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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1)
요 14:15-24
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21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22 가룟인 아닌 유다가 이르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24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예수께서 떠난 자리에 또 다른 보혜사 성령께서 오십니다. 성령은 예수의 제자들에게 맡기신 사명을 이루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실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15, 21-24) 예수의 계명을 지키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의 관계를 설명하십니다. 이 둘은 서로 분리되지 않으며 오묘한 관계가 있습니다. 예수를 사랑하는 자는 말씀에 순종합니다. 예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는 그가 그리스도인임을 증명함과 동시에 그가 예수를 사랑하는 자임을 나타냅니다. 계명은 단지 머릿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도의 삶과 헌신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이것은 계명을 주신 분의 뜻입니다. 계명은 명령으로 순종을 요구합니다. 따라서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주어지는 특권은 예수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그에게는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납니다. 반대로 계명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그가 그리스도인이 아니거나 아니면 그는 예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또 다른 보혜사(16-20)예수께서는 곧 떠나시지만, 제자들을 돌보실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셔서 그들을 격려하십니다. 제자들은 고아와 같이 버림받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떠나신 후에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성령이 또 다른 보혜사이신 것은 예수께서 보혜사로서 역할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라, 진리를 거부하는 세상은 성령을 알지도 못하고 받을 수 없지만 제자들은 다릅니다. 제자들은 진리를 알기에 성령을 받을 수 있고, 성령이 함께 하실 수 있습니다. 성령이 함께 한다는 사실은 놀라운 특권을 의미합니다. 성령은 제자들이 전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비밀을 깨닫게 하시고, 예수께서 말씀하신 계명을 지킬 수 있게 도우실 것입니다. 이것이 보혜사의 역할입니다. 보혜사는 ‘조력자’, ‘대변자’, ‘위로자’의 역할을 합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 제자들은 순종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적용: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말씀을 순종하는 것은 서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입술의 고백이 신앙의 진실 됨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신앙의 진실 됨을 증명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주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자들은 주님을 그저 아는 것이지 사랑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이 어떤 말씀을 하시더라도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 설 교 >
예수의 이름으로
요 14:11-14 / 김태환 목사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 말씀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매우 익숙한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에 능력이 있다고 믿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로 태어난 사람을 일으켰습니다. 이 사건은 초대 교회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가장 센세이셔널한 사건이었습니다. 사도행전 3:6에 보면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면서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였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반대하던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이름”은 두려움과 공포의 이름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붙잡아서 때리면서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협박했습니다.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사도행전 5:40)”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이름”은 찬양하고 높여야 할 이름이었고, 구원의 권세가 있는 이름이었고, 믿어야 할 이름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든 사람을 낫게 했고,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는 일을 했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예수님은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믿고 그리스도인들은 기도할 때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이것이 하나의 전통이 되었습니다. 기도할 때는 자기 이름으로 기도하거나, 다른 어떤 권위 있는 사람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않습니다. 어떤 성인의 이름으로도 기도하지 않습니다. 기도할 때는 언제나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많은 경우에 이 말씀은 잘못 해석되어 왔습니다. 기도할 때 형식적인 의미에서 마지막에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문자적인 의미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만 하면 그대로 다 이루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에 매직 파워가 있으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모두 이루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말씀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잘 살펴보면, 우리가 조심해서 보아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13절 말씀입니다. “그리고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내가 너희에게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될 것이다(You can ask for anything in my name, and I will do it, so that the Son can bring glory to the Father)”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뜻을 잘 생각해 보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1)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2)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것과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기도에 예수님께서 싸인을 하신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의 기도를 예수님께서 승인하셨다는 뜻입니다.
이런 경우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꼭 하고 싶은 어떤 일이 있는데 어머니가 허락을 해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문제를 가지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기도하면서 그 어머니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우리 어머니가 허락을 해 주시지 않습니다. 하지만 꼭 이 기도를 들어 주세요. 우리 어머니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이런 기도를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기도할 때 예수님께서 기뻐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일을 가지고 기도하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철저하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무엇을 기뻐하시고,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정확하게 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일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반대로 자기가 원하는 일이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으신 일은 모두 포기하셨습니다. 그 기도가 유명한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아닙니까?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가복음 14:36) 지금 겟세마네 동산에 가면 큰 올리브 나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의 한 올리브 나무는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이 올리브나무는 예수님 당시에도 있었던 나무이다”라고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어쩌면 예수님은 그 올리브 나무 아래서 하나님께 그런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에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여김을 받으소서. 아버지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하소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이 세상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마태복음 6:9-10)”라고 나와 있습니다. 아주 유명한 구절이지요? NIV 성경에는 이 말씀이 이렇게 나옵니다. “Our Father in heaven, hallowed be your name, your kingdom come, your will be done on earth as it is in heaven.” 예수님의 사역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을 이룬 사역이었습니다. 어느 것 하나도 하나님의 뜻을 어기거나 거스른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이 예수님의 사역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말씀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말씀은 단순히 앞에서 자기 마음으로 기도해 놓고 맨 마지막 마칠 때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기도의 내용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내용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알면 어떻게 됩니까? 예. 기도의 내용이 달라집니다. 자기 마음대로 기도해 놓고 마지막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그런 식의 기도가 아니라, 기도 내용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기도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결론을 지을 수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이 기도가 과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는가?” 하고 점검을 해야 합니다. 둘째로, “예수님이시라면 나와 똑 같은 상황에서 어떻게 기도하셨을까?” 하고 생각해야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말씀의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 보십시오. “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내 말을 믿어라. 나를 믿지 못하겠으면, 내가 행한 표적 그것만이라도 믿어라. 내가 너희에게 진리를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지금까지 해온 일들을 그 사람도 행할 것이다. 심지어 이보다 더 큰 일들도 행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내가 너희에게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될 것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흥분되지 않습니까?
김경수 목사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은 어떻게 받아 누릴 수 있을까요? 대부분 잘 아실 것입니다. 물론 답은 기도입니다. 경험된 사실이기도 하지만 진리의 말씀인 성경은 기도에 대해서 너무나 많은 내용들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잘 알고 있는 너무나도 중요한 사실인 기도에 대해서 또한 등한시 하며 살아온 것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기도의 결핍과 부족은 곧 은혜가 메마르고 축복이 사라지게 함으로 자연스럽게 신앙생활은 활력을 잃게 되고 삶의 갈하고 주리는 일들은 악순환처럼 시정되지 않고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것입니다. 이런 삶에 익숙해지다 보면 신앙생활은 걸림돌이 되고 하나님은 그리스의 신화에 나오는 신들 중에 하나라고 하는 인식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일정한 시간 동안 살면서 뒤돌아보면 후회할 것이 많겠지만 그 중에서도 가슴을 치며 통탄할 일은 기도의 부족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의 핍절과 가난, 허기지고 주린 삶의 이유는 기도의 부족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미래는 또 어떨까요? 기도하지 않고 지내온 것처럼 살아도 미래의 희망과 비전을 가질 수 있을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기도 없이 산다면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는 삶의 연속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래가 복되고 희망적이기를 원한다면 무엇보다도 기도의 삶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그리고 능력은 오직 기도로 오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눈앞에 두고 기도의 중요성에 대해서 강조하여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마지막 밤을 보내시면서 성찬식과 세족식을 마치시고 곧 죽게 될 것을 말씀하셨을 때에 잠시 주님과 함께 죽는데까지 가겠다고 호기를 부리기도 했지만 그것은 자신들의 불안하고 염려스러운 마음을 감추는 은폐성 발언에 불과했을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사실을 잘 알고 계셨기에 그들을 안위시키면서 기도에 대하여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모두 일곱 여 차례 반복하시면서 강조하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필두로 기도의 중요성을 말씀하십니다.
곧 15장에서도 7, 14절, 16절에 다시 강조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16장에서도 23, 24절, 26-27절에 이르도록 기도에 대해서 계속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 상에서의 가상칠언에 대해서 묵상하곤 합니다. 그러나 이토록 반복적으로 강조하시면서 행하라고 말씀하신 기도에 대해서는 너무나 무심하게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왜 나는 일이 잘 되지 않지?”, “될 것 같은데 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나의 미래는 기대할 것이 없어. 이렇게 살다가 죽는 것지.” 등등 부정적이고 패배적인 생각과 말들을 늘어놓습니다.
실로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생각과 말입니다. 미래를 기약할 수 없고 기대하지 못한다면 살았다고 하지만 죽은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사람이 살면서 미래는 더 좋아지고 발전하며 행복할 것이라는 기대를 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왜 이토록 연약한 생각과 말들을 하면서 살지 않으면 안 될까요? 무엇이 문제입니까?
오늘 본문 말씀을 보십시오. 한계가 정해지지 않은 무한정의 약속이 주어졌습니다. 무엇이든지 기도하면 주님께서 응답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진실로 우리들의 삶 가운데 기도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면 결코 힘을 공급받을 수 없다는 평범하지만 간과하기 쉬운 진리에 초점을 맞추고 집중을 합니다. 태양을 맞추지 아니하면 놀라운 에너지를 공급받을 수 없듯이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하고 집중하며 은혜를 사모할 때 힘을 공급받게 됩니다. 다윗도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졌습니다. 그도 실수를 했고 시행착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결같이 그는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합니다. 그리고 은혜를 사모했습니다.
(시18:1)-“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호와를 앙망하면 새 힘을 주신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연약한 인생이 어디서 힘을 얻습니까? 하나님을 앙망해야 합니다. 앙망한다는 것은 시선을 고정하고 기도로 은혜를 사모한다는 뜻입니다.
다윗은 기도의 사람입니다. 그가 놀라운 업적을 이루고 위대한 삶을 산 밑바닥에는 기도의 영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환경을 탓하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집착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하고 기도합니다. 은혜를 사모합니다. 새 힘을 공급받기를 소원합니다.
다윗의 기도는 언제나 동일합니다.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마감합니다.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기도를 놓치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와 다른 점입니다. 기도가 없는 우리들이 다윗을 볼 때 그는 마치 영웅처럼 보입니다. 우리와 다른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는 태어나면서 특별한 사람으로 태어난 것처럼 생각합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오히려 많은 약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부모님의 사랑을 받지 못했습니다.
(시27:10상)-“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부모님에게 버림받은 느낌은 사람의 인격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어릴 때부터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인격에 역기능적인 면이 많이 나타납니다. 그만큼 부모님의 사랑은 자녀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데 다윗은 사랑은 고사하고 버림받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은 고사하고 항상 부모님으로부터 무시를 당하며 삽니다. 다윗은 성장하면서 문제아가 되어야 하며 사회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는 위대한 이스라엘의 성군이 된 것입니다.
무엇이 이렇게 바닥에서 허우적거리며 살아야 할 사람이 창공을 비상하며 존귀함을 누리면서 살게 했습니까?
다윗은 하나님을 떠나지 않습니다. 시선을 항상 하나님께 고정합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이유는 기도줄을 놓치지 않습니다. 목동으로 있을 때에도, 골리앗을 물리치고 난 후에도, 광야에서 쫓김을 받을 때에도, 왕이 되었을 때도 기도줄을 놓치지 않습니다. 기도가 그로 하여금 위대한 삶을 살게 한 것입니다. 기도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힘을 공급받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부모에게는 버림을 받고 무시를 당했지만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하고 기도로 나아갈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영접해 주었습니다.
(시27:10하)-“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기도는 믿음의 사람에게 새 힘을 가져다줍니다. 그렇다면 왜 믿음의 사람들은 기도를 하지 않을까요?
마귀가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죄 중에서 태어나 죄를 지으며 살다가 어느 날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이라고 하는 선물을 받습니다. 마귀의 자식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새생명의 은총은 기쁨을 가져다줍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훈련되지 못하고 거룩한 습관을 들이지 못함으로 인해 다시 옛 생활로 쉽게 돌아가 버리는 경향이 허다합니다. 다시 마귀의 종노릇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 어떻게 살았습니까?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았습니다. 기도 없이 살지 않았습니까? 내 마음대로 살고 환경과 사람에 의해 영향을 받으며 살아왔습니다. 신앙생활에 훈련이 없기 때문에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마귀의 조종을 받게 됩니다.
마귀의 최대 미혹은 “기도하지 말고 살아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남의 이목이 있어 예배를 드리는 것도 크게 신경 쓰지 않습니다. 사람과의 교제가 좋고 봉사를 통해 인정도 받게 됨으로 열심히 모임에 참석하는 것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도하기 위해 무릎을 꿇으면 마귀와 그의 졸개들은 비상사태로 돌입하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기도하면 하나님의 능력을 받게 되고 은혜를 누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받고 은혜를 누리게 되면 믿음의 사람들은 행복하게 됩니다. 누구보다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기도만큼은 절대로 묵과하지 않습니다.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기도의 잠을 자게 만듭니다.
기도의 잠을 자는 순간부터 믿음의 사람들은 힘을 상실합니다. 능력이 빠져 나갑니다. 은혜가 시들해집니다. 능력이 빠져나가면 무기력이 찾아옵니다. 시험들이 찾아옵니다. 태양을 등지는 순간 어두운 그림자를 보게 되듯이 하나님을 등지고 기도의 잠을 자는 순간 홀연히 시험과 재앙이 그림자처럼 찾아오는 것입니다.
마귀는 기도 없이 잘 할 수 있고 큰 결실을 기대할 수 있다고 유혹합니다. 과신하도록 합니다. 그러나 기도 없는 삶은 알맹이가 없는 쭉정이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미래가 없는 불행한 삶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자 주님께 왜 자기들은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느냐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가는 일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로 하여금 기도로 깨어 있으라고 권면했습니다. 만약에 기도로 깨어 있지 아니하면 시험이 찾아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의 훈련과 거룩한 습관이 되어 있지 못한 육적 그리스도인이었던 제자들은 결국 주님을 모른다고 배신하며 도망가는 비참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주님과 더불어 기도로 깨어 있었다면 그들은 승리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의 잠을 자고 있다면 주님께 충실한 것이 아니라 마귀에게 충실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는 만사를 형통하게 합니다. 기도는 천국의 보고를 여는 열쇠입니다. 기도는 새 힘을 공급받는 유일한 길입니다. 기도는 영적 호흡이기에 하지 아니하면 영적으로 죽습니다. 기도할 수 있다면 미래는 희망과 비전으로 맞이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과 실라가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지만 실신 상태에 이르렀어도 기도줄을 붙잡고 기도할 때 찬양할 수 있는 새 힘을 공급받습니다. 찬양할 때 지진이 일어나고 옥문이 열리며 착고가 풀려지는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이 일로 빌립보 감옥에 있던 간수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기도 없는 삶은 후회로 귀결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도의 대가를 지불하고 미래를 기대하는 삶이 절대적으로 지혜롭고 현명한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기도는 어떤 일들이 나타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먼저는, 주님보다 큰일을 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주님께서 얼마나 놀라운 일들을 하셨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따랐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침을 받았습니까? 귀신이 쫓겨 가고 불치의 질병들이 고침 받으며 한량없는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그런데 주님보다 더 큰 일을 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주님께서 단지 근심하는 제자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립서비스를 했을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기도는 주님보다 더 큰 일을 하게 할 것입니다.
다니엘은 기도하며 살기로 뜻을 정했습니다. 하루 세 번씩 기도의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하나님을 향해, 예루살렘을 향해 창문을 열고 기도를 합니다. 그의 성공적인 삶의 비결은 기도에 있었던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은 지혜는 그 누구도 따라가지 못합니다. 정권이 바뀌어도 그의 입지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엘리야도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가졌다고 야고보 사도께서 설파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약5:17-18)-“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
주님의 약속은 우리를 흥분시키지 않습니까?
기도하면 힘을 공급 받고 하늘문을 열기도 하며 닫기도 합니다. 기도하면 사자의 입을 봉하게도 하며 상황을 반전시키기도 합니다.
나는 기도가 좋습니다. 기도가 이런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가져다주는 것이기에 내 평생에 기도줄을 놓치 않으렵니다. 새벽에도 기도하렵니다. 매순간 기도하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의 시간을 정하십시오. 기도를 하고 계시다면 조금 더 시간을 할애하는 것이 좋습니다. 기도의 양이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오래 기도하는 것이 좋습니다. 평생에 새벽을 깨울 수만 있다면 일어나십시오. 새벽에 도와주실 줄 알아 일어나서 성전에 와서 기도한다면 미래는 찬란하게 열릴 것입니다. 기도에는 대가와 희생이 따릅니다. 그러나 그 열매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너무나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는 사실 그 자체로 흥분되는 일입니다.
두 번째는, 무엇을 구하든지 주님께서 행하리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전 삶의 영역에서 필요한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가정의 행복과 평화, 자녀들의 형통함, 식구들의 건강, 사업과 직장의 번창함.
미래와 비전을 위하여,
교회의 부흥과 나라의 발전 등등.
우리들의 삶의 전 영역에서 기도는 필수적입니다. 기도는 외부의 적대적인 공격을 방어하는 힘이 있고 내부의 염려와 근심들을 물리치는 능력이 있습니다. 담대하게 되고 미래와 비전을 위하여 기대하게 만듭니다.
기도하는 것은 무엇이든 받게 될 것입니다.
기도는 흥분되는 일입니다.
2020년을 뒤돌아보면 기도의 부족이 못내 아쉽습니다. 기도를 조금이라도 더 했더라면 상황은 현저히 달라져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늦지 않았습니다. 내년에는 새해 벽두부터 기도로 힘차게 나아갑시다. 한 해가 흥분의 도가니가 될 수 있도록 합시다.
예수님보다 큰일도 하리니
요 14:12-17 / 이종윤 목사
1. 어떤 류의 일인가? (What kind of works?)
주님은 두 가지, 즉 기적을 행하신 일과 영적인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큰 일이 기적을 말씀하신 것이라면 이런 일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충분히 주님을 믿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큰일을 하는 이가 없는 것입니까? 큰 일이 영적인 일을 말씀한 것이라면 하나님 입장에서 보는 것과 우리가 보는 것 사이에 큰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전도의 사명을 감당하고 돌아온 제자들이 기뻐하며 주님께 보고했을 때, 주님은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하셨습니다.(눅10:19-20) 물리적 이적보다 영적 구원의 가치를 더 크게 생각하심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II. 어떤 조건이 있나? (What kind of Conditions?)
1.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 (We must believe on Jesus)
‘나를 믿는 자는 그 보다 큰 일도 하리니'(12절) 우리는 주님의 존재뿐 아니라, 그분의 구원주 되심을 믿어야 합니다. 주님을 믿는 이들을 통해 주님의 일은 이 세상에서 계속될 것입니다.
2.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13-18절) (We must pray)
주님은 하늘에, 제자들은 땅에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거리감을 제거하고, 더 큰일을 할 수 있는 열쇠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 기도를 드리려면 우리는 먼저,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해야 합니다. ① 우리는 먼저 믿음으로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크리스챤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기도는 크리스챤만의 것입니다. 14절에서 ‘너희가 내 이름으로’, 12절의 ‘나를 믿는자'라는 말이 이것을 설명합니다. ② ‘다른 이름은 없다’ 행 4:12에서 베드로는 공회 앞에서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예수 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③ 예수님의 이름을 주문처럼 생각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함부로 팔지 말아야 합니다.
3. 우리는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순종해야 한다.(We must love for Christ and keeping His Commandments)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15절)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서 그리스도를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사랑하고 순종하면 오늘도 큰 역사가 일어납니다.
4.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을 통해서 능력을 입어야 한다.(We must be empowered by Christ's own Spirit, the Holy spirit)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16절) 우리는 성령 없이 기도할 수 없습니다. 주님을 사랑할 수도 순종할 수 도 없습니다. 내 속에 계신 성령께서 그 일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나는 너희가 자극 좌절감에 빠져 괴로워하는 것을 알고 있다. 세상은 복음에 대한 반응을 별로 나타내지도 않고 있음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승천하여 하나님 우편 보좌에 앉아 너희를 다스린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아버지께서 내게 주셨다. 내가 이 권세로 너희를 세상에 보낸다. 나는 죄, 사망, 지옥, 마귀를 이겼다. 너희도 세상을 이길 능력자가 될 것이다. 내가 한 일보다 너희를 통하여 더 큰일을 하고 싶다. 자 내가 너희에게 요청하노니 너희는 복음을 전파하라. 내가 너희에게 명한 것을 온 세상에 나아가 전파하라.”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하지 맙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모든 것을 할 것이라고 외칩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기도하며, 사랑하고, 순종하여 성령의 능력을 받아 홍해를 가르고 세상을 바꿉시다.
이보다 큰 것도 하리라
요 14:12-18 / 박근호 목사
지난 주간은 월드컵 열기로 인해 전에 없던 엄청난 희열과 감격을 맛본 신바람나는 한 주간이었습니다. 구속사의 '고난 주간'처럼 아마 지난 주간은 우리 역사에 두고두고 기억될 한 주간이 될 것입니다. '혹시나' 했는데 세계 6위 이탈리아를 물리치고, '설마' 했는데 무적함대라 불리우는 세계 8위 스페인조차 물리치면서 4강 확보에 준결승까지 진출했습니다. 이탈리아와의 16강 경기가 열렸던 화요일 저녁과 스페인과의 8강 경기가 열렸던 토요일 오후는 그야말로 온 나라가 지축이 흔들리는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정말 믿기지 않는 승리입니다. 이렇게 까지 잘 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잘 해야 16강, 월드컵 출전 사상 첫 승만 올린대도 성공이라는 게 축구 전문가들의 전망이었습니다. 그런데 4강입니다. 우승확률 40:1에서 이제 6:1이 되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해가 되질 않고 납득이 가질 않습니다. 불과 두 달 전만 해도 본선에서의 1승조차도 어렵다는 평을 받던 한국팀입니다. 그런데 두 달 사이에 전혀 다른 팀이 되어 있습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되겠습니까?
물론 인정해야할 것은 우리에겐 약간의 운도 따랐습니다. 이탈리아, 스페인 정말 잘하는 팀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심판을 매수하지 않았고 또 그 정도의 홈그라운드의 잇점은 언제나 있어온 것입니다. 잉글랜드는 브라질과 한 명이 더 많은 11:10으로 싸웠지만 경기에 지고 말았습니다. 분명 우리에게 운도 따랐지만 운 때문에 이겼다고 한다면 그건 너무 불공평한 평가입니다.
물론 패자의 '억울한' 심정도 헤아려야 합니다. 대 이탈리아전에서 주심 판정에 큰 무리가 있었다고는 보지 않으나 저들의 그러한 반응을 '지나친 불평'이라고 넘겨버리기에는 좀 아쉬운 면이 없지는 않습니다. 분명 우리에게 홈그라운드의 이점이 조금은 작용한 것이고 또 그들의 불운이 언젠가 우리의 불운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냉소적으로 대하기보다는 저들을 향한 이해와 동정을 보이는 것이 우리가 세계에서 더 많은 친구를 만드는 길일 것입니다.
분명 심판도 사람인고로 오심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제 스페인과의 연장전에서의 한 골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걸 '아니다'라고 해선 안될 것입니다. 터치 라인 아웃이 아닌데 아웃이라고 한 것은 심판의 오심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이미 우리가 이긴 경기에 심판 실수가 있었다면 그 행운에 감사하더라도 그러한 심판의 실수와 공동 운명체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얻은 행운에는 감사하면서 이런 큰 대회에서 반복되는 오심이 가져오는 문제에 대해서는 차분하고도 진지한 분석이 필요하다 할 것입니다.
4년 전 프랑스 월드컵 때 우리는 멕시코와의 첫 경기에서 첫골을 넣고도 하석주 선수가 퇴장 당해 경기를 망쳤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월드컵에서 하석주의 퇴장 이후 그의 백태클보다 훨씬 심한 태클임에도 퇴장은커녕 경고도 받지 않는 무수한 태클들을 거기서 봤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감수했습니다. 그저 재수없게 시범 케이스로 걸렸다고들 생각했습니다. 이건 인간이 심판을 보는 경기에선 얼마든지 있는 변수입니다. 만약 그것이 골로 인정되었다면 그 다음 국면이 어떻게 전개되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겁니다. 아마 우리 선수들이 자극을 받아 더 펄펄 뛰었을지도 모릅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 선수들이 잘 싸웠다는 것입니다. 잘 싸워 이긴 겁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패배에 익숙한 우리들은 '우리가 이태리 같은 강팀을 그냥 이길 리 없다'고 생각하고, 우리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으면서도 '항상 그 상황을 외국의 시선으로 검증 받아야 그제서야 마음이 놓이는 병'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우리가 퇴장을 먹을 땐 우리끼리 'FIFA 규정을 숙지를 못했네 어쩌네' 하며 자학하더니 시뮬레이션에 대해선 철저하게 대응한다는 강화된 규정이 더해진 이번 월드컵에서의 상대 선수 퇴장에 대해서는 우리끼리 쫄아서 궁시렁거리고 있습니다. 전세계에서 한국 축구에 반한 사람들이 무지기수로 늘어가고 있는 이 마당에 말입니다.
개중에는 '편파 판정으로 우리가 16강, 8강, 4강에 올랐다'느니, '우리같은 팀이 올라가면 월드컵 수준이 낮아졌다고 세계의 비웃음을 사지 않겠냐'느니... 당당하게 우리의 승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의식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한 반칙만을 생각하지 우리 선수들이 채이고 맞고 걸려 나자빠지는 건 억울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이게 뭘 말하는 거겠습니까?
물론 축구 선진국들인 이탈리아와 스페인과의 경기에서 그들은 우리보다 앞선 기술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술이 앞서면 뭐합니까? 이상하게도 완벽한 찬스에서 때리는 슛이 빗나가고, 골 포스트를 맞고 튕겨져 나옵니다. 골이 들어가려면 수없이 들어갈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넓은 골문으로 볼이 들어가질 않습니다. 어제 스페인과의 대전에서는 후반전 들어 스페인의 결정적인 슛이 골 포스트를 맞고 튕겨나오자 관중석에서 '이젠 이겼다'는 환호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골 포스트 맞고 나온 팀중에 이긴 팀이 없거든요. 골대만 때리면 졌습니다. 그러더니 스페인은 그 숱한 찬스를 다 놓치고, 또 심판의 오심으로 잃어버리고 결국은 승부차기에서 우리에게 5:3으로 지고 말았습니다. 이 결과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입니까?...
경기가 끝나고 인터넷 게시판에 들어가 보니 여러 소감들이 많이 올라와 있었는데 그 의견들을 종합해 보면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승리해서 기쁘다'는 것과, 또 하나는 '홈 그라운드의 잇점에 의한 어드밴티지로 진짜 승리는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오프 사이드로 판정된 것은 골'이라느니, '어떤 선수의 퇴장은 지나쳤다'느니, '이렇게 승리해서 무슨 의미가 있느냐'느니... 뭐 이런 저런 이야기들이 게시판을 가득 채웁니다. 사고의 폭을 넓힐 수 있는 재미있는 장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거기서 일종의 패배주의가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외국에서조차 우리의 승리를 인정하고 축하해 주는데 정작 우리는 외국의 시각보다 더 치우친 시각으로 우리의 승리의 의미를 희석화시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동안 흔히 우리들은 우리 선수들이 유럽 선수들에 비해서 체력과 골 결정력이 떨어진다고 평했습니다. 저도 두달 전까지는 그런 생각에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월드컵 경기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수정해야할 필요를 느낍니다. 우리 선수들이 오히려 유럽 선수들보다 월등한 체력을 보여 주었습니다. 개인 기술도 상당히 근접해 있고 무엇보다도 뚜렷한 건 강력한 팀웍입니다. 체력과 조직력은 그 어느 팀에 뒤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체력과 스피드와 조직력이라는 종합된 실력으로 한 경기 한 경기를 이겨 4강까지 올라온 겁니다. 전문가들이 8강에 오른 여덟 팀을 분석했는데 우리나라는 모든 부분에서 3위에 올라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나라는 안돼'하는 숙명론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겁니다.
물론 우리가 4강에 오른 것이 우리 선수들의 순수한 실력만으로 이룬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른 나라들이 모두 다 실력이 떨어져서 4강에 못오른 것도 아닙니다. 그걸 안믿는 이들은 '운명' 또는 '재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엔 뭔가가 특별한 게 있다는 생각을 대한민국 국민도 하고 있고 외국인들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Fantastic', '환상적이다, 기이한 일이다, 이변이다'라고 표현합니다. 그럼 그 특별한 게 도대체 무엇일까요?
물론 세계에 유래가 없는 온 국민의 단합된 응원이겠지요. 정말 경기도 경기지만 전국 방방곡곡에서 펼치는 응원열기를 보노라면 '언제 우리 민족이 이렇게 하나될 수 있을까' 싶어 목이 메이는 게 정말 우리 민족은 위대한 민족이라는 경험을 하곤 합니다. 뭐 '악마니 뭐니' 하며 호칭가지고 너무 과민반응 일으킬 필요 없습니다. 그건 그냥 '애칭이다' 여기면 됩니다. 사랑하는 연인끼리 귀엽고 깜찍하고 사랑스러운 상대를 향해 '악마!'하고 부르지 않습니까? 그런 의미로 수용하면 되지 그걸 가지고 사탄이니 마귀니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된 우리들은 그 응원의 힘 말고도 또 다른 무엇이 우리 선수들을 돕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건 바로 눈에 보이지 않는 힘입니다. 뭔가 우리 팀을 돕고 있는 기운이 확실히 있습니다. 그 기운이 우리 선수들에게 그리고 우리 국민들에게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게 뭘까? 또 그러한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일까? 이게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번 월드컵에서 찾아야할 보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이 있습니다.
저는 이번 월드컵의 최대의 수확은 4강이니 우승이니 하는 경기적인 것보다도 우리 속에 있는 능력을 새롭게 확인하고 우리 자신들에 대해서 자긍심을 갖게 된 것이라고 봅니다. '국민 대통합'이 이루어졌다고 말합니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건 정말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IMF 이후 주눅들고 의기소침해진 우리 민족이 다시금 하나되어 일어서는 놀라운 비상을 우리는 모든 도시에서 보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하여 우리 자신을 이전보다 더 사랑할 수 있게 되고 무엇을 하든 자신감을 갖게되었다고 하는 것이 월드컵을 통해 얻은 최고의 유익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저는 이 2002 월드컵을 '하나님께서 21세기에 우리 민족에게 주신 가장 크고 놀라운 선물'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이번 월드컵을 통해서 모든 부정적인 것과 패배주의와 회의주의, 사대주의를 다 버리고 참으로 우리도 할 수 있다고 하는 새희망의 노래를 부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가 언제 그런 모습을 보았습니까? 모두가 한 마음 한 뜻 되어 기뻐하고 환호하는 그 신명난 모습들, 이전보다 더 열린 사람들이 되고, 열정적인 사람들이 되고, 너그러운 사람들이 된 듯한 느낌, 만나는 사람마다 손을 잡고 싶고 얼싸안고 싶을 정도로 정겨운 느낌, 그런 것은 천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고귀한 것들인데 이런 역사가 지금 이땅에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긍심과 자존감과 자신감의 회복입니다. 이런 것을 가져보지 못한 사람은 자꾸만 자기를 비하하고 학대하는 데 익숙해지게 됩니다. 사대주의와 식민사관에서 벗어나질 못합니다. 그러니 우리 선수들이 그렇게 잘해서 당당하게 4강에 올랐는데도 아직도 우리 가운데는 그것이 '홈팀의 어드벤티지'이거나 '심판의 불공정한 판정'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겁니다. 40위 랭킹인 한국이 감히 5위, 6위, 8위의 그런 팀들을 이긴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에게 진 포르투갈과 이탈리아의 언론을 제외하고는 세계 유수의 언론들이 모두 한국의 승리를 실력에 의한 것으로 인정하고 있지 않습니까?
어느 기자가 공항에서 우리와 같은 조에 속한 포르투칼 선수들에게 '한국팀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한국팀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고 대답했다는 겁니다. 개막 바로 직전에 한국에 도착한 감독조차도 '한국에 대한 데이타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진 겁니다. 그렇게 오만하고 준비가 부족했기에 진 것입니다. 이탈리아는 예선도 겨우 통과하고 조2위로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저들은 우리가 보았다시피 남들이 '더티 싸커'라고 비난할 정도로 깔끔하지 못한 경기를 보였습니다. 더욱이 한 골을 먼저 넣고 나서 그것을 지키기에 급급하다가 정신력과 투지로 똘똘 뭉친 한국에게 역습을 당한 것입니다. 빗장수비의 대명사인 이탈리아에 대해 경기 종료 5분을 남겨놓고 동점골을 터뜨리고 연장에서 골든골을 터뜨려 이긴 끈기의 팀은 축구 역사상 우리밖에 없습니다.
히딩크의 위대함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겁니다. 그는 '우리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선수들에게 '너희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줬습니다. '너희에겐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할 만한 저력이 있다'고 저들을 격려하면서 저들을 믿고 가르치고 훈련시켜 저들 속에 있는 그 잠재력과 가능성을 백분 끌어낸 것, 이게 바로 그가 명장인 이유요 한국축구가 승승장구하는 이유입니다.
오늘 제가 이런 축구 이야기를 장황하게 하는 것은 예수님도 바로 그런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제가 한 이 월드컵 이야기는 바로 예수님의 이야기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따르던 갈릴리 사람들 가운데는 유독 지배자들의 횡포와 경제적 궁핍 그리고 너무 과중한 종교적 부담으로 풀이 죽고 기가 죽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에게서 어떤 희망적인 것도 찾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바로 그런 사람들을 긍정하고 격려하면서 그들 속에 있는 아름다운 것들을 끌어내어 새로운 의식 속에 살게 하셨습니다. 이게 바로 주님이 하신 일이었습니다.
나면서부터 시력을 잃어 평생 배우지 못하고 길가에 앉아 구걸하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죄인 취급 하였고 주님의 제자들마저도 그가 그렇게 된 것이 그 자신의 죄 때문인지 아니면 그 부모의 죄 때문인지를 물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가 그렇게 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이라고 말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이 그에게서 나타나기 위함'이라고 함으로써 그를 한없이 긍정해 주었습니다.
주님은 그를 고쳐줌으로써 그를 멸시의 대상이 아닌 하나님의 일들이 일어나는 현장이 되게 하고 장본인이 되게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의 불행에서 그저 죄를 찾기에 급급했지만 주님은 그의 불행 속에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의 일을 보았고 그 사람 속에 피어날 아름다운 하나님의 미래를 보았습니다. 이게 얼마나 중요한 얘기입니까?
그는 확실히 변해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질 못하고 '맞다, 아니다'라고 논란을 벌입니다. 변한 겁니다. 새로워진 겁니다. 이제 사람들은 예전의 비굴하거나 주눅든 죄인이나 걸인의 모습을 그에게서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는 당당하게 새 인생을 살아갑니다.
어디 성경에 이런 이야기가 한 두 가지이겠습니까? 열두 해 동안 혈루증 앓던 여인, 병든 딸의 치유를 염원했던 수로보니게 여인, 간질병 들린 자식을 위해 애타하던 아버지... 저들을 향한 주님의 선언은 '네 믿음대로 될찌어다'였습니다. 주님의 기적은 이런 방식으로 일어납니다. 주님은 그들 자신들의 의지와 확신과 믿음을 문제 삼고, 그들 자신들 속에 있는 능력을 한없이 긍정해 주고, 그들 자신들이 기죽거나 주눅들지 않고 자기들 속에 있는 아름답고 힘있는 것들을 드러내도록 도와줍니다. 그게 바로 '네 믿음대로 될찌라'라는 치유의 선언입니다.
주님은 바로 이 일을 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이고 이 일을 하시되 십자가를 지기까지 철저하게 하신 겁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얼마나 존귀한 존재요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인가를 깨우쳐 주는 놀라운 사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절망적인 존재로 낙인찍어서는 안됩니다. 그런 태도를 겸손이나 신앙으로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오.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오'했던 사도 바울의 의연함이 바로 우리의 의연함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긍정하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겁니다.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임을 일깨워주신 겁니다. 당신의 독생자까지도 주실만큼 우리가 가치있고 존귀한 존재임을 십자가로 일깨워주신 겁니다.
언젠가 빌립이 주님께 "주님,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했을 때 주님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본 사람이다"라고 대답하십니다. 유대 사람들은 이것을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천한 인간 속에서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신성모독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하실 때 저들은 돌을 들어 주님을 치려 합니다. 이 때 주님은 엄청난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의 율법에 '내가 너희를 신들이라고 하였다' 하는 말이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을 신이라고 하셨느니라..." 요10:34절의 말씀입니다. 이 얼마나 파격적인 말씀입니까?...
그 주님께서 이제 제자들을 떠나시기 전에 아주 중요한 말씀을 오늘 본문에서 하고 계십니다. 12절 말씀을 보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할 것이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당신의 사람들을 향한 엄청난 긍정입니다. 우리 시대의 영웅 히딩크는 상대도 안됩니다. 주님은 당신을 믿는 자는 오히려 스승을 능가하는 제자처럼, 주님이 한 일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건 당신의 사람들을 향한 놀라운 긍정입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인들의 역할이 스승보다 못한 제자처럼 스승의 흉내나 내는 것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보다 큰 것을 한다는 겁니다.
물론 이것은 주님 밖에서 가능한 게 아닙니다. 그 능력의 원천은 주님이 아버지께로 가셔서 보혜사 성령을 보내시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역시 주님이 저들 속에 역사하시며 계속해서 도와주고 가르쳐 주시는 가운데 일어나는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일이 아들이신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제는 믿는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번 월드컵을 보면서 바로 이 말씀이 늘 가슴에 파고 들어왔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요 또한 보혜사 성령을 너희에게 보내사 너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아니하고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하며 너희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하리라..."
저는 우리 월드컵팀이 승승장구하는 숨은 이유를 여기서 봅니다. 그 속엔 열명의 크리스챤들이 있습니다. 이운재, 송종국, 이영표, 이천수, 최태욱, 차두리, 안정환, 유상철, 현영민 등등... 저들 가족을 비롯한 한국교회가 얼마나 많은 기도를 하고 있습니까? 어제 경기장 관중석에서 '주님 안의 종국'이라는 프랑카드를 보셨습니까? 그게 바로 기적의 이유입니다. 정말 저들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는 보지 않습니까? 이운재 선수가 승부차기를 막아낸 후 자신감에 차서 씨익 웃는 모습을 보셨습니까? 그 자신감이, 그 믿음이 승리를 가져온 것입니다. '큰 일을 하리라'는 약속, '내가 너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아니하고 함께 한다'는 약속, 그 약속 안에서 저들은 자신들도 깜짝 놀라는 큰 일을 해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주님 안에서 소중히 여기고, 긍정하고, 우리 속에서 아름답고 힘있는 것들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건 자만도 아니고 교만도 아닙니다. 자기 속에 성령의 임재를 느끼고 그리스도의 현존을 느끼며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사는 자가 그리스도입니다. 주님이 뭐라고 약속하십니까? '더 큰 일을 하리라. 보혜사 성령께서 함께 하시며 도우실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면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라. 그러면 내가 시행하리라...'
이 약속이 오늘 여러분의 것이 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구하는 삶입니까? 기도하는 삶입니까? 자존감을 갖고 희망하며 살아가고 계십니까?... 무엇보다 자신감을 가지십시오. '엄마, 저 혼자는 못해요, 안돼요, 할 수 없어요'라고 말하는 자식보다 '엄마, 행복해요. 감사해요, 할 수 있어요'라고 말하는 자식이 좋은 겁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긍정해야 합니다. 이 자존감과 자기긍정이 없으면 그 신앙은 아주 미숙한 단계에 머무는 신앙이 되고 맙니다. 무엇보다 부정적인 의식들을 다 떨쳐버리시기 바랍니다. 패배주의와 사대주의를 다 몰아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처럼 믿음 안에서 자신을 한없이 긍정하고, 성령의 현존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자신을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으로 가꿔가시기 바랍니다. 내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감격하고 그 기쁨 속에서 기도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게 바로 새천년의 첫 번째 월드컵을 이 땅에 허락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놀라운 은총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겐 멋있고 선한 것들이 있습니다. 무한히 잠재된 힘이 있습니다. 쪼잔하게 나누고 갈리고 다투는 우리가 아님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가 하나인 것을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그게 바로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고 우리가 계속해서 이루어가야할 일들입니다. '기도하며 성령 안에서 살아갈 때에 너희는 내가 한 일을 할 것이요 그보다 더 큰 일도 하리라...' 이 주님의 약속을 믿고 언제나 성령의 신바람난 삶을 이루어가는 우리 영락의 모든 권속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의 일을 한다
김상복 목사
우리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기독교인은 믿음의 대상이 분명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믿음의 대상이 확실하고 분명합니다. ‘나’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지요.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를 믿고 나면 달라지는 것이 있어요. 그 달라지는 것 가운데 하나가 예수님이 하시던 일을 하려고 합니다. 본문에 보면 12절에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라고 합니다. 예수를 믿고 나면 그 날부터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하시던 일을 자기도 하고 싶은 거예요. 하려고 하는 겁니다. 그것이 예수 믿은 사람의 특징이에요. 예수님께서 무슨 일을 이 땅에서 하셨습니까? 23절, 2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하신 일을 세 가지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과 저도 예수를 믿으면 예수님이 하시던 세 가지 일을 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다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라고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좋아해요. 읽습니다, 공부합니다, 묵상합니다, 암송합니다, 순종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철저하게 알아요. 그것을 가지고 자기 가족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게 해요. 부모는 자녀들에게 말씀을 가르칩니다. 예수님께서 하셨듯이 말씀을 열심히 가르칩니다. 신명기 6장에 보면 “너희가 누울 때도 잘 때도 일어날 때도 걸을 때에도 길을 다닐 때에도 문지방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써놓고 네 자녀를 열심히 부지런히 가르치라”고 하였습니다. 나도 가르치고 내 아내도 가르치고 내 자식도 가르치고 내 형제도 가르치고 내 이웃도 가르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면서 살려고 하는 겁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하시던 것이에요. 여러분도 집에서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가르치십시오.
둘째는 천국 복음을 전했다고 하였습니다. 천국 복음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를 사해 주셔서 예수님 때문에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구원받지 못할 사람은 한 명도 없어요. 여러분의 사랑하는 가족들, 친구들, 형제들, 이웃들, 동료들, 누구든지 다 하나님의 사랑의 영역 안에 있는 것이에요. 가르쳐 주는 것이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도 전에 ‘이웃초청 잔치’에 왔다가 예수님을 만나서 믿고 이 자리에 앉아 있는 분들이 여러 사람 있습니다. 누군가 초청했기 때문에, 누군가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주었기 때문에 그들이 이 기쁜 소식을 듣고 하나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예수를 믿게 된 것이지요. 천국을 소유하게 되었고 영원한 생명을 갖게 되었고 죄 사함을 받게 된 것이에요. 여러분이 이번 주 동안에도 누군가를 초청하고 전화를 걸고 찾아가고 대화해서 다음 주에 이 자리에 와서 여러분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구원받는 일이 나타나기 바랍니다.
세 번째는 치유했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니라” 즉, 병 난 사람을 고친 것입니다. 병도 여러 가지 입니다. 육체의 병도 있고 마음의 병도 있고 영혼의 병도 있고 가정의 병도 있고 인간관계의 질병도 있고 뿐만 아니라 사업적인 질병들도 있습니다. 이 땅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병들어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남에게 병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아니고 마음에 병 든 사람들에게 평화를 줍니다. 사랑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사랑을 회복시켜 줍니다. 불안한 자들에게 안심을 줍니다. 깨어진 가정들을 묶어 줍니다. 이것이 믿는 사람들이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말씀을 가르쳤고 복음을 전했고 치유를 하셨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이 땅에 살면서 우리가 하는 일이 바로 그런 것들입니다. 그것이 예수 믿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여러분도 저도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서 예수께서 이 땅에서 하시던 일을 함께 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첫 째는 기도로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고 아픈 자들을 고치고 병 든 자들을 치유하고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켜 주는 일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영적인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일은 기도로 해야 되는 것입니다. “내 이름으로 구하라 무엇이든지 구하라 그리하면 시행하리니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리라”고 했습니다. 결국 영적인 열매는 영적으로 맺어지는 것입니다. 기도 없이는 되지 않습니다. 만약에 지금까지 여러분의 마음속에 ‘누구를 데려와서 복음을 듣게 할까?’ 생각이 안 나면 오늘이라도 기도하십시오. 이미 여러분들은 기도하셨을 줄 압니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 사람의 얼굴을 떠오르게 합니다, 그 사람의 이름을 줍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람을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기도가 없으면 도움이 안 되는 거지요. 하나님의 일을 할 수가 없어요. 무슨 일이든지 예수님께서 하시던 일을 하려면 여러분이 꼭 기도를 하십시오. 기도하면 이루어집니다.
둘째는 성령의 도움으로 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예수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그 순간에 여러분은 구원 받습니다. 구원받는 순간 성령이 여러분에게 임합니다. 여러분과 저는 혼자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함께 계시는 사람들입니다. 성령이 계시기 때문에 여러분이 무슨 일을 하든지, 어떤 종류의 일을 하든지 간에 성령의 도움을 기도로 구하십시오. 구하면 그 성령께서 여러분을 위로해 주시고 힘주시고 용기를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쓰임을 받도록 역사를 하실 것입니다.
다음 주가 이웃초청 큰 잔치입니다. 여러분이 분당과 성남 근처에 아는 사람들이 있으면 이번 주 동안에 기도하는 가운데 이름을 떠올리고 그 사람의 전화번호를 알아서 전화를 하고 찾아가고 권고하고 초청해서 다음 주일에 이 자리에 와서 여러분과 저처럼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이 일은 기도해야 됩니다. 성령의 도움을 받아야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어요. 여러분 때문에 누군가 구원받는 역사를 일으키도록 여러분의 가족과 친구들과 동료들, 이웃들을 위해서 이 시간 우리 함께 기도하십시다.
예수님이 하신 일보다 더 큰 일
이종윤 목사
Ms. Suzanne Scholte가 Seoul Peace Prize를 10월 7일에 받았다.
(상금은 미화 20만 달러)
요14:12의 예수님 말씀을 받은 우리의 반응은 어떠해야 할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 보다 큰 것도 하리니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I. 예수님께서 하신 일 보다 더 큰일이란 무엇인가?
1.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인가?
여기서 나를 믿는 자는 즉, 예수님을 바르게 믿는 사람에게 주신 특권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그런 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으니 우리 믿음은 기준치 미달인가?
2. 사도들에게 주신 말씀인가?
사도들은 기적을 행하였다.
그러나 주님을 능가하는 기적은 못했다.
3. 위대함에 대한 우리의 관점과 하나님의 관심은 같이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전도여행 보고를 하며 제자들은 자랑했다.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귀신들이 항복하는 것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라`(눅10:17-20) 하셨다.
기적보다 영적 구원의 가치를 더 높게 평가하셨다.
4. 주님이 하신 가장 중요한 일은 기적이 아니다
아버지 하나님을 나타내시고 아버지를 아는 지식을 갖게 하는 것이다.
주님이 언급하신 큰일은 영적인 일이다.
물론 하나님의 긍휼, 치유, 진보의 일들이 함축된다.
주님은 5천명에게 설교하셨지만 지금은 방송, TV, 인터넷 통해 수십만, 수백만명이 동시에 듣는다.
II. 약속 시행을 위한 조건들
1.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일도 하리니`(12절)
예수님의 존재, 세상의 구주로 믿는 것이 아니고 개인의 구주로 내가 믿고 의뢰하며 따른다는 것이다.
2.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13절)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한다.
가)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의 기도 (너희가...)
나) 예수님 이름 외에 다른 이름으로 기도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공로로 하나님께 접근할 수 있다.
다) 그리스도께서 기도에 합당한 삶을 사셨듯이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응답이 있다
라) 이는 아버지르 하여금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13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영광이다.
Ralph Keiper는 시력이 약해져 우울증에 빠졌다.
성령께서 그에게 인생의 목적을 물었다.
하나님의 영광과 네 시력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어느 것을 택하겠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겠다고 했다.
정말 하나님 영광이 네 시력보다 중요하다고 믿느냐?
내 시력 그것이 어떠하든지 하나님 영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려고 너에게 그 방식을 쓰셨는데 왜 염려하는가?
우리 주님도 소위 영광스런 방식으로 행하신 것이 아니다.
(머리 둘 곳, 오해, 조롱, 멸시, 거절, 매 맞고 처형 -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 것이다)
3. 주님의 약속은 순종을 통해 이루어진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라(15절)
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함께 간다
사랑은 순종의 샘이다.
순종은 사랑의 열매다.
나)`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마13:34)
우리집, 재산, 애완용 동물보다 이웃을 사랑하지 못한 우리에게 이웃을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라 하신다.
다) 사랑하라는 것은 섬기는 것, 희생하는 것, 나누는 것이다
4. 그리스도의 영, 성령을 통해서 능력을 힘입어야 한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16절)
성령이 아니고는 기도할 수도 없고 주님을 사랑하거나 순종할 수도 없다.
성령께서 내 안에 계셔서 행하지 않으면 주님의 맡겨주신 일을 할 수 없다.
III. 주님의 부탁하시는 말씀
1. 나 예수는 거친 세상, 반응 없는 세상, 죄를 포기하지 않는 세상에서
너희가 어려움과 좌절에 빠지는 것 알고 있다
그러나 부활, 승천하여 나는 아버지 우편 보좌에 앉아 거기서 모든 것을 다스린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아버지께서 내게 주셨다.
이 권세와 내 능력을 근거로 나는 너희를 제자로 보낸다.
나는 죄와 사망, 지옥과 마귀를 이긴 주님이다.
너희는 이 세력들을 이기는 주(lord)가 될 것이다.
2. 내가 이 세상에 있을 때 나는 약함에 싸여 있었다
나는 몇 가지 일을 했다.
이제 나는 부활의 주다.
너희는 내가 행한 것보다 더 큰일하는 것이 내 기쁨이다.
나는 너희를 통해 그런 일을 하고 싶다.
내가 너희에게 사명을 부여한다.
온 세상에 가서 이 복음을 전파하라.
내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 메시지를 축복해주며 악의 요새를 파괴할 것이다.
너희 증거를 받든지 거절하든지 할 것이다.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겠다(18절)
3. 이 위대한 사명을 받은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하지말고 하나님 은혜로 나의 주님의 능력으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나를 보내 주소서 하라!
놀라운 주님의 약속
이재철 목사
수련회를 가서 홍수가 난 강을 무모하게 건너려던 세 학생이 사망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교회 수련회를 가서 사망할 수 있는가 하는 의구심이 생길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바다 위를 걸었고, 풍랑을 보고 빠졌지만 예수님께서 건져서 살려주셨습니다.
이들에게는 어떤 차이가 있었을까요?
베드로는 주님이 먼저 걸어오라는 말씀이 있은 후에 걸어갔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간 것입니다.
우리는 무모한 맹신을 신앙으로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나중에 믿어지지 않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다른 사람도 넘어지게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 없이 내 욕심대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믿고 어떻게 믿어야 합니까.
하나님의 성품과 인격을 믿고, 약속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그럴 때 내 삶을 통해 이뤄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순종이 능력이고 순종이 축복입니다.
믿음도, 순종도 없으면 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 본문에서는 제자들을 통해서 이루실 약속의 말씀 세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①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하고 나보다 더 큰 일을 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12절)
정말로 예수님이 그 약속을 이루셨습니까? 성경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3년 6개월 동안 예수님의 주된 사역은 영혼 구원하여 제자 삼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12제자 중 한 명은 실패하고 11제자를 세우셨습니다.
후에 베드로를 보십시오. 그가 한 번 말씀을 전할 때 3천명, 5천명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3년 동안 사역하였으나 제자들은 후에 더 큰 일을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로마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고, 안드레는 러시아 정교회의 복음의 씨앗이 되었으며, 도마는 인도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런 사역들은 예수님이 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 이뤄졌습니다.
우리 교회도 이처럼 영혼 구원하여 제자 삼는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②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13-14절)
기도하면 응답하시는 것을 믿었다가도 믿지 못하고 의심할 때가 있습니다. 제자들도 그랬고 현재 우리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기도 응답에 대한 부분을 반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7:7-8 7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기도 하지 않고 신앙 생활을 하면 힘이 듭니다.
반대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이루실 것을 봅니다.
“내 이름으로”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악세사리로 보면 안됩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예수님의 인격과 존재입니다.
내 삶에 예수님의 인격이 나타나도록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베드로는 처음에 야고보와 요한을 경쟁의 대상으로 경계하였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요한과 함께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가다 성전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③ “내가 영원토록 너와 함께 하겠다”라고 약속하셨습니다. (16-17절)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 몸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몸 성전이 됩니다.
고아처럼 살아가는 사람은 자기 힘으로 모든 일을 해야 하지만, 자녀로 살아가는 사람은 아버지가 계시고 무엇이든 도와주십니다.
둘의 차이는 평상시에는 잘 나타나지 않으나 낮이 지나고 어두움이 오면 자녀는 돌아갈 곳이 있고 반겨 줄 가족이 있지만, 고아는 돌아갈 곳도 없고 반겨줄 사람도 없습니다.
내 인생의 죽음이 올 때를 보면 고아인지, 자녀인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8절)
내 안에서는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 확증을 주십니다.
구약은 율법시대, 예수님 시대는 은혜시대, 지금은 성령의 시대입니다.
성령의 빛없이 믿으려 하면 힘이 듭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요 14:13-14 / 이규현 목사
기도를 배운다는 것은 너무도 귀중한 일입니다. 우리의 일생에 가장 큰 변화를 일으켜 축복된 인생을 살아가게 하는 키가 있다면 바로 기도를 배우는 일일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풍성한 삶을 살게 하는 비밀이 기도에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레슨을 받기도 하고, 멤버십을 갖기도 하고, 수많은 특권들을 얻고자 애를 씁니다. 그러나 기도의 특권에 견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너무도 연약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도움 없이도 살 수 있다고 큰소리를 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살다 보면 절망에 부딪히는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배운다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기도를 배운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한계와 문제에 부딪혔을 때 기도를 배워놓은 사람은 살아납니다. 기도는 우리 인생을 살아나게 하고 인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유한한 인간이 절대자와 접속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는 신자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은총이고 특권입니다. 그런데 기도에 빠뜨릴 수 없는 것이 기도의 말미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입니다. 어떤 초신자에게 갑자기 기도를 시켰는데 끝을 맺는 것을 몰라서 계속 “주실 줄 믿습니다.”라고 해도 아무도 “아멘”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간절히 기도합니다.”라고 해도 “아멘”이 안 나오자 너무도 당황해서 “하나님 안녕히 계십시오”라고 했다고 합니다. 기도를 아무리 멋있게, 열심히 했다고 해도 기도가 하나님께 도달하지 않는다면 소용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기도하지만 모든 기도가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가 받아들여지는데 결정적인 요소는 “예수님의 이름으로”에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에 대한 의미를 정확히 알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자격을 얻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아니면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핸드폰의 벨이 울리면 발신자의 이름을 확인한 후 전화를 받습니다. 수신자가 입력해놓은 이름이 화면에 뜨는데 아무 전화나 받는 것이 아니고 입력해놓은 사람의 전화만 받게 됩니다. 그 사람과 관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기도하지만,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기도가 따로 있습니다. 인간의 타락 이후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단절되었기 때문에 죄인 된 인간 스스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과 백성들이 만나는 곳은 성전이었는데, 중보자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갈 수 있었습니다. 죄인이 하나님께 직접 나가면 그 자리에서 죽었고, 제사장들이 백성들의 죄를 대신해서 짐승을 잡아 하나님께 올려 드렸습니다. 구약성경 레위기를 읽다 보면 제사제도에 대한 아주 복잡한 규정들을 대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만나기가 어렵다는 것을 잘 설명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복잡한 과정과 절차들을 단번에 무너뜨리신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예수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할 때 모든 장애물, 제한들이 제거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단번에 영원한 속죄의 제사가 되었습니다. 구약시대에 짐승의 피로 드렸던 제사는 불완전해서 한 번에 영원한 속죄가 불가능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때마다 일평생 제물을 바쳐야 했고 제사장의 중보가 필요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속죄의 제사는 완전한 제사로, 완전한 제물이 되셨습니다. 「19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히 10:19~20)」 하나님께로 나아갈 새로운 길이 열렸습니다.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갈 자격을 얻은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담력을 얻었다는 것은 죄인인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두려움 없이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아무 두려움 없이 나아가는 것은 딱하나,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휘장은 하나님과 사람을 가로막은 것입니다. 휘장이 찢어진 것은 그리스도의 몸이 찢어짐으로 누구든지 나아갈 자격을 얻은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예수님의 피’ 입니다. 이것은 기도의 핵심적 원리입니다. 내가 열심히 기도해서 응답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우리 대신 고통을 당해주셨기 때문에 그 대가로 인하여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런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죄인의 모습입니다. 아무리 정성을 들여도, 어떤 삶을 살았든지 내 모습을 보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얼마나 오래 기도했느냐, 얼마나 정성을 바쳤는가로 하나님께서 기도를 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내 공로가 아니라 전적으로 예수의 공로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의례적인 인사나 형식이 아닙니다. 기도할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께서 마련해놓으신 통로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기도함으로 주어지는 확신과 평강은 내가 열심히 해서 갖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예수를 붙들 때 일어납니다. 「13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14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요 14:13~14)」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요 15:16하)」 예수의 이름 때문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대로가 열렸습니다. 가로막고 있던 모든 장벽이 무너진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새로운 길, 새로운 시대가 온 것입니다. 아무나 누릴 수 없는 엄청난 특권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예수의 이름이 비밀 문을 여는 패스워드입니다. 하늘 궁정의 문을 여는 마스터키입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것은 복음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상태를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으로 인해 나의 기도를 받으십니다. 나의 상태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도무지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하면 얼마든지 담대함을 가지고 나갈 수 있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다면 조금도 주저하지 마십시오. 언제든지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
둘째, 예수의 이름의 능력을 의지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름은 그 사람의 속성이고 존재의 의미입니다. 예수의 이름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 16:24)」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 자체가 응답을 전제합니다. 이름 자체가 능력이고 권세입니다. 직장에서 CEO의 이름과 직인이 찍힌 서류는 그 자체가 실행력을 가집니다. 미술품에 작가의 이름이나 사인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납니다. 이름에는 권위가 있고 동시에 파워가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겠다”는 말에서 무엇을 느낍니까? 강력한 권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과 요한복음 15장 16절 하반절 말씀에서 강조하는 것은 주님의 이름으로 구하면 ‘무엇이든지’행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 이름의 권세가 얼마나 대단한가를 약속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당신의 이름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상상할 수 없는 큰 특권을 맡기셨습니다. 이 기도의 특권은 인간이 죄로 인해서 잃어버렸던 통치의 능력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기도라는 도구를 사용해서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 가끔 어떤 일을 하다 보면 한계를 느낄 때가 있습니다. 바로 그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냥 일꾼으로 부르시지 않으시고 기도라는 엄청난 비밀 병기도 맡기셨습니다. 사도행전 3장에는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걸하며 날 때부터 일어나지 못하던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으켜 세우는 사건이 나옵니다. 그들은 그 이전까지는 예수의 이름의 권세를 잘 몰랐습니다. 특권은 사용할 때 진가를 발휘합니다. 특권이 있지만 사용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용하는 만큼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특권은 빛을 발하게 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기도의 권세도 포함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아갈 때 우리는 자녀로서의 특권을 마음껏 누릴 수 있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특권을 통한 권세가 얼마나 대단한가를 경험해야 합니다. 신 나는 일입니다.
성경을 통해 확인하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주시려고 안달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11)」 아들의 권세는 아버지가 가진 권세를 함께 누리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에는 엄청난 파워와 실행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기도를 어떤 교리나 막연한 이론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기도 그 자체, 예수의 이름은 실행코드입니다. 신앙의 핵심에 기도가 있습니다. 자신의 형편이나 조건을 바라보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붙들고 나아가십시오. 예수 이름의 권세를 누리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몫입니다. 야고보서에서는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고,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고 했습니다. 간혹 기도를 무기력하고 병약한 사람들이나 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기도야말로 가장 강력한 하늘의 능력을 경험하게 하는 최고의 수단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구하십시오. 예수 이름의 권세를 기도를 통해서 확인하십시오.
셋째,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구해야 합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다 이루어지지만, 문제는 예수의 뜻에 따라 기도하는 것입니다. 복권을 사서 일등에 당첨되게 해달라고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해서 당첨이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사고 싶은 물건이 있는데 반값 세일하게 해달라거나, 손을 봐주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한번 살짝 만져주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 이루어진다면 세상에 남아돌아가는 것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누구의 이름을 내 마음대로 사용하면 도용입니다. 누가 내 이름을 빌어 나도 모르게 나의 의도와 다르게 사용한다면 황당한 일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구한다는 것은 주님의 동의를 받을만한 것이어야 합니다. 이름을 사용한다는 것은 그분의 뜻을 존중한다는 것입니다. 하늘 보좌에 오르는 소화물에 “예수님의 이름”이 붙어있으면 1단계는 통과합니다. 그러나 정밀단계의 스캔을 통과해야 합니다. 요즘 공항에는 전신스캔을 하는 기계가 도입된 곳이 많습니다. 한국 엄마들이 김치 같은 것을 포장에 포장을 하지만 들키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뜻, 하나님을 위해서라고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속에는 자신의 야망, 탐욕은 깊은 곳에 은밀하게 감추어 놓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보좌 앞에는 드러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만약 우리의 모든 기도가 응답이 된다면 재앙이 될 수도 있고 응답이 타락으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세상은 혼란에 빠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미국이 남북전쟁이 일어났을 때 남군의 리 장군도 독실한 신앙인이었고, 북군을 이끄는 링컨 역시 신실한 신앙인이었습니다. 링컨은 “남과 북이 모두 똑같이 성경을 읽고, 한 하나님께 기도하며 상대방을 이기게 해달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양쪽의 기도가 모두 받아들여질 수는 없습니다. 어느 쪽도 소원하는 바를 완전히 이룰 수는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그분만의 목적을 가지고 이루십니다.”라고 연설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우리는 예수의 이름에 합당한 기도 내용이어야 한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능력 있는 기도란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팔을 비틀어서라도 응답을 받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 능력 있는 기도는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다른 기도를 하면서 “예수님의 이름”을 남발하고 마치 하나님을 채무자 다루듯이 “왜 안주세요! 아직도 내 말을 못 알아들으신 거예요? 제가 할 만큼 했는데 나를 이렇게 대하면 안 되지요”라고 합니다. 또 흥정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번에 한 번만 나를 봐주시면 나도 하나님이 힘드실 때 도와드리겠습니다.”라고 협박하고, 강요하고, 투쟁합니다.
우리가 기도에 응답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첫째로 믿음의 부족 때문입니다. 「6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7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약 1:6~7)」고 했습니다. 둘째는 우리의 욕망이나 탐심으로 구했기 때문입니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 4:3)」 이런 기도는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NO”하십니다. NO도 응답입니다. 셋째, 내가 원하는 것과 하나님의 응답의 차이일 수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내 마음에는 들지 않을 수 있지만, 지나고 보면 하나님이 주신 것이 더 좋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경우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지만 응답입니다. 넷째, 무응답의 응답입니다. 하나님의 무응답이 원망스럽지만 세월이 흐르고 나면 응답하지 않았던 것이 축복이 될 때가 있습니다. 어떤 청년이 짝사랑하는 자매의 마음을 사로잡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세월이 흐르고 보니 그렇게 되었다면 끔찍할 뻔했다고 고백합니다. 응답하지 않는 것도 주님의 사랑의 증거입니다. 다섯째, 응답을 지체하는 경우입니다. 내가 구한 것을 당장 주시지 않고 나중에 주실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내가 원하는 시간에 주지 않으면 응답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타이밍을 정확하게 맞추십니다. 아무리 자녀를 사랑해도 아직 면허증도 따지 않았는데 자동차를 사주지는 않습니다. 시기는 하나님이 정하십니다. 가장 완전한 때에 허락하십니다. 여섯째, 내가 구한 것이 응답되지 않아 야속하지만, 공동체 전체를 볼 때는 훨씬 더 유익한 경우입니다. 성경은 한 개인보다 공동체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결국은 공동체가 복되어야 개인도 공동체 안에서 복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도 응답되지 않은 적이 있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하고 기도하셨지만,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인류의 구원을 위한 무응답이었습니다. 온전히 응답받는 기도는 예수님의 이름에 합당한 기도를 드렸을 때입니다.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고 할 때 무엇이든지에 단서가 붙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내가 구한 것을 통해서 예수님의 뜻과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야 합니다. 예수님은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계셨지만 함부로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기도할 때도 자신의 필요를 가지고 기도하신 적이 없습니다. 단 한 번, 십자가를 앞두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기도하셨지만 곧 그 기도마저도 거두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우리가 사업이 잘 되기를, 직장에서 승진이 되기를 기도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다운 사업으로, 하나님의 뜻 가운데 경영하도록 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유혹이나 세속주의와 타협하지 않고, 말씀을 따라 살아갈 수 있는 믿음과 용기를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정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는 하나님께만 모든 것을 맡기는 일방적인 태도가 아니라 우리의 책임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공부를 잘하게 해달라는 것은 대책 없는 기도입니다. 이 과정을 통해 이때에 알맞은 성실함을 배우게 하시고, 게으르지 않고 나에게 하시는 훈련을 잘 받아, 이 공부를 통해 인류와 공동체를 위해 쓰임 받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직장에서 승진하고 일시적인 출세에 목을 매달지 않고 그리스도인으로서 빛과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더 건강한 기도입니다. 병이 낫게 해달라는 기도보다 이 병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내가 죽든 살든 하나님께 나아가 믿음 위에 굳게 세워지는 기회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나의 책임, 내가 감당해야 할 영역에 대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단순히 내가 성취하는 목적에만 몰두하면 하나님의 뜻과 멀어지게 됩니다. 예수님의 이름만 살짝 걸치고 자기 마음대로 기도하다면 기도를 오해한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려면 예수님의 의도와 마음을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뜻을 분명히 이해했다면 나의 기도의 상당한 부분은 수정해야 할지 모릅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어떻게 기도하셨는지를 늘 묵상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무엇을 얻는 것보다 포기하는 쪽에 더 가까웠습니다. 당신의 영광을 추구하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에 초점을 늘 맞추셨습니다. 특히 잃어버린 영혼에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의 뜻에 합당한 기도를 한다면 마땅히 영혼 구원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건지기 위해 기도해보십시오.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하나님께서 기꺼이 응답하실 것입니다. 성숙한 기도는 예수께서 기도하신 것 같이 내 욕망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을 품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기도를 하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그 기도는 막강한 역사를 이루어낼 수밖에 없습니다.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이루어주시겠다는 것은 바로 그때 해당되는 약속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아들의 이름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축복 중의 축복입니다. 이것을 놓치면 안 됩니다. 우리를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대행자로, 동역자로 불러 주셔서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드러내기 원하신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신 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목적에 맞게 기도해보십시오. 무엇이든지 그 이름의 능력을 믿고 기도하십시오.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일에 쓰임 받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주님은 살아계십니다. 주님의 뜻을 따라 기도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아가,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이루어주시겠다는 이 약속이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인 줄 믿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삶의 지평이 넓어져 가고 풍성하게 되는 은혜를 누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요 14:13-14 / 김영규 목사
기도 응답을 약속하심
앞서서 성부와 성자의 관계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이런 문맥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기도의 교훈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13-14) 요약하면 이런 뜻입니다. 성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주님이 시행하시고, 그 결과로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신다!
기도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다락방 훈화 가운데는 본문 외에도 기도에 대한 명령이 반복됩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7)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16:23-24)
기도는 주님 교훈의 중심에 있습니다. 산상 수훈 중의 골방의 기도(마6:6), 주기도문의 교훈(마6:9),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눅18:1), 한 밤중에 찾아온 친구의 비유(눅11:5),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눅18:10) 등등. 주님의 교훈에는 다양한 기도의 실제가 담겨 있습니다.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라!(눅18:1) 강청하듯이 끈질기게 기도하라!(눅11:5) 중언부언 하지 말고 진정성 있는 기도를 하라!(마6:7)
사무엘은 기도하기를 쉬는 것은 죄라고 했습니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길을 너희에게 가르칠 것인즉”(삼상12:23) 기도를 멈추는 것은 죄입니다. 왜냐하면 잠시라도 하나님과의 대화의 줄, 교제의 줄을 끊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이름으로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본문에서 첫 번째로 강조된 것은 주님의 이름입니다. “내 이름으로”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빙자하고 사용하라는 말입니다.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곧 그 이름의 주체를 의지하는 행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는 주님의 신성과 권세가 들어 있습니다. 어떤 장사하시는 분의 영업장소에 속칭 삥 뜯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언젠가 현직 대통령과 함께 찍은 사진이 있어서 걸어놨습니다. 그랬더니 귀찮게 굴던 사람들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사진을 보는 사람마다 “내 배후에는 이런 힘 있는 사람이 있어!” 라고 해석한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단순한 이름 사용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권위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에 주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죄인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주님의 이름을 의지하는 것뿐입니다. 하나님 앞에 무엇을 구하기에 앞서, 하나님을 면담할 수 있는 길이 오직 예수님 이름 뿐입니다. 저는 처음 교회 나와서 기도할 때에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기도가 끝난다는 신호인 줄 알았어요. 대표 기도 하는 사람이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하면 다 같이 “아멘!” 하고 끝나더라고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기도 끝난다는 표시가 아닙니다. 기도할 때에 주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감히 하나님 앞에 무엇을 요청할 처지가 아닙니다. 죄인이요, 하나님의 진노 앞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이나 후나 마찬가집니다. 우리는 단 한 순간도 예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은 후에는 예수님을 의지하지 않아도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나요? 절대로 아닙니다.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오직 예수님이 내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은혜를 항상 의지해야만 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를 의지하고 있다는 고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에 주님은 들으십니다. 본문에 보세요.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13-14) 기도를 응답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이름만 빌려주는 분이 아닙니다. 기도의 대상자시고, 기도를 직접 듣고 집행하시는 분입니다. 요즘 합심 기도 할 때에 “주여!” 소리를 외칩니다. 주님이 내 기도를 응답해 주시는 주체이십니다. 그래서 주님을 힘써 부릅니다. 오늘 무슨 기도 제목이 있습니까? 주여! 내 기도를 들어주소서! 항상 주를 의지하고, 주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이름을 항상, 많이 사용하세요. 주님은 자신의 이름을 많이 사용할수록 좋아하십니다. 사도들은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사람을 고칠 때마다 주님의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행3:6)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행4:10)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행16:18) 내 인생에 일어나는 일이라고 해서 변변찮은 내 이름을 내걸지 마세요. 힘깨나 있는 사람이라고 세상 권력자 이름 빙자하지 마세요. 잘못하면 명의 도용 죄로 고발당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하고 맘껏 사용하세요. 확실한 응답이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면
오늘 말씀에서 꼭 주석을 달아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라는 내용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구하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구하면 다 주실까요? 제한 없이, 무조건 주실까요? 그러면 당장 필요한 돈이나 몇 십 억 원 달라고 해 볼까요? 오늘 교인들이 그렇게 애달프게 구하는 기도들이 왜 응답되지 않나요? 시험 합격을 위해서, 직장과 사업을 위해서, 자녀들의 장래를 위해서, 승진을 위해서, 병 낫기를 위해서, 그렇게 많은 기도를 하는데 왜 다 응답되지 않을까요? 기도를 잘못했을까요?
“무엇이든지”라는 말은 체험적으로 볼 때, 결코 “무엇이든지”가 아닙니다. 제한적입니다. 그러면 “왜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하셨을까요? 이 말은 두 가지 측면에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제한이 없고, 단지 응답은 주님이 임의로 하십니다. 주시든지, 안 주시든지, 다른 것을 주시든지, 응답은 있습니다. 둘째는, 구하라는 말 속에는 분명히 제한성이 있습니다. 아무거나 막무가내로 구해도 다 주신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지혜로운 기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같은 다락방 훈화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7) “무엇이든지”라는 말 앞에, 조건이 붙어 있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내 안에 거하면! 내가 주님 품 안에 있을 때, 즉 인격적으로 주님을 모시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달리 말하면 내가 주님과 어떤 교제 관계에 있을 때입니다. 주님과 주고받고 대화도 나누고, 교류가 있는 상태입니다. 주님과 교제 관계에 있을 때와 없을 때 뭐가 다릅니까?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이 부분에 대해서 사도 요한은 이런 설명을 했습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요일5:14-15) 주님과 교제 관계에 있다면 내가 원하는 것도 있지만, 주님이 원하시는 것도 알게 됩니다. 나는 이런 것을 원하지만, 주님은 내 인생을 향해 원하시는 것이 달리 있습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주님의 뜻입니다. 주님의 뜻이 뭔가? 그래서 사도 요한을 이 말을 합니다.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내가 원하는 것을 구하지 않고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구합니다. 주님과의 교제 관계에서 나오는 기도! 이게 바로 지혜로운 기도입니다.
지혜로운 기도의 실례가 있습니다. 솔로몬은 아버지의 왕위를 물려받고 하나님 앞에 나가 기도했습니다. 그 때에 솔로몬이 무엇을 구했을까요? “주는 이제 내게 지혜와 지식을 주사 이 백성 앞에서 출입하게 하옵소서 이렇게 많은 주의 백성을 누가 능히 재판하리까?”(대하1:10) “나는 어린 사람입니다. 세상 물정을 잘 모릅니다. 하물며 이 많은 백성을 어떻게 지도하겠습니까? 최소한 이 백성의 시비를 잘 판단하고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통치자로서의 안목과 지혜를 구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이 어떻게 응답하셨습니까?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이르시되 이런 마음이 네게 있어서 부나 재물이나 영광이나 원수의 생명 멸하기를 구하지 아니하며 장수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내가 네게 다스리게 한 내 백성을 재판하기 위하여 지혜와 지식을 구하였으니, 그러므로 내가 네게 지혜와 지식을 주고 부와 재물과 영광도 주리니 네 전의 왕들도 이런 일이 없었거니와 네 후에도 이런 일이 없으리라 하시니라.”(대하1:11-12) 하나님이 보실 때, 통상 일반인들이 구하는 내용은 뻔합니다. 첫째는 부와 재물입니다. 둘째는 영광스런 지위입니다. 셋째는 원수 갚는 일입니다. 넷째는 건강 장수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구하는 것을 보니 이런 것들이 아닙니다. 당연히 사람들이 구하는 것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백성을 잘 다스릴 지혜를 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척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 뜻에 맞는 기도를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이 구한 지혜를 주셨습니다. 주시되 엄청난 지혜를 주셨습니다. 요즘 세계에서 가장 I.Q.가 높은 사람 TOP 10을 발표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197이고, 한국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177입니다. 솔로몬은 얼마나 되었을까요? 역사상 전무후무하다고 했습니다. 아마 요즘 방식으로 하면 I.Q. 300 쯤 될지 모릅니다. 오죽 하면 스바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TEST 하러 보물을 싸들고 왔겠습니까? 솔로몬의 지혜를 본 스바 여왕은 이렇게 감탄했습니다. “복되도다 당신의 사람들이여, 복되도다 당신의 이 신하들이여, 항상 당신 앞에 서서 당신의 지혜를 들음이로다!”(대하9:7) 하나님 뜻대로 구하면 대단한 응답을 받습니다.
그 뿐입니까? 기도의 보너스가 있습니다. 솔로몬에게 덤으로 주신 응답이 또한 거창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네게 지혜와 지식을 주고 부와 재물과 영광도 주리니”(대하1:12) 부와 재물과 영광!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솔로몬 왕이 마시는 그릇은 다 금이요 레바논 나무 궁의 그릇들도 다 순금이라 솔로몬의 시대에 은을 귀하게 여기지 아니함은, 왕의 배들이 후람의 종들과 함께 다시스로 다니며 그 배들이 삼 년에 일 차씩 다시스의 금과 은과 상아와 원숭이와 공작을 실어옴이더라. 솔로몬 왕의 재산과 지혜가 천하의 모든 왕들보다 큰지라, 천하의 열왕이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마음에 주신 지혜를 들으며 그의 얼굴을 보기 원하여, 각기 예물을 가지고 왔으니 곧 은 그릇과 금 그릇과 의복과 갑옷과 향품과 말과 노새라 해마다 정한 수가 있었더라.”(대하 9:20-24)
솔로몬 기도를 보면서 일부러 딴청 피는 기도는 하지 마세요. 흥부가 제비 다리 고쳐주고 복 받았다고 하니까, 놀부는 제비 다리를 부러뜨려 놓고 고쳐줬습니다. 솔로몬이 지혜를 구해서 잘 됐다고 하니까 덮어놓고 지혜만 구할 필요는 없습니다. 정말 돈이 필요하면 돈을 구하세요. 양식 필요하면 양식 구하세요. 건강이 필요하면 건강 구하시고, 승진이 필요하면 승진시켜 달라고 기도 하세요. 꼭 필요한데도 필요 없는 척 하지는 마세요. 다만 중심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 뭔지는 알고 기도하세요.
그러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의 이슈가 뭐 따로 정해진 게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매일 기도해야 될 중요한 이슈들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항상 외우는 주기도문입니다.(마6:9-13) 주기도문의 기도 제목은 여섯 가지입니다. 처음 세 가지는 하나님을 위한 것이고, 다음 세 가지는 우리를 위한 기도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기를 기도합니다. 둘째는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먼저 하나님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순서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편을 바꾸려고 기도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내가 할 일을 기도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려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나님 나라가 임하려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려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바로 그것을 구하는 겁니다. 이런 기도를 한 다음에 내 기도를 시작합니다. 내 기도의 첫째는 양식입니다. 양식 구하는 것은 좋은 기도입니다. 단지 일용할 양식을 구해야 합니다. 50년 치, 혹은 100년 치의 양식을 달라고 하지는 마세요. 왜냐하면 하루 양식을 얻어야 다음 날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또 구할 것 아닙니까? 내 기도 두 번째 세 번째는 영적인 문제입니다. 죄를 용서하고, 죄 용서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죄는 영혼의 암입니다. 인생을 망치기 때문입니다. 시험에 들지 않고, 마귀에게서 구함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귀는 항상 시험을 통해서 죄 짓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정해주신 기도의 이슈들을 잘 보세요. 그렇다고 기계적으로 이런 기도를 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삶을 통해서 정말 이런 기도가 필요하게 되어야 합니다. 주 안에서, 주 뜻대로 무엇이든지 구하고 얻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버지께서 영광 받으실 기도인가
마지막으로 말씀드릴 것은 내가 구하는 기도의 타당성 문제입니다. 내가 드리는 기도가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욕심으로 구하는 것인지? 여기에 대한 하나의 지표가 있습니다.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13) 내가 구하는 것을 응답해 주셨을 때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면 타당성이 있는 기도입니다. 내가 구하는 것이 응답되었을 때, 하나님 명예가 올라갈 일인지, 아니면 하나님 명예에 먹칠을 하는 일인지?
바로 앞 절에서 주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요14:12) 주님은 떠나시면서 제자들이 주님이 하시던 일을 계승해 주기를 바라셨습니다. 주님이 하시던 일이 뭡니까?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일입니다. 병든 사람을 고쳐주는 일입니다. 귀신을 쫓아내는 일입니다. 배고픈 사람을 먹이고, 연약한 사람을 붙들어 주는 일입니다. 이런 일들을 통해서 주님은 이 땅에 주님의 교회가 세워지기를 바라셨습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 내 기도 응답으로 아버지께서 영광 받으실 일을 위하여 기도하세요.
오늘 내가 드리는 기도로 주님의 명예가 올라가게 하세요. 내 기도로 주님의 나라가 세워지게 하세요. 내 기도로 주님이 하시던 일이 계속되게 하세요. 물론 기도에는 크고 작은 것이 따로 없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구한다는 점에서 모든 기도는 다 동일합니다. 사소한 일이라고 기도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인생사의 매 순간에 주님께 기도하세요. 만일 하나님의 뜻을 알고 기도한다면 응답은 100%입니다. 기도의 보너스도 있습니다. 주님 말씀대로 무엇이든지 구하고 응답 받는 매일의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응답받는 기도의 비결
요 14:!3-14 / 김홍도 목사
저는 40여 년 부흥회를 다녔지만, 이번처럼 벅찬 기쁨과 보람을 느끼는 부흥회는 처음인 것 같습니다. LA 열린문교회(박헌성 목사)와 일본 센다이교회(서동일 목사), 두 교회에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먼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배후에서 뜨겁게 기도해 주셔서 이런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센다이교회에 가자마자 서동일 목사가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교회 체육대회를 앞두고 비가 오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데, 그것도 비도 안 오고 장마철에 햇빛도 안 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자고 하니까, 모두 킥킥거리고 웃기만하고 기도할 생각을 안 하더랍니다. 그래도 억지로 통성기도를 시켰더니, 그렇게 장맛비가 쏟아지다가 그날 아침이 되니까 비가 그치고 구름이 가리워 햇빛도 안 나는 것을 보고, 믿음이 없었던 교인들이 하나님이 살아계심과 기도의 능력을 체험하고, 목사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고 시키는 대로 기도도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아마도 서동일 목사는 2006년 7월 말, 세계감리교 대회를 앞두고 장맛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것을 보면서도, 비 오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 할 때, 대회 시작하는 날부터 닷새 동안 비가 오지 않았고, 끝난 다음 날부터 다시 비가 오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확신이 없는 일본 교인들에게 모험적인 기도를 시켰던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믿고 간절히 기도하면 응답해 주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기도를 해도 응답받지 못하는 기도를 드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기도해야 응답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응답받는 기도의 비결”이란 제목으로 기초부터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1.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14장 13절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꼭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미국 남북전쟁 때 한 부자의 아들이 총탄에 맞아 죽어가면서, 자기 전우에게 자기에게 돌아올 유산을 받으라고 하면서 사인(sign)해 주어서, 그 아들의 사인 때문에 그 병사는 그 많은 재산을 물려받았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15장 16절에 “…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불교 믿다가 개종한 할머니가 기도하는 것을 보니까, 손을 싹싹 비비면서 기도하고 나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나무아미타불” 하더랍니다. 이 기도는 죽도 밥도 아닙니다. 마리아의 이름으로 기도해도 안 되고, 더욱이 마리아나 어느 제자에게 기도해도 안 됩니다. 또 아주 틀린 것은 아닙니다마는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하거나 “십자가 공로로 기도 합니다” 하는 것보다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 “…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고 하셨으니, 기도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상달될 수 없다고 봅니다.
2. 죄가 가로막히지 않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을 받지 못하니까, “하나님이 늙어서 힘이 없거나 귀가 어두워서 듣지 못하시는 가보다”라고 말할 때, 선지자 이사야가 이사야 59장 1~2절에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고 하며, 우리의 죄악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 막아서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할 때에는 하루 동안에도 지은 죄가 있나 살펴보고 회개 자복한 후에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용서하지 못하는 것 있으면 회개해야 됩니다. 마가복음 11장 24~25절에 “…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기도가 막히지 않기 위해서라도 부부간에 싸웠다가도 오래 끌지 말고 화해하고, 원수같이 미웠던 사람도 용서하시기를 바랍니다.
3. 정욕(욕심)의 동기에서 기도하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하는 동기가 하나님이 뜻이 아니라, 육신의 정욕, 사사로운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하는 기도는 응답받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야고보서 4장 2~3절에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wrong motives)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라고 했습니다. 무엇이든지 기도할 때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인가를 살펴봐야 합니다. 물질을 구해도, 호의호식하고 멋진 차를 타고 다니기 위해서 기도하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5장 7절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라고 하셨습니다.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이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마음으로 기도할 때 무엇이든 기도하면 응답받는 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누가복음 22장 42절에 보면 “…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천사(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눅22:43)라고 했습니다.
야고보서 4장 15~16절에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 할것이거늘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야고보서 1장 15절에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라고 했습니다. 기도 외에도 욕심을 가지면 유혹에 넘어가기 쉽고 사기꾼에 넘어가기 쉽습니다.
우리 교인들 중에 여러 가지 다단계라든가, 잘못된 일에 속아 넘어가 손해를 보고, 낭패하는 것을 보는데, 대개가 크게 수지맞고 쉽게 큰 돈을 벌게 해준다고 유혹하는데 넘어가서 결국 실패하고 큰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 정상이 아닌 상식이상의 돈을 벌게 해준다고 하면 거의 100% 사기당하는 것입니다. 그 욕심 때문에 도박에 빠지고, 경마에 빠지고, 빠찡코에 빠지는 것입니다.
기도하는데도 육신의 정욕, 욕심으로 구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구하는 것은 아무리 큰 것을 구해도 잘 못이 아닙니다. 욕심과 사심 없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도해야 응답받습니다. 통성기도 할 때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을 놓고 기도하면 기도가 올라가다가 뚝 떨어지는 느낌이 듭니다.
가령 교회가 부흥되기를 원하는 것은 좋지만, 지옥 갈 영혼, 천하보다 귀한 영혼 하나라도 더 구원코자 하는 것이 동기가 아니라, 큰 교회가 돼서 봉급 많이 받고, 좋은 차타고 다니고, 큰 예배당 지어서 으스대고 싶은 마음이 앞선다면, 잘못된 동기이며, 정욕적인 동기인 것입니다. 언제나 기도 할 때, 자신의 기도하는 동기가 잘못되지 않았나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4.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 응답받을 수 있을까, 나 같은 죄인의 기도도 들어주실까, 이런 큰 문제도 하나님이 해결해 주실까, 등등, 확신 없는 기도를 드리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뒤에, 다음에 그 무화과나무가 뿌리부터 말라 죽은 것을 보고 놀라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마가복음 11장 23절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이 어떤 분입니까?
천지를 지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수십억만개의 별들을 지으시고 질서 있게 운행하시는 분입니다. 어려운 문제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하고, 불치의 병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전능하시고, 전지하시고, 무소부재 하신 하나님을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 다음절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은 골리앗(Goliath)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보았지, 골리앗을 보지 않았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아낙자손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안 되리라고 하는 부정적인 생각을 떨쳐버리고 응답받은 모습을, 다 이루어진 모습을 그림을 그리고, 영상을 그리며 기도해야 합니다.
야고보서 1장 6~8절에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캘빈(Calvin)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기도를 반드시 들으신다는 사실에 대한 확신처럼 우리 기도를 作興(작흥)시키고 격려시키는 것은 없다. 의심을 품고 하는 기도는 무력하고 멍청하고 태만한 죽은 의식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여리고성을 함락할 때, 일곱 바퀴를 도는데, 다섯 바퀴, 여섯 바퀴, 돌때까지 한쪽 귀퉁이도 무너지지 않았고, 무너질 조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바퀴 돈 다음에야 와르르 무너졌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없고 손에 잡히는 것이 없고, 귀에 들리는 것이 없어도, 끝까지 약속의 말씀을 믿고 기도해야 됩니다.
5. 뜨거운 열정으로 기도하자
C.H.Spurgeon 목사는 “열정 없이 기도하는 것은 기도하지 않는 것과 같다”라고 했습니다. E.M.Bound는 “열정은 기도의 핵심이며 기도에서 불은 원동력이다”라고 했습니다. 소리 없이 조용히 기도해도 하나님이 들으시지만, 뜨거운 마음으로 열정적인 기도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 빨리 응답해 주십니다.
소경거지 바디메오가 죽을힘을 다하여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부르짖을 때, 주위의 사람들이 윽박지르고 조용히 하라고 했지만, 그는 “더욱 심히 소리 질러 부르짖었더니” 예수님이 즉시 머물러 서서 그를 불러 고쳐 주셨습니다. 시편 18편 6절에 “내가 환난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저가 그 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 귀에 들렸도다”. 최대한 뜨거운 열정으로 기도해야 응답이 빠릅니다. 열정이 철야기도로 나타날 수도 있고, 부르짖음으로 나타 날수도 있습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능력의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 “무릎 꿇고 땀 많이 흘리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라고 하셨습니다.
6. 중단하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 응답이 쉽게 오지 않는다고 포기하고 물러서거나 중단하지 말고 계속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8장에 “항상 기도하고(계속 기도하고)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비유로…” 말씀하시기를, 한 과부가 억울한 일을 당하고 해결할 분은 재판관밖에 없어서 재판관을 찾아갔지만, 그는 하나님도 두려워 않고, 사람도 무시하는 건방진 사람이라, 찾아가도 만나 주지 않았지만, 집으로 찾아가고 재판소로 찾아가 기다리고, 열흘, 스무날 계속 찾아가니까, 번거로워서 해결해 준 것처럼, 너희도 쉽게 응답이 오지 않는다고 낙심하지 말고 계속 기도하면,
누가복음 18장 7절에 “…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1장에는 여행 중에 있던 친구가 밤에 찾아왔는데, 먹지 못해 금방 죽을 지경에 이르렀는데, 자기는 먹일 빵이 없어서 부자 친구에게 찾아가서 빵 좀 빌려달라고 아무리 소리쳐도 들은 척도 안 했습니다.
그래도 낙심치 않고 문을 두드리고, 대문을 걷어차고 계속 부르짖었더니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소에 누웠으니 돌아가라”고 했지만, 중단하지 않고 계속 부르짖었더니 빵을 들고 나와 주면서 하는 말이 “네가 내 친구라고 해서 주는 것이 아니라 그 강청함을 인하여 준다”고 했습니다.
즉 중단하지 않고 끈질기게 강청해서 준다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11장 13절에는 “… 너희 천부께서…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성령 충만 받고 능력 받는 것도 10분, 20분, 기도해보다가 포기하지 말고 한 시간, 두 시간, 하루 이틀 사흘 계속해서 간절히 기도하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delaying is not denial”이란 말이 있습니다. 늦어지는 것은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세 가지 응답을 하십니다.
첫째, Yes(예스)입니다. 즉각 응답하실 때입니다.
둘째, wait(웨이트) ‘기다리다’가 있는데, 기도의 분량이 차지 않았거나, 응답받을 때가 아니니까 더 기다리라는 말씀입니다.
셋째, no(노)입니다. 어린이가 면도칼을 달라고 하면, 다치니까 안 된다고 하며 대신 사탕을 줄 것입니다.
저는 광희문교회 부목사로 있다가 담임목사로 임명되기 원했으나 너무 젊다고 거절당했습니다. 그러나 거절되지 않았다면 세계 최대의 금란교회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