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잘 해낼 줄 알았다. 네가 자랑스럽구나.
이제 월영으로서의 세 가지 의무를 이행함에 있어
한 치의 소홀함도 있어서는 안 됨을 명심토록 해라.”
아버지 카즈키의 건조한 음성을 묵묵히 듣고 있는 한비는
초췌한 얼굴이었지만 화려한 문양의 기모노조차
한비의 외모를 죽이진 못했다.
미동조차 없이 정좌하고 있는 한비는
전보다 더욱 싸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악몽 같았던 계승의식이 끝난 후 우선적으로 달라진 것이 있다면
카즈키 앞에서 무릎을 꿇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일주일에 걸쳐 이루어진 계승의식을 마치고
56대 월영이 된 한비는
더 이상 그 누구의 앞에서도 무릎을 꿇어선 안 되기 때문이다.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해야 한다는 이유로
삼일 동안을 정좌한 채 뜬눈으로 보냈다.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못한 그 시간이 지나고
조직의 수뇌부 백여 명의
새끼손가락에서 받아낸 피를 섞은 물에 몸을 닦아야 했다.
목욕이 끝난 후 꼬박 이틀 동안을 문신을 새겨야 했다.
보통의 문신과는 격이 다른,
수십 배의 정교함을 요구하는 작업이었다.
여의주 대신 칼을 물고 달을 향해 날아오르는 한 마리의 용은
한비의 등에서 살아 숨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저 멀리 날아가 버릴 것처럼 살아있는 용은
손대면 피가 뚝뚝 떨어질 것만 같은 날카로운 칼을 물고 있었다.
그것이 한국은 물론 일본의 반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야쿠자 조직
적월 아키모토 일파의 지존인 월영을 상징하는 칼임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그렇게 문신까지 새기고 난 후 조상의 위패가 모셔진 사당에서
오십 네 명의 선대 월영에게 제사를 올려야만 했다.
그리고 오늘 등에 새겨진 칼과 똑같은 칼을 건네받았고
마지막으로 카즈키의 피가 담긴 혈주를 마심으로 모든 의식이 끝났다.
피에서 피로 이어지는 계승의식............
목구멍에서 다시 올라올 것만 같은 비릿한 피 맛이 입안을 맴돌 때
또다시 카즈키의 음성이 귓전을 파고들었다.
“이제 이 한비라는 이름은 더 이상 쓸모가 없다. 버리도록 하여라.”
그러나 한비는 대답하지 않았다.
지난 일주일 동안 한비를 버틸 수 있게 해준 것은
월영이 되겠다는 의지가 아닌
하성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자신을 살고 싶다고 만들어 주는 사람.......
그런 하성이 그토록 좋아하던 자신의 이름.........
때문에 죽는 순간까지 버리고 싶지 않은 이름이었다.
“첫 번째 의무를 시행토록 하여라.”
앞에 놓여진 칼을 두 손으로 공손히 집어들은 한비는
품속에 집어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가보겠습니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한비는 품속에서 칼을 꺼냈다.
한 뼘 정도밖에 되지 않는 칼..............
가문의 가보라는 칼, 월영도(月影刀)............
보기엔 그냥 평범한 칼이다.
붉은색의 칼집과 손잡이에 용무늬가 양각된 단검.
만드는 사람이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는 칼이었다.
그러나 그 칼에는 잔인한 비밀이 담겨져 있었다.
진정한 월영을 가려내 주는 칼...........
세 가지 의무를 이행하면 은빛의 검 날이 붉은색으로 변한다는 칼.......
월영이 된 자가 칼을 들 때에만 붉은 빛을 띤다는 신비로운 칼이지만
또한 잔인한 칼이기도 하다.
진정한 월영이 되기 위한 세 가지 의무............
그것은 세 사람의 목숨을 거둔 다는 뜻이기에...........
즉 월영으로서 선택된 자가 계승의식을 치루고
세 사람의 목숨을 취해 그 피를 먹였을 때..........
오로지 주인의 손에서만 붉게 변하는 잔인한 칼.........
저주받은 운명을 나타내 주는 칼이었다.
***
“무슨 말이야?”
벌써 며칠 째 한비가 연락이 되지 않자 하성은 초조해졌다.
불안했던 마음이 현실이 될 것만 같아서였다.
계속 꺼져 있던 전화기에 몇 개의 음성을 남기기도 했지만
여전히 한비에게선 아무런 연락도 없었고 전화기는 변함없이 꺼져 있었다.
한비의 학교를 찾아 간지 벌써 4일째였지만 그토록 기다리는 한비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그게 무슨 말 이냐구!!!!!!!!!!”
애꿎은 태석을 닦달해 보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같았다.
“한비 학교 자퇴했다더라. 나도 오늘에서야 알았어.”
“도대체 왜!!!!!!!!!!!”
“유학 가기 위해서라는데.......”
“하아............”
하성은 땅바닥에 스르르 주저앉았다.
힘겹게 지탱하고 있던 두 다리의 힘이 모두 빠져 버렸기 때문이다.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런 말 한 마디 없었는데........유학이라니.........
“아니지?...........하아..........비야.............아닌 거지?”
어쩌면 너에게 나는 나무였는지도 몰라.
늘 상 같은 자리에서 그저 묵묵히 기다려 주는 나무였는지도 몰라.
그렇게 가슴이 아파, 조금씩 죽어 가면서도
결코 너에게 다가갈 수 없는, 꿈조차 꿀 수 없는 나는.......
그래.........아마도 네가 찾아와 주기만을 바라는
그렇게 초라한 나무였을 뿐인지도 몰라.
하성은 허리춤에 달려 있는 시계의 뚜껑을 열었다.
한비의 얼굴이 들어 있었다.
전에 놀러 갔을 때 한비 몰래 찍었던 독사진을 오려 넣은 것이었다.
한비가 사라지기 전 날처럼 싸늘한 바람이 얼굴을 훑고 지나갔다.
시계위로 하성의 눈물방울이 흩어지고 있었다.
***
가슴에 압박붕대를 감은 한비는 검은 정장 바지와 하얀 와이셔츠를 입었다.
셔츠위에 검은색 홀스터를 착용한 한비는
자신의 권총 p7m13을 권총집에 넣고 검은색 마이를 걸쳤다.
남자처럼 짧은 머리 가발에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코트를 손에 든 채 방을 나섰고
그런 한비의 뒤를 역시 검은 정장을 입은 휘가 따랐다.
“목표물 위치는?”
자동차에 올라타면서 한비가 물었다.
“새벽 세 시경 A지점을 거칠 것입니다. 눈 좀 붙이십시오.
울산에 도착하면 깨워 드리겠습니다.”
휘의 말에 시트에 몸을 기댄 한비는 눈을 감았다.
세 시가 되면 그 누군가가 죽을 것이다.
의무라는 이름 하에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사라져 버리겠지만
그 사람에 대해 한비는 물을 권리가 없었다.
혹여 라도 있을지 모를 사사로운 감정의 개입을 피하기 위해
정작 죽여야 하는 자신조차도 그 사람에 대해 알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열여덟 살 생일이 지난 지 불과 일주일도 되지 않았다.
누군가의 목숨을 취하기엔 지나치게 어린 나이.........
그러나 오직 이행만이 있을 뿐 그 어떤 항명도 있을 수 없었다.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신년 초...........
그렇게 잔인한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
“기필코 내 손으로 복수 할 거야.
누군지만 알면 지옥 끝까지라도 찾아가서..............”
어느 장례식장 안 한 귀퉁이에서
이를 악물고 절규하듯 말하는 소년의 눈빛은 싸늘했다.
***
-삐빅
미처 바꾸지 못한 전화 번호.
그동안 꺼놨던 전화기를 켜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음성을 알리는 신호음이 울렸다.
한비는 비밀번호를 누르고 음성 메시지에 귀를 기울였다.
[내 사랑하는 그대에게.......
사랑하는..........그대여.......오늘처럼 날씨가 맑은 날이면.......
내 그대를 생각합니다.
눈 시리게 푸른 하늘 한 귀퉁이에서..........
그대가 나를 보고 있을 것만 같아
차마 하늘 한번 쳐다보지 못하는 나는
혹시 누가 볼까 두려워하며............홀로 그대를 생각합니다.
그대로 인하여 숨쉬고..........
그대로 인하여 웃고 울던 시간들이.........오늘 못내 그리워
행여 맑은 날 감추어지지 않을 슬픔을 걱정하여...........
이렇게 어두운 방안에 웅크린 채............숨죽여 울고만 있습니다.
내 사랑하는 그대................
사랑하는.......그대여.........내게 다시........돌아올 순..........없는 건가요.]
잊을 수 없는..........
잊으려는 노력조차 포기해 버린 사람..........
하성의 음성이었다.
티 없이 맑은 목소리가 울음을 참고 있는 듯
간절함을 전하며 떨리고 있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한비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져 내렸다.
뒤에도 몇 개의 메시지가 더 있었지만 차마 듣지 못하고 플립을 닫아버렸다.
그때 전화기가 누군가의 기분을 대신하듯..........요란스럽게 울어댔다.
발신제한으로 걸려온 전화였다.
“뭐냐.”
[이 한비. 나 지우다.]
하성의 친구............한비는 대꾸하지 않았다.
아니, 뭐라 입을 열수가 없었다.
[무슨 일이냐.......고는 묻지 않을게.
왜 하성이 자식을 힘들게 하는 거냐고도
묻지 않을게. 다만.............]
“..........그런 얘기 할 거면 끊어라.”
아픈 마음을 감추기 위해
더욱 싸늘하게 지우의 말을 잘라 버리는 한비.
그런 한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우에게서 들려오는 말의 내용은
한비를 더더욱 아프게 하고 있었다.
[하성이 아빠, 돌아가셨다. 지금 그 자식에게 필요한 사람은...........
다른 누구보다 너 일거다. 부탁이다............]
“더 이상 할 말 없으면 끊는다.”
전화를 끊어 버리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하성을 살리기 위해서는 철저한 타인이 되어야 했기에...........
한비는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조직원에게 전화번호를 바꿔오라고
명령을 내리고는 텔레비전의 전원을 켰다.
[피살된 사람의 신원은 울산지청 민 동규 검사로............
심장에 박힌 9mm 파라블럼.............]
뉴스를 보던 한비는 미간을 찌푸렸다.
민 동규............분명 낯익은 이름이었다.
한참 동안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한비의 머릿속에
필름처럼 스쳐지나가는 영상.........
한비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하게 변하고 있었다.
카페 게시글
로맨스 소설 2.
[ 장편 ]
비연지화-[87화]
은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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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1.08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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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ㅠ_ㅠ!! 하성이의 아빠..인가요? .. ...
하성이 아빠 맞구만...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