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게르니카
윤은경
그날, 올해의 가장 슬픈 가을이 내렸어
그 밤거리, 그토록 화려하고 휘황한 빛들이 만인의 발목을 짓눌렀지
불빛들 툭툭 꺼져가고 어둠들 퉁퉁 켜지던, 소요와 고요가 서둘러 몸 바꾸던, 세상에서 가장 큰 좁디좁은 골목,
헛발 위에 헛발이 쌓이고, 헛발 위에 또다시 헛발이 쌓여 이룬 흑암의 거탑 위에……
너무도 바빴던 금단추의 제복은 말했지
이를 어째 이를 어째 우린 몰랐지 갔더라도 별수 없었을 걸 지켜야 할 것이 너무 많았어 과중한 업무로 내밀 손도 없었는 걸 모든 게 다 환각이고 불운이었지 우리의 즐겁고 기쁜 꿈을 멈추게 한 깊고 넓은 어둠의 강 범람하는 환란과 남실대는 환멸의 강을 빨리 건너야 해 우리가 할 일은 ‘스노피자’의 말처럼 지구가 멸망할 때까지 사과나무를 심는*거야
호박등과 토끼 머리띠 뒤에서 한없는 연민의 표정으로 악수를 청했지 부서진 하늘과 피에 젖은 한숨과 잦아든 신음 사이를 맨발들이 헤맬 때,
구름 속 황금털 원숭이의 보드라운 손끝에서 폭탄이 터지고, 드넓은 광장엔 위로 대신 저주가 애도 대신 매도가 빵부스러기로 쏟아져 내렸지
하지만 난 절대 말할 수 없을 거야
새로 생겨난 총성 없는 게르니카와 더러운 비둘기에 대해, 우리의 작은 책상과 굳은 펜에 대해, 내 작은 입술은
빵부스러기 흐트러진 땅바닥이 우리의 지상이고 전부라니까.
* 세간에 떠도는 유머.
검은 꽃밭
비 오시는 꽃밭이 어두워진다 꽃잎에 맺힌 물방울 속, 산과 하늘과 나무와 꽃들이 절벽처럼 에둘러 있다 세계의 문이 닫히듯 물방울 하나 폭 꺼진다 엷은 빛에 기대어 수천 겹 층을 이룬 만상의 색상, 마침내 얇고 어두운 막을 벗어나 꽃밭으로 녹아든다 여러 번 생을 살아도 거듭, 주저없이 흘러가는 육체들의 검은 강
살붙이여 무변 허공을 질러와 또 점점 부푸는 물방울이여, 더는 매달릴 수 없을 때 누구도 닦아줄 수 없는 물방울 속으로 소리 없이 낯익은 미움이 지나간다
꽃의 발등이 적막하게 물에 잠긴다
이 시대의 코기토
아프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통증으로만 존재한다. 원인도 모르고 약도 없다. 병과 죽음만이 확실하다
끄려 하면 통증은 불티처럼 날아가 버린다. 날아간 재의 무덤에서 여우불처럼 다시 타오르는 불꽃. 누군가 떠밀리고, 누군가 넘어지고, 무언가 잘못되고, 너무도 자명한 죄악들은 법의 성긴 그물 밖에서 어슬렁거리며 음흉한 미소를 흘린다.
밤에는 모든 피가 검다.* 악의 구렁에서 무수히 돋아나는 흉측한 영혼보다, 매일 뜨는 태양의 잔인한 낯이 더 슬프다. 재 위에 쓰고 쓴 아름다운 말, 공정, 상식, 법치, 정의, 도덕, 윤리…….
닦아주지 못한 말의 얼굴, 닦이지 않는 얼룩들.
따라 읽을 수 없으니 모든 말을 버려야 하나.
빈방에 가라앉아 덕석 같은 먼지를 뒤집어쓰고 무럭무럭 자라나는 적의敵意여,
자정쯤이면 시계추처럼 흔들리는 누군가의 잘린 손.
꿈과 거짓을 한 밥상에 올려놓고, 맹목의 우리는 안전한가.
이미 망해버린 시대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과 우울과 권태와 상실과 환란과 환멸과 폭력과 야만의 지구는 변함없이 태양을 돌 테지.
문제는 언제나 당대라고? 당대를 헛디딘 것이라고?
개뿔!
그러니 당신과 나 그렇게 우리, 앉은뱅이책상 걸머지고 이제 가야지.
‘푸르고 푸른’ 봄의 최후통첩을 날려야지, 불붙어 타오르던 하많은 통증들을 한꺼번에 터뜨려야지.
오늘도 개떼처럼 통증이 몰려온다. 아직, 살아 있다.
* 밤에는 모든 피가 검다 : 다비드 디옵의 소설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