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6일, 목요일 (17일째)
이르쿠츠크의 마지막 하루
새벽 네시경 잠이 깼다.
동쪽은 이미 붉은 기운이 감돌며 새벽이 오고 있었다.
오늘은 무엇을 하며 보낼까 고민하다 갑자가 생각이 나서 카잔스키교회와 나무집마을 130번 거리를 폭풍 검색했다.
그러다 일출을 보았다.
도시의 일출이라 특별한건 없지만 이르쿠츠크의 일출이라 카메라 셔트를 몇 번 눌러보았다.
가는 길을 정확히 알아보고 와이파이가 잘 터지는 로비에서 검색하려고 내려가보니 비송샘과
말순샘이 뭔가를 찾고 있었는데 말순샘의 캐시미어 쇼핑 봉지를 어제 로비 의자에 두고 객실로 올라갔는데 그걸 까맣게 잊고 있다가 아침에 불현 듯 생각이 나서 찾고 있는 중이란다.
돈도 돈이지만 가족들과 자신의 옷을 고르며 행복해 했던 말순샘을 생각하니 기가 막혔다.
데스크 아가씨에게 짐 보관소 키를 달라고 해서 가보니 아무리 찾아봐도 없다.
그래서 혹시 여기 옷가방 주워 놓은 거 없냐니까 모른단다.
일단 케이씨님이 일어나면 해결하기로 하고 두 분은 방으로 올라가시고 나는 아가씨에게 카잔스키 교회 가는 법을 물어보았다.
그런데 이 아가씨가 버스나 트램은 없다며 자꾸 택시를 잡아타고 가란다.
러시아는 우리나라처럼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타는 것이 아니고 택시를 호출해서 타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호텔에서 출발할 때는 데스크에서 택시를 불러 준다고 하지만 카잔 교회에서는 어떻게 택시를 부른단 말인가?(문제는 영어가 안 통하는 러시아에서 내 재주로는 전화로 택시를 호출할 방법이 없다는 거다.)
그래서 밖으로 나가 관광안내지도를 보니 카잔교회까지 큰 대로가 나 있어 버스나 트램이 지나갈 것 같은 확신이 든다.
아무래도 저 아가씨가 어제 애란님에게 리스트비얀카 갈 때 버스 타고 버스 터미널까지 가라고 말해 준 아가씨인 것 같다.
다른 아가씨는 중앙시장에 걸어가 거기서 버스 타고 가면 된다고 가르쳐줘서 편하게 갔는데...
그래서 그 똑똑한 아가씨가 나오면 다시 물어 보기로 하고 로비에 앉아 나무집마을 130번 거리의 맛집을 검색했다.
이때 산책하다 들어오신 조복래님과 처음으로 제대로 된 몇 마디를 나눌 수 있었다.
어느 순간 보니 데스크에 똑쟁이 아가씨가 나와 있어 카잔 교회 가는 법을 물으니 숙소에서 조금 걸어 나가면 트램 정류소가 있는데 거기서 5a를 타란다.(역시 사람은 발품, 입품을 팔아야 돼.)
오늘 움직일 동선을 알아보고 난 뒤 나도 산책에 나섰는데 거기서 유재명, 변순남 부부님을 만나 호텔로비에서 유선생님이 사주신 맛있는 커피를 마시며 변순남님과 뜻 깊은 시간을 가졌다.
변순남님은 제 작년 윈난에서도 그랬지만 이번 여행에서도 끊임없이 나를 격려해주고 도와주며 힘을 주는 분이다.
너무 일찍 일어나 설치는 통해 피곤해진 나는 아침 먹고 나서 짐을 싸고는 멍 때리며 침대에 한참을 누워있었다.
열시에 로비에 모여 출발했는데 트램 정류장에서 케이씨님과 일행을 만나 거기서 우리는 케이씨님을 통해 케시미어 분실물을 찾았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다.
우리는 너무 기분이 좋아 케이씨님을 얼싸안고 기쁨을 같이 했다.
이 순간 내 마음을 누르고 있던 무거운 짐 하나가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케시미어를 찾아내는 데는 CC TV를 돌려 봐야한다고 주장한 미경샘의 의견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애를 쓴 케이씨님이 공이 컸으니 케이씨의 인기는 상종가를 쳤고, 미경샘은 뽀시라기라는 별칭에서 똑띠라는 별칭으로 갈아타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 5a트램이 와서 타려는데 거기서 이숙님과 애란님이 내린다.
우리 보고 어딜 가냐고 묻기에 카잔교회에 간다니 다시 트램에 오른다.
이분들은 트램을 반대 방향으로 잘 못 타서 역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중이었다.
트램을 타고 가다 보니 중앙시장이 나오고, 어제 그렇게 고생해서 찾아갔던 발콘스키의집도 있다.(다시 한번 속이 쓰린다.)
트램에 내리니 바로 카잔 교회가 보인다.
외관이 얼마나 아름답던지 일행 모두 감탄을 한다.
어제 너무 지치게 해드려 미안했는데 이렇게 큰 기쁨으로 보상해드릴 수 있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동화 같은 외관과 정성스레 가꾼 정원이 아름다운 교회였다.
아름다운 음악이 흘러나오는 내부로 들어가니 외부 못지않게 아름답다.
이르쿠츠크의 여러 교회 중 이곳이 가장 정성이 많이 들어가지 않았을까 생각되었는데 정말 아름답고 섬세한 벽과 천정, 그리고 장식물에 반해서 한참을 머물렀다.
그리고 특별한 감동을 준 이곳에 함께 오지 못한 특별한 분들이 생각나 그분들에게 드릴 작고 소박한 선물을 샀다.
이 아름다운 교회를 오셨다면 두 분 다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지금까지 여행 다니며 성당이나 교회에서 물건을 사기는 처음이다.
밖으로 나와서도 예쁜 정원과 멋진 외관에 반해 한참을 사진 찍고 놀다 이숙님, 애란님과 헤어져 우리는 트램을 타고 중앙시장으로 갔다.
거기서 언니들은 도매시장에서 스카프로도 쓰이고 옷 위에 걸쳐 입을 수 있는 특이한 의상을 샀는데 가격이 무척 싸서 많이 들 구입했다.
나는 길이가 짧게 태어 난 관계로 어울릴 것 같지 않아 사지 않고 평만 열심히 해 주었다.
점심으로 케밥을 먹었는데 먹을 만은 했지만 그리 맛있지는 않았다.
잣을 팔기에 가장 작은 것 하나만 구입했는데 나중에 후회가 되었다.
들고 다니기에 힘이 들어 여행 마지막에 살려고 했는데 블라디보스토크엔 잣이 비쌌을 뿐 아니라 품질도 좋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이칼에서 생산 된 잣의 품질이 최고라고 했으니 이르쿠츠크 중앙시장에서 사는 게 최선이었던 것이다.
비송님, 미경샘, 말순샘은 화려한 꽃무늬 원피스를 구입하여 여행지에서 입고 다니겠다는 원대한 꿈을 안고 시장을 돌아다녔지만 그런 옷은 눈에 띄지도 않았고 너무 더워 쇼핑을 포기하고 그늘에서 한참을 쉬었다.
그리고 길거리에서 러시아 전통음료라는 크바스를 마셨는데 맥콜과 대추차 등을 혼합한 맛이었다.
한낮의 더위를 피해 한참을 쉬다 우리는 예쁜 카페 거리로 소문 난 나무집마을 130번 거리로 갔다.
여기서 변순남님 일행을 만났는데 내가 추천한 딸지 뮤지엄이 최고였다며 아주 기뻐하신다.
오늘 많은 분들이 나의 추천으로 딸지 마을에 가셨는데 모두 이렇게 만족해하시면 좋겠다.
오늘 순애샘은 우리와 떨어져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기로 했는데 성당 세 개를 돌고 우체국에 들러 엽서를 부친다고 했다.
다섯시에 순애샘과 만기로 한 장소에 영순샘과 나가서 기다리니 저 멀리 눈에 익은 한 사람이 걸어오고 있다.
순애샘이다.
나머지 일행과 분수대에서 만나 슈퍼에서 60여시간 동안 기차에서 먹을 장을 보고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저녁을 먹으러 갔다.
이탈리안 레스토랑은 가격은 비쌌지만 음식 맛이 아주 좋아 우리 모두 흡족한 저녁식사를 즐길 수 있었다.
버스를 타고 호텔로 돌아와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고 짐을 찾아 기차역으로 향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 여행의 하이라이트인 64시간의 긴 기차 여행이 시작된다.
우리가 탄 기차는 6인실로 기차에 타자마자 우리 모두 절망에 빠졌는데 인도의 기차를 연상시킬 만큼 더럽고 엉망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자리 옆에는 더러운 침구 보따리가 천정까지 쌓여 있었는데, 몽골리언 익스프레스의 쾌적함을 기대하고 탔다가 너무도 달라진 환경에 모두 넋을 잃고 앉아 짐을 풀 생각도 못했다.
선풍기조차 없는 실내는 얼마나 더운지 무거운 배낭을 지고 탄다고 안 그래도 용을 썼는지라 온 몸은 마치 폭발할 것 같은 열기에 싸여 있었다.
몽골리언 익스프레스 4인실에서 쾌적하게 지내다 갑자기 누추하고 불편해지니 마음이 살짝 힘들어졌지만 닥터지바고에서 생존을 위해 시베리아횡댠열차를 타고 짐짝처럼 실려 가며 기차 안에 바닥에 짚을 깔고 대소변을 해결하고는 코를 틀어막고 고통을 참던 장면을 생각하니 이것도 호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다 약소국의 백성으로 태어나 살던 집과 재산을 다 잃고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강제로 태워져 동토의 땅에 버려졌던 사할린과 연해주 동포들을 생각하니 자발적으로 이 고생을 선택한 나는 더 이상 불평을 할 수가 없었다.
어느새 마음이 편안하고 즐거워졌다.
두 번의 인도여행과 실크로드 여행으로 여러 번 기차를 탔는데 1층을 배정 받기는 처음이다.
이번에 결심한 것이 있는데 며칠 동안 씻지 않고 견뎌보는 것이다.
일행 중 한분이 눈 수술 후 한동안 씻지를 못했는데 오히려 피부가 살아나더라는 것이다.
누군가는 세안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어떤 게 맞는지 기꺼이 나를 이 실험에 참여 시켜볼 생각이다.
대금님이 주신 보드카를 조금 마셨을 뿐인데 덥고 술에 취해 소란스러운 와중에도 나는 바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첫댓글 카잔 성딩의 아름다움에 흠뻑 젖어 뜨거운 햇빛도 사랑했지요! 그리고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우리의 인내심을 시험했고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