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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을미사변(乙未事變, 1895)-일본군 명성황후 시해사건
경복궁 건청궁 옥호루
1900년 황태자 순종(純宗)이 임오군란, 갑신정변, 을미사변 당시 죽은 조선군인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로 사당은 헐어 없어졌다.
한편 일본인 낭인과 조선인 앞잡이들 앞에서 당당하게 나는 조선의 국모라고 호통쳤다는 공식 기록과는 달리 암살 직전 목숨을 구걸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영국 데일리메일의 기자이자 조선주재 특파원인 프레드릭 매킨지(Frederick Mckenzie)에 의하면 오카모토 류노스케가 방 한 구석에 숨은 여인을 발견하고 머리채를 붙잡고 왕후가 아니냐고 물었다. 그러나 왕후는 이를 부인하고 몸을 피해 마루 아래로 달아나려는 순간 일격을 당했다고 한다. 황현은 낭인들이 왕비의 정체를 확인하자 '살려달라고 애걸했으나 일본인들이 칼로 내리쳤다.'고 하였다.
명성황후가 절명한 시각은 사바틴이 현장을 떠난 지 20~30분 뒤인 새벽 5시50분 이후인 10월 8일 아침 6시 직전이나 직후로 여겨지나, 절명한 곳이 어디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여간 방 안에서 황후의 시신을 보았다는 증언은 많다. 또한 낭인들은 황후를 죽인 뒤에도 그들이 죽인 사람이 황후임을 알지 못하여 용모가 비슷한 궁녀를 세 명 살해하였다. 흉도 가운데 황후를 죽인 사람으로 자주 지목되는 사람은 데라자키 다이키치(寺崎泰吉)이다. 그밖에도 나카무라 다테오(中村楯雄), 후지카스, 구니토모 시게아키(國友重章) 등의 낭인과 미야모토 소위, 마키 등의 일본 군인들이 황후의 침실에 난입하여 칼을 휘둘렀기 때문에 누가 범인인지 지목하기 힘들다는 지적도 있다.
낭인들은 그들이 살해한 네 여인 가운데 누가 황후인지를 확인하는 방법으로는, 궁녀와 태자를 불러와서 확인했다는 설, 황후 얼굴을 잘 아는 고무라의 딸을 불러와서 확인했다는 설《매천야록(梅泉野錄)》, 황후의 얼굴에 있는 마마 자국을 확인했다는 설, 처음부터 초상화를 들고 들어왔다는 설이 제기되고 있으며, 이러한 여러 방법을 섞어서 썼으리라는 주장도 있다.
암살 직후
미우라 공사는 다음날 새벽에 고종을 면담하기 위해 궁에 들어간 뒤 황후의 시체를 직접 확인하고 나서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오기하라에게 급히 화장하라고 지시했다. 흉도들은 시신을 문짝 위에 얹어 이불을 덮고 건청궁 동쪽 녹원(鹿園) 순속으로 가져간 다음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고 석유를 뿌려 태웠다. 날이 밝은 뒤 타다 남은 유골을 궁궐을 순시하던 우범선이 우연히 발견하여 연못 향원정에 넣으려고 했으나, 훈련대 참위 윤석우(尹錫禹)가 혹시 황후의 시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이를 수습하여 멀리 떨어진 오운각 서봉(西峰) 밑에 매장했다. 뒷날 친일 내각은 윤석우를 비롯한 군부 협판 이주회, 일본어 통역관 박선(朴銑) 등을 무고하게 반역죄 또는 불경죄로 사형에 처했다.
나중에 명성황후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유해를 수습할 때 뼈에 재와 모래가 뒤섞여 신체 부위가 판명되지 않아 고양군에 사는 환관을 불러 그의 말을 들으면서 석회를 바르고 비단옷을 수십 벌 입혀 구부리고 포개고 묶어서 관에 넣었다. 《매천야록(梅泉野錄)》에 따르면, 궁내관 정만조가 이 광경을 목격했다고 한다.
법부 협판 권재형의 보고서(흔히 〈권재형 보고서〉)에 따르면, 고종은 흉도들의 주의를 따돌려 명성황후의 피신을 돕기 위해 밀실의 뒷문을 모두 열고 흉도들이 잘 보이는 방 문앞에 나와 서 있었는데, 흉도들은 칼날을 휘두르며 그 방에 들어가 고종의 어깨와 팔을 끌고 다니기도 하고, 고종 옆에서 권총을 쏘고 궁녀들을 난타하며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 또한 무단 침입을 꾸짖는 고종의 어깨에 무례하게 손을 얹어 주저앉혔으며, 태자도 다른 방에서 붙잡혀 머리채를 휘둘리고 관이 벗겨지고 칼등으로 목줄기를 얻어맞는 수모를 당했다.
당시 낭인들은 남의 나라 국모를 무참하게 죽이는 일에 가담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은커녕 일본 국가를 위해 충성하는 자부심에 가득 차 있었다.
그날 오전 9시 20분, 주한 일본 공사관 수비대 소속 니이로(新納) 해군 소좌는 본국(일본제국) 대본영 육군참모부에 전문(電文) 한 장을 보냈다. ‘극비’(極秘)라는 붉은 낙인이 찍힌 이 전문에는 ‘국왕무사 왕비살해’(國王無事 王妃殺害)라는 문구가 짤막하게 적혀 있었다. 그것은 일본 정부의 공식 라인을 통해 “여우사냥”의 성공을 알린 보고서였다.
1895년 10월 김해 사람 문석봉은 충청북도 보은 등지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의병을 일으켜 적당들을 토벌하자고 소리쳤다. 그러자 이곳과 인접한 읍의 유생, 선비들이 두건과 도포를 입고 나아갔지만 얼마 후 공주부에서 보낸 군사에 의해 모두 체포되었다.
을미사변이 일어난 10월 8일 아침에 고종이 미우라 공사에게 사자를 급히 보내 어젯밤 일의 내막을 묻자 미우라는 서기관 스기무라와 통역관을 데리고 궁으로 들어왔다. 고종은 아침 8시경 건청궁 장안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미우라와 스기무라, 그리고 자객의 우두머리가 옆에 섰으며, 흥선대원군도 들어와 고종 옆에 앉았다. 미국과 러시아의 공사도 소식을 듣고 궁으로 왔다. 미우라는 고종을 협박하여 김홍집 내각을 성립시켰다. 김홍집 등이 연락을 받고 궁으로 들어올 때 미우라는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황후의 시신을 직접 확인하고 화장을 명한다. - 《한국통사(韓國痛史)》에는 미우라가 고종을 알현한 곳이 건청궁으로 되어 있다.
김홍집 내각은 세 가지 조칙을 기초하여 고종에게 서압(서명)하라고 요청했다. 고종이 거부하자 그들은 서로 서압하고 물러났으며, 일본 군인들도 궁궐에서 철수하였다. 이날 군부 대신은 안경수에서 일본의 사주를 받은 조희연으로 바뀌었고, 권형진이 치안을 담당하는 경무사, 유길준이 서리내무 대신, 어윤중이 탁지부 대신, 장박(張博)이 법부 대신, 서광범이 학부 대신, 정병하가 농상공부 대신으로 임명되었는데, 이들은 황후 시해를 방조 또는 묵인한 이들이다.
사건 직후 미우라는 황후 시해 사건을 조선인의 반란으로 호도하는 공작을 폈다. 미우라는 이튿날인 10월 9일과 그 다음날인 10월 10일 외부에 공문을 보내었다. 그 와중에 군부 대신 조희연이 일본을 위해 거짓말을 하고, 미우라는 조선 외부(外部)와 군부(軍部)의 입을 통해 일본이 관여하지 않았다는 거짓 증명을 받아냈다. 사건 발생 다음날인 10월 9일에는 사바틴의 입을 막기 위해 친일 내각이 그에게 내무부 고문직을 제의했으나, 사바틴은 거절했다.
폐서인 조칙
한편 을미사변 직후 고종은 허수아비처럼 되었다. ‘대군주폐하’라는 존칭을 받고, 황제가 쓸 수 있는 ‘조칙’을 내리고 있지만, 자신의 의지로 내린 조칙이 없었다. 10월 10일(음력 8월 22일) 김홍집 내각은 ‘왕후’를 서인(庶人)으로 폐위하는 조서(詔書)를 김홍집 내각이 스스로 서압하여 고종의 명의로 발표했다. 그 가짜 조서에서 “옛날 임오 때와 마찬가지로 짐을 떠나 피난했다.”라는 거짓말을 하였다. 이때 서명한 이는 김홍집을 비롯하여 김윤식, 조희연, 서광범, 정병하 등이며, 탁지부 대신 심상훈(沈相薰)만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때 “나라의 원수를 갚지 않으면 벼슬하지 않겠다.”라고 말했으며, 그런 까닭에 고종으로부터 신임을 얻었다.
왕태자가 가장 먼저 명성황후의 폐위에 반발하면서 태자위를 양위(讓位)하겠다며 저항하자 다음날인 10월 11일(음력 8월 23일) ‘왕후’를 ‘서인’에서 후궁에 해당하는 ‘빈’(嬪)으로 승격시켰다. 10월 14일(음력 8월 26일)에는 황후를 새로 간택하라는 지시가 내려졌으나, 고종의 의사와는 관계가 없었고, 고종은 그 뒤로 1919년 죽을 때까지 황후를 새로 맞이하지 않았다. 명성황후 시해와 폐위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자 민심은 극도로 나빠졌으며, 재야에서는 황후의 복위를 요청하는 상소를 올리고, 복수를 외치는 의병운동(乙未義兵)이 전국에서 일어났다. 폐위 소식을 들은 외국 공사들은 고종이 직접 도장을 찍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준을 거부하니, 일본을 제외한 모든 나라가 같은 반응을 보였다. 특히 서울 주재 러시아 대리공사 베베르(Вебер К И )는 을미사변 사건 직후 서울 주재 외교 대표단의 회합을 주선하고,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에게 항의하고 일본 공사가 조선의 국모(國母) 시해사건의 주모자였음을 밝혀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을미사변을 조선인의 소행으로 돌리려던 미우라의 흉계가 실패로 끝나자, 일본은 미우라 공사를 비롯한 관련자 47명을 소환하여 히로시마 재판소에 회부했다. 그러나 예심 판사 요시오카(吉岡美秀)는 증거가 불확실하다는 이유로 다음해(1896년) 1월 20일 이들을 모두 석방한다.
일본과 김홍집 내각은 악화된 국내외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11월 26일(음력 10월 10일) 폐후 조칙을 취소하였다.
사건을 주동한 일본군 육군 소좌, 궁내부 및 군부 고문관 오카모토 류노스케, 일본인 영사관보, 낭인들의 길 안내인 호리구치 구마이치(堀口 九萬一), 주조선 공사관 무관, 일본육군 포병 중좌 구스노세 유키히코(楠瀨 幸彦), 일본인 영사관 경찰총수 오기하라 히데지로 등과 일본인 군인과 외무성 낭인, 일본 영사관 경찰 등 암살을 주동한 일본인 낭인들은 처벌받지 않았다.
조선인 최고 지휘자 흥선대원군과 고위 협력자인 유길준 역시 처벌되지 않았다. 그러나 황제 고종은 아버지 흥선대원군을 처벌할 수는 없었지만, 대신 대원군이 죽자 장례식에 불참한다. 대원군의 손자이자 자신의 조카인 이준용은 유학 형식으로 일본으로 추방한 뒤, 민씨 세력은 꾸준히 자객을 보내 이준용을 암살하려 하였으나 실패한다. 처벌은 이두황, 이주회, 박선 등을 처벌하는 선에서 종결되었고, 도피한 우범선은 민씨의 측근인 개화파 문신 고영근에 의해 암살된다.
폐후 조칙이 취소된 뒤 김홍집 내각을 타도하고 경복궁에 유폐되다시피 한 고종을 구출하여 미국 공사관으로 피신시키려던 춘생문 사건이 발생하자 김홍집 내각은 명성황후가 살해된 지 55일 만인 12월 1일(음력 10월 15일)에 그 사망을 공식 발표하고 국상을 치르려 했다. 이는 고종의 친위 쿠데타 세력인 정동파가 몰락한 분위기를 이용하여 국상을 치르려 함이었다.
1896년 2월 11일 아관파천이 일어났으며, 그날 고종은 조칙을 내려 김홍집 일파, 곧 김홍집, 유길준, 정병하, 조희연을 을미사적(乙未四賊)이라고 밝히어 역도로 규정하고, 그들이 진행시키던 국모 재간택과 이미 내린 폐비에 관한 조칙을 무효로 돌렸다. 1896년 3월 10일 김홍집 내각이 진행하던 국상 절차를 중단시키고, 무기한 연기하였다. 그 뒤 국상 일정을 몇 차례 더 연기하였다.
1897년 10월 12일(음력 9월 17일) 고종이 새벽 4시에서 6시 사이에 환구단에 나아가 스스로 황제에 즉위하고, 낮 12시에 왕후를 “명성황후”로 책봉·추존하였다. 이튿날인 10월 13일 아침 황제는 황후의 빈전에 제사를 드리고, 오전 8시에 태극전에 나아가 “대한(大韓)”이라는 국호를 반포하였다.
1897년 11월 22일 명성황후는 청량리 홍릉에 안장되었다.
고종은 사건 이전에 명성황후의 신변을 염려하여 여러 조치를 취한다. 시위대를 만들었으며, 그것으로도 안심이 되지 않아 서양인 궁궐 경비원을 고용하였다. 그러나 러시아인 경비원 아파나시 세레딘사바틴은 폭동이 있으리라는 정보를 중국인으로부터 받고도 방어 대책을 건의하거나 세우지 않아 고종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또한 시위대와 궁궐 경비원들은 사건 당일에도 새벽 2시에 이미 일본군의 수상한 동태를 파악했으나 안이하게 경비하다가 4시 30분경에야 고종에게 급보를 전했다. 고종은 왕후가 안전한 곳에 피신했다고 답변했으나 당시의 급박한 정황으로 보아 마땅한 피신처를 찾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했으리라 여겨진다.
당시 고종은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처럼 왕의 침전만은 감히 침범하지 못하리라는 예상하고 왕후를 침전인 옥호루에서 고종의 침전인 곤령합으로 부르고,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아 왕후를 일반 궁녀와 같은 복장으로 궁녀들과 함께 앉혀 폭도들의 눈을 피하려는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일본인 폭도들은 곤령합마저 서슴없이 유린하였다.
한편 봉건 군주 국가에서 마땅히 조선의 군대는 왕실 수호와 국토 방위에 헌신해야 함에도 조선 군대인 훈련대 일부는 일본 폭도들의 역모에 가담해 그들의 졸개로 궁궐 침입에 가세했다. 한편 연약한 조선 궁녀들은 일본 폭도들의 폭력과 협박 앞에 굴복하지 않았으나 1500명의 궁궐 경비병은 겁을 먹고 무기와 군복 상의를 벗어던지고 도주해 버렸다. 흥선대원군은 정치적인 원한관계로 민비 암살을 기도했고, 일본 영사관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다.
역사적 평가
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이 사건을 고종이 아관파천을 결정하게 된 주요 원인으로 보며, 또한 의병 봉기의 계기가 되었다고 여긴다. 또한 대한제국 성립의 한 원인으로 평가한다. 이 사건을 기회로 한국의 개화파들 중 일부는 일본으로 망명하게 됐다. 사건의 주요 가담자의 한사람인 조선군 1대대장 우범선은 후에 조선 조정에서 파견한 자객 고영근에 의해 암살된다. 대원군의 가담 여부에 대해서는 일본의 억측이나 누명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었으나, 1990년대 이후 바뀌었다. 1990년대 초 대원군의 가담 의혹이 제기되었다. 그리고 유길준이 미국인 은사 모스 목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흥선대원군을 조선인 최고위 협력자로 지목한 것이 알려지게 됐다. 이후 박은식의 한국통사와 황현의 매천야록 등 서로 다른 시각을 가진 인사들에 의해 흥선대원군이 명성황후 암살 협력자로 지목되었다.
사건을 조명함에 있어 조선인 협력자들의 존재 역시 간과하기 힘들다. 흥선대원군은 일본 공사관을 찾아가 명성황후 제거에 도움을 요청했는데, 이를 두고 여러가지 상반된 평가가 존재한다. 박은식은 춘추전국시대에 조돈(趙盾)이 왕을 암살한 것을 비유하여 이와 다를바 없다고 평가하였으며 감정이 사람의 양심을 가린다며 비판하였다. 편지에서 유길준은 명성황후 암살은 실행되었지만 흥선대원군이 명성황후 암살 문제를 일본공사와 협의하고 일본측에 약간의 도움을 요청한 것은 큰 실수였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유길준은 '도움을 얻기 위해서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는 의견도 덧붙였다.
대원군을 암살 배후로 지목한 유길준 역시 일본 낭인들의 지휘자로 지목됐다. 윤치호는 그의 일기에서 명성황후를 암살한 일본 낭인들의 지휘자 중 한사람이라고 지목하였다. 명성황후가 암살당할 무렵 윤치호는 유길준과 일본인 이시쓰카가 사건의 전말을 눈치채지 못하게 하려고 자신을 저녁 식사에 자신을 초대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당대에도 조선인 협력자들의 이름이 지목되었으나, 유길준은 피신했도 대원군은 고종의 생부이니 처벌할수 없었으며, 처벌은 일본 공사관 통역관 박선, 전 군부차관 이주회 선에서 종결되었다.
한국의 친일파나 일본의 극우 인사들은 한국의 근대화를 방해하는 “민비”를 처단함으로써 한국의 근대화를 촉진하였다고 주장한다. 반면 그와 같은 주장에 대해 서구화만을 근대화로 오해하여 자주적 근대화를 수구·반동으로 여겨서 일으킨 폭거라는 시각도 존재한다.
일본 아사히 TV 보도
2009년 8월 일본 아사히 TV의 "보도 스테이션"은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대한 프로그램을 방영하였는데, 범인들의 후손중 카와노 타츠미와 이에이리 케이코가 명성황후의 후손을 만나 사죄하는 모습을 담았다. 일본의 일부 극우익 성향의 네티즌들은 "역사 위조, 허위보도"라고 하기도 했으며 "황후를 살해한 것은 조선인들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아사히 TV 보도 이후 전독립기념관 관장 김삼웅은 을미사변에 참여했던 한성신보 주필 구니토모 시게아키의 외손자 카와노 타츠미를 만나 개인적인 반성과 용서에 그치지 않고 일본 정부가 반성하고 사죄할 수 있도록 적극 제안해 달라고 요청했다.
명성황후 생존설
정상수 한국방송통신대 교수는 2013년 6월 30일 을미사변 당시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게 살해되지 않았다는 내용의 독일과 영국의 외교문서를 찾았다고 밝혔다. 정상수가 찾아낸 외교문서에 따르면 을미사변이 일어난지 4개월 후인 1896년 2월 6일 러시아 주재 독일대사 후고 라돌린은 독일제국 총리 쉴링스퓌르스트 호엔로에게 "명성황후가 살아있으며 서울 주재 러시아 공사로 피신하려 한다"는 취지의 비밀문서를 보냈다.
아관파천 직후인 1896년 2월 15일 서울 주재 영국 총영사 윌터 힐리어는 베이징 주재 영국 대리공사 뷰클럭에게 을미사변 당시 명성황후의 사망 여부에 대해 조선 고종이 말하지 않고 있다고 보고했다. 고종은 을미사변 이후 명성황후가 사망했다고 발표한 바 있는데, 4개월 후에는 영국 총영사에게 명성황후의 사망 여부에 대해 침묵한 것이다. 힐리어는 을미사변 직후인 1895년 10월 9일 을미사변 당시 궁녀 서너 명이 죽었고, 명성황후는 탈출했다는 내용의 보고를 베이징에 보낸 바 있다.
정상수의 발표에 대해 여러 역사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의견을 발표했다. 전우용은 정상수가 발굴한 외교자료에 대해 "일본이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퍼뜨린 역선전이 포함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이태진 국사편찬위원장은 "독일 외교문서가 신뢰성이 높다는 점은 수긍한다"면서도 이 문서가 아관파천이 일어난 시기와 비슷한 시점에 작성됐다며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을 원한 사람은 왕비가 아니라 왕의 오기일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강상규 한국방송통신대 교수는 "정설에 안주하지 않고 1차 사료를 토대로 치밀한 재검토 작업을 벌여야 한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