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사언의 어머니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이 詩는 양사언이 모든 일에 노력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는 교훈조의 詩로만 알고있으나 사실 처절하게 살다간 어머니를 그리는 詩라는것이 새로
조명하여 밝혀졌다.
지금까지 "양사언과 그의 어머니"에 대하여 아는 사람들은 흔하지 않았다.
양사언의 아버지 '양 민'이 전라도 영광 사또로 부임 하여 내려가는 삼월에 어느 고을을 지날 즈음, 농번기라 사람들은 집에 없어 집들을 둘러보는 중 한 집에서 소녀가 나와 식사 대접을 하겠다고 공손히 아뢴다. 그러면서
사또가 거리에서 식사를 할 수 없다고 하며 안으로 모시고 부지런히 진지상을 지어 올린다.
소녀의 태도나 말솜씨가 어른스러우며 예의도 바른 지라 사또는 매우 기특히 여긴다.
조반을 잘 먹은 젊은 신관 사또는 고마움에 보답을 하고자 소매에서 부채 靑扇(청선)과 紅扇(홍선)
두 자루를 꺼내 소녀에게
그냥 주기에는 멋쩍어 농담을 섞어 "이는 내가 네게 고마움의 표시로 채단 대신 주는 것이니 어서 받으라."
‘채단'은 결혼 전에 신랑 집에서 신부 집에 보내는 청색 홍색의 옷감들이다.
놀란 소녀는 안방 장롱을 뒤져 홍보를 가져와서 바닥에 깔고 청선, 홍선을
내려놓아달라고 말하자
사또는 어리둥절하여 묻는다. 이에
"폐백에 바치는 채단을 어찌 맨손으로 받을 수 있겠습니까"
홍보 위에 놓여진 채단을 소녀는 잘 싸서 안방으로 가지고 들어갔다.
세월이 흘러 사또 '양 민'이 업무을 보고 있는 어느날
한 노인이 찾아왔다.
"몇 년 전 부임하던중 아침 식사를 대접한 소녀에게 靑扇(청선), 紅扇(홍선)을 주고 간 적이 있느냐" 묻는다.
사또는 조금 생각하다
"그런 일을 기억한다" 하며 아직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고 말한다.
노인은 이제서야 의문이 풀렸다는 듯 고개를 끄떡 이며 "그러셨군요.
그 여식이 이제 과년한 제 딸년인데 그 이후 시집을 보내려해도 어느 곳으로도 시집을 안 가겠다하여
사연을 물어 이렇게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그 정성이 지극하니 어찌 내 모른척 할 수 있겠소. 아내로 맞이하겠소이다."
드라마 같은 이 이야기는 실제 이야기다.
이 소녀가 양사언의 어머니가된다.
사또는 정실부인과 아들 '양사준' 이 있었다.
그리고 후처인 소녀와의 사이에 사언과 사기,
두 아들이 태어난다.
사준, 사언, 사기, 삼형제는 자라며 매우 총명하고 재주가 있고 풍채도 좋아 주변에 칭송이 끊이질 않았으며, 형제애가 깊어 중국의 '소순, 소식, 소철' 삼형제와 비교되었다한다.
정실부인이 죽고 사언의 어머니가 모든 살림살이를 도맡아 하며 아들들을 훌륭하게 잘 키운다.
그러나 후처부인의 한탄은
자기 아들들에게 서자의 딱지를 떼 내는 일이었다.
'양 민'의 장례식날에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며 말한다.
"양씨 가문에 들어와 낳은 아들들이 재주가 있고 총명하며 풍채도 있거늘 첩이 낳았다 하여 나라 풍습은 서자의 너울을 벗겨주지 않습니다." 부인은 적자 양사준에게 울면서 부탁한다.
"첩이 이 다음에 서모의 누를 가지고 죽은 후라도 우리 큰 아드님이 석 달 복밖에 입지 않으실터이니 이리되면 내가 낳은
두 아들은 서자 소리를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지금 영감님 성복날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 복제가 혼돈하여 사람이 모르게 될 것이니
내 이미 마음을 다진 몸, 무엇을 주저할까 만은 내가 죽은 뒤 사언, 사기 두 형제한테 서자로 부르지 않겠다 약속하면 죽어서 기꺼이 영감님 곁에 편히 누울 수 있겠습니다.”
말하고 사언의 어머니는 가슴에 품고 있던 단검을 꺼내 자결을 한다.
아들의 서자 멍에를 풀어 떳떳히 세상을 살아가게 하고싶었던 여인, 죽음으로 불합리한 인간 차별화를 타파하고 싶었던 선구적인 어머니의 죽음을
보며 양사언은 학문에 더욱 매진하여 훌륭한 문인이 되었던것이다.
양사언은 후에 장원급제 하여 높은 관직에 오르고 한석봉, 김정희와 더불어 조선 3대 서예가로도 크게 이름을 떨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