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고 위험한 땅 (8-2)
가고시마 (하)
역사와 문화의 길로 가다 사쓰마 의사비를 지나, 꾸불꾸불하고 울창하고 음산한 길을 올라 가면 남산의 약 1/2 높이의 시로야마 정상(城山, 107m)이다. 가고시마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고, 사이고 다카모리가 세이난 전쟁에서 최후의 저항을 시도한 곳이다. 이 전투에서 사이고는 치명상을 입었고 사전에 약속된 대로 충직한 부관이 그의 목을 쳐줌으로써 사이고는 자결했다는 동굴이 있다.
시로야마 전망대를 거처 다음으로 간 곳이 센간엔이다.
센간엔(이소데이엔)
센간엔(이소데이엔)
킨꼬만과 사꾸라지마를 배경으로 1만 5,000평 부지에 조성된 정원, 사쓰마의 19대 번주였던 시마즈 미쯔히사가 1658년에 별장으로 지은 것으로 230여 년에 걸친 긴 공사 끝에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한다. 도로와 철도가 없었던 과거, 바다와 직접 연결되여 있을 때를 그려보며 돌아 보았다. 그리고 이 지역은 일본 근대화의 선구, 많은 기여를 했다.
센간엔(이소데이엔) 정문
이소 禦殿
이소 정원
교구수이 정원
쓰루조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가스등
이소에서 본 사꾸라지마
1814년 27대 시마즈 나리오키가 만든것, 3글자의 크기는 11미터
시마즈가 역대 번주와 가족들을 모신 와쓰루가네 신사(鶴嶺神寺)
와쓰루가네 신사(鶴嶺神寺)
와쓰루가네 신사(鶴嶺神寺)
대포와 포대
센간엔 11월에 열리는 국화 전시회
센간엔 11월 국화 전시회
상고집성관 본관(구집성관 기계공장, 현 박물관)과 메이지천황 행차소 집성관 비
가고시마 중앙역의 젊은 사쓰마의 군상
1863년 7월 살영전쟁(薩英戰爭) 후 1865년 사쓰마 번의 유학생 19명이 영국으로 유학을 가게 된다. 여행과 유학을 통해 해외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물론 당시는 비밀 출국이었다. 이들이 간 길은 쿠시키노 시 북쪽의 하네시마(羽島) 항을 출발, 홍콩-싱가포르-페낭-고르-봄베이-아덴- 스에즈-알렉산드리아-마르타-지브롤터, 그리고 영국의 더 샘프턴 항으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이 유학생들이 이후 일본의 근대화와 조선침략에 기여했다고 한다.
그리고 센간엔 주위에는 쇼고슈세이칸과 이진칸이 있다. 쇼고슈세이칸은 28대 번주였던 시마즈 나리아키라가 지은 서양식 공장들을 총칭한다. 석조로된 본관은 1865년에 지어진 기계 공장을 이용한 것으로 일본의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관내에는 대포, 방직기계, 사츠마에서 생산된 유라 세공품인 시츠마 기리코, 사료 등 약 1만점을 소장하고 있다.
이진칸은 옛날 영국 기술자들이 숙소로 사용하던 서양식 건물이다. 이 기술자들은 29대 번주였던 시마즈 다다요시가 지은 일본 최초의 서양식 방적공장에 기술을 지도하기 위해 초빙되었다. 관내에는 당시의 사진과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시마즈 나리아키는 이소지역을 중심으로 부국강변, 식산흥업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집성관 사업을 시작했다. 이 사업은 조선, 대포제조, 제철, 방직, 유리, 인쇄, 전신, 의료, 복지 등 다양한 분야였다고 한다. 그는 "백성들이 풍요롭게 살게 되면 자연스럽게 단결된다. 사람들이 사이좋게 협력하는 것은 어떤 성벽보다도 강하다."라고 했다고 한다. 그는 군비의 근대화뿐만 아니라, 산업을 일으키고 사회기반을 정비하면서 일본을 강하고 풍요로운 나라로 만들고자 했다.
그의 사후에는 번주 시마즈 히사미스와 타다요시에 의해 집성관 사업이 추진되었다. 특히 1863년 사쓰마와 영국의 전쟁, 살영전쟁(薩英戰爭) 에서 서양의 군사력과 과학 기술의 대단함을 알게된 사쓰마번에서는 전쟁으로 인해 소실된 집성관의 재건축에 박차를 가해, 서양풍 석조의 기계공장(상고집성관 본관)을 짓는 등의 사업에도 충실을 기했다고 한다. 시마즈 나리아키라의 꿈은 사쓰마번의 많은 가신들에게도 이어졌다. 그들에 의해 메이지유신이 달성되어 일본은 근대국가로 거듭나게 되었다.
가고시마의 고려교
고려교
마음먹고 찾아간 고려교는 해안 마을에 있는 가고시마 이시바시 공원(석교 기념 공원) 내 있다. 생각했던 것 보다 넓고 컸다. 공원내에는 5개의 다리가 있는데 3개의 다리가 옛다리로 그중 하나가 고려교이다. 안내해 주는 78세의 자원봉사 노인에게 물었다. '왜 이 다리가 고라이 바시냐고...? 내가 한국인임을 알고 그는 웃으며 조용히 옛날에 한국 사람들이 살았다만 대답한다, 친절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사진 찍기를 기다려 주며 자세히 안내를 해주었다 . 현무암의 우리 선조들의 숨결이 깃든 다리는 나의 눈길을 쉽사리 떨치지 못하게 붙잡는다.
가고시마 이시바시 공원(석교 기념 공원)에 있는 고려교
가고시마 시내에는 고우스키가와(갑돌천, 甲突川)라는 강이 한복판을 흐르고 있다. `갑돌천', 일본에서는 참으로 특이한 이름이었다. 우리 갑돌이와 갑순이 생각나는 이름이었다.
혹시 이 강가에서, 잡혀 온 도공들이 고국을 그리며 갑돌이와 갑순이를 노래하지나 않았는지-.
이 일대는 메이지 시대 이전만 해도 이곳의 핵심지였다. 여기서 후에 일본 군국의 우두머리가 되는 자들이 태어나고 살았다.
가고시마 현과 사쿠라지마(櫻島) 사이의 만 이름은 긴코만(錦江灣)이다. 우리 충남 공주를 흐르는 강이 금강인데 왜 여기 그 이름이 와 있는지 우연이라기에는 좀 이상했다.
니시다바시(西田僑)와 西田僑御門
니시다바시(西田僑)
니시다바시(西田僑)의 물 흐름
니시다바시(西田僑)의 물 흐름
사꾸라지마
사꾸라지마((櫻島)
가고시마의 상징, 사꾸라지마는 4,800명의 주민이 거주하는 둘레 52km, 면적 80 킬로미터제곱의 자그마한 섬으로 유지에서 3km 정도 떨어진 곳이며 페리로 약 15분간 소요된다. 섬 한복판에 북, 중, 남악 등 3개 (기타다케, 나카다케,미나미다케) 등 3개화산은 13,000년 전 생성한 것인데, 각각의 화산을 중심으로 여러개의 기생 화산이 활동하고 있는게 특징이라고한다. 1914년의 대폭팔 때는 약 1개월에 걸쳐 분출된 30억톤의 용암이 폭 1km의 오스미 해협을 메워 버려 사꾸라지마와 오스미 반도가 육지로 이어졌다. 지금도 계속 연기를 내뿐는 활화산이다.
위험한 환경 때문에 화산으로의 접근은 금지돼 있고 해안 용암 도로를 일주하며 섬을 구경하는게 보편적인 여행이다. 일주 도로는 차도와 보행자도로 분리되어 있고, 만일을 위해 대비소와 대피 방법, 전망대, 쉼터가 있다.
나는 14년간 인도네시아 근무해서 새로운 맛은 없다. 페리에서 하선한 후 우측의 해안 둘레 길인용암 산책로(편도 3km)를 걷기 시작했다. 길은 알맞는 넓이고 누구나 걸을 수 있게 높낮이가 별로 없다. 휠체어가 다녀도 아무 지장이 없을 정도다. 가끔씩 쉴곳과 그늘이 잘 정비되어 있고, 알맞은 간격으로 화장실도 있어 노상 방뇨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온천도 줄길 수 있다. 곳곳에 뛰어 나온 검은 기암 괴석과 한적함으로 무서움을 느낄 때도 있다. 용암의 조각, 바다 건너 보이는 시내 풍경, 오락 가락하는 배들, 새들의 소리로 피로감이 없이 걸을 수 있었다.
길가의 인근에 많은 추모비가 산재해 있다.
가고시마와 사꾸라지마 간 페리와 낚시 공원
사꾸라지마((櫻島) Vistor's Center의 뒷면
용암 산책로에있는 무료 온천 족욕탕 일본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함
사꾸라지마 산 중턱에 있는 한 전망대
해안 용암 산책로
용암 해안 산책로의 풍경
용암 해안 산책로의 풍경
용암 해안 산책로의 풍경
용암 해안 산책로의 풍경
용암 해안 산책로의 풍경
용암 해안 산책로의 풍경
용암 해안 산책로의 풍경
용암 해안 산책로의 풍경
용암 해안 산책로의 한 쉼터
전망대 주차장의 야생 고양이
용암 도로의 한 대피소
페리에서 본 방조제와 가고시마 풍경
가고시마 수족관 근교에서 본 사꾸라마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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