다. 눈에는 언제나 텅 빈 천장이 보였다. 당연했다. 남자는 천장을 보며 체리 색 몰딩을 따라 귀퉁이마다 이야기를 하나씩 만들었다. 네 귀퉁이를 모두 돌 때 즈음이면 하루가 지나기도 했다. 맨 오른쪽 귀퉁이에서는 해야 했던 일을 떠올렸고 했다면 어떻게 됐을 지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곤 했다. 다음 귀퉁이에서는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 지에 대해 상상했다. 하고 싶은 일에 대해 늘어놓곤 하는 세 번째 귀퉁이에 시선이 닿으면 다음 귀퉁이로 넘어가지 못하고 한참 이야기를 연해 곱씹었다. 마지막 네 번째 귀퉁이에서는 실패한 일들을 되새김질하곤 하는데 이미 일어난 일이 자동 연상되는 그 과정의 끝은 결국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앉았다가 다시 벌렁 누워버리는 일련의 행동이었다. 이렇게 한없이 사방 네녁의 달리기를 이어가는 안쪽 방의 이중창은 언제나 닫혀 있었다. 창의 바깥 유리는 투명하지만 안쪽 유리는 하운드투스 체크와 유사한 무늬가 들어있어 안에서 바깥을 볼 수도 없었고 바깥에서 안이 보이지도 않았다.
아침부터 해가 드는 방이었다. 하루 내내 해가 빠지지 않았다. 남자는 커튼을 달아서 빛이 들어오는 걸 막아야겠다는 생각을 거의 매일 하면서도 막상 움직이지는 않았다. 바깥에서 안이 들여다보였다면 다른 문제였을 것이 분명했지만 유리의 무늬는 부옇게 벽처럼 안과 밖을 나누었다. 남자는 커튼이 필요하다는 생각과 내일은, 이라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건너갔다. 미루다보니 계절이 넘어가고 있었다. 시간은 쉬웠다. 빛이 강하게 쳐들어 눈이 부시고 흰 벽지가 더 희게 빛나면 남자는 창문을 등지고 돌아눕거나 이불을 머리까지 쓰고 버티다가 답답함에 눌려 잠이 들었다. 답답함이 부른 뚜렷하게 기억나지 않는 악몽을 짧게 나눠 꾸다가 이불을 차내기도 했다. 그러면 빛이 눈꺼풀을 흔들었고 잠은 흩어졌다. 그렇게 깨어나면 남자는 내일은 꼭 커튼을 사다 달겠다고 다짐했고 그때마다 해가 지고 있었다. 그래서 남자는 매번 내일을 기약해야했다. 오늘이 다르지 않은 내일은 없는 것임을 남자는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지만 내일이란 말은 손쉽고 가벼워서 집어들 수밖에 없었다. 선뜻 집기도 편했다.
저녁으로 갈수록 방의 흰 벽은 빛을 잃었고 체리 색 몰딩도 더 어두운 색으로 물들다가 완전히 어둠에 잠겼다. 그때가 되어서야 옆집 사람이 대문을 여는 소리가 났다. 철컹이며 대문이 닫히는 소리, B101호의 문을 열기 위해 열쇠를 쩔렁이는 소리, 누름쇠가 풀리는 소리, 문 여닫는 소리가 나면 남자는 조심스레 방을 나가 복도 벽에 붙었다. 귀를 대지 않아도 소리는 쉽게 넘어왔다. 옆집 사람이 집으로 돌아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오디오를 켜는 것이었다. 남자가 커피 향으로 집이란 빈 공간을 채우듯 옆집 사람은 소리로 빈 공간을 채우는 것이라고 남자는 생각했다. 대체로 피아노곡이었는데 베토벤과 바흐를 좋아하는 것인지 아니면 음반이 그것뿐인지 의심스러웠지만 남자는 바흐 연습곡보다는 베토벤 소나타 쪽이 더 좋았다. 가끔 아이돌 노래가 섞이기도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빅뱅의 노래였는데 샤이니의 신곡이 나오자마자 바로 노래가 바뀌었다. 푹 빠졌는지 흥얼거리며 따라 부르는 소리도 들렸는데 남자는 옆집 사람이 노래를 잘하지 축에는 끼지 못한다는 평가를 내렸다. 하지만 옆집 사람이 작게 노래를 따라 부르다 멈추면 남자는 그것이 조금 아쉽기도 했다.
냉장고를 여닫는 소리가 나고 도마와 칼이 탕탕대는 소리가 나고 음식 냄새가 스며오면 옆집 사람의 저녁 시간이었다. 카레 냄새가 가장 잦았고 라면이 그 다음을 이었다. 자주 두부를 조리는 것 같았고 김치를 볶기도 했다. 요리에 양파를 많이 넣는 것이 옆집 사람 나름의 요리 방법 같았다. 매번 양파 익는 달달한 냄새가 넘어와서 남자의 위를 자극했다. 설탕을 적게 쓰고 그 대신 양파를 많이 넣어 단맛을 내는 요리법을 남자는 좋아했다. 옆집 사람이 만든 음식을 먹어보고 싶단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생선을 굽는 날이면 창문을 활짝 열어놓는지 생선 냄새는 잘 스며드는 때문인지 남자의 집까지 비린내가 진동했다. 그럴 때면 남자는 마일드 참치 캔을 뜯고 햇반을 데워 식사를 했다. 가진 먹을거리 중 그나마 가장 비린 것이었다. 혼자 사는 사람치고 몹시 부지런한 옆집 사람의 식사가 끝나면 설거지 치우는 물소리가 났다. 남자도 옆집에서 나는 소리에 맞춰 햇반 용기와 참치 캔을 씻어 싱크대에 엎어두었다. 식사 후 바로 설거지를 치우는 모습까지도 부지런한 옆집 사람이었다. 식사 후면 옆집은 조용해졌다. 간간 기침 소리가 들리고 같은 노래가 계속 반복되는 것 외에 별다른 기척이 없었다. 아침의 부산함과 다르게 밤이면 차분하게 가라앉는 옆집이라 소리가 끊어지면 남자는 그제야 벽에서 떨어졌다. 다시 안쪽 방으로 들어가 이불 속에 누워 어둠을 노려보는 일과를 이어갔다. 남자는 불조차 켜지 않았다. 그렇게 저녁이 지나 밤이 되면 남자는 산책을 했다. 남자가 집 아닌 곳에서 하는 거의 유일한 일이기도 했다.
남자의 산책은 옆집에서 사료를 담는 소리가 알림이었다. 쌀알보다 크지만 그보다 가벼운 사료는 소리도 컸다. 옆집 사람은 지퍼백에 사료를 담고 햇반 용기를 챙겨서 산책을 나갔다. 10시 이후 정해진 시간을 꼭 지켰으며 그 횟수는 일주일에 3일 정도였다. 날씨가 추워지면 산책은 더 잦아졌다. 골목을 돌며 길고양이가 있을만한 장소나 편히 먹이를 먹을 수 있을 곳을 찾아 햇반 용기에 사료 한 줌씩을 놓고 다니는 것이 옆집 사람의 산책이었다. 남자는 옆집 사람의 형상이 간신히 보일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며 그 산책을 따라갔다. 경계심이 강한 길고양이들은 먹이를 놓고 간 사람이 멀어진 후에 나타나는 경우가 많았다. 그 덕에 남자는 옆집 사람보다 더 많은 고양이를 만났다. 사료를 먹던 고양이는 남자의 발걸음 소리에 급하게 몸을 돌려 사라지기도 했다. 처음 남자는 자신이 지나간 후에 다시 고양이가 오는지 보기 위해 멀리서 기다렸다. 옆집 사람을 놓치면서까지 기다리기도 했다. 고양이들은 멀지 않은 곳에서 사료를 바라보고 있기도 하고 조심스럽게 다시 사료로 다가오기도 했다. 같은 시간대, 같은 장소에 먹이가 있어도 건드리지 않고 바라보기만 하는 경우도 있었다.
꾸준한 산책이 이어지자 고양이가 먼저 나와 기다리는 일도 일어났다. 옆집 사람은 고양이에게 말을 걸고 자주 보는 고양이일수록 기쁜 탄식을 내뱉고 한참을 그 자리에 앉아 고양이와 놀기도 했다. 남자는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남자는 인터넷을 통해 옆집 사람처럼 길고양이들에게 정기적으로 먹이를 주는 사람들이 캣맘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걸 알게 되었다. 겨울이면 허기진 고양이가 저체온증으로 죽기도 해서 사료 한 줌이 절실하다는 글도 보았다. 소박하고 간절한 걱정들이 길고양이와 함께 넘쳐났다. 옆집 사람이 겨울의 찬 공기를 견디며 산책을 나가는 이유였다. 늦은 시간 고양이가 다닐만한 골목은 어둡기도 하고 으슥하기도 했다. 남자는 옆집 사람의 산책에 더 열심히 동행했다. 옆집 사람과 남자 사이의 거리는 가깝지 않았으나 남자는 함께 걷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쩌다 산책에 동행하지 못하면 남자는 옆집 사람의 안부를 걱정 했다. 뒷모습이 더 익숙해서 길에서 만나도 바로 알아볼 자신이 없을 것 같았으나 남자는 옆집 사람을 잘 아는 것처럼도 느꼈다. 더 가까워지고 싶기도 했다. 그럴 때는 보폭을 빨리 해 거리를 좁혀보기도 했다. 옆집 사람은 고양이와 마주칠 기대에 예민하였을 뿐 뒤따르는 남자에게 관심을 나누어주지 않았다.
남자는 조심스럽게 옆집 문손잡이를 돌려보는 습관이 생겼다. 열릴 거라는 기대는 없었다. 남자가 맺는 사람과의 인연은 매번 화전민이 지나간 자리 같았다. 불탄 자리만 남을 뿐이었다. 그런데 문이 열렸고, 남자는 저신의 집과 똑같은 모양의 현관에 서서 이것은 계시라고 생각했다. 절박한 사람은 작은 우연도 필연처럼 포장해버릴 때가 있는 법이었다. 초대와 같다고 느꼈다.
남자는 책꽂이에 꽂힌 책들의 제목을 읽고 싶었지만 잘 보이지 않았다. 좀 더 알고 싶었다. 그렇다고 휴대폰 손전등을 켤 수는 없었다. 남자가 열고 들어온 문은 옆집 문이었고 서 있는 곳은 옆집 현관이었다. 시간을 보니 옆집 사람이 산책을 준비할 때가 가까워오고 있었다. 남자는 선택해야 했다. 문을 열고 나가 본래 가려던 자신의 집으로 들어가도 될 것이었고 문을 열고 나가 문을 닫고 정중하게 문을 두드려도 될 것이었다. 이대로 기침 소리가 나는 안쪽 방으로 걸어 들어가도 될 일이었다. 남자는 어느 쪽이든 가능하다는 사실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선택지가 여럿 존재한다는 만족감에 남자는 옆집 현관에 서 있는 지금이 무척 두근대고 설레었다. 어느 쪽도 좋았고 어느 쪽이든 좋은 결과로 이어질 것 같았다. 기대감은 망상을 불렀다. 어쩌면 옆집 사람은 ‘예쁜척하다 잠들 잠옷’을 입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남자는 쇼핑몰에서 옷에 짓는 이름들이 얼마나 우스운지 옆집 사람의 택배를 통해 알았다. 택배 봉투나 상자의 글씨들을 읽으며 소리 내어 웃을 때도 있었다. 가장 우스웠던 것은 ‘벨트가 헐렁하면 루즈벨트 원피스’였다. 그 긴 이름이 송장에 다 쓰여 있는 것까지도 우스워 남자는 어떤 옷이 그런 이름을 가질까 하여 택배를 뜯어보고 싶을 정도였다. 남자는 옆집 사람을 따라 산책할 때면 저 티셔츠가 ‘발레니 핑크’라는 이름을 가진 봄 신상 균일가 옷이려나 싶었고 신고 있는 양말이 ‘언니네 꽈배기 무지 아이보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걸었다. 복도가 끝나는 곳에 있는 바깥쪽 방에 옷들이 걸려 있을 것이었다. 남자는 옆집 사람이 있을 안쪽 방으로 들어가 어떤 옷을 입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옷들의 이름을 묻고 싶기도 했다. 옆집 사람이 기억하지 못한다면 직접 골랐을, 그렇게 우스운 이름들을 어떻게 잊을 수 있냐고 되묻고 싶기도 했다. 남자가 옷 이름을 줄줄 말하면 옆집 사람은 웃을 것 같았다. 고양이 앞에서 웃는 것처럼 남자를 향해 웃을 것이었다.
남자는 이 설렘을 좀 더 누리고 싶어졌다.
남자는 옆집 문을 열어보는 습관을 멈추지 않을 것이었다. 언제고 다시 문이 열릴 것이었다. 믿음까지 들었다. 남자는 조용히 아주 조심스럽게 옆집 문을 열고 나갔다. 그리고 다시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기침 소리와 샤이니 노래 소리가 문 안에 닫혔다. 남자는 자신의 집 문을 열고 들어가 문을 닫고 복도 벽에 기대어 앉았다. 옆집 사람의 산책을 기다리며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액정 화면의 불빛이 남자의 얼굴을 비추는 것 외에 집에는 불빛이 없었다. 이윽고 산책을 준비하는 부산한 소리에 이어 옆집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났다. 남자는 대문이 삐걱대는 소리를 기다렸다. 발소리가 멀어졌다. 남자는 조용히 문을 열었다. 산책 시간이었다. 동행자를 놓치지 않기 위해 남자는 신을 신었다.
문화일보 플랫폼 문 은 미 집을 나서면서 혜진은 저녁 반찬으로 마트에 새로 들어온 포장 불고기를 먹어보자고 했다. “상추만 더 사면되잖아. 편하겠다.” 혜진은 계산대에 포장 불고기가 올라올 때마다 개수를 세고 있는 것 같았다. 표정엔 안타까움이 역력했지만 손님이 이미 선택한 물건을 내려놓게 할 수는 없었다. 그러다 나와 눈이라도 마주치면 몰래 씩 웃고는 했다. 나는 따라 웃는 것 말고는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혜진이 손짓을 했다. “불고기들이 다른 세계로 떠나고 있어.” 그녀가 나에게 물건이 꽉 찬 봉투를 건네주며 말했다. 그녀는 계산대를 플랫폼이라고 불렀다. 다른 곳으로 가기 위해 거치는 레일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가끔 물건들 대신 계산대 자동레일에 타고 싶다고. 다른 아르바이트를 찾을 수도 있지만 굳이 마트에서 일하는 이유는 그것뿐이라고 했다. “조만간 내가 레일 위에 올라가는 걸 볼 수 있을지 몰라요. 그건 일종의 예행연습이에요.” 그녀와 처음 단둘이 술을 마셨을 때 그녀는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웃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그녀와 나의 동거가 시작됐다. 속이 꽉 찬 봉투 여섯 개가 배달을 기다리고 있었다. 각기 다른 물건이나 식품들로 삼만 원 이상 채워진 봉투들이었다. 트렁크에 배다른 형제들을 실은 다마스가 그르렁 하고 잠에서 깨어났다. 다마스는 억지로 일어나 느리게 움직이는 노년의 몸처럼 굼뜨게 움직였다. 매번 툴툴거리는 소리를 냈지만 나를 마트에 취직할 수 있게 해준 일등 공신이었다. 면접 날 매니저는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고 거창하게 쓰인 문 안쪽에서 나를 맞이했다. “다마스가 있네요.” 아직 때가 아닌데 머리가 성급하게 벗겨지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는 매니저가 이력서를 보며 꺼낸 첫마디였다. “아버지가 타던 차예요.” “배달에 이용할 수 있는 차가 있으면 채용에 가산점이 붙습니다.” 나는 생활비가 필요했다. 그래서 아버지가 타던 다마스가 여전히 아버지 소유이며, 아버지가 언제 다시 나타나서 소유권을 주장할지 모른다는 말은 덧붙이지 않았다. 혹은 말도 없이 다마스만 몰고 사라질 수도 있었다. 그는 종종 그래왔기 때문이다. 언젠가부터, 아마도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무렵부터, 아버지가 집에 돌아오지 않는 일이 우리 집에 흔한 일상이 되었다. 짧게는 한두 달씩, 길게는 일 년 넘도록 집을 비웠다. 처음엔 아버지에게 불행한 일이라도 생긴 것이 아닌가 걱정하던 엄마도 그가 결국엔 집으로 돌아온다는 막연한 믿음을 갖게 된 것 같다. 그런 엄마의 믿음은 깃털만큼 가벼운 것이었다. 아버지는 엄마의 임종을 보지 못했다. 그는 장례식 마지막 날, 아차 싶은 간격으로 집에 돌아왔다. 아버지는 엄마의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었지만 나는 그것이 엄마가 혼자서 다른 세상으로 가버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다마스를 달래며 첫 번째 배달지 주소를 내비게이션에 입력했다. 280㎖ 야쿠르트, 비엔나 소세지, 물먹는 하마, 신라면, 항균 행주세트, 플로럴향 페브리즈, 그리고 뽀로로가 그려진 어린이용 플라스틱 컵을 기다리는 고객의 주소였다. 벨소리가 울리고 곧 여자가 문을 열었다. 아무렇게나 동여맨 머리는 흐트러져 있었고 잠을 자지 못한 사람처럼 창백한 얼굴은 몇 시간 전보다 한층 수척해 보였다. 여자는 배달이 너무 늦은 거 아니냐며 짜증 섞인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대답 대신 묵직한 봉투를 내밀었다. 반투명한 봉투 사이로 뽀로로가 비쳤다. 여자는 하던 말을 멈추고 봉투 안을 들여다보는가 싶더니 서둘러 문손잡이를 찾았다. 닫히는 문틈 사이로 아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이는 여자와 마트에 올 때도 지치지 않고 울어댔다. 아이를 멈출 수 있는 것은 뽀로로뿐이었다. 종량제 봉투 안에 들어있는 플라스틱 컵이 곧 효과를 낼 것이다.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아파트 단지 내에는 어둠의 속도에 맞춰 공기 중에 음식 냄새가 스며들었다. 양손에 한 개씩 들려 있는 봉투에는 305호 사람들이 먹을 포장 불고기와, 308호 사람들이 먹을 포장 동태찌개가 들어 있었다. 창문을 통과한 불빛들이 어두운 복도에 기울어진 사각형을 찍어내고 있었다. 빛을 징검다리 삼아 301호를 지나고 302호를 지날 즈음이었다. 복도 끝에 까만 어둠이 보였다. 사람 두 명이 누울 수 있을 만한 크기의 둥그런 어둠은 끝을 알 수 없는 통로의 입구처럼 깜깜했다. 그것은 마치 이리로 들어오라고 손짓하는 것처럼 그곳에 있었다. 나는 그것을 우연히 마주친 길고양이를 대하는 것처럼 모른 척했다. 305호 여자에게 봉투를 건네고, 서둘러서 방향을 바꿔 왔던 길을 되돌아 308호로 갔다. 마지막 봉투를 배달하고 뒤를 돌아봤을 때 어둠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웃고 있는 혜진의 손에 검은 비닐봉투가 들려 있었다. 그녀가 먹고 싶어 하던 불고기와 상추가 들어 있을 것이다. 그녀는 다른 직원들에게 하는 것처럼 나에게도 의례적으로 느껴지는 인사를 했다. 내일 또 봬요.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나는 그녀처럼 능청스럽게 연기하는 것이 어려웠다. 시선이 오가기라도 하면 내일이라뇨? 우리 실은 같이 살고 있잖아요, 하고 말해버릴 것 같았다. 나는 혜진을 생각하며 창고 정리를 서둘렀다. 오늘도 그녀는 세 정거장을 간 후에 버스에서 내려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먼저 들어가서 기다리지 그래요?” 밖에서 기다리는 그녀가 안쓰러워서 물어본 적이 있었다. 동거를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혼자 어두운 방에 들어가기 싫어서 그래요. 신경 쓰여요?” “미안해지니까요.” “괜찮아요. 어두운 방에 들어가서 불을 켜야 하는 것 보다는 환한 밖에 있는 것이 좋아요.” 혜진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그녀는 불을 켜야 할 만큼 어두운 곳을 견디지 못했다. 불을 끄면 잠을 잘 수 없어요, 깜깜한 귀신의 집에는 들어가지 못해요, 극장은 어둡잖아요, 하는 식이었다. “어두운 곳에 가면 배가 아파요. 꼬르륵거릴 때 배 안에서 느낌이 나잖아요? 꼭 그래요. 살아있는 게 계속 움직이는 느낌이 어두운 동안 계속되는 거예요. 처음에는 내 착각인 줄 알았어요. 배 안에 뭔가가 있는 거요.” “배에 병이라도 있는 거예요?” 그녀는 그런 거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더 큰 무언가가 있으니 놀라지 말라는 표정도 덧붙였다. “배에 살아있는 것이, 그러니까 파리나 벌, 반딧불이 같은 것들이 들어있다고 병원을 찾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은 거 알아요? 그게 다 그 사람들의 착각일까요?” 나는 그녀의 농담이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내가 그녀에게 푹 빠져있다고 아무 말이나 해서 나를 놀릴 심산이라면 그만두라고 했다. “진짜예요. 병원에 가본 적도 있는 걸요? 결국 의사는 그것을 찾아내지 못했지만. 그러고는 스트레스가 원인일 수 있대요. 알죠? 의사들은 아무것도 모를 때 최후의 보루로 스트레스를 꺼낸다는 거요.” 그녀가 일어나서 짐을 옮길 때 가져왔던 트렁크를 열었다. 그 안에서 병원 진단서가 나왔다. 그녀가 말한 이야기와 같은 증세가 적힌 종이였다. “스트레스로 인해 배에 무언가가 살 수 있다는 얘기는 처음 들었어요.” “당연하죠. 그런 일은 없으니까요. 두 번째 찾아간 의사는 그래도 솔직했어요. 배 속에 들어 있는 것의 정체를 알 수 없다고 했어요. 하지만 원인을 찾으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도 했죠.” “원인을 찾았나요?” “찾고 있는 중이에요.” 이야기를 듣고 나서도 그녀의 머리가 어떻게 된 거라든지, 그녀가 위험할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도움을 주고 싶어졌다. 그래서인지 옆에 있는 그녀가 더욱 애틋해졌다.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요. 내가 곁에 있어 줄게요.” 그녀가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얘기를 들은 날 밤, 나는 밤새 등대 불빛이 바다 위 허공을 비추는 꿈을 꿨다. 등대의 꼭대기에는 혜진이 살고 있었다. 그곳에서 그녀가 땀을 뻘뻘 흘리며 혼신을 다해 불을 밝히고 있었다. 꿈을 꾸는 중이었기 때문에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길을 잃는 배는 없겠구나. 나는 등대가 보이는 어딘가에 서서 혼잣말을 했다. 두리번거리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몇 번 그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 간 적이 있었다. 그는 언제나 현관문을 활짝 열어둔 채로 짐을 받았는데, 현관 맞은편 벽 끝에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큰 가족사진이 걸려 있었다. 하지만 그 집에서 남자 외에 다른 사람을 본 적이 없어서 사진은 볼 때마다 기묘한 느낌을 주었다. 남자가 입은 짙은 회색 트렌치코트가 90년대의 주윤발을 떠올리게 했다. 어렸을 때 내가 살던 집에는, 정확히 말하면 방이라고 해야 하지만, 아무튼 아버지가 모아놓은 비디오테이프가 레고 블록처럼 쌓여 있었다. 상습적인 가출을 하기 전 시절의 아버지는 대부분의 시간을 영화를 보면서 지냈다. 비디오테이프가 VCR 안으로 들어가면 지지직거리던 화면이 멈추고 유리벽 안쪽에서 그 당시엔 바바리코트를 입은 남자들의 활약상이 시작됐다. 그들은 어째서인지 서로를 향해 총을 쏘고 피를 잔뜩 흘렸다. 그들의 사랑과 우정, 의리, 배신 같은 것을 보면서 아버지는 눈시울을 붉혔다. 조용히 눈물을 흘리는 것도 같았다. 그러면 나는 어린 나이에도 아버지의 삶은 퍽 진지하구나 하고 생각했다. 나도 삶에 대해 그와 비슷한 태도를 갖게 될 거라는 어릴 적 기대와는 달리 나는 영화를 보며 눈물을 흘리지 않게 됐다. 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르고 집에 와서 비디오를 틀고 울던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난 후부터였다. 나는 주윤발 대신 주성치를 택했다. 보이는 대로 총을 쏘고, 피를 한 바가지는 더 흘린 것 같은 상황에서도 주성치의 영화는 보는 이로 하여금 울지 못하게 하는 무엇이 있었다. 오히려 아파하는 주성치를 보며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는 게 고역이어서 그게 마음에 들었다. 트렌치코트를 입은 남자는 팔 위에 총 대신 애호박이니, 두부니 하는 것들을 들고 있었다. 주성치 생각에서 빠져나올 때쯤 그의 소매 안에서 뭔가가 튀어나오더니 바닥으로 툭 하고 떨어졌다. 와인 오프너였다. 남자가 주성치를 알았더라면, 그것을 집어 아무렇지 않게 품 안으로 넣던가, 적어도 목구멍으로 넘기는 척이라도 했을 텐데. 무엇을 하는 대신 그는 석고상처럼 서서 곧 울 것 같은 표정을 하고 나를 쳐다봤다. 나도 모르게 몸이 먼저 반응했다. 나는 이미 한 번 둘러보고 왔던 진열대 반대편으로 다시 넘어가서 새우깡, 자갈치, 홈런볼, 허니버터칩 같은 과자봉지를 정리했다. 뜸을 들이다 생필품 진열대 쪽으로 갔을 때, 트렌치코트 남자가 서 있던 자리에 빨간 오프너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그것을 조끼 안쪽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뾰족한 스크루 끝이 자꾸 가슴을 찔렀다. 그럴 때마다 아침 조회 시간에 매니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요즘 마트에서 물건을 훔쳐가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으니 주의 좀 해주세요. 일일이 다 잡을 수는 없지만 예상치 밖으로 손해가 커지면 일이 복잡해집니다.” “예상치가 뭐예요?” 매니저의 말이 끝나고 정육 코너의 김 씨 아저씨한테 물어봤었다. “그건 어느 정도 손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야. 완벽하게 일을 하는 것 같아도 어디에선가 빵꾸가 생긴다고 하더라고. 아무리 잘 살펴도 없어지는 물건이 생기기 마련이고, 사라지는 돈이 있기 마련이라는 거지. 근데 손가락만 한 것이 주먹만 해지면 그땐 곤란하니까 잘 보라는 거야.” 빵꾸는, 다시 말해 구멍 같은 건 도처에 존재하는 모양이었다. 내가 처음 까만 구멍을 봤을 때 그것은 작은 점에 불과했다. 감은 눈을 비비면 눈꺼풀에 맺히는 까만 점처럼 찰나로 생겨났다 사라졌다. 그런 이유로 처음 그것을 보았을 때 어떤 잔상에 지나지 않을 거라며 경계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는 사이 그것은 수박씨에서 포도알, 초코파이에서 프라이팬 크기로 점점 면적을 넓혔다. 까만 구멍이 항상 같은 명도를 지닌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주변의 색에 비해 짙었다. 어둠보다 더 까만 어둠이라니. 나는 두려움을 느끼기 전에 정체 모를 그것 때문에 내 삶에 뭔가 새로운 것이 펼쳐지고 있다는 얄팍한 기대감을 품기도 했었다. 하지만 인간이라면 이내 그렇듯, 나는 곧 그림자나 어둠, 어둠의 형체 같은 것은 두려움, 공포, 죽음 같은 것과 맞닿아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이르렀고 그 후로 어둠에 알은체하지 않았다. 한 번 눈길을 줬다가는 속을 알 수 없는 심연 같은 그것이 내가 발을 헛디디기만을 기다리며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닐 것 같아서였다. 나는 배달을 기다리고 있는 트렌치코트 남자의 봉투에 와인 오프너를 집어넣었다. 그 바람에 봉투가 조금 찢어지기는 했지만 개의치 않을 정도였다. 혜진이 이불을 걷고 내 옆으로 들어 왔다. 살갗에 닿는 그녀의 몸이 차가웠다. “그 여자 얘기해 줘요.” “누구요?” 혜진은 백합 아파트에 사는 여자에 대해 듣고 싶어 했다. “그 여자는 7동 15층에 살아요. 두 집밖에 없는데 맞은편 현관문이 열리는 건 본 적이 없어요. 우리 마트 고객이 아닌가 봐요. 처음 배달을 간 날, 그 여자가 물건이 빈다고 했어요. 전날 밤에 계산을 끝내고 분명히 봉투에 담는 것을 보았는데 아, 전날 배달 서비스가 끝나서 다음 날 아침에 가져갔거든요. 아무튼 어떻게 그 안에 없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말투였어요. 히스테릭한 말투 때문인지 연극을 본적은 없지만 연극배우가 있다면 저렇게 말하지 않을까 싶었어요. 나는 배달만 하기 때문에 모르는 일이라고 말했어요.” “당신을 의심하던가요?” 혜진이 내 쪽으로 돌아누우면서 말했다.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여자에게 영수증을 보여 달라고 했지만 그녀는 이미 영수증을 버렸다고 했어요. 나는 봉투 안의 물건을 손으로 뒤적거렸어요. 그리고 여자한테 물었죠. 없나요?” “없다니까. 차에 다시 갔다 와 봐요.” 내가 하는 행동을 빤히 보고 있던 여자는 그럼 그렇지 하는 눈빛이었다. 나는 도둑으로 몰리면 골치 아픈 일이 생길 거라는 두려움에 여자가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런데 뭐가 없다고 했더라?’ 1층에 도착하고 나서야 여자가 없어졌다고 우기는 물건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숨을 내쉬며 15층을 올려봤다. 여자가 나를 보고 있었다. 몸의 반 이상이 허공으로 넘어온 상태였다. 그냥 놔두면 아래로 떨어져도 이상할 것이 없을 만큼 여자는 위태로워 보였다. 뭐라도 찾아내서 여자에게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마스 트렁크는 비어 있었다. “그럴 리가 없어요. 분명히 없다고요.” 여자는 끝까지 배달되지 않은 물건이 무엇인지 말하지 않았고 없어진 물건을 찾아내라면서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나는 마트의 매니저에게 전화를 한 후에 간신히 풀려날 수 있었다. 매니저의 답은 간단했다. 원래 그런 여자야. 곧 텅 빈 복도에 철문 닫히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그 후로도 여자는 배달을 갈 때마다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마치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달라고 떼를 쓰는 아이 같았다. “어떻게 된 걸까요?” 혜진이 물었다. “뭐가요?” “다들 궁금해하잖아요. 더 이상 물건이 사라졌다느니, 일부러 가져갔다고 하지 않으니까요.” 여자의 봉투에서는 무엇이 빠져버린 걸까? 여자에게 배달을 다녀오면 종일 그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그것을 찾아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처음 넣은 것은 국자였다. 딱히 어떤 이유가 있기보다는 사람들이 마트에서 잘 사지 않는 물건이어서 그랬던 것 같다. 맨 앞의 국자를 빼고 뒤에 있는 것들을 앞으로 죽 밀어다 놓으면 감쪽같았다. 국자를 받은 후로 여자는 봉투에서 사라진 물건을 찾아 달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이제 괜찮은 것 같아요.” 여전히 호기심을 가득 담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혜진에게 말했다. “왜 억지 부리는 걸 그만두게 됐을까요?” “상황이 바뀌었겠죠.” 천장에서 비추는 형광등 때문에 눈이 부셨다. 혜진이 손바닥을 펴더니 내 눈 위에 가져다 놓았다. “좋겠네요…… 바뀌는 거요.” “바꾸고 싶은 것이 있어요?” 혜진은 내 말을 듣고 한참 동안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다시 불을 끄고 잘 수 있으면 달라질까요?” 여전히 내 눈을 가린 채 그녀가 말했다. 나는 대답 대신 한 손을 들어 그녀의 눈 위에 올렸다. 마트에 있는 물건을 가져다 몇몇 손님들 봉투에 넣기 시작한 것이 그 무렵부터였다. 처음에는 진열장에서 없어져도 티가 안 나는 물건을 주로 넣었다. 그러다 봉투 안에 어떤 질서가 존재하는 것을 발견했다. 일종의 삶의 축소판 같았다. 봉투를 들여다보면 어떤 기능의 샴푸로 머리를 감고, 무슨 향의 비누를 사용해 손을 씻는지, 화장실에서 부드러운 화장지를 선호하는지 알뜰형을 쓰는지 보였고, 옷에 정전기 방지제를 쓰는지, 어느 모델이 광고하는 맥주를 마시는지, 특정 라면에 대한 충성심이 높은지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지 등을 알 수 있었다. 거기엔 시간의 질서 또한 필연적이어서 떨어질 만한 때가 되면 어김없이 상품이 봉투에 담겼다. 그 삶의 질서가 나에게 안도감을 주었다. 나는 점점 더 대범하게 고객이 필요할 만한 것들을 봉투에 챙겨 넣기 시작했다. 아침 조회 시간에 매니저가 그의 사무실로 직원들을 불렀다. 주로 매장에서 조회를 하기 때문에 흔치 않은 일이었다. 사무실로 들어가자마자 눈에 들어온 것은 매니저의 책상 옆에 있는 모니터였다. 한두 개가 아니라 자그마치 아홉 개의 화면이 매장 구석구석을 비추고 있었다. 매니저는 잠시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직원들이 충분히 볼 수 있는 시간을 주고 싶은 모양이었다. 몇 초 사이에 모니터에 비치는 화면이 규칙적으로 바뀌었다. 아무래도 차례차례 정해진 장소를 비추는 방식인 것 같았다. 그만큼 CCTV 수가 늘어났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전에는 CCTV 사각지대라 불렸던 공간도 빈틈없이 화면에 들어왔다. 매니저가 책상 위에 있는 스틱을 잡고 이리저리 돌렸다. 과거에 유행하던 게임기의 조종기처럼 생긴 막대가 돌아갈 때마다 화면도 이리저리 회전했다. 토도독, 토도독. 스틱 돌아가는 소리가 심장을 노크하는 소리처럼 들렸다. “이게 바로 최신식 360도 회전이란 거 아니겠습니까?” 매니저가 호들갑스럽게 목소리를 높였다. “사장님이 특별히 달아주신 거예요. 이렇게 일하는 환경을 신경 써 주신다니까요. 다들 더 열심히 합시다!” 매니저가 직원들이 서 있는 가운데로 손을 내밀었다. 아무래도 손을 모으고 파이팅을 하고 싶은 눈치였다. CCTV를 우리를 위해 단 것일 리 만무할 텐데, 하나둘씩 직원들의 손이 탑처럼 쌓였다. 나도 마지못해 그 위해 한 층을 올렸다. 매장에서 물건을 정리하는 내내 나는 감시 받고 있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신경을 쓰지 말아야지 하면, 그것을 의식하느라 더 부자연스럽게 움직였다. 그도 그럴 것이 고개를 들 때마다 CCTV가 보였고, 그것들이 다른 누구도 아닌 나를 감시하기 위해 설치된 것들이라는 생각이 꼬리를 물고 따라 왔다. 얼굴을 보이면 형벌이라도 받는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인 채 물건을 정리하고 있을 때 여자 구두가 보였다. 여자의 발에 걸려 있는 구두는 언젠가부터 크기가 맞지 않고, 급기야 헐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나는 덜커덕거리는 소리가 여자를 위태로워 보이게 했다. 신발 위에 두 다리는 점점 뼈를 드러내며 앙상해졌고 지방과 근육이 서서히 빠져나가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말라가는 몸과 대조적으로 여자의 봉투는 점점 부피가 커졌다. 그녀는 마트에 올 때마다 공을 들여 장을 봤다. 혼자 먹기엔 많다 싶은 양의 식품을 담았다. 그것은 마치 여자가 든 봉투 안의 조화가 서서히 무너지고 있다는 경고 같았다. 봉투에 뭔가를 넣으면 막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마땅한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여성용품 섹션에서 그것을 찾았다. 반가운 마음에 손을 앞으로 뻗었다가 내려놓기를 반복했다. CCTV가 숨을 죽이고 다음에 펼쳐질 내 행동을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배달 시간이 가까워져 올수록 마음이 다급해졌다. 결국 나는 물건을 정리하는 척하다 몇 개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지나가던 여자아이가 그것들과 나를 번갈아 보다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나는 떨어진 것들을 다시 진열해 놓다가 재빨리 꾸러미 하나를 조끼 안으로 넣었다. 옆구리에 푹신하고 따뜻한 느낌이 전해졌다.마지막 봉투는 트렌치코트 남자의 집으로 배달되는 것이었다. 봉투 안에 레드와인과 올리브, 치즈 같은 것들이 담겨 있었다. 오랜만에 하는 배달이었다. 남자가 수줍은 미소를 지으면 봉투를 건네받았다. “잠깐 들어왔다 가시겠습니까?”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등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나를 소파에 앉게 했다. 막상 초대는 했지만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여서 지금이라도 급한 일이 생각난 것처럼 일어나서 나가야 하나 싶었다. “와인을 한잔하려는데, 잠시 말동무나 되어 주시겠어요?” 마침내 그가 마음을 정해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남자가 주방으로 들어가 있는 동안 나는 멀뚱히 거실 소파에 앉아 남자를 기다렸다. 뭐라도 해야 하나 싶다가 남의 집 살림을 무턱대고 만지는 것이 예의가 아니지 않나, 남자에게 물어볼까 하다가 이것저것 물어보자니 아직 그 정도로 친밀한 관계는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주방 입구 쪽에 있는 와인 냉장고에 시선이 갔다. 속이 들여다보이는 냉장고 안으로 와인 병들이 질서 있게 채워져 있는 것이 보였다. 와인 냉장고 옆에는 높이가 천장에 닿아 있는 장식장이 있었다. 집의 구조상 측면만 보일 뿐이었지만 언뜻 보아도 비싼 목재를 써서 정교하게 깎았다는 인상을 주었다. 남자는 우려했던 것보다 꽤 자기 세계를 즐기고 있는 사람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남자의 봉투에 집어넣었던 와인 오프너가 떠올랐다. 이 정도의 술 애호가라면 오프너쯤은 한두 개 구비해놓고 있을 텐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장식장의 정면이 보이는 곳으로 갔다. 그저 남자가 수집하고 있는 술이나 보자는 심산이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마주한 것은 뜻밖의 것들이었다. 값비싼 위스키나 코냑 대신 장식장 안에는 가위, 커터 칼, 와인 오프너 같은 것들이 정연하게 걸려 있었다. 그곳은 온갖 뾰족한 것들의 안식처였다. 장식장 내부는 목재와 비슷한 색깔의 벨벳 천으로 덧대어 있고, 두툼한 쿠션 같은 천 위에 꽂힌 핀들이 가위나 칼, 오프너를 붙들고 있었다. 물론 그의 컬렉션에는 내가 그의 봉투에 넣어 두었던 그 빨간 오프너도 있었다. 이렇게 다양한 가위나 칼이 있을 수 있다는 상상은 해보지 못했다. 실은 이렇게 다양하게 뾰족한 것이 존재한다는 것보다 그런 것을 모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상상해 보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만감이 교차했다. 마트에서 그를 자주 봤다는 이유로 아무 의심 없이 그의 집 안으로 들어온 것이 후회됐다. “안에서 오프너 좀 꺼내 주시겠어요?” 그렇고 그런 공포 영화에서 긴장을 고조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기법처럼 어느새 등 뒤에 그가 서 있었다. 나는 여차하면 무기로 쓰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 심정으로 가장 날카로워 보이는 오프너 한 개를 손에 쥐었다. 마트에서 산 와인과 안주가 그대로 식탁 위로 올라왔다. 남자는 마지막으로 와인 잔 두 개를 그와 내 앞에 놓았다. 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와인 오프너를 넘겨주는 것이 마뜩잖았지만 그것을 들고 버티면 부자연스럽게 보일 게 뻔해 어쩔 수 없이 그에게 오프너를 건넸다. 다행히 그의 손에 들린 오프너가 뚫은 것은 코르크 마개뿐이었다. 마른 팔로 안간힘을 쓰며 코르크에 스크루를 돌려 넣는 그를 보며 오히려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피처럼 붉은 와인이 잔에 담겼다. 그는 건배를 제의했다. 나는 와인은 처음인데……하며 어색하게 그와 잔을 부딪치고 한 모금 들이켰다. 상상했던 것과 전혀 다른 건조한 맛의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잔을 내려놓은 그의 시선이 내 등 너머에 꽂혔다. “놀라셨나요?” “조금…….” “놀라게 해드릴 생각은 없었는데 죄송합니다. 제겐 너무 익숙한 풍경이라 다른 사람의 시선은 고려하지 못했어요.” “날카로운 것을 모으는 게 취미신가 봐요.” 남자는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아뇨, 아닙니다. 취미라는 것은 수집하는 것에 목적을 두는 순수한 행위인데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목적을 가지고 산 것들이니까요.” 그는 5년 전 아내와 아들아이가 미국으로 간 후에 기러기 아빠가 됐다고 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가슴에 통증을 느꼈다. 그래서 병원에도 가보고 이런저런 검사도 받아봤지만 몸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는 얘기만 들었다. 어느 날 밤에는 가슴이 뻥 뚫린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잠에서 깼다. 그것은 그의 가슴보다 훨씬 큰 구멍이었다. 그 날 이후로 그는 자신의 삶이 그 안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다고 믿게 됐다. 그는 종국에 무(無)의 세계에 홀로 남게 될 것이 두려웠다. 그러던 중 그의 눈에 주방에서 쓰는 가위가 들어왔다. “그 작은 물건 하나가 내 고통을 끊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용기가 없었어요. 저 물건들을 사 모을 때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실행에 옮기기 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때는…….” 남자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는 마트에서 빨간 오프너를 보는 순간 이번에는 정말 고통을 끝낼 수 있을 것이라 예감했다. 그래서 운명에 이끌리듯 그것을 품에 넣었지만 나에 의해 미수로 끝나고 말았다. “그때는 정말 감사했습니다. 눈감아 주신 것도 모자라 봉투에 오프너가 들어 있어서 놀랐습니다.” 내가 다시 보낸 그 오프너가 가슴에 턱 막히더라고 했다. 그게 거름망이라도 된 것처럼 삶이 턱턱 그 오프너에 걸리기 시작했다고. 그는 내 손을 잡고 감격에 찬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던 계획을 알았더라면 그 오프너를 그의 봉투에 넣지 않았을 거라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집을 나서는데 그가 머뭇거리며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은색 가위가 들어 있었다. 곡선을 이루는 둥근 손잡이와 끝으로 갈수록 뾰족해지는 날이 분리 없이 하나로 이루어진 가위였다. 그가 내심 가위를 쥐는 나를 보고 싶어 하는 것 같아 양쪽 손잡이 안으로 손가락을 넣었다. 눈이 쨍하게 시릴 정도로 잘 벼려진 두 개의 날이 무엇이라도 가를 기세로 열렸다 닫히기를 반복했다. 밖에는 어느새 눈이 내리고 있었다. 한참 동안 눈을 맞으며 기다렸던 것에 항의라도 하는 건지 다마스의 툴툴거리는 소리가 사나웠다. 남자가 준 가위를 조심스레 옆자리에 내려놓았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 다급히 나를 찾는 혜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트에 도착하자마자 매니저의 사무실로 갔다. 그곳엔 매니저 외에 한 사람 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백합 아파트 여자였다. 그들의 등 뒤로 아홉 개의 내가 보였다. 매니저는 극적인 연출이라도 하고 싶었던 것인지, 생리대 봉지를 조끼 안으로 넣고 있는 내 모습을 아홉 개의 모니터마다 정지시켜 놓고 있었다. 그녀가 한 손에 생리대 봉지를 들고 덜거덕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걸어왔다. 내가 배달하기 전에 가까스로 봉투에 넣어 놓은 물건이었다. 그녀의 이야기 속에서 나는 그녀의 오래된 스토커였다. 필요한 물건을 어떻게 알고 쇼핑 봉투에 넣었는지 그녀로서도 모를 일이지만, 더 참기 힘든 건 이제 사용할 수 없는 물건까지 욱여넣어 그녀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라며 소리를 질렀다. 그녀의 말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억울함이나 수치스러움, 괴로움 같은 감정들을 구체적으로 꺼내 놨다. 그러는 사이 그녀의 사연 안에 나 말고 다른 남자가 등장했다. 결국 나는 이야기의 뒤편으로 물러났고 그 남자가 이야기의 중심이 됐다. 여자는 남자와 최근 완전히 결별한 모양이었다. 가정이 있는 남자였는데 평생 곁에 있겠다는 약속을 무르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나쁜 새끼. 항상 어딘가로 가버리는 새끼들이 문제야.” 여자는 제풀에 지칠 때까지 말을 뱉어냈다. 온갖 저주의 말을 퍼붓더니 종국에는 여전히 그를 사랑한다고 울먹였다. 그녀는 그를 데려다 달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잠시 나와 눈이 마주치기도 했지만 그녀가 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건지도 모른다. 결국 나뭇가지처럼 앙상해진 몸을 매니저가 부축해서 나가는 것으로 소란은 끝이 났다. 침묵과 뒤섞인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매장 안으로 돌아왔지만 혜진의 계산대는 비어 있었다. 멈춘 레일 위에 ‘종료되었습니다’라고 적힌 팻말만 놓여 있었다. 마트에서 세 정거장 떨어진 버스 정류장에서 잠시 혜진을 기다렸다. 그러는 사이 다마스의 시동이 완전히 꺼졌다. 우려했던 일이 결국 일어나고 만 것이다. 시동은 기다리다 보면 다시 켜질 수도 있었지만 나는 다마스를 두고 집으로 걸었다. 혜진과 동거를 시작한 후 처음으로 방에 불을 켜지 않고 들어갔다. 바깥과 연결된 문을 닫고 나자 마치 내가 있는 방 밖의 세계가 사라지기라도 한 것처럼 고요했다. 아버지의 동굴도 이랬을까. 엄마가 죽고 며칠 동안 서럽게 울던 아버지는 어느 밤에 현관 타일에 구두를 탕탕 구르고 나간 뒤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나는 그가 외출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문을 열어보지는 않았다. 아버지가 그해 최저 기온을 기록한 날 회색 양복만 입고 집과 반대 방향으로 가더라는 목격담을 전해준 사람은 세탁소를 운영하는 최 씨 아저씨였다. 내가 외투를 빌려주고 싶었는데, 라며 말끝을 흐리는 아저씨의 얼굴 위로 하얀 입김이 피어올랐다. 아버지가 발견된 것은 마지막 가출을 했던 그 겨울이 끝나며 봄이 오던 무렵이었다. 한 사람이 간신히 들어갈 만한 크기의 산속 동굴에서 언 몸이 녹고 있는 것을 길을 잘못 든 등산객이 발견했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왜 라는 물음을 가장 먼저 떠올렸다. 아버지는 평생 자신의 삶을 인정하지 않았다. 여기가 아니라 어딘가 다른 곳에 진짜가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가 지금 속해 있는 삶은 잠시 머물다 가는 정거장에 불과했다. 그곳에서 나와 엄마는 아버지를 기다렸다. 아버지가 어딘가에서 진짜를 찾으면 우리도 그곳으로 데려갈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을 품기도 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삶은 언제나 ‘여기’였다. 단 한 번도 ‘거기’가 된 적은 없었다. 아버지는 왜 동굴로 들어갔을까? 방의 암흑에 익숙해질 무렵 어둠보다 더 까만 어둠이 허공에 생겼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 눈을 꾹 감았다. 그리고 그것을 향해 손을 뻗었다. 팔은…… 그대로 쓱 어둠을 통과해 반대편으로 나왔다. 그냥 그뿐이었다. 그것은 나를 삼키지도, 나를 다른 곳으로 데려다 놓지도 않았다. 나는 어둠에 몸을 뉘었다. 내 몸에 꼭 맞았다. 어둠은 내가 외면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타인이 대신 들어가 몸을 맞춰 줄 수도 없었다. 나의 어둠은 내가 있기에 존재했다. 잠시 뒤, 다마스가 툴툴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류장에 있던 다마스를 이곳으로 가져올 사람은 혜진뿐이었다. 나는 혜진이 다마스에서 내려 방문을 열어주기를 기다렸다. 그녀가 온다면 그녀의 어둠을 핑계 삼아 피했던 내 어둠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놓고 싶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둠도 같이 일어났다. 불을 켰다. 순식간에 어둠이 사라졌다. 하지만 그것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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