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토연모" 토지를 연구하는 사람들의 모임 원문보기 글쓴이: 황금의땅
요즘에 주변서 결혼을 많이 합니다.
청첩장을 받아보면서 어느덧 제 아이들도 20대 초반이니
곧 결혼식을 시켜야 하는 혼주의 입장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큰 녀석이 딸아이다보니 주변 분들이 지금부터 준비하라고 독촉을 합니다.
"여자는 26살이 넘어가면,
박사나 의사라도 결혼하기가 쉽지 않아. 한살이라도 어릴 때부터 빨리....."
한살이라도 어릴 때부터, 외모, 학력, 직업, 부모의 재력 등에 따라
A등급, B등급 식으로 매겨지는 중매결혼시장에 내 놓으란 이야기입니다.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조언을 주고자 하는 이야기임을 아는지라 듣고는
그냥 "신경 써줘서 고맙다"고만 하고 맙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결혼을 시켜야 하는가는 의문입니다.
요즘은 이혼을 어렵게 생각하는 시대가 아니므로
빨리 결혼을 시키는 것이 능사인가라는 생각 또한 하게 되고요.
스스로, 때가 되면 찾아질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합니다.
과거처럼 평균수명이 60세 전후라면
길어봐야 한 30 여년 정도를 함께 살 것이니
부모가 골라주거나 외형적 조건에 부합하는 짝도 괜찮을 수도 있겠으나
지금의 아이들은 100세를 지나 120세까지도 바라봐야 하는데
그 많은 시간을 원만하게 같이 살아가려면 일단 대화 등 여러 부분에서 잘 통해야 하고
둘 사이의 유대감 등을 형성시킬 수 있는 구심점이 강해야 하기에
스스로가 신중하게 선택해야 하지 않을까 하고
굳이 빨리 가라고 압력을 가할 필요가 있나 싶습니다.
/
저 또한 제가 선택했으나,
그때 부모님은 그다지 탐탁하진 않아하셨습니다.
당시에 그다지 각광을 받지 못했던 업종 종사자였고,
남편이 종가집 장손이란 부분을 특히 껄그러워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다고 극심하게 반대하거나 하진 않으셨고,
다만 저한테 좀 더 깊이 생각해고 다시 판단해보라는 정도였습니다.
예전에 시어머니가 그러셨죠.
"시할머니 돌아가실 때까지만 제사를 지내라. 이후엔 내가 없애준다."
그런데 시할머니보다 시어머니가 5년 먼저 돌아가셨습니다.
그때만해도 전 곧 사라질 것을(?) 돕는 조력자였기 때문에
여러 불만이 많아 항상 툴툴 거렸죠. 지금은 본의 아니게 주관자의 입장이 되어
힘들다는 생각조차도 들지 않습니다. 위치가 그 사람을 만든다는 말 맞습니다.
또한 시간이 흐르니 남편의 직업이 선호직종 중 하나로 부상하더군요.
그러나 이젠 제가 남편에게 그럽니다.
"아버님 마음 편하시도록 아버님 생전에만 군소리 없이 지낸다.
나중에도 꼭 지내야겠으면, 고분거리는 어린 마누라 얻어서 새장가를 가라~~~
내 아들에게 물려주었다간 그 녀석은 장가도 못간다!"
혹자는 그럽니다. 전통이니 계속 지켜져야 할 좋은 것이라고요.
네. 저도 제 3자면 그렇게 이야기 할런지도 모릅니다.
몇일 전에 남편의 증조할아버지 제사였습니다.
남편이 퇴근해야 같이 가므로, 음식은 제 집에서 만들고
시아버님 집에 가서 제사를 지냈습니다. 시동생이 독신주의자라
시동생과 사십니다.
정작 증조할아버지의 아들인 다른 할아버지 분들이 다 오지는 않으셨습니다.
오신 분도 있고, 안 오신 분도 있고 한데 그럴 때마다 겉으로는 표현을 하지 않지만
아들과 며느리도 아닌, 단지 종가집 맏며느리가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형식적으로 숙제를 하듯 지내는 것에 불과할 뿐인 것이
대체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란 의문이 생깁니다.
전 증조할아버지 되신다는 분이 어떤 삶을 사신 분이신지를 전혀 모릅니다.
모르니까 의미를 더더욱 못 느끼는 것이겠죠.
저는 아까워서 버리지 않고 다 먹지만,
친지 분 중에 기독교 등 종교가 다른 분은 제사상에 올렸던 음식은 먹지 않습니다.
이 역시도 의미가 없는 형식적인 참석에 불과한 경우겠죠.
이런 것에 대해서 누구도 저에 대한
정서적 학대일 수도 있다는 관점으로는 생각조차도 안하더군요.
많을 땐 40~50분까지 모이므로, 저 혼자 그 음식을 다 준비하고
그러는 것에 대한 지적이나, 불만이 아닙니다.
다른 친지 분들에겐 명절과 제사에 대한 참석이 선택이지만
종가집은 선택이 아니란 이야기입니다. 제가 아프거나 급한 사정이 있다고 해도
다른 친척분에게 잠깐이라도 넘겨 줄수가 없습니다.
법도 자체가 '조금의 예외도 인정되지 않는다.' 입니다.
만일 종가집에 오늘 내일하는 중병 환자가 있거나, 상중이거나 하면
제사나 명절은 없습니다. 그런 해는 지내지 않고 넘어가게 됩니다.
따라서 제가 아픈 경우는 정신이 오락가락 할 수준으로 죽기직전까지 아퍼야만
잠시 멈출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정서적 학대가 아닌가라고 하는 겁니다.ㅎ
아마도 등급을 매긴다면, 아들의 경우 제가 종손의 의무를 없애주지 않는 한
결혼상대로선 기피 등급을 받을 것 같습니다.
개인주의와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요즘 사람들이 누가 이것을 물려 받겠나요?
/
시대의 변화에 따라 제사 등의 문화도 변화되었다면 어땠을까요?
과거엔 집성촌 형태의 촌락구조였기에 혈족을 중심으로 모여 단합하는 것은 물론
내부의 규율 등을 정할 구심점이 필요했으니 제사나 종가집 등이 필요했겠으나,
지금은 그렇지가 않죠.
또한 평일 제사에 참석하려면 반차나 월차 등을 사용해야 하고
사는 곳도 옆 마을 등이 아닌 여러 곳으로 뿔뿔이 흩어져 있고
식문화도 많이 변화되어 있는데 그 변화를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는
음식도 문제입니다. 명절이면 고속도로변 휴게소나 갓길 근처에
떡과 전종류의 음식물이 포장도 채 뜯지 않고 많이 버려져 있다고 하죠.
한 30년 전만해도 결혼 전에 함을 사라고 외치던 함장사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함을 사라고 외쳤다간 바로 고성방가로 신고됩니다.
결과 함 문화가 거의 사라졌듯이 종가집이나 제사도
시대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일부 종중 정도만 제외하고 사라질 운명으로 보여집니다.
필요는 하다면서도, 정작 자신들이 그것을 하기 싫어하니까요.
/
친정 아버지가 얼마 전까지 가족묘를 손보아 가족 납골당을
다시 만드시려 했습니다. 후손들까지도 다 사용할 수 있도록 하시겠다면서 말입니다.
친정어머니 부탁으로 제가 그것을 말렸습니다.
남동생이 결혼을 늦게 해서
조카들이 지금 뽀로로를 좋아하는 7살, 5살입니다.
"그 아이들이 앞으로 한국에서만 살라는 보장이 있나요?
쟤네들이 외국서 살면 무인묘처럼 장기간 방치될 수도 있고,
후손들이 외국서 태어나면 국적이 달라질 수도 있고 ..."
필요하면 나중에 후손들이 알아서 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고
후손들까지 고려한 더이상의 시설은 미리 만들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
그러니 이 나라에서 계속 살지, 아닐지도 현재로선 알 수 없는
내 아이들에게 무엇을 진정한 자산으로 남겨야 하나?란 물음이 늘 따라다닙니다.
'재산'은 온전하지 않은 답안입니다.
아무리 많이 물려준들 지킬 능력이 있어야만 지켜지는 것이고,
또한 재산이라 하는 것도, 대부분은 관리 상의 문제로
자국 내의 자산 형태로 보유하게 됩니다. 나라의 경제상황과 환율변화 등에 따라
상대적으로 평가되는 그 가치가 수시로 변화할 수도 있습니다.
좀 극단적인 사례이지만, 요즘 경기가 회복되는 중이라는 일본의 경우
쓰나미와 그로 인한 원전 피해지역으로 분류되는 곳의 토지가격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과연 거래나 될까요?
앞으로도 오랜세월 누군가의 등기자산이겠지만 그러나 한동안은 버려진 땅이 될 것입니다.
즉, 눈 앞에 당장 보인다고 해서 그게 전부는 아니겠지요.
그러니 투자에선
다양한 대상으로 자산으로 분산시켜 여러 위험에서의
방어책을 마련해두라고 하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누구도 미래는 온전히 알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현재의 방식이 미래에도 통용되리란 보장이 없으므로
결국은 부모가 어떤 마인드를 가지고 살았는지가 자산의 하나가 될 것입니다.
단지 말과 당위성에 대한 설명이 아닌, 직접 보여주는 모습들 말입니다.
제사 등의 형식이 아니라 자식의 기억 가운데, 손자의 기억 가운데
긍정적인 방향으로 살아있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일테고요.
동생의 처가엔 사업가들이 많습니다.
장인분부터가 코스닥에 회사를 상장시킨 분이었습니다.
법학과 출신이었으나, 고시패스에 몇번 실패하고
지역의 중소업체에 들어가 일하다가 회사가 어려워지자 아예 그 회사를 인수하여
경영자가 된 후 키워 상장시켰다고 합니다.
올케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어렸을 때 늘 경제적으로 힘들었다고 합니다.
부도 난다, 아니다 그런 적도 많았고 늘 대출금 빚을 갚느라 바빴다고 하네요.
그것을 보고 자란 처남 둘은 모두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성격들이 강하고
각자 사업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장인되는 분이 지병이 악화되어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상속세 문제로 상속지분을
블럭딜 형태로 상당부분 팔았으나, 아들이 아닌 동생의 손위 사위가
처남들의 도움을 받아 경영 중입니다. 투자자가 경영목적으로
지분을 산 것이 아니어서 회사에 대해 잘 아는 경영자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반면 제 집안은 확인된 길로만 가라는 분위기가 강했던지라
동생이 결혼 후 문화적인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관련해서 기억이 하나 납니다. 동생 결혼식날 그 장인되는 분이
제 남편과 자신의 큰 사위가 가족석에서 함께 식사를 하자
회사는 다르지만 업종이 같았던지라,
"둘이 독립해서 같이 사업을 해도 되겠다" 라는 이야기를 하셨더랬죠.
저도 옆에서 같이 먹고 있다가, '이건 대체 뭔 말이래?' 생각했었죠.
보통은 "우리 딸을 잘 부탁한다" 그런 이야기만 하는데 그런 이야기와 함께
가벼운 이야기였겠으나 자신의 사위와 사돈을 슬쩍 묶어서 사업을 권유하다뇨.
아마도 급여생활자인 사위가 '은퇴하고 나면 뭐할까?'란 생각을 평소 하고 계셨던게
아닐까? 그래서 무의식 중에 그런 생각이 표출된 것이 아닐까 싶네요.
저나 남편이나 자라난 환경, 집안 분위기가 비슷하여
안정성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이런 모습들에서 부모의 철학과 마인드를 자식들이 익히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래서 더 제 아이들이겐 "좋은 직장에 취직해서" 란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하고 싶은 것을 하라는 이야기를 주로 합니다. 다행이 양가집 할아버지들도
제 아이, 그러니까 당신들의 손자에게 좋아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라고 하십니다.
그럴 때마다 저나 동생에게 했던 이야기와는 다르다? 란 생각도 들긴 하나
시대가 변했음을 부모님들도 인지하셨으니, 그러시는 것이겠죠.
현재가 고도성장기라면
좋은 직장에 취업해서 기업과 함께 성장하는 것도 좋은 방편이겠으나,
지금은 저부터가 그렇다는 확신이 없습니다.
지금의 유망한 직업군이 미래에도 유망할런지는 장담키 어려운 것들도 많습니다.
새로이 생겨날 것과 사라질 것들이 많다죠.
큰 녀석은 산업디자인을 공부 중이고
작은 녀석은 지금은 전방에서 군복부 중입니다만,
수능시험을 치른 후 대학 원서를 쓰는 과정 중에 피디가 되겠다면서
방송 쪽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애가 원하는 길을 선택하도록 해줬습니다.
피디가 될지, 제작자가 될지, 기술 쪽으로 갈지 아직 정해진 바는 없습니다.
언제든 변화될 수 있고, 아직은 어니리까 전공 자체가 바뀔 가능성도
일부 열어두어야겠죠.
지금은 군에서 해외파병을 가고 싶다고 파병신청을 하려는 중입니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위험하다고 말린다는데, 저는 그리하고 싶으면 해보라고 했습니다.
떨어져도 어학공부를 그 안에서 하고 있을 것이니 상관없고
합격하여 파병되면 그 나름대로 생각도 자랄 것이고, 배워오는 것들이 있겠죠.
아직 아이들을 완전한 독립적인 개체로서 다 키워놓은 상태가 아니어서
늘 어떻게 해야 최선인지 등의 생각이 많아지는데, 아이들에겐
"부모인 우리를 노후까지 온전히 모든 것을 다 책임져줄 것이 아니라면
기댈 생각말고 독립해서 네 힘으로 살아가라. 대신 공부만은 하고 싶다는 만큼 시켜준다."
라고 합니다.
돈도 많이 물려주면 애들 입장에선 좋겠지만
그것보다는 세상의 변화를 빠르게 알아챌 수 있고,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경험과 지식자본의 형태로 물려주고 싶은 겁니다.
제 아이들의 경우엔 책상에 앉아서 인내심 있게 고시공부를 하듯 해야 하는
전공들도 아니고요. 상상력과 창의력이 좌우하게 될 것입니다.
해서 다양한 경험을 쌓도록 용돈을 다소 빠듯하게 주어서
겨우 최저시급 정도에 불과한 알바도 많이 해보도록 유도시킵니다.
여행경비의 경우 전 반 장도만 대줍니다. 나머지 반은 할아버지들을 설득하든
장학금을 받든 아니면 스스로 벌어야 합니다.
해외로 한달짜리 배낭여행을 가기 위해
방학내내 편의점 알바를 하는 것 등을 볼 땐 한편에선 측은하기도 했지만
원하는 결과를 얻었던지라 그것에서 애가 자신감과 성취감을 느끼는 것도
보게 되고요.
이제야 큰 녀석이 왜 엄마가 알바를 하도록 유도시키고 있는지
그 의도를 제대로 깨닫기 시작합니다.
"일반 매장에서 최저시급 받고 일하면 억울하지 않니?" 라고 전에 물었을 때
또래의 자기 친구들이 다 그러하므로,
그것이 당연하다 여겨 제 물음이 뭔지 잘 모르더니 요즘엔 달라졌습니다.
알바라도 전문성이 있는 것을 해야 적은 시간을 투입하고도
많은 돈을 번다는 것을 경험하고는 디자인의 외주 기획안이나
디자인적인 요소가 필요한 PPT 자료 등을 만들어 주는 일을
교수나 선배들을 통한 알음알음 방식으로 찾기 시작합니다.
그간 공부를 한 것이 있으니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양한 종류의 회사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아직은 인맥 등이 형성되어 있지 않아 시간과 경험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창업 계획도 꾸준히 세우고요. 구체화된 것은 아니고 여러 종류의 이야기를
저한테 많이 합니다.
물론 아직까지는 변화되는 과정이므로 어떤 결과가 도출될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의 방향성을 찾아가고 있으니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점차 만들어가겠죠.
돈으로 얼마를 물려주고 하느니 하는 것보다
이러한 것이 더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지금 아이들의 경쟁상대는
이 좁은 반도 내에 있는 한국인들만이 아니죠. 한정된 대상과 경쟁을 한다면
결혼중개업체에서 등급을 따지듯이 부모의 재력도 매우 중요한 부분이겠지만,
전세계에 있는 그 많은 또래들과 머리 싸움을 하면서 경쟁하려면
스스로가 필요에 의해서, 자신의 능력으로 스스로 쌓아 올라가야만 합니다.
세상은 누구도 대신 살아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리고 부모나 할아버지의 재력은 좀 편하고 빠르게 갈 수 있게
만들어주거나 실패했을 때 잠시 안식처를 제공받을 수 있는 수단일 뿐,
반드시 결과를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죠.
제 아이들의 경우는
어려서부터 어깨너머로 본 것도 있고, 교육시킨 것도 있으므로
투자에 대한 것들을 물려받겠죠. 하지만 그것도 억지로 되는 게 아닙니다.
역시 자발적인 의지가 생겨야 하므로 그러려면 일단 자신들의 힘으로
어렵게 쌓은 것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것을 일단은 지키고
더 나아가서 불리고자 하는 강렬한 마음이 생겨야만 가능한 것이지
제가 다만 얼마라도 줄테니 시도 해봐라~하는 식으로는 되기가 쉽지 않습니다.
보통 큰부자가 되거나 성공하려면 3대의 노력이 합쳐져야 한다고 합니다.
최근엔 구글 사례 등 IT 기술을 이용한 부자들이 많이 태동되는데
그들의 경우를 보면 황무지에서 어느날 갑자기 세상을 변화시킨 것이
아님을 볼 수 았습니다. 그 부모들이 교육열이 높았던지,
이미 부유해 신기술을 쉽게 접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받았거나,
아들이 갑자기 학교를 그만두고 창고에서 창업을 해도
묵묵하게 믿고 지켜봐주었다거나 등과 같은 지원을 포함한 무엇인가가
배경에 있었습니다. 그 무엇인가에는 세상을 바라보는
마인드 등도 포함이 됩니다. 예컨대 과거의 행태만을 무조건 옳다고 답습하려 하거나
지나치게 권위적이거나, 세상을 부정적으로만 바라보는 부모 밑에선
꿈을 이루어내는 자식이 나오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말로 하기는 쉬운데 정작 내 자식의 문제가 되면 실천하기가
쉽지가 않죠. 그게 부모라면 경험하게 되는 문제입니다.
청첩장 등을 받아들고,
나는 아직은 미생인 내 자식을 어떻게 더 키워야 하는가라는 상념을
적어봅니다.
skuld(조혜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