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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동조합 가톨릭 사회교리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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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론 생명과 행복을 위한 진리, 십자가와 부활
이기우 추천 1 조회 75 23.02.22 05:38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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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23.02.22 10:05

    첫댓글 고정댓글: 이토록 훌륭했던 우리 민족의 사유를 바탕으로 생겨난 정신 전통이 왜 오늘날까지 전해지지 못했는지 궁금해서 여기저기 찾아보았습니다. (요한복음서의 주해와 묵상을 집필하면서 신앙 토착화의 관점을 정리하다 보니 여기까지 와야 했습니다) 그랬더니,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세워진 국가 고조선을 47대 단군이 2300여 년 간 다스리면서 '천부경'이라든지 '낙서' '하도' 등에 역법으로 발전시켜서 확립해 놓았는데, 철기 문명이 시작되면서 국내가 큰 변동을 겪게 되어 더 이상 귀족 세력에 의한 평민 통치가 어려워지기도 했고 철기를 문화를 군사력으로 조직화시킨 중국 한 왕조가 밀고 들어오는 바람에 고조선이 붕괴되었습니다. 그런데 중국인들은 고조선의 문물을 전수받으면서 왠만한 것은 자기 것이라고 위장을 하면서 고조선의 문헌들은 죄다 불태워버려서 남아 있지 못합니다. 사마천의 사기마저도 정사로 알려져 있지만 역사왜곡이 보통이 아닙니다. 오죽하면 '천부경'조차도 신라 시대 최치원이 바위 위에 조각해 놓은 것을 필사해서 후대에 전해주었겠습니까? 예나 지금이나 중국인들은 그런 짓들을 잘 합니다.

  • 작성자 23.02.22 09:57

    이에 대해 학계에서 제일 잘 정리해 놓으신 학자가 윤내현 교수입니다. 지금도 윤교수의 '고조선 연구'를 읽으며 정리를 하고 있는데, 사회사 전공으로 고조선 문명론을 처음으로 주창하신 신용하 - 강단사학의 식민사관을 고발한 이덕일 - 고구려의 해양활동을 부각시키며 고조선을 원조선으로 부르는 윤명철 같은 학자들의 글도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지금 제게 드는 생각은 이렇습니다. 고조선의 문물이 남아있지 못한 것은 중국의 침탈과 역사왜곡 탓이기는 하지만, 고조선의 단군 왕조가 2300여 년 간 존속한 것만 해도 세계사에 유례가 없이 길고 안정된 사례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 고구려 시대에 일어났습니다. 소수림왕 2년인 372년에 불교를 도입하면서 유교와 도교도 따라 들어왔는데, 이들의 정교한 지적 체계를 따라잡을 만한 학자나 예언자가 고조선 시대와 고구려 시대에는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최고선일 공경하던 정신 전통은 고작 무속(Shamanism)화 되어버리고 지배층과 지식층은 외래 사조에 함몰된 채 조선 시대까지 내려왔습니다.

  • 작성자 23.02.22 10:07

    이런 뼈아픈 역사와 정신 전통을 꿰뚫어본 이가 정약종입니다. 그는 형 약전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전해받고는 약전에게 천주교를 가르쳐준 이벽을 직접 만나서 배워야겠다는 일념으로 천진암 강학회에 뒤늦게 합류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불교와 도교의 전래 과정은 물론 그 지적 체계와 정신적 흐름을 통달해 있었던 처지라서 형 약전이나 동생 약용보다 신앙의 정진 속도가 더 빨랐고, 그래서 '천주실의'나 '성교요지'를 소화하고나서 순한글로 '주교요지'를 펴낼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이 책은 천민 출신이었지만 두뇌가 영민했던 황일광 시몬과 '교우'로 교제하며 서민들 속에 반만년 가까이 전수되어온 민간의 신앙 또는 종교적 심성을 배워서 썼기 때문에 무속에 대한 신앙적 식별작업이 훌륭히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최고신을 공경해온 정신전통은 계승하면서 그리스도 신앙으로 보충하고, 미신행사로 전락한 무속신앙을 배격해 내는 신앙 토착화의 지성적 작업이 마무리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정약종의 '주교요지'에 주목하고 있고, 우리 신앙의 선각자들이 이처럼 대단한 신학 작업을 해 낸 역사에 대해 커다란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본받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 23.02.22 14:42

    독서와 복음을 보면 주님은 생명이시고 주님의 길을 따라 계명과 법규에 충실하면 복을 받을 것이다. 주님의 길이란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는 길이라는 말씀으로 요약될 것 같습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갈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대속의 삶을 살아가셨던 예수님의 모습도 따라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사유와 히브리적 사유의 공통점을 통해 하느님이 먼 곳에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친숙한 분이심을, 그리고 우리에게 도도히 흐르는 하느님 신앙의 근원도 떠올려 봅니다. 그리고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결합이 문명을 높였듯이 우리의 사유와 히브리적 사유의 결합이 하느님 신앙의 시너지를 내기를 기원해 봅니다.

  • 작성자 23.02.22 16:18

    네, 제대로 보셨습니다. 우리 민족의 직관적이고 종합적인 사유가 하느님 신앙을 고수해 온 히브리적 사유와 함께, 우리 신앙 선조들이 중국에 파견되었던 서양 선교사들을 통해 서양 문물을 파악한 실사구시적 사유와 결합되면 좋겠습니다.

  • 23.02.23 05:20

    "말씀이 우리와 함께" 책자를 잘 받았습니다. 올해가 가해라서 아날로그식으로 강론을 편하게 볼 수 있겠다 생각했는데 오늘의 디지탈 강론과 똑같지는 않군요. 정약종의 주교요지가 현대어로 정리된 자료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살펴보고 싶군요.

  • 작성자 23.02.23 07:48

    전주 교구 정태현 신부님께서 풀이해 놓으신 책을 추천합니다.

  • 작성자 23.02.24 07:36

    부처님께서는 신으로 자처하신 적이 없었고 공자님께서도 내세에 대해 가르치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후대의 불자들이 부처의 신격화를 추진하고 후대의 유림들도 공자와 조상을 위한 제사를 내세와의 통공 수단인 양 교조적으로 가르쳤습니다. 이는 볼자들과 유림들 안에서도 신적인 현존에 대해서나 내세적 영원 내지 영적인 통공에 대해서 생겨난 깊은 갈망을 대변하는 현상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 생활철학적인 가르침들을 자연종교라고 부르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몸소 삶으로 가르치신 그리스도교를 계시종교라고 불러 구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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