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조선을 말아먹은 무당 '진령군'
위 그림은 참고 자료.
진령군 그림은 남아있지 않다.
때는 임오군란, 군사들에게 죽을뻔한 민비는 충주로 피신하였다. 이 곳에서 민비는 용하다는 무당을 하나 만나게 된다.
자신을 관우의 딸이라 소개한 무녀는 민비에게 "8월이 되면 환궁을 하게 될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
임오군란은 청나라의 개입으로 종료되고 흥선 대원군은 텐진으로 납치되며 흥선 대원군의 천하가 끝나게 되었다.
다시 민씨 일가의 세상이 된 것이다. 이 때가 놀랍게도 무당이 민비에게 말한 바로 그 시기였다. 민비는 환궁하였으며 무당 역시 민비를 따라오게 되었다.
드라마 장사의 신에 나오는 진령군
무당은 또한 민비가 아픈 곳이 있으면 고쳐 주었고 민비는 그녀를 더욱 신뢰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에게 진령군이라는 칭호를 내려 주었다.
성균관 북쪽에는 나랏돈으로 사당도 만들었다.
그렇게 그녀의 본거지가 된 북묘에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진령군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그 역시 조정의 실세가 되었다. 조정의 관리들은 진령군과 의남매 혹은 자식으로 들어가는 경우도 있었으며 북묘에는 금은보화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고 한다.
진령군 모자의 횡포로 국고가 바닥이 났지만 민비는 진령군을 신뢰했다.
진령군의 전횡을 보다 못 한 이들이 상소문을 올렸지만 민비 일파와 진령군 일파는 이를 중간에 차단해서 고종이 보지 못하게 하였고 오히려 이들을 귀양보냈다.
당시 진령군의 횡포가 어찌나 심했는지 조선 왕조 실록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신령의 힘을 빙자하여 임금을 현혹시키고 기도한다는 구실로 재물을 축내며 요직을 차지하고 농간을 부린 요사스러운 계집 진령군(眞靈君)에 대하여 온 세상 사람들이 그들의 살점을 씹어 먹으려고 합니다."
- 고종실록 32권
영원할 것 같은 진령군의 권세도 1894년 갑오개혁으로 끝나고 만다. 조선 조정에 친일 내각이 들어서면서 진령군이 실각한 것이다.
그녀의 모든 재산은 몰수되었으며 북묘에서 삼청동으로 쫓겨나 숨어 살았다고 한다. 그리고 민비가 을미사변으로 시해되고나서야 고종은 진령군에 대한 탄핵 상소문을 봤다고 한다.
이후 진령군은 삼청동 산골에 숨어 살다 사망하였다.
그 때가 1896년 8월. 바로 병신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