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유를 유약한 성격이나 또는 세상의 풍조와 인습에 줏대없이 추종하는 것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이와는 반대로 온유는 조화의 중심을 잃지 않고 환경에 순응할수 있게 하는 높은 수준의 침착성을 전제로 한다. 토마스아퀴나스는 "온유는 고귀한 영혼을 전제로 하는 덕이다. 다시말해, 이 덕을 지닌 사람은 흔히들 말과행동을 앞세우는 모든 사람들보다 우월하다. 그는 말이나 행동으로 다른 이들로보터 모욕을 받아도 평정을 보전하고 영혼의평화를 잃지 않는다." 그러므로 온유에는 비굴하거나 예속적인 면이 전혀 없다. 이와는 반대로 온유한 사람은 자유인이다. 다른 사람의행위나 말에 의해 자신의 평정과 자기 영혼의 평화에 혼란이 야기되는 사람은 다른 이의 노예가 되고 만다. 이와는 달리 모욕을 정면으로 맞선 상태에서 자기의 평정을 보전하는 사람은 진정한 독립 과 자유를 누리는 사람이다. 실제로 경건한 정신으로 자신을 자제하는 것만큼 당당한 것은 없다. 한가지 실례만으로 넉넉하리라. 성 요한 에우데스의 전기에 주목할 만한 일화가 있다. 그의 동료 중 한사람이 그의 뺨을 때렸을 때, 요한은 모욕을 예민하게 느끼면서도 그 죽시 무릅을 끓고 복음의 가르침대로 다른 쪽 뺨을 내밀었다.그러면 누가 더 당당한가? 뺨을 때린 사람인가, 얻어맞은 사람인가? 어떤 이대한 불교승려가 비방에 관한 노래시를 지었다
- 비방하래라, 혹평하래라 ! 하늘을 태우려 들면 제 몸만 지치리니, 내가 듣기로는 감수로 마시는 듯하네, 그들이 날 내쫓으니 나는 불가사의 경지로 들어가네! 그대가 험담을 공덕으로 여긴다면 그대를 헐뜻는 이, 그대 정신의 길잡이가 된다네, 악담 들었다고 성내지 마라, 어진 인내, 신통한 힘, 어찌 드러내려는가? - 불교도가 이처럼 높은 영성의 경지에 도달했다면, 우리 앞에 그리스도의 생생한 모범이 있고, 우리 안에 작용하고 있는 그분의 은총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겠는가! 다른 사람이 우리에 대해 비평하는 것을 단 이슬 마시듯이 수긍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런 일을 이성적으로 심사숙고하면 상황에 따라서 우리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에 대한 다른 이들의 비평은 정당할 수도 있고 부당할수도 있다. 그 비평이 정당하면 진실에는 아픔이 있기 때문에 속이 저리게 아플 것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비평하는 이를 우리의 정신적 길잡이로 삼는 다면, 비평에 맞추어 우리 자신을 갱신하는데 방해가 될리 없지 않겠는가? 우리는 수강료를 내지 않고 기쁘게 강의를 받게 될 것이다. 그비평이 선의에서 나왔던 악의에서 나왔던 신경 쓸 이유가 없지 않은가? 비록 그것이 악의적인 것이라 해도 우리가 분개하지 않는 한, 비평은 우리 영혼에 해를 끼치지 못한다. 만일 그 비평이 부당하면, 우리는 그 비평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일치될 수 있는 작은 십자가로 봉헌할 수 있으니 우리 입장은 조금 더 낳아진다. 물론 모든 영성수련과 마찬가지로 극기하는 일은 실천보다는 말이 더 쉬운 법이다. 성인들은 둔한 사람들이 아니었지만, 매우 자극적이고 견디기 어려운 환경 한복판에서 자신을 하느님 섭리의 손에 맡김으로써 극기를 성취했다. 그리스도인의 온유는 우선 하느님의 뜻에 효도를 다하는 순종을 의미한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말에 따르면 온유란 진리에 순응하는 것에 불과하다. 부차적으로 온유는 하느님에 대한 순종을 표현하는 묵묵한 자세를 수반한다.
- 주님, 당신을 만났고 당신이 항상 제 안에 계심을 당신이 보여주시기에 그토록 처절하게 입고 싶었던 "온유"를 이제야 겨우 걸치게 됩니다. 어떻게 벋겨질줄 날아갈줄 모르지만 처절하게 붙잡고 나아가렵니다.
첫댓글 온유에 담겨진 진실 대해서 나눠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혼자서는 넘볼 수 없는 진리의 자리이지만
자비로우신 주님께 온유의 은총을 청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