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飜譯書> 논픽션, 閔妃暗殺」②-3
岡本 柳之助는 1852년(嘉永5년). 紀州(기슈:和歌山) 번사(藩士/제후에 속하는 무사)의 집에서 태어났다. 연호가 메이지(明治)로 바뀐 것은 그가 16세 때였다.
岡本 가 紀州藩 출신이라는 것은, 그 생애를 결정하는 인맥상의 중요성을 지닌다. 어릴 때부터 문무에 재능이 뛰어나 ‘신동’으로 알려진 그는, 같은 번의 陸奧 宗光(무쓰 무네미츠)와, 후에 육군소장이 되는 津田 出(츠다 이즈르)의 눈에 일직부터 띄었다. 陸奧는 “사쓰마(蕯)와 나가몬(長)출신, 그 이외에는 전혀 힘을 못쓰는” 그 시대에 和歌山(와가야마)출신으로 메이지 정부의 고관이 된, 거의 유일한 인물이다.
열다섯의 나이로 막부(幕府)의 포병연습소에 들어간 岡本는, 불과 1년 만에 졸업하고, 번의 江湖定府士族砲兵隊로 명을 받았으며, 머지않아 砲兵頭(호헤이가시라)가 된다. 陸奧의 번정(藩政)개혁 때에 먼저 포병대장이 된 岡本는 반대의 보수파 寺內藤次郞(데라우치 토오지로)의 저택을 습격하여, 그 참살(斬殺)에 참여하고 있다. 1871년(메이지4년). 번(藩)을 폐지하고 현(縣)이 설치된 후, 그는 정부의 포병대편성회의에 참석하였으나, 자기의견이 이루어지지 않는데 불만을 품고 귀향했다.
陸奧와 津田은 岡本의 재주가 아까워서, 육군 사관으로 추천했다. 岡本가 이들 대선배의 호의를 받아들여 육군대위로 임관한 것은 1875년(메이지8년)1월, 만22세 때이다.
岡本는 대위로는 불만스러웠다. 그러나 그 보다는 연장이고, 유신 때에는 鳥羽伏見(도바후시미)전투에서 공을 세웠으며, 이미 독일에 유학한 長州(초오슈)출신 桂太郞(가츠라 타로우/후에 육군대신, 일로전쟁 때의 수상)가 동시에 대위로 임관되는데,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1877년(메이지10년), 서남전쟁이 일어났다. 정한론이 이루어지지 않자, 향리 鹿兒島(가고시마)에 돌아와 있던 西鄕 隆盛(사이고 타카모리)가, 사립하교 생도 등 병사들을 이끌고 행동을 개시한 것은 2월이었다.
3월 岡本는 별동 제4여단의 참모로 참전하였으며, 각지를 옮겨가며 싸우고 城山(죠야마)까지 쳐들어갔다. 이윽고 서남전쟁이 끝나고, 소좌에 진급된 岡本는 이듬해 78년3월, 도쿄진대예비포병 제1대대장이 된다.
竹橋(다케바시)사건이 일어난 것은 그로부터 반년 후인, 8월23일 밤이었다. 타케바시 사건이란, 근위포병대대의 장병 200여명이, 서남전쟁 논공행상의 불평등과 감봉에 대한 불만을 천황에게 호소하려고 상관을 살상하고, 불을 지르고, 산포를 끌어와, 당시의 가 황궁이었던 赤坂(아카사카) 어소(御所/천황의 거처)를 목표로 폭주한 사건이다. 지휘관이 없는 이 집단은 행동개시로부터 불과 2시간쯤으로 간단히 진압되었지만, 1936년(소화11년)의 2.26사건과 함께, 「육군의 2대 반란사건」으로 알려지고 있다.
사건이 일어나던 날 밤 岡本의 행동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다. 도쿄진대예비포병 제1대대장이었던 그는, 사건발발 약 2시간 반 전에 부하 200여명을 모아, 행군연습을 명하고, 오지무라(王子村/현 도쿄도 북구)으로 향한다. 부하 중에 岡本를 ‘직소’의 동지로 믿고 이날 밤에 궐기하는 근위포병대와 행동을 같이 하는 것으로 생각한 몇 사람이 있어, 岡本의 변심에 놀라 행군을 저지하려고 하였으나, 그는 강경하게 오지무라(王子村)로 전진했다. 이윽고 반란의 포성을 들은 岡本는, 부하 전원에게, “오늘밤 너희들을 여기까지 데리고 온 것은, 너희들에게 국적(國賊)의 오명을 지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고 고했다고 한다. 그는 이날 밤의 폭동을, 발발 전에 알고 있었던 것이다.
10월9일, 취조 속행 중에 岡本는 나이프로 손의 동맥을 끊어, 자살을 꽤했다. 서둘러 달려온 간수는, 발광상태에서 날뛰는 岡本를 누르고 치료를 했다. 상처는 가벼웠다.
10월15일, 육군재판소는 제1차 판결을 내렸다. 유죄 자 263명중, 사형선고를 받은 53명(뒤에 2명 추가)은 그날 안으로 처형되었다.
10월25일 岡本는 와병을 이유로 보석되었다.
“岡本의 발광은 연극 이었다”는 설이 있다. 강인한 정신을 말하는 그의 경력에서 유치 정도로 발광할 이가 없다고 생각된다는 것, 자살미수에서 약 6개월 후에 석방된 그가, 곧 사숙(私塾/사설글방)을 열어 제자들의 지도를 맡았다는 등이 가짜 광인설의 근거일 것이다. 일부에서는, “사전에 외부 유력자와의 사이에 ‘미친 사람 흉내를 내라. 그것을 이유로 보석해 준다’는 약속이 있었던 것 같다”는 억측도 있다.
岡本에 관하여, 「竹橋사건의 주모자」또는 「사건의 진상을 아는 중요인물」등의 설이 있으나, 이것은 그의 불가해한 행동과, 암담했을 그의 심경과를 배경으로 해서 생긴 일이다.
岡本의 강력한 지원자였던 津田 出과 陸奧 宗光는, 이때 두 사람이 다 같이 실각되어 이었다.
津田은 군정 전문가로 선발되어, 육군 창설에 크게 공헌했지만, 육군도 또한 蕯⦁長(사쓰마와 나가몬 출신)의 천하였고 紀州출신인 津田는 중장이 되지도 못하고 군적을 떠났다. 이것을 본 岡本가 은인인 津田을 냉대한 육군에 분통을 품고, 같은 紀州출신인 자기의 장래에 희망을 잃게 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있다.
당시의 陸奧는 국사범으로 옥중에 있었다. 메이지(明治) 정부에 벼슬살이를 한 초기의 陸奧는 蕯⦁長藩閥의 횡포에 울분이 끌어, 高知縣(코치현)의 무가들과 짜고 土佐(토사)로 거병(擧兵)하는 계획에 참가했으나, 이것이 실패하여 옥에 갇히게 된다. 陸奧 宗光에게 일생일대의 착오였을 것이다.
“岡本는 竹橋사건의 소동을 틈타, 陸奧를 탈옥시켜 해외로 도피시킬 계획을 했다”는 소문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竹橋사건이 그 어떤 형태로 성공해도, 그로부터 陸奧가 해외로 도피할 가능성이 있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陸奧와 岡本의 밀접한 관계를 아는 사람들의 근거 없는 상상이었을 것이다.
竹橋 사건은 蕯⦁長 이외의 현의 불평분자가 蕯⦁長 천하를 흔들려고, 근위병을 선동하여 폭동에 동원했다는 설이 있다. 이와 같이 번벌(藩閥)에 불만을 가진 岡本가 ‘불붙이는 역할’을 했을까, 하는 상상은 할 수 있지만, 그 뒷받침은 없다.
또 국군강화를 계획하는 육군경(육군대신) 山縣 有朋(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서남전쟁 직후에 시행한 육군성 정액의 삭감을 우려하고 병사들의 불만을 천하에 알려 예산을 획득하려고, 폭동을 일으키게 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이 설에는 많은 무리가 있으며, 또 崗本와 결부하여 상상할 단서가 없다.
竹橋사건은, 100년 이상 지난 오늘도 진상불명의 ‘수수께끼 사건’이다. 수수께끼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그 첫째는, 이 폭동은 사전에 여기 저기 새나가고 있으면서, 누구도 저지를 위한 결정적 손을 쓰지 않았고, 岡本도 그 한 사람이었으나,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과 같은 태도를 취한 것이다. 이 한 가지를 생각해도, 장병들의 불만에서 자연 발생한 단순한 사건이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사건이 일어난 지 약 7개월 후인 1879년(메이지12년) 4월5일 岡本는, <탈관, 종신 문무대소의 수령에 보임되는 것을 금지>하는 선고를 받고, 석방되었다. 이 선고는 국사에 분주한 것을 삶의 보람으로 하는 岡本에게 일대 타격이었을 것이다.
생애에 걸쳐서 관직에 취임하지 못하도록 금지당한 岡本는, 이때부터 사회의 정도를 벗어나 뒷길을 걷기 시작한다. 竹橋사건에 연좌되었기 때문에 받은 일대 전기(轉機)였으나, 여기까지의 그의 경력을 보면, 가령 竹橋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하드라도, 언젠가는 뒷길로 벗어나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崗本는 아직 ‘소년’이라고 할 나이로 메이지 유신의 격동기를 살았다. 젊을 때 번쩍이는 칼 밑에서 기는 위기도 경험하였으나, 그의 언동은 성미가 강하고 급하면서 ‘오로지 순수한 청년다움’은 느껴지지 않는다. 선두에 서려고 하지는 않고, 한발 비켜서 책략을 꾸미는 타이프였다. 그의 타고난 성격이었을 것이다.
竹橋사건에 의해서 ‘낭인’이 된 岡本 柳之助의 그 후 족적은, 일한관계의 자료 속에서 살피기로 하고, 나는 겨우 민비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21.9.21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