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아
박세영
순아 내 사랑하는 동생
둘도 없는 내 귀여운 누이
내가 홀홀이 집을 떠날 제
너는 열여섯의 소녀
밤벌레같이 포동포동하고
샛별 같은 네 눈
내 어찌 그 때를 잊으랴
순아 너, 내 사랑하는 순아
너는 오빠 없는 집을 버리려고
내가 집을 떠나자마자
서울로 갔더란 말이냐
집에는 홀어머니만 남기고
어찌하면 못 살아
놈들의 꼬임에 빠져 가고 말았더냐
어머닌 어찌라고 너마저 갔더란 말이냐
그애 낸들 목숨이 아까워 떠났겠니
우리들의 일을 위하여
산 설고 물 설은 딴 나라로
달포나 걸어가지 않았겠니
어느덧 그 때도 삼년 전 옛 일
내 몸은 헐벗고 여위고
한숨의 긴 날을 보냈을망정
조국을 살리려는 오직 그 뜻 하나로
나는 양식을 삼았거니
너 내 사랑하는 순아!
빼앗긴 조국은 해방이 되어
왜놈의 넋이 타 버리고
오빠는 미칠 듯 서풍 모양 왔는데도
너는 병든 몸으로 돌아오다니
딴 시악씨드냐,
그 고왔던 얼굴이 어디로 사고
내 그 옛날 순이는 찾을 길 없고나
가여워라 지금의 네 모습
어쩌면 그다지도 해쓱하냐
어린 너의 피까지 앗아가다니
놈들의 공장 악마의 넉시이 아직도 씨였니
그러나 너, 내 사랑하는 순아
집을 돌보려는 너의 뜻 장하고나
낮과 밤, 거리거리로
입술에 북홍칠하고 나돌아다니는
오직 행락만 꿈꾸는 시악씨들보다야
왜놈의 턱찌끼를 얻어먹고 호사하며
침략자와 어울리어 민족을 팔아먹으려던
반역자의 노리개가 아닌 너 순아
차라리 깨끗하구나
조선의 순진하고 참다운 계집애로구나
(시집 『횃불』, 1946)
[어휘풀이]
-북홍칠 : 매우 붉은 색칠
-턱찌끼 : 턱찌꺼기의 준말. 먹고 남은 음식
[작품해설]
이 시는 시적 화자인 오빠가, 동생 순아가 열여섯 살일 때 조국을 떠나, 해방이 된 뒤 동생을 만나 보니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한 것에 대한 감흥을 읊고 있는 평이한 서술의 작품이다. 이러한 이 시의 서사 구조를 따르자면, 이 시는 네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단락은 1~4연으로 시적 화자의 누이의 과거에 대한 회상 장면이다. 그 때 ‘사랑하는 순아’는 ‘밤벌래같이 포동포동하고 / 샛별 같은’ 눈을 지닌 ‘열여섯의 소녀’였지만, 시적 화자가 ‘집을 떠나자마자 / 서울러 갔’다. 시골에서는 살 수 없어 ‘집에는 홀어머니만 남기고’ ‘놈들의 꼬임에 빠져’ 서울로 떠난 것이다. 시적 화자의 회한이 여기에 이르자, 둘째 단락인 5~6연에서는 먼저 집을 떠났던 자신에 대한 회상으로 접어든다. 그러나 그가 떠난 것은 살 수 없어서라기보다는 ‘우리들의 일을 위하여 / 산 설고 물 설은 딴 나라로’ 망명하여 간, 조국의 광복을 위한 선택이었음이 강조된다.
셋째 단락인 7~9연에서는 다시 고향에 돌아온 순아의 모습을 보고 느끼는 시적 화자의 분노의 감정을 드러낸다. ‘빼앗긴 조국은 해방이 되’었지만 ‘병든 몸으로 돌아’온 누이의 모습을 보고는 시적 화자는 절망과 안타까움을 느낀다. 그것은 가장으로서 집을 돌보지 못하여 어린 누이까지 공장으로 내몰게 된데 대한 자책감이자 동시에 일제의 간악한 수탈에 대한 뼈저린 분노의 표현이다. 그것을 시적 화자는 ‘놈들의 공장 악마의 넋이 아직도 씨’어 있다는 직설적인 어구로 드러낸다. 마지막 단락인 10~11연에서는 시상의 전환이 이루어진다. 이제 해방의 현실로 돌아와 시적 화자는 다시 적극적인 의지로 새 시대를 준비하고자 하고, 그럴 때 순아는 집을 돌보면서 오빠의 일을 뒷바라지하고자 한다. 그것을 시적 화자는 ‘그러나’라는 강한 부정의 접속어로 새 단락을 이끌면서, 과거의 아픔을 딛고 굳세게 살아가려는 새 시대의 민중상으로 파악한다. 따라서 이 단락은 해방이 되었다고 다시금 시대의 전면에 나서 부귀영화를 꾀하고자하는 친일 모리배들을 싸잡아 비판하는 시대적 메시지로 읽혀진다.
이 시는 시적 화자가 동생을 앞에 놓고 대화하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구어체의 표현이 그 묘미를 얻고 있다. 이와 함께 익숙한 일상적인 시어들을 통해 순아의 존재가 해방기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는 희생자로서의 이웃으로 표상될 분 아니라, 그럴수록 과거 친일파의 무리들에 대한 비판의 강도는 높아지게 된다. 이처럼 이 시는 분명하고도 선동적인 표현이 없이도 해방기에서의 정치적 색채를 잘 드러낸 대표적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소개]
박세영(朴世永)
백하(白河)
1907년 경기도 고양 출생
1922년 배재고보 졸업 후 중국 혜령영문전문학교에서 수학, 『염군(焰群)』 동인
1924년 귀국 후 사회주의 예술 운동에 가담
1927년 시 「농부의 아들 탄식」, 「산협(山峽)에서」 등을 발표하여 등단
1937년 배재고보에 근무
1945년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 조선문학가동맹 맹원
1946년 월북
1989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