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5월
1일
부활
제4주간 금요일(노동자
성 요셉)
“너희는 걱정하지 마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요한
14,1-6)
Do not let your hearts be
troubled. You have faith in God; have faith
also in me.
"I am the way and the truth and the life.
No one comes to the Father
except through me."
말씀의 초대
제1차 선교 여행을
시작한 바오로 사도 일행은 키프로스를 거쳐 피시디아 안티오키아에 도착하여 늘 하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 유다인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한다. 여기서
바오로는 하느님께서 다윗의 후손 가운데 구원자를 약속하셨음을 회상시키면서, 예수님께서 약속된 바로 그 구원자이심을 증언한다(제1독서). 수난을
앞두신 예수님께서는 몸소 아버지의 집에 제자들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신 다음 그들을 데려가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다(복음).
☆☆☆
오늘의
묵상
버스 승객이
묻습니다. “종각 갑니까?” “여기가 종각인데요.” 토마스 사도가 예수님께 길을 묻습니다.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내가 길이다. 그리고 내가 목적지다.” 토마스는 자신이
길을 모른다고 생각하여 길을 물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는 목적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의 질문은 정확합니다. 목적지를 모르기 때문에 길도
모르는 것입니다(“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지금 바로 눈앞에 목적지이신 분이 서 계시는데도, 그분께 토마스는 엉뚱하게 길을
묻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길과 목적지를 모두 알려 주십니다. 그분께서 진리요 생명이시기에 그분이 목적지이시고, 또 그분을 통해서만
아버지께 갈 수 있기에 그분께서 길이십니다. 같은 복음에서
토마스 사도는 부활하신 주님을 뵈었다는 다른 사도들의 증언도 믿지 않습니다. 그토록 오랜 기간 예수님과 함께 지냈으면서도 아직 스승의 가르침을
온전히 깨닫지 못하는 토마스 사도를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요? 사도들의 명단에서만 단 한 번 토마스를 언급하는 다른 복음서와 달리, 요한
복음에는 토마스 사도의 이름이 일곱 번이나 등장합니다. 듣고서 믿지 못하고 보고서야 믿었던 토마스는 이렇게 늘 우리와 비교의 대상도 되지만
동시에 위안을 주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요한 복음이 교회의 기둥인 열두 사도 가운데 굳이 한 사람인 토마스의 믿음이 불완전하다고 밝히는 이유는,
보지는 못하였지만 전해 들은 것만으로 믿는 우리의 믿음을 격려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성경의 모든 말씀을 한마디로 요약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사람이 되시어 강생하신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만날 수 있고 진리 자체이신 그분을 통해서만 아버지께 나아가서 그분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은 유일한 길이십니다.
오늘 독서를 살펴보면 바오로 사도는 토마스 사도와는 달리, 예수님의 직제자도 아니고 그분을 직접 뵙지도 못하였지만, 다른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에 관한 복음을 받아들이고 담대하게 전하였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눈앞에 계신 분을 보면서도 알아보지 못하고 길을 물었던 토마스
사도와 달리, 우리는 오로지 사도들의 증언만을 듣고 그분께서 목적지이심을 믿고 고백하기 때문에 예수님 말씀대로 우리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마태 13,55
노동자 성 요셉)
영국 근대소설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평을 받는 조지프 애디슨의 ‘누가 떠나고 누가 남는가’라는 시를 소개해 봅니다.
위대한 사람들의
무덤을 바라볼 때 내 마음속 시기심은
모두 사라져 버린다.
미인들의 묘비명을
읽을 때 무절제한 욕망은
덧없어진다.
아이들 비석에
새겨진 부모들의 슬픔을 읽을 때 내 마음은 연민으로
가득해진다.
하지만 그 옆에
있는 부모들 자신의 무덤을 볼 때 곧 따라가 만나게
될 사람을 슬퍼하는 것이 얼마나 헛된 일인가를 깨닫는다.
쫓겨난 왕들이
그들을 쫓아낸 사람들 옆에 묻혀 있는 것을 볼 때 또 온갖 논리와
주장으로 세상을 갈라놓던 학자와 논객들이 나란히 묻힌 것을 볼 때 인간의 하잘것없는
다툼, 싸움, 논쟁에 대해 나는 슬픔과 놀라움에 젖는다.
영원할 수 없는 이
세상 삶이지요. 그런데 영원히 살 것 같은 착각 속에서 아등바등 살아가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언젠가 이렇게 말씀하시는 어떤 신부님의 강론을
들었습니다.
“장례식장에 가서
저는 이상하다고 생각되는 모습이 있습니다. 그것은 백발노인이 정말로 서럽게 우시는 모습입니다. 물론 아쉬움과 그리움 때문에 그렇기도 하겠지만,
그분의 겉모습을 볼 때 고인과 다시 만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은데 뭘 그렇게 서럽게 우시는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되지요.”
그 누구도 죽음에
대해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은 아니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은 왜 일까요? 바로 이 세상에 대한 미련이 많기
때문이겠지요. 아직도 할 것이 많다는 생각, 아직도 더 누려야 한다는 생각, 아직도 아쉬움이 많다는 생각 등으로 인해 우리는 죽음을 피하려고만
합니다.
인간이 천 년 만
년 살 것도 아니라면, 세상에 대한 미련보다는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 안에서 영원히 사는 모습을 그리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즉, 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 삶이 아니라, 서로 나누고 하나 되는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하느님 나라에 더욱 더 가깝게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노동자 성 요셉’ 축일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요셉 성인은 겸손함을 잊지 않으셨지요. 특히 하느님께 겸손한 모습으로 자신의 몫을 묵묵히 행할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한 번도 그의 말이나 주장이 나오지 않습니다. 마리아의 예수님 잉태 소식에 남모르게 파혼할 생각이 있기도
했지만, 꿈을 통한 하느님의 개입에 그대로 순명하십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성 요셉 성인의
모습을 따라 하느님의 뜻을 따를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나의 주장을 내세우기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펼칠 수 있도록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때, 순간의 만족이 아닌 영원한 행복을 누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식물의 미덕은 자기
자리에 머무는 것이다. 동물의 미덕은 자기 영역을 지키는 것이다. 인간의 미덕은 자기 위치를 찾아가는 것이다(김은주).
기도(라빈드라나트
타고르)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위험에 처해도
두려워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고통을 멎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고통을 이겨 낼
가슴을 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생의 싸움터에서
함께 싸울 동료를 보내 달라고
기도하는 대신 스스로의 힘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두려움 속에서
구원을 갈망하기보다는 스스로 자유를 찾을
인내심을 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내 자신의
성공에서만 신의 자비를 느끼는 겁쟁이가 되지
않도록 하시고 나의 실패에서도
신의 손길을 느끼게 하소서.
지금 우리는 어떤
기도를 바치고 있었을까요?
겸손에서 새 세상 배우는
시작((마태
13,55 노동자 성 요셉)
-이기정신부-
육체의 조건이
우리에게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지요. 보고 만지고 먹고 듣고 냄새로 파악하는 것 말고 육감도 있습니다. 생각이나 마음 씀씀이 그리고
느낌 같은 것들이 사람의 특성입니다.
부부간에도
서로 마음을 헤아리며 정서와 사랑의 교감이 필요하지요. 생각이나 마음이 자기 중심이 되면 교만으로 더 이상 전진 못합니다. 마음은 모름까지
내려간 겸손에서 새 세상 배우는 시작이 되겠지요.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 (마태오
13,58)”
< 일이
곧 자기 자신이다 >((마태
13,55 노동자 성 요셉)
-전삼용신부-
구세군
대장 브람웰 부드는 일본 각지를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한 사람이었습니다.
1926년
가을 당시 그는 눈보다 흰 백발의 노인이었습니다.
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14세가
되었을 때,
사람들은
아마도 17세까지
살지 못할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17세까지
간신히 살아남았고 건강도 조금 좋아졌으나 의사는 내게 희망을 품지 않았고,
21세
정도까지 살 것으로 단정했습니다.
계속
병상에 누워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2,
3년간은
누구의 도움 없이는 2층으로
올라갈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병약했던 그가 어떻게 73세의
장수를 누릴 수 있었고,
세계
6대주를
두루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할 수 있었을까요?
그는
건강 회복을 위해 어떠한 노력을 했는가에 대한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쉬지
않고 부지런히 노동한 것이 나로 하여금 병을 이겨 내게 했습니다.”
노동은
돈을 버는 목적보다 더 신성한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는 하느님께서 노동하신 내용이 나옵니다.
하느님의
노동이란 바로 ‘창조’입니다.
독서에서
“이렇게
하늘과 땅과 그 안의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라고
하며 창조가 하늘과 땅 사이의 공간을 만들고 그 안에 살 수 있는 모든 것을 넣는 것이 창조임을 알려줍니다.
사실
하늘과 땅,
물과
물,
땅과
바다를 만드시고 하늘과 땅 사이에 해와 달,
별들을
만드시고,
궁창
사이에 날아다니는 것을 만드시고 땅과 바다 사이에 온갖 생물과 그것을 다스릴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는 것이 창조의
순서였습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는 것과 같은 내용입니다.
땅은
바로 우리들입니다.
주님은
먼저 우리 안에 공간을 마련하시기 위해 질서를 잡아주십니다.
누가
하늘이고 누가 땅인지,
즉
인간이 누구에게 순종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늘이 아니라 하느님이 하늘입니다.
그리고는
우리 안에 온갖 덕들이 자라날 준비를 위해 성령의 비를 내려주십니다.
그렇게
되면 새 땅이 완성되고 새 하늘이신 그리스도께서 새 아담으로 우리 안에 사시며 우리를 지배하게 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창조사업은 그 때 끝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존재하는 한 계속 이어지는 것입니다.
아니
영원히 이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본성이 창조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또한 이 창조사업에 동참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당신 모습대로 창조하셨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노동자 요셉성인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한 바오로의 말은 일하지 않는 자는 죽는 편이 낫다는 말과 같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노동’이란
육체적인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어가는
사람도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한 마디로 마지막 한 눈짓으로 주님을 증거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인간의 참 모습을 잃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육일 동안 일하고 이렛날에는 쉬셨다고 합니다.
하느님이
힘드실 리가 없지만 그만큼 힘드시게 일하시는 분이란 뜻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이
일하시는데 인간이 어찌 쉴 수 있겠습니까?
성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것을 이웃에 나누어주는 사랑과 노동의 신성함을 늘 가르쳤습니다.
하루는
그가 정원에서 채소를 가꾸고 있을 때 한 제자가 다가와 물었습니다.
“선생님,
오늘
석양과 함께 선생님의 생이 끝난다고 할 때 지금부터 어떤 일을 먼저 하시겠습니까?”
프란체스코는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밭에서
채소를 가꾸지 뭘 하겠나?”
하느님
나라에 가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는 것이 결코 영원토록 쉬기만 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도 일을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일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도
일을 하시기에 하느님이신 것처럼,
우리
또한 일을 하기에 우리 자신이 되는 것입니다.
내
얼굴
-이수철신부-
돌아갈
제자리가, 하느님이 있는 이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물흐르듯
빠른 세월입니다.
정주수도생활의
좋은 점은
흐르는
세월을 볼 수 있다는 것과 하느님 목표가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흘러간
세월에 아쉬워하지 않고
세월과
함께 하느님 향해 흐른다는 것은 얼마나 홀가분한 행복인지요.
인생사계,
내 삶을 사계절로 압축해 봤을 때 내 나이 어느 계절에 와 있는지,
일일일생,
내 삶을 하루로 압축해 봤을 때 내 나이 어느 시점에 와 있는지
묵상해
보는 일도 재미있습니다.
하느님께
돌아갈 귀가의 죽음 시간도 헤아려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월의
흐름이 놀랍고 눈부십니다.
10일간
전주에 있는 인보성체수도회 수녀님들의 피정지도(4.21-4.30)후 귀가하니
편안하기가
'아버지의 집'에 온 듯 환대하는 수도형제들 하나하나가 반갑습니다.
떠나기
얼마전에는 벚꽃이 눈부셨고 떠나는 당일에는 배꽃 만개하여
하느님
은총 찬란한 수도원이었는데 지금은
꽃들 다 지고 연초록 숲 무성한 숲이 되었습니다.
아,
이제 오늘부터는 제일 좋은 시절, 계절의 여왕이라는 성모님의 달 5월입니다.
귀가후
집무실에 들어오니 피정 떠나던 날 게시판에 붙여놓은
4.21(화)일자
강론이 한 눈에 들어왔고 '사랑하면
닮는다'라는 제목이 정다웠습니다.
사랑할
때 닮습니다.
무엇보다
닮아야 할 얼굴이 하느님의 얼굴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할수록 우정이 깊어가면서 하느님의 얼굴을 닮고 이것이 인생 유일의 목표입니다.
엊그제(4.29일)
휴천재에 나온 전순란님의 글이 큰 깨달음이었습니다.
-아침
화장을 하다말고 아래층에 내려갔다가 정오가 다 되어
정옥씨와의
점심약속으로 나가려니까 보스코(성염교수)가 내 얼굴을 찬찬히 쳐다보더니만
“여보, 당신
얼굴이 없어!”란다.
말하자면
기초화장으로 도화지만 마련하고서 눈썹도 입술도 안 그렸으니
‘얼굴
없는 여인’이 휴천재를 활보하고 있었던 셈이다.
결혼
하고서 40년 넘게 아침마다 깔끔하게 화장을 하고서
남편이
눈뜨기를 기다려온 여인이었으므로(실은 보스코는 새벽 네댓 시에 침실을 나간다)
보스코에게
나의 ‘쌩얼’은 참 낯선가보다.-
읽는
순간 내 얼굴을 생각했습니다.
"당신
얼굴이 없어!“
화두와
같은 깨달음을 주는 말마디입니다.
아,
자기 얼굴을 잊고 사는 사람들은, 자기 얼굴이 없는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나이
40을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지 않습니까?
외적
얼굴이 상징하는바 내면의 얼굴입니다.
끊임없이
사랑하는 분을 닮아간다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요.
바로
예수님 얼굴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요한복음을
요약하는 구절입니다.
이보다
반갑고 좋은 성구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을 닮아가는 것이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얼굴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길에서
벗어날 때 미아요, 진리에서 벗어날 때 거짓이요, 생명에서 벗어날 때 죽음입니다.
그러니
탈선하지 않고
하루하루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이신 예수님을 따라 아버지께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얼굴, 아버지의 얼굴을 닮아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런
예수님 내면의 얼굴을 가장 닮은 분이 사도행전의 바오로 사도입니다.
"형제
여러분, 아브라함의 후손 여러분, 그리고 하느님을 경외하는 여러분,
이
구원의 말씀이 바로 오늘 우리에게 파견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러분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오늘
우리 모두를 향한 바오로의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파견되신 구원의 말씀이신 부활하신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더욱 당신을 닮아 진리와 생명으로 충만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
당신 사랑으로 저희를 지켜주시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에 이르게 하소서."
아멘.
산란해 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마태 13,55
노동자 성 요셉)
-반영억신부-
가끔은 셋방살이의
서러움에 대해 생각합니다.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갑자기 집세를 올려 달라고 요구하고, 기울어 가던 가게를 최선을 다하여 일으켜 놓으니까 이제
그만 비워달라고 하면 기운이 빠집니다. 삶의 터전을 잡으려 애쓰는 곳에서 이러저러한 이유로 밀려나게 될 때 어떻게 일구어 놓은 터전인데 이렇게
힘없이 물러나야 하나 하는 아픔을 겪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럴 때는 마음이 산란해 집니다. 이럴 때 하느님은 무엇을 하고 계시나?
예수님께서는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요한14,1).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당신이 떠난다고 해서 마음 흔들리지 말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내가 떠나는 것은
너희가 머물 곳을 아버지 집에 마련하러 가는 일시적인 것이니 슬퍼하지 말라’는 당부이십니다.
그러나 그런 보증을 받기 위해서는 믿음의 행위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믿고 나를
믿어라.”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준다 해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마음의 산란함 속에 살수 밖에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나 가정에서도 믿음에 바탕을 두지
않으면 인간적인 이득을 따지게 되고 계산하면서 결국은 주님의 뜻과는 먼 삶을 살아가면서 방황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14,6) 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다다르는 수단이십니다. 아버지와 만남을 이루는 방법은 예수님을 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중개자이십니다. 아버지를 가장 잘 알고 계시니 그분을 따라 가는 것이 최선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진리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과 온전히 하나가 되셔서 아버지 안에 살고 아버지께서 그 안에 사십니다. 그래서 누군가 예수님을 알면
아버지도 아는 것이고, 예수님을 보는 사람은 아버지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알려주는 계시자로서
진리이십니다.
그리고
생명이십니다.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과 생명을 완전한 방법으로 드러내고 세상에 구원을 알립니다. 당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내어 주셔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원자로서 생명이십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고 마음으로 받아들인다고 하면서도 내 삶을 주님의
삶으로 바꾸지 않는 한 그분은 그저 좋은 분으로 머물 뿐 구원이 될 수 없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분께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으로
산란한 마음을 다스리고 매사에 내 뜻을 내려놓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용기 있게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마태 13,55 노동자 성 요셉)
-오상선신부-
여러분은 누구의
아들이고 딸입니까? 저는 '몰락한
지주의 손자요 일찍 작고한 교육자의 아들'입니다. 우리는 할아버지,
아버지의 직업이 무엇이었냐를 아직도 우리 정체성의 일부로 생각합니다. 그러다보니 오늘날의 직업가치
기준에 따라 부모 직업의 귀천을
따지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부모의
직업을 어떻게
여기시나요? 그 직업을
자랑스러워 하나요? 아니면 부끄러워
하나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내 부모의 직업이
챙피하다고 여긴다면 예수의 직업을 한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는
목수였고 그 육신의 아버지
요셉의 직업을 대를
이어받았습니다. 아버지의 직업을
자랑스러워 했을 겁니다.
오늘 나의 직업에
대해 자랑스러워
합시다. 그리고 우리 부모의
직업도 자랑스러워
합시다.
나는 그 아버지의
자식입니다. 그 피를
이어받고 그 생명을 이어받을
뿐만 아니라 그 직업의
댓가로 양육되었기
때문입니다.
내 직업을 참으로
감사하는 사람은 그
'직업'(vocation)이 '성소'(Vocation)가 됩니다.
오늘 노동자의
날은 나의 직업에
감사함으로써 나의 성소를
경축하는 날입니다. 축하합니다~~^^
길이신 주님,
도반인 이웃
-김찬선신부-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우리에게는 두 종류의 길이 있습니다.
그저 사람이 다닐 수 있는 길과 목적지로 가는 길이요,
이미 나 있는 길과 내가 만들어가는 길입니다.
사람이 다닐 수 있도록
이미 나 있는 길은 집이나 논밭이 아니고
사람이 다닐 수 있는 곳이라는
일반적인 의미의 길이며,
굳이 목적지를 향해가는 그런 특정한 길이 아닙니다.
그래서 길을 걷고 있지만
목적지 없이 그저 길을 갈 수 있으며
이렇게 길을 걸을 때
정처 없이 걷는다거나 방황한다고 합니다.
이에 비해 목적지를 향하여 가는
특정한 길이 있으며,
이럴 경우 그 목적지를 향하여 가면
길을 통하여 가든 들판을 가로 질러 가든
그곳으로 가는 길이라고 하고,
<나는 그곳으로 가는 길>이라고 합니다.
내가 그곳으로 가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옛날 제가 지금보다 겁이 없었을 때
등산을 가면 가끔 만용을 부렸습니다.
이미 나 있는 안전한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길을 제가 만들려고 했던 것인데,
그때 제가 자주 한 말이
<내가 가면 그것이 길>이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때는 그렇게 목적지만 정해 놓고
산길을 가기도 하고,
인생길을 만들어 가기도 하였으니
매우 도전적이고 창의적으로
길을 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 나이를 먹으면서
그리고 몇 번 죽을뻔하면서
이미 나 있는 안전한 길을
겸손하게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인생길뿐 아니라
천국 길도 안전하게 가고 싶은데,
오늘 주님께서는 고맙게도
당신이 그 길이라고 말씀하시며
당신을 통하여
아버지께서 계신 곳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수도생활 문헌, “Vita Consecrata(축성생활)”는
우리의 수도생활을 하나의 여정으로 표현하는데,
그 여정을 “A Patre ad Patrem”이라고 요약합니다.
직역하면 “아버지께로부터 아버지께로”라는 뜻이고,
풀이하면 아버지께로부터 와서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은 아버지께로부터 와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여정인데
이 여정을 먼저 가신 분이 고맙게도
예수 그리스도이시기에
우리는 그분을 길 삼아
편히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이 문헌은 이어서 또
다른 길을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타볼산으로부터 해골산으로”라는 길입니다.
아버지로부터 오셔서 아버지께로 가시는
주님을 뒤따라 가다보면
타볼산에서 내려오시어 해골산으로 오르신
그 길도 따라야 한다는 겁니다.
하느님 아버지께로 가는 길을
내가 만들어 갈 필요 없이
주님께서 가신 길을
편하고 안전하게 따라갈 수 있기는 한데
그 길에 타볼산에서 내려오는 길도 있고,
해골산으로 오르는 길도 있으니
결코 쉬운 길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전에도 한 번 말씀드렸듯이
같이 이 길을 가야 할 동반자가 필요합니다.
쉬운 길, 가까운 길은 혼자 갈 수 있고,
혼자 가는 것이 더 편하지만
힘든 길, 먼 길은 혼자 갈 수 없고,
아예 엄두조차 내지 못하지요.
그런데 주님은
이 길을 앞서 가시는 인도자이시고,
우리는 이 길을 같이 가는
도반이요 동반자입니다.
그러기에 주님께 감사드리고
이 길을 같이 가는 우리 도반들에게도
감사하는 오늘이고 나날입니다.
길 위에서 길을 찾는 나그네
-기경호신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14,6)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계시에 근거한 요한 복음사가의 그리스도론과 구원론의 최고봉이요 요약이다. 우리의
혼동, 불안, 불신앙,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져 있을 때 이 말씀은 나의 존재 이유, 의미가 된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계시하므로 ‘길’이시다.
그리고 “진리요 생명입니다”란 말씀이 ‘길’의 의미를 더욱 분명히 설명해 준다. 예수님은 ‘생명’으로 이끄는 ‘진리’를 계시하고 그 진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여 실현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길’이시다.
길이란 인간이
방향을 모색하는 것을 뜻하며, 따라서 삶 전체가 하나의 길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올바른 길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 구약성서에서 길은 하느님의
가르침 또는 인간이 지켜야 할 참된 삶의 길로서의 율법이다. ‘길’은 초기 그리스도교가 율법 위주의 신앙으로부터 자신을 구분 짓고자 했던 하나의
표지였을 것이다. 인간은 길 곧 생명의 길과 구원의 길, 그리고 존재 의미와 목표에 대해 묻는다. 예수님이 바로
길이시다.
성 프란치스코는
이것을 누구보다도 깊이 깨달았다. 따라서 그는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고자 하였고 그의 모든 관심은 그 발자취에 맞추어졌다.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그네 되셨고, 동냥으로 사셨기에 프란치스코와 그 동료들도 그리스도라는 그 길을 끊임없이 걷기 위해 순례자와 나그네가 되었다.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성 프란치스코의 삶의 유일한 목표였다. “프란치스코의 가장 높은 지향과 주된 바람과 최고의 결심은 복음을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을 통하여 실행하는 것이었고, 조금도 한눈을 팔지 않고 열의를 다하여 애타게 갈망하는 온전한 정신과 뜨겁게 타오르는 온전한
마음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치심과 발자취를 따르는 것이었다(1첼라노 84).
복되신 프란치스코는
주님의 뜻을 자기 안에서, 그리고 자기와 관련된 것에서 이룩할 수 있는 일이라면 수고나 고통을 마다하지 않고 언제나 십자가를 졌다. 어디에서나
그는 늘 예수께 사로잡혀 있었다. 마음에 예수를 품고 있었고, 입에도 예수, 귀에도 예수, 눈에도 예수, 손에도 예수, 나머지 다른 지체에도 늘
예수를 모시고 다녔다(1첼라노 115). 그렇다! 우리 삶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을 수 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삶에 기쁨을
주시며 평화를 가져다주신 분은 바로 하느님이시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만 저 깊은 곳과 일상의 작은 사건들, 그리고 절박한 위험으로부터
하느님을 만날 수 있으며 그분의 영을 받아 되살아날 수 있게 된다.
이제 일상의 삶은
우리에게 도전해 오며, 사람들이 나에게 묻는다. “당신은 무엇을 위해 왜 사는 것입니까? 당신에게 예수님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이런
질문들은 단순한 언어유희가 결코 아니다. 삶이 왜 재미없어지고 어려움과 시련을 당하면 금새 얼굴빛이 어두워지고, 신앙까지 버리게 되는가? 나의
삶에서 예수님을 변두리로 쫓아버리기 때문이다. 그분께 묻고 그분이 이끄시는 대로 따르지 않고 아예 그분을 소외시켜버렸기 때문이다. 오늘 신음하고
번민하고 외로워하고 있는 나는 다름 아닌 ‘왕따 당하고 푸대접 당하시는 예수님의 얼굴’이 아닐까?
주님! 이제부터라도
성 프란치스코처럼 당신 사랑에 철저히 미치게 해주소서. 계산하지 말고 온전히 맡길 줄 아는 지혜를 허락하소서.뜨거운 가슴으로 당신을 끌어안게
하소서. 당신만이 저희의 길이요 의미이며 희망이시나이다.
사랑이신 주님!
삶도 죽음도, 기쁨과 슬픔도, 사랑도 미움도, 희망도 절망도, 아름다움도 추함도, 참됨도 거짓도, 착함도 악함도, 성공도 실패도, 깨우침도
어리석음도, 시작도 마침도, 만남도 헤어짐도, 세상사도 온갖 피조물도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그분의 빛을 받아야만 영원한 가치와 의미를 지니게
되나이다.
오! 당신만이 저의
길이요, 빛이며 넋이나이다. 저의 심장이요 손발이시나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
-이영근수사
길이신
주님!
제 발길에 밟히며
제 아래에서
저를 이끄셨듯이
저 역시 형제들
아래에서
그들이 밟고 가는
길이 되게
하소서!
진리이신
주님!
제 주장에 밀려
옳고도 져주셨듯이
저 역시 형제들에
밀려
자신을 태워
빚을 밝히게
하소서!
생명이신
주님!
제게 씹혀 부서져
제 속에서 살이
되셨듯이
저 역시 형제들
안에서
부서져 씹히는
양식이 되게
하소서!
저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
이제 더 이상은
제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게 하소서!
아멘.
-한상우신부-
(마태 13,55
노동자 성 요셉)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우리는 성
요셉처럼 노동을
통해 하느님께 더
가까워지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랑의
존재들입니다.
사랑은
노동처럼 피상적이지
않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노동처럼
구체적입니다.
구체적인 현실
안에서 하느님을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안과
밖의 노동으로 생명의
결실을 맺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좋은
오월입니다.
삶이라는
선물은 다양한 노동을
통해 이웃들과
연결됩니다.
노동은 더나은 내일을
위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노동없이는 영적인
충만에 이를 수
없습니다.
노동없는
생명은 공허하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나아가려는 아름다운
최선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생명은 노동을
통해 재창조로
나아갑니다.
생명의
응답처럼 노동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셨던
성요셉처럼 우리의
노동으로 하느님의 선하심을
드러내는 사랑의
오월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생명과
노동 노동과
사랑은 하느님
창조의 핵심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일하는 새로운 사랑의
방법을 노동자, 성
요셉에게서 다시
배웁니다.
연두빛으로 꽃으로 출렁거리는
오월입니다.
목수였던 성
요셉처럼 더듬어보고
가다듬는 신앙으로
성모성월을 맞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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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 합니다. 행복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