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신조) 총리의 의도는 (한국과의) 정치적 대립을 통해 개헌과 정권 복귀로 가는 것이다. 이는 경제적 정치적 침략으로 한쪽만 강조해서는 안 된다. (일본과의 현재 대립은) 과거사와 연관돼 있고 미래 정치와도 연관돼 있다"
여당 '더불어민주당'의 김민석 최고위원이 자신이 한 이 처절한 발언을 지금도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내 뇌리에는 또렷이 남아 있다. 2018년 10월 대법원의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판결, 이에 맞서 일본이 한국을 '백색국가(수출심사 간소화 대상국)'에서 배제하는 등 보복 조치를 취하면서 한일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던 2019년 8월 8일이었다.
김 최고위원은 이날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가 주최한 제64차 통일전략포럼 '한일관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서 일본에 대해 갖고 있는 불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국가와 정권의 명운이 달려 있다고 말했다.
"이 문제에 국가의 명운이 달려 있고, 이를 제대로 해결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정권의 명운이 달려 있다. 아베 정권에서 누군가 문재인 정권을 교체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나는 이 문제는 아베 정권이 물러나는 것으로 끝날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당시 이 발언에 상당히 충격을 받아 2021년 출간한 저서 '신냉전 한일전'에서 김 최고위원이 '음모론적 오해'에 근거해 잘못된 주장을 하고 있다고 비판한 바 있다. 그런데 5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윤석열 정권의 끊임없는 간악함을 지켜봐야 하는 지금에 이르러 보면 한일 갈등의 고통으로 가득 찬 본질을 이렇게까지 정확히 찌른 분석은 달리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당시의 싸움은 한일 양국의 과거(역사)와 미래, 즉 '모든 것'을 건 존재론적인 싸움이었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패한 것은 아베가 아니라 문재인 정권이었고, 그 결과 한국은 역사를 잊고(대법원 판결에 대한 일방적 양보안, 사도광산 외교참사) 대한민국의 국가 정체성을 스스로 부정하고(건국절, 일제강점기 일본 국적 논란) 미일동맹의 하위 파트너로 전락해 군사협력(캠프 데이비드 선언)에 내몰리는 상황에 이르렀다.
조금 더 시야를 넓혀보면 냉전이 끝나가던 1980년대 말 한일 앞에는 두 가지 길이 열려 있었다.
첫 번째는 김대중의 길이었다. 이는 한일이 진정한 우정을 쌓아가기 위해 일본이 과거의 잘못에 통절한 반성과 진심 어린 사과(1998년 한일공동선언)를 부끄럼 없이 하는 길이며 냉전의 고통의 유산인 북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맞지 않는 상대와도 적극적으로 대화하는 용기 있는 길이었다. 이 정신에 따라 김대중 전 대통령은 2000년 6월,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는 2002년 9월 각각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평화는 곧 눈앞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흐름을 가로막은 것은 아베의 길이었다. 아베 총리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과한 일본인 납치문제를 적극적으로 내세워 이제 막 시작된 북-일 국교정상화의 싹을 틔웠다. 2012년 말 권좌에 복귀한 뒤에는 전쟁에 관련이 없는 세대에게 더 이상 사죄를 계속하는 숙명을 짊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는 아베 담화(2015년)를 발표하고 힘으로 중국의 부상을 억누르고 북한을 포위하겠다는 적극적 평화주의와 자유롭고 열린 인도태평양 구상을 내세웠다.
한일의 운명이 걸린 결정적인 승부처는 2019년 2월 말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두 번째 북·미 정상회담이었다. 아베 총리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불어넣어 남북관계를 개선하고 북·미 대화를 촉진해 동아시아의 냉전 구도를 깨자는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아킬레스건을 끊었다. 게다가 같은 해 7월, 문재인 정권을 상대로 화이트국으로부터의 배제라고 하는 격렬한 보복에 나섰다.
이 패배는 김대중 노선의 파탄으로 이어졌다. 그 이후로, 진심으로 즐긴 날은 하루도 없다. 그 결과 등장한 윤석열 정권은 아베 총리가 꿈꿨던 질서를 한국에 적극 이식하고 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우리 국민이 아니라 '일본의 심정'(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이며 우리가 풀어야 할 시대적 과제는 미일의 전략관을 맹목적으로 따라 신냉전의 최전선에 소총을 들고 뛰어들게 됐다. 이는 세뇌된 식민지인의 마음가짐이라고 평가할 수 있지만 윤석열 정권을 이처럼 절묘하게 묘사할 표현은 달리 떠오르지 않는다. 우리가 아는 대한민국은 어디로 갔는가. 한 발 디딜 틈조차 없다. (번역자주: 마지막 한 문장은 1944년 옥사한 독립운동가 이육사의 시 한 구절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