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의 대가였던 야산(也山) 이달(李達·1889∼1958)은 6·25전쟁이 일어날 것을 미리 내다보고, 1차로 1946년 12월에 가족과 제자 24명을 데리고 충청도 태안의 안면도로 피신해 들어갔다. 야산의 지시에 따라 6·25 발발 이전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제자들이 전국 각지에서 안면도로 들어왔다. 대략 300가구에 1000명이 넘는 숫자였다고 전해진다. 야산을 따라 안면도에 들어왔던 사람들은 6·25 때 인명피해가 없었음은 물론이다. …태안과 안면도라는 지명은 그 의미가 심중하다. …앞으로 ‘태안반도’와 ‘안면도’는 후천개벽의 요지가 될 것이다.’ <조용헌의 ‘동양학강의 1’에서>
태안(泰安)은 서쪽 땅끝이다. ‘크게 편안한 땅’이다. 누구든 태안반도에 들어서면 안온해진다. 온유해진다. 마음이 평안하다. 태안반도 왼쪽은 서해바다이고, 오른쪽은 천수만과 가로림만이다. 서해 쪽은 모래사장이고, 천수·가로림만 쪽은 뻘밭이다. 모래밭엔 32개의 해수욕장이 자리 잡고 있다. 42개의 항·포구도 대부분 서해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뻘 쪽엔 세발낙지가 잡힌다. 바지락 등 조개도 많다. 걸쭉한 젓국 개펄엔 먹을 게 가득하다. 천수만에 철새가 날아드는 이유다.
태안반도는 사실상 섬이다. 사면이 거의 바다다. 육지와 이어진 부분은 천수만과 가로림만 사이의 2.8km뿐이다. 만약 고려시대부터 팠던 굴포운하가 뚫렸다면 진즉에 태안섬이 됐을 것이다. 태안반도는 북쪽 끝 만대포구에서 맨 끝자락 영목항까지 길이가 85km나 된다. 칠레처럼 길쭉한 장화 모양이다. 85km의 기다란 문짝이 2.8km의 돌쩌귀 하나에 달랑 매달려 있는 꼴이다. 그렇게 한반도라는 얼굴에 귀처럼 붙어 있다.
태안반도는 리아스식 해안이다. 수많은 주름과 굴곡으로 이뤄졌다. 해안선 길이가 무려 530.8km나 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섬인 제주(418.6km)나 그 다음인 거제(386.6km)보다 더 길다. 크고 작은 119개 섬이 있지만 사람이 살고 있는 섬은 10개뿐이다.
태안반도는 중국과 가장 가까운 땅이다. 중국 산둥(山東) 땅에도 이름이 똑같은 ‘타이안(泰安)’이라는 곳이 있다. 타이산(泰山) 산 바로 아래에 있는 도시가 그곳이다. 그만큼 태안반도는 중국 문물이 가장 먼저 닿았던 곳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삼존불인 태안마애삼존불(국보 제307호)이 바로 그 흔적이다.
‘산벚꽃 분분하던 어느 봄날/곰곰 생각에 잠긴 미륵보살님은/천지간에 꽃 시절 잠깐인데/산문 환히 열어 놓고/구름 탁발,/바람 탁발,//…산동땅 오가던 백제인 고된 뱃길/만리 밖 밝히도록/천년을 둥글고 환하게 웃고 계시는/석가여래님,’ <김지헌의 ‘백제의 미소’에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2007년 12월 7일, 태안앞바다 기름 유출 사건이 그랬다. 만약 전국에서 달려온 자원봉사자들이 없었다면, 어쩌면 태안은 ‘기름지옥’이 됐을지도 모른다. 자원봉사자 123만 명의 정성과 땀이 태안을 살렸다.
당시 군인 학생 직장인 등 수많은 봉사자들이 앞 다퉈 기름띠 제거에 나섰다. 하지만 해안절벽이나 갯바위 등은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다. 아예 길이 없는 곳이 많았다. 해안을 따라 새로 길을 트는 수밖에 없었다. 그 길을 이은 것이 자원봉사자길(바ㅱ길)이다. 태안반도 북쪽 끝 학암포해수욕장에서 파도리까지 이어지는 44km 길이다. 가는 곳마다 땅이나 동네이름이 정답다. 꼬챙이, 큰아치네, 쥐마골, 새끼미, 뒷장벌, 댕갈막, 구름포, 새부리용굴, 용세골, 어은들, 양챙이, 모재, 버듬이, 마외, 가시내, 민어도, 장구도, 간이실, 수문개, 새내뚝, 범적골, 부엌이아래지매, 부엌이위지매, 와우재, 소래범이, 해별….
이제 그 자원봉사길이 걷기 명품코스가 됐다. 제1코스는 학암포해수욕장∼석갱이∼구례포해수욕장∼해녀마을∼먼동해수욕장∼두웅습지∼신두리해수욕장에 이르는 12.773km이다. 신두리사구는 천연기념물 제431호. 바람에 날린 모래가 해안선을 따라 쌓인 모래언덕이다. 신두리사구는 길이 약 3.4km(폭 0.2∼1.3km)로 남북 방향으로 길게 늘어져 있다. 사구엔 해당화가 끝물이다. 드문드문 붉은 꽃, 하얀 꽃이 아쉬움을 달래준다. 갯방풍 갯메꽃 갯씀바귀도 보인다. 둥근 언덕마다 하얀 ‘삘기 꽃’이 하늘거리며 장관을 이룬다. 두웅습지는 모래언덕과 언덕 사이에 만들어진 ‘물 창고’이다. 금개구리 맹꽁이가 펄쩍거리고, 수련 애기마름 부들 같은 풀들이 자란다.
양승호 씨의 옹기작품 ‘누에고치’
| 제2코스는 신두리해수욕장∼만리저수지∼방파제∼십리포해수욕장∼신너루해수욕장∼태배∼구름포해수욕장에 이르는 12.068km이다. 숲 속을 걷다가, 마을 골목길도 거치고, 모래밭도 걷는다. 숲 속의 새소리에 저 멀리 파도 소리가 아득히 버무려진다.
제3코스는 구름포해수욕장∼의항해수욕장∼백리포해수욕장∼천리포항구∼천리포수목원∼만리포해수욕장∼모항항구∼행금이∼모항저수지∼어은돌해수욕장∼파도리해수욕장의 19.174km이다. 파도리 앞바다엔 냉수대가 흐른다. 그만큼 고기가 많다. 모항에선 간자미 붕장어 전복 우럭 광어회를 값싸게 먹을 수 있다.
3코스는 거의 해수욕장 길이다. 맨발로 백사장을 걷는다. 꼬물꼬물 살갗 밑의 잠자던 세포들이 우우우 기지개를 켜며 눈을 뜬다. 말랑말랑 간질간질 고슬고슬 어찔어찔하다. 이 코스는 기름 유출 때 정면으로 피해를 봤던 지역.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백사장엔 작은 게(돌쟁이)들이 어지럽다. 쏙 고개를 내밀었다가 잽싸게 움츠린다. 갯바위엔 하얀 굴딱지가 덕지덕지 붙어 있다. 따개비나 이곳에서만 나는 바다풀 세모도 단단하게 달라붙어 있다. 연초록 말미잘들은 바위 틈새에서 물을 흠뻑 먹고 있다.
태안반도 상투인 맨 위 지역엔 만대어촌체험마을(꾸지나무골·김진헌 사무장 041-675-0081)이 있다. 독살체험으로 이름난 곳이다. 서울 가족들이 많이 찾는다. 어린이들은 마을에 하루 이틀 묵으면서 엄마 아빠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갯벌에서 논다. 독살은 갯벌에 돌을 쌓아 만든 어장. 밀물 때 바닷물과 함께 밀려온 고기가 썰물 때 못 빠져나가게 되면 그걸 손이나 그물로 잡는 것이다. 고기는 너무 더우면 독살이 있는 해변 가까이 오지 않는다. 바닷물이 섭씨 20도가 넘기 때문이다. 수온이 섭씨 15∼17도가 될 때 독살에 고기가 많이 든다.
체험마을 부근엔 갯벌생태옹기를 만드는 양승호 작가의 예술옹기작업실(041-675-7720)이 있다. 미리 연락하면 견학할 수 있다. 그의 ‘트인 옹기’는 영국에서 인기가 높다. 굴딱지나 따개비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옹기도 눈에 띈다. 옹기를 구운 뒤 바다에 한동안 그대로 담가 놓기 때문이다. 그렇다. 바다는 아름다움을 완성한다.
‘최초의 인간이 흘렸던 한 방울 눈물 안에 모든 시대의 슬픔이 녹아 있듯 바다에는 소금이 녹아 있다. 뺨을 흘러내리는 최초의 한 방울이 머금고 있었던 가장 순결한 푸름. 바람이 불타는 누런 보리밭에서 낫질하는 사람 이마에서 떨어지는 땀방울 안에 바다가 있다. 낯선 도시 밤하늘 먼 별빛을 바라보는 눈에 고이는 눈물 안에 바다가 있다.’ <허만하 ‘바다의 성분’에서>
■ 조선시대 완성 못한 굴포운하 재검토… ‘태안島’ 생기나
노량(露梁) 명량(鳴梁) 견내량(見乃梁) 안흥량(安興梁)…. ‘∼량(梁)’자가 붙는 바다는 무섭다. 물살이 세고 암초가 많다. 물살소리가 마치 울부짖는 듯하다. 그래서 울돌목(鳴梁)이다.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도 바로 이러한 지리적 이점을 이용한 것이다.
‘∼량(梁)’에선 삐끗하면 배가 뒤집어지거나 부서진다. 더구나 옛날엔 동력선이 아닌 돛단배밖에 없었다. 하필 그런 곳은 뱃길의 목젖과 같은 요지이다. 그곳을 지나지 않고선 목적지까지 갈 수가 없다.
갯바위에 덕지덕지 붙은 하얀 굴딱지들.
| 안흥량은 태안반도 안흥 앞바다이다. 조선시대 영호남의 세곡운반선이 한양에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다. 한 해 평균 200여만 석의 세곡이 이곳을 거쳐 한양으로 운반됐다. 당연히 침몰하거나 부서지는 배가 많았다. 오죽하면 뱃사람들이 안흥량을 ‘난행량(難行梁)’이라고 불렀을까. 난행량은 ‘가기 어려운 뱃길’이란 뜻이다.
조선 태조 4년(1395)부터 세조 1년(1455)까지 60년 동안 선박 200척이 안흥량에서 부서지거나 침몰했다. 사람도 1200여 명이나 죽었다. 세금으로 거둬들인 미곡 1만5800섬이 바다에 가라앉았다. 태종 14년(1414)엔 세곡선 66척과 미곡 5800섬이 수장되기도 했다. 요즘 고려청자가 심심찮게 건져 올려지는 곳도 바로 안흥량이다. 고려청자는 전남 강진이나 전북 부안에서 구워 당시 고려 수도인 개성으로 운반됐었다.
굴포운하는 안흥량을 거치지 않기 위해 팠던 내륙 뱃길이다. 고려 인종 12년(1134)에 첫 삽을 떠, 조선 세조 7년(1461)까지 무려 327년 동안 이뤄졌다(일부에선 조선 현종 10년인 1669년까지 535년 간 공사가 지속됐다고 주장). 구간은 남쪽 천수만에서 북쪽 가로림만을 잇는 6.8km 거리. 물길이 열리기만 한다면 안전하고, 운행시간도 3분 1로 줄일 수 있었다. 수에즈운하(1869년 개통)나 파나마운하(1914년 개통)보다도 수백 년 앞설 수도 있었다. 하지만 수백 년 동안 팠지만 겨우 4km의 물길을 내는 데 그쳤다. 2.8km를 남겨두고 공사를 중단했다. 중장비가 없던 시절, 사람의 힘만으로 거대한 바윗덩이를 치우기는 불가능했던 것이다.
결국 조선 인조(재위 1623∼1649)는 안면곶의 잘록한 부분을 끊어 판목운하를 팠다. 서해의 바닷물을 천수만과 연결시킨 것이다. 원래 육지와 연결됐었던 안면곶도 이때부터 섬이 돼 안면도가 됐다. 안면도는 1970년 연륙교(안면대교)로 다시 뭍과 이어졌다.
판목운하가 열린 뒤 삼남의 세곡선들은 안흥량을 거치지 않고 판목운하를 통해 천수만으로 들어와 짐을 부렸다. 부려진 세곡은 굴포운하 남쪽 창고(남창·南倉)에 보관됐다가, 육로로 가로림만의 굴포운하 북쪽 창고(북창·北倉)까지 운반됐다. 그 다음엔 다시 배로 한양까지 운반했다. 뚫지 못한 2.8km 굴포운하 육로구간을 ‘막고 품기’식으로 이은 것이다. 얼마나 품이 많이 들었을까. 결국 세곡선은 다시 안흥량을 거쳐 곧바로 한양으로 가기 시작했다. 그만큼 침몰사고도 이어졌다. 2009년 태안군은 굴포운하를 다시 잇기 위해 타당성 조사에 나섰다. 만약 굴포운하가 뚫린다면 태안반도는 태안섬이 된다.
김화성 기자 mars@donga.com
■ 교통정보
△승용차: 서해안고속도로→서산나들목 혹은 해미나들목→태안 △고속버스: 서울강남고속터미널·서울남부터미널→태안(2시간10분 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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