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께서 저녁 7시를 조금 넘겨 운명하신 후 고대구로병원으로 엠브런스를 의뢰했다. 남편과 장례를 어찌 치를 것인가를 미리 의논하진 않았지만, 그리하는 게 좋으리라 판단했다. 장례 비용보다는 전국에서 올 조문객들을 위해 교통편이나 시설면을 더 우선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머니 시신이 9시 반 집을 나서기 전, 시누이와 난곡외삼촌, 외숙모님을 비롯해서 작은어머님과 사촌형, 형님과 조카들 그리고 외사촌 형제들이 와서 어머니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배웅했다. 어머니는 깔고 계시던 하얀 매트리스 카바에 그대로 둘둘 말려 실려 나가셨다.
병원에 도착하니 소식을 들은 친구들이 어느새 많이들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님을 안치실에 모시고 장례식장 이용을 의논하려하니 교회에서 담임목사님을 모시고 전도사님께서 임종예배를 보러 오신다 한다. 병원 영결식장을 이용하여 예배를 드리려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을 보고 분향실을 급히 정했다. 45평의 좁은 곳만 남은 형편이라 100평 이라는 특실 201호실로 선택의 여지없이 결정했다. 하루 이용료만 이백여만원 드는 곳. 혹시 모를 조카 손님을 의식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과분한 곳, 조문객도 없는데 남들 눈에 허영으로 보일까봐 염려되었다. 남편 친구 연범씨가 일당으로라도 채울 터이니 걱정말라고 위로해 주었다. 호텔처럼 근사한 장례식장에서 드리는 임종예배...
장례식은 남편이 도착하는 월요일부터 시작해서 사흘 기독교장으로 잠점 결정이 내렸다. 이는 어머님 운명하신 날로부터 나흘장이 되는 것이니 작은어머니가 그리 할 수 없는 것이라 하셨다. 하지만 남편이 도착한 날 늦게 급하게 입관예식을 하면 바로 발인이 되는 것이니 삼일장은 섭섭하고 그렇다면 오일장을 하여야 하는 것이다... 푸우~ 난곡외삼촌께서 달이 새로 바뀌니 나흘장도 괜찮다고 숨통을 열어주셔서 그렇게 하려는데 이번에는 형님(큰동서)이 경우를 운운하며 여러 사람 앞에서 질책했다. 그리고 이어서 고모부가 조문객들이 수근수근 뒷말할 터이니 어찌 감당할려냐고 몹시 흥분하며 반박했다. 모두들 참으로 예의범절이 뛰어난 사람들이다... ㅠㅠ 여자 홀 몸으로 한분한분 설득하고 이해시키고... 정말정말 남편의 그림자가 그리운 하루였다.
어찌됐든 예정대로 장례일을 정하고 절차를 의논하려는데 상담자가 너무 많다. 모두들 나를 도와야겠다고 생각했겠지만, 처해있는 입장이 각기 다르다보니 잡음이 많아 괴로웠다. 이날부터 장례가 끝나는 순간까지 늘 옆에서 버팀목이 되어 주셨던 큰형부에게 감사드린다. 그래도 하나하나 차분하게 일처리한다고 난곡외삼촌께 칭찬 들었다. 시어머니 모신 수고에다 임종을 볼 수 있게 해 준데 대한 보상을 톡톡히 받은 셈이다. 그러나 예상했던대로 모든 잡음은 남편이 도착하자 감쪽 같이 사라졌다. 어쩔 수 없는 문화, 남존여비사상...
어머님은 병원에서 임종을 맞지 않으셨기 때문에 사망진단서가 아닌 시체검안서가 작성됐다. 병원에 전담 의사샘을 의뢰해 받는 것인데, 어머님의 사인을 정하는 데 약간의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노환이라든가, 치매라는 것이 사인으로 인정되지 않는 이유인데 난감해하는 의사샘께 최근의 어머님 몸 상태와 임종 전의 상태를 설명하니 고개를 끄덕이시며 '악액질'이라고 바로 쓰셨다. 처음 듣는 단어라 나중에 조사해보니 이는 우리가 흔히 일컷는 피골이 상접함이며 암, 만성질환에 의한 쇠약으로 불건강상태를 말한다. 어머니가 체중이 급격히 감소하고 아토피 모양으로 혈맥이 터지며 손.발등이 붓는 등이 다 워낙 쇠할대로 쇠한 것으로 보여진다는 것이다.
꼬박 이틀 조문객을 맞이하는 동안 몸이 많이 고단하고 눈에선 핏발이 터지기도 했지만 정말 많은 분들이 찾아와 이 넓은 공간을 채워주셔서 감사했다. 거기다 조카 손님 중에 영화배우들이 더러 있어서 우리들은 물론이려니와 손님들도 즐거워했다. 생각지도않던 형님 손님들이 많이 찾아주셨고, 시누이 직장 동료들도 많이 찾아주셨다. 물론, 교회 교인들을 비롯해서 친구들은 이틀 삼일을 연이어 찾아주었고 많은 부의금을 보태주셨다. 그리고 많은 분들이 그동안의 나의 수고를 아낌없이 칭찬해 주셨다.
둘째날 새벽, 뜬금없이 제삿상을 준비시키는 형님... 아니 집사님께서 왠? 하지만 어쪄랴... 어머님 마지막 가시는 길 그리하고프다면 그리하도록 할 수 밖에... 가족이 종교가 다르다는 것을 결혼한지 20년 만에 처음으로 느꼈다. 그동안 아무 탈없이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왔다는 것에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오후시간, 입관예식을 알리는 소리에 우리 모두 염습실로 내려갔다. 배테랑 장의사 옆에 이를 돕는 보조 장의사가 여자, 그것도 아가씨 같아 보여 너무나 놀랐다. 그녀는 깨끗이 목욕을 마치고 고운 수의를 입은 어머니 얼굴에 예쁘게 화장을 해 주었다. 공주병 우리 어머니가 마지막 단장을 마치는 순간이다. 예쁜 꽃신도 신으셨다. 목사님께서 함께 위로를 해 주시며 어머님께 마지막 인사를 하라고 하셨다. 형님이 어머니께 잘못했다고 사죄를 했고 시누이는 눈물로 이별을 슬퍼했다. 남편과 나는 천국에서 만날 것을 기약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어머님이 열려있는 천국문에 들어서지 못하시고 눈물을 흘리시는 것이 느껴진다.
이날 저녁은 장례비를 계산하기 위해 부의금을 정리하는 날이다. 분향소 안쪽의 방에선 시누이부부와 사촌이 작은 노트북을 꺼내어 조문에 감사하며 즐거워하고 분향소 입구에선 조카들이 옹기종기 모여 깔깔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 참 아름다워보였다. 나는 부러움으로 지켜보시는 난곡외삼촌을 옆에서 위로했다. 이날 밤은 잠들 시간이 없었다.
발인예배가 다음날 새벽 6시 30분에 영결식장에서 있었다. 발인을 위해 장례식장 정리를 서두르고 가족들의 아침식사를 서둘렀다. 영결식장 중앙 벽면 십자가가 우뚝 서 있는 앞으로 어머니 관이 들어서고 그 앞에 영정사진을 놓았다. 나는 피곤으로 지쳐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 지 모르겠다. 다만 극도로 예민했던 매 순간마다 예배가 있었고, 이 예배를 통해 평안을 얻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모든 상황을 아시고 미리 예비하신 하나님... 필요의 때를 아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7시 시아버님 계시는 천안공원으로 영구차가 출발했다. 선두차를 비롯해서 따라오는 개인차가 여섯대.. 50 명 조금 넘는 인원이 함께 출발했다. 손님들이 아침식사를 못하셨으리라 생각해서 호박꽂이를 넣은 떡을 주문했는데 마침 도착해서 뜨끈뜨끈 한 것을 음료수와 함께 나누어 드렸다. 두어시간 만에 도착하고 약간의 수속절차를 밟은 후 하관예식을 거행했는데 겨울날씨 임에도 따스한 것에 어머님이 참 복이 많으신 분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아버님 옆에 합장하고 국화꽃 잎을 떨구며 가시는 길을 축복했다.
천안공원 안 식당에서 갈비탕과 육계장으로 식사가 나왔다. 조문 때 남은 절편과 방울토마토를 각 테이블마다 나누어 드리고 남은 것을 형님과 형님 친구 그리고 외삼촌 두 분께 싸 드리니 이제 내 손에 남은 것이 없어 가벼워 좋았다. 이 모든 절차가 어찌나 순조롭게 진행되었는지 시각은 낮 열두시를 넘기고 있었다. 영구차가 돌아가는 길에 교회에 들러 손님들을 내려드리고 외삼촌들, 형님가족과도 헤어지고 시누이 가족과 사촌과 함께 우리집으로 돌아왔다. 어젯밤 계산을 미쳐 끝내지 못한 것, 장지에서 추가로 사용 한 것을 합하여 정산을 마치니 들어온 부의금도 엄청났지만 장례비용도 엄청났다. 그래도 많은 돈이 남았다. 시누이 표정에 부의금에 대한 기대가 보인다. 하지만, 남편과 나는 이미 부의금에 대한 이야기를 서로 나눴기 때문에 삼우제날 보기로 하고 헤어졌다.
어머님 첫 성묘예배를 마치고... 천안공원의 풍경
삼우제는 천안공원에서 아침 9시에 만나기로 했다. 새벽부터 서두르다보니 출출하고 또 시간도 있고해서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렀는데 그곳에서 모두들 약속이나 한 듯 만났다. 이런 행복한 우연이 있을 수 있을까! 그러나 묘소 주위에 불어대는 칼바람에 담요가 동원되고 모자를 눌러 쓰고 덜덜 떨며 어머님 첫 성묘예배를 드렸다. 남편이 사회를 보고 조카가 기도문을 낭독했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살아생전의 어머니를 추억하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우리는 천안공원 관리실 한켠의 조용한 방을 빌려 둘러 앉았다. 이때 형님이 우리들에게 할 말이 있다고 먼저 말문을 열었다.
" 아이들이 크다보니 가족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리고 내가 맏이인데... 맏이 노릇을 동서가 해서 너무도 미안하고... 고맙고... 마음으로는 고맙다고 말하고 싶은데 겉으로는 표현이 안돼서... (나를 향하며) 동서 너무 고맙고 미안해... 그리고 부의금은 동서 수고의 대가로 나 안 가져갈거야... 동서가 쓰도록 했으면 좋겠어... "
" (나) 형님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너무 고마워요! "
" (남편) 형수님 그리 말씀하시니 고맙습니다... 그리고 부의금은... 우리 셋으로 똑같이 나누기로 해요. "
" (나) 그리하세요... 아무래도 조문하신 분들께도 인사를 하셔야 할 터인데... "
" (시누이 남편) 생각지도 않았는데... "
" (시누이) 그럼... 짜투리는 작은 오빠가... 아무래도 교회에 또 쓸 일이 있을테니까..."
우리는 서로의 수고를 격려하며 헤어졌다. 죽음은 이렇게 흩어졌던 가족을 모이게 할 수도 있고 모였던 가족들을 흩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욕심을 비움으로 가능한 일... 하나님은 이를 미리 아시고 어머니의 임종 전에 내 마음을 돌려놓으셨던 모양이다. 우리는 각자의 모습대로 최선을 다해 어머님을 천국으로 보내 드렸다.
이렇게 내 수고는 이미 많은 분들로부터 칭찬을 받으며 끝났으며 앞으로 받을 칭찬은 또한 내가 살아가는 모양으로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정말로 받고 싶은 보상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니 이는 내 가족의 평안과 행복... 남편의 사업장 번창과 내 아이들 앞날에 예비한 축복일 터!
그동안 찔래꽃가족들에게 받은 격려와 위로에 감사를 드립니다. 격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치매와의 동거... 여러분이 계셨기에 주저리주저리 내 속내음 다 털어놓으며 살았습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동화 속의 이발사처럼 말이죠. 이제 어머님 천국으로 가셨으니 '방실이의 치매일기'는 막을 내려야하지만 치매로 애쓰시는 여러분들께 작은 도움이 되어드리고자 자주 들를겁니다. 고맙습니다... 여러분으로 인해 행복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