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묵시록의 시작과 복음에서 우리는 “다시”라는 말을 공통으로 발견합니다.
묵시록은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저버린 것”을 나무라며 “어디에서 추락했는지
생각해 내어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들을 다시 하여라.”라고 합니다.
그리고 복음의 눈먼 이는 “다시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라고 청합니다.
그래서 오늘 먼저 다시 사랑하는 것에 관해 성찰하고 묵상코자 합니다.
그런데 처음에 했던 사랑을 다시 하는 것을 우리는 잘 이해해야겠습니다.
그것은 못 이룬 첫사랑을 다시 찾아 만나는 것이 아님은 말할 것도 없고,
부부간에 처음 만났을 때는 서로 정말 사랑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그래서 그때의 사랑을 다시 하라는 그런 뜻도 아닐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좋아서 사랑했던 그 사랑을 다시 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이제 와 다시 좋아하게 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좋아서 사랑했던 그런 사랑은 오히려 풋사랑이라고 내동댕이치고,
볼 것, 못 볼 것을 다 보고 난 뒤의 싫고 좋은 것을 넘어서 사랑하는,
그런 성숙하고 참된 사랑을 다시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물론 우리 인간 사랑도 이렇게 다시 해야겠지만
오늘 묵시록이 다시 하라는 사랑은 조금 다른 차원일 것입니다.
아예 사랑 자체를 잃어버렸다면 그 사랑을 다시 찾으라는 뜻이고,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잃어버렸다면 그 사랑을 다시 찾으라는 뜻일 겁니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사랑한다는 것을 사치스러운 생각이라며 제쳐놓았습니다.
먹고 사느라 지쳐서 사랑이 완전히 메말라버렸는데
그 무슨 사랑 타령이냐고, 고목에서 싹이 나겠냐고 냉소적으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이나 사랑 타령은 젊었을 때나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하고,
무엇보다 하느님 사랑은 나이 먹어 새로이 시작하고 나이 먹을수록 더 오롯한
사랑을 하고 더 성숙한 사랑을 할 수 있다고 우리 생각을 바꿔야 할 것입니다.
유행가에 ‘내 나이가 어때서.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인데’라는 기막힌 가사처럼
우리는 나이 먹을수록 하느님 사랑하기에 딱 좋은 나이라고 생각을 바꿀 것입니다.
다음으로 다시 보는 것에 관해 성찰하고 묵상해보겠습니다.
다시 본다는 것은 눈이 먼 적이 있음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욕심에 눈이 머는 것이고,
더 친절하게 풀이하면 세상 욕심에 눈이 머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세상 욕심에 눈이 멀었었고
안경에 세상 때가 많이 꼈었습니다.
그런데 살 만큼 산 지금 눈에서 욕심을 벗겨낼 때가 되었습니다.
그놈의 욕심 때문에 얼마나 고통스러웠고 불행했습니까?!
그러니 우리도 복음의 눈먼 이처럼 눈을 멀게 했던 욕심을 벗겨내고
다시 보고자 하는 갈망이랄까 열망이 마음에서부터 솟아나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는 세상을 따라가지 않고,
오늘 복음의 눈먼 이처럼 주님을 따라 아버지 계시는 하느님 나라로 가야겠습니다.
“그가 즉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다.”
오늘은 너무 늦어서 여기까지만 나누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