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꽃이 곧 연잎’…‘곧’자 하나에 팔만대장경 숨어 있다
부처와 중생이 둘이라고 착각한 상태에서는
부처를 말해줘도 모르고 중생을 갈파해줘도 모른다
부처와 중생이 똑같다고 착각한 상태에서는
극락 가는 승차권 들고 지옥행 열차를 타고 만다
극락과 지옥이 같다고 흔들림없이 말할 자신 있다면…
➲ 강설
본래 있는 진리를 정리하여 내보이고 다시 설명하는 것은, 마치 화려한 비단 위에다 꽃을 늘어놓듯이 크게 신통한 일은 아니다. 부처님께서 스스로 말씀하셨듯이 설파하신 모든 진리는 부처님께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이치를 깨달으시고 설명한 것일 뿐이다. 그러니 본래의 자리에서 보자면 부처님의 가르침만을 줄줄 외우고 있는 것은 참 쓸데없는 일인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쓸데없는 일이 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부처님께서 교화하신 목적은 사람들이 진리를 깨달아 해탈하라는 것이었다. 해탈하기 위해서는 각자 스스로 만들어 뒤집어쓰고 있는 구속의 굴레를 풀어버려야 하는 것이며, 스스로 지어서 스스로 짊어진 고뇌를 벗어버려야만 부처님의 은혜를 갚게 되는 것이다.
이 이치를 파악했다면 더 이상 수고를 보탤 것이 없겠지만, 아직도 남의 집안 보물을 부러워하고 있다면 옛 선사들이 어떻게 하는지를 잘 살펴 깨달아야 할 것이다.
지문 광조(智門光祚)선사 송대(宋代) 스님으로 향림 징원(香林澄遠, 908~987)선사의 제자이며, 이 <벽암록> 100칙을 선별하여 송을 붙인 설두(雪竇)선사의 스승이다. 호북성(湖北省)의 지문사(智門寺)에서 오래 후학을 지도했다.
➲ 본칙 원문
擧 僧問智門 蓮花未出水時如何 智門云蓮花 僧云出水後如何 門云荷葉
➲ 본칙
이런 얘기가 있다.
어떤 스님이 지문선사께 여쭈었다.
“연꽃이 물 밖으로 나오지 않았을 때는 뭐라고 합니까?”
지문선사께서 말씀하셨다.
“연꽃이니라.”
그 스님이 다시 물었다.
“물 위로 솟은 뒤에는 뭐라고 합니까?”
지문선사께서 말씀하셨다.
“연잎이니라.”
➲ 강설
“연잎만 무성하여 아직 꽃이 피기 전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연꽃이니라.” “연꽃이 활짝 피었을 때는 어떠합니까?” “연잎이니라.”
질문을 던진 스님은 제법 날카로운 질문을 한답시고 물었지만, 스스로 분별에 떨어져 있음을 어쩌랴.
부처와 중생이 둘이라고 착각한 상태에서는 부처를 말해줘도 모르고 중생을 갈파해주어도 모른다. 반대로 부처와 중생이 똑같다고 착각한 상태에서는, 극락으로 가는 승차권을 들고 지옥행열차를 타고 만다. 만약 극락과 지옥이 똑같다고 흔들림 없이 말할 자신이 있다면 일단 봐 줄만은 하겠다. 하지만 진정 그 말과 같다면 다시는 다른 사람을 미워하지도 말고 신세 한탄도 말 것이며, 부모를 탓하거나 사회를 탓하지 않는 정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늘 편안하고 자유자재한 삶이어야 할 것이다.
지문선사는 상대를 정확히 파악하였기에 상대의 생각을 부수어 진실을 보여주려 하셨다.
과연 보았을까? 모양 없는 진실을.
시든 뒤 얼음 속에 있으니, 연꽃인가 연잎인가!
➲ 송 원문
蓮花荷葉報君知 出水何如未出時
江北江南問王老 一狐疑了一狐疑
왕노(王老) 왕노사(王老師)의 줄임. 이 말은 남전(南泉)선사께서 당신의 성씨를 빌려 스스로를 지칭하여 사용했던 말이다. 남전선사께서 입적하신 후에는 점차 ‘선지식(善知識)’ 정도의 뜻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일호의(一狐疑) ‘한 마리 여우가 의심하다’의 뜻이 아니라, ‘한 가지 의심’이라는 뜻임. 호의(狐疑)라는 단어는 여우가 쫒기면서도 계속 의심해서 돌아본다고 하여 나온 말이라 함.
➲ 송
연꽃과 연잎으로 그대에게 알려주려 답했으니,
물에서 나온 후와 나오지 않았을 때는 어떠한가?
➲ 강설
지문선사의 저 친절한 답을 보라. 깨닫게 해 주려고 얼마나 애쓰셨는지 알겠는가. 물속에서 헤매고 있을 때는 번쩍 물 밖으로 내던지더니, 물에 나왔다고 착각하는 순간 다시 물속에 처박아 버리네. 그나저나 지문선사와 설두 영감님의 따스한 미소를 보기나 하는 것인가.
만약 ‘연꽃이 곧 연잎’인 도리를 깨달았다면 ‘곧’자 하나에 팔만대장경이 숨어 있는 것을 알 것이다. ‘곧’자의 비밀을 깨달아 무한한 지혜를 쓸 수 있게 된다면 팔만대장경이 모두 백지인 것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곧’자의 비밀을 모른다면 팔만대장경을 다 외우고 해석할 수 있을 지라도 지옥문을 열고 나오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그런 경지가 아니라면 ‘연꽃이 곧 연잎’이라는 헛소리 따위를 내뱉지 말 것.
지문선사와 설두 영감님의 노파심이 헛되지 않게 하는 대장부가 없진 않겠지!
➲ 송
강의 북쪽이나 강의 남쪽에서 선지식에게 물어본다면,
한 가지 의심 풀리면 또 한 가지 의심이 일어나리라.
➲ 강설
우리는 천지에 스승이 가득한 시대를 살고 있다. 인터넷만 검색하면 온갖 가르침이 홍수를 이룬다. 진리도 가르쳐주고 행복도 가르쳐 준다. 수행도 한나절이면 다 이루게 만들어주고, 깨달음도 똘똘 뭉쳐 잘 전해준다. 그런데 그런 스승들 자신은 왜 편안해 보이지 않는 것일까? 말은 수행의 대가인 것처럼 하는데, 왜 몇 시간도 고요히 정좌(靜坐)해 있질 못하고 자잘한 온갖 것에 그렇게 걸리는 것일까?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유명한 사람을 떠받든다고 수행자마저도 그 부류에 들고자 하면 되겠는가? 바다는 오라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아도 세상의 물이 모이고, 산은 묵묵히 있어도 온갖 생명이 깃드는 것이다. 설사 그렇지 아니하면 또 어떠한가. 저자거리에서도 유유자적(悠悠自適)한 것이 수행자의 진면목(眞面目)인 것을.
참으로 묘하게도 잘 알려지지 않은 이들 가운데 참된 수행인이 눈에 띄고, 유명하지도 않은 이들 가운데 지혜롭게 사는 이들이 보인다. 그러니 쓸데없이 유명한 이들 찾아다니지 말고, 그저 묵묵히 참구해 보라. 호흡 몇 분 고른다고 해탈 할 수 있고 눈앞의 사물 똑똑히 본다고 깨닫는다면, 고양이나 독수리 따위가 훨씬 먼저 해탈하고 깨달을 것이다. 스스로 맑아지고 보면 참된 길도 보이고, 진정한 스승도 알아볼 수 있다.
위의 공안에 대한 답을 묻기로 작정한다면 세상 천지에 답할 이는 부지기수다. 그런데 그 답이 그대의 안목(眼目)을 열어줄 것이라고 착각하지는 말라. 그건 마치 두꺼운 커튼으로 빛을 가린 방안에서 성냥불을 켜는 것과 비슷한 일이다.
보인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시 어둠이다. 꺼지지 않는 빛을 찾는 방법이야 잘 알 것이니, 어디 행동으로 한 번 옮겨 보시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