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3주간 월요일 강론
송영진 모세 신부 ・ 23시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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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3주간 월요일 강론>(2024. 11. 18. 월)(루카 18,35-43)
<우리는 구원의 빛을 받아 빛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의 일이다.
어떤 눈먼 이가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다가,
군중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사람들이 그에게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 하고
알려 주자, 그가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다. 앞서가던 이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데려오라고 분부하셨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물으셨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그가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그가 즉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다. 군중도 모두 그것을 보고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다(루카 18,35-43).”
1) 어떤 눈먼 이의 이름은 ‘바르티매오’입니다(마르 10,46).
바르티매오가 처해 있는 상황에서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마태 4,16).”
바르티매오가 눈이 멀었다는 것은, 어둠 속에 앉아 있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의 경우에, ‘어둠’은 죄를 뜻하는 말이 아니라,
메시아를 아직 만나지 못했음을 뜻하는 말로 해석됩니다.
바르티매오가 길가에 앉아서 구걸하고 있었다는 것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인생을 살고 있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의 경우에, ‘죽음의 그림자’는
구원의 길을 아직 모르고 있음을 뜻합니다.
<아직 예수님을 모르고, 그래서 구원의 길을 모르고,
인생의 허무함 속에서 방황하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인들은 ‘빛으로 오신’ 메시아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고,
어둠과 죽음의 그림자에서 해방된 사람들입니다.>
2) 바르티매오의 상황에서 요한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도 연상됩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스승님,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저 사람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우리는 낮 동안에 해야 한다. 이제 밤이 올 터인데
그때에는 아무도 일하지 못한다.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9,1-5).”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라는 말씀에서,
코린토 2서에 있는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이 일과 관련하여, 나는 그것이 나에게서 떠나게
해 주십사고 주님께 세 번이나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약함도 모욕도 재난도 박해도
역경도 달갑게 여깁니다.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2코린 12,8-10).”
<우리는 어떤 질병이나 신체장애 같은 고통과 불행을
함부로 ‘죄’에 연결해서 생각하면 안 됩니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는 주님 말씀대로,
그 고통과 불행을 겪고 있는 사람이 건강한 사람들보다 더
주님의 권능과 은총을 드러낼 수 있고, 증명할 수 있습니다.>
3) 바르티매오는 메시아를 만나기를, 또 메시아의 구원을
얻기를 갈망하면서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을 것이고,
소문만으로도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믿었을 것이고,
예수님에게 희망과 기대를 걸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처지에서 예수님을 만나러 갈 수는 없었고,
예수님께서 그에게 오시기를, 또는 그의 앞을 지나가시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39절의 ‘더욱 큰 소리로’ 라는 말은,
그의 간절한 심정을 나타냅니다.
4)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라는
예수님의 질문은, 몰라서 하신 질문이 아니라,
바르티매오 자신이 자기의 믿음을 능동적으로
고백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신 말씀입니다.
<주님이신 예수님은 사람 속을 꿰뚫어 보시는 분입니다.
“그분께는 사람에 관하여 누가 증언해 드릴 필요가 없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사람 속에 들어 있는 것까지
알고 계셨다(요한 2,25).”>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라는 말은,
겉으로만 보면 ‘시력 회복’을 간청하는 말이지만,
전후 상황을 모두 생각하면, 이 말은 예수님을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오신 메시아’로 믿고 있음을
고백하면서 메시아께 구원을 간청하는 신앙고백입니다.
그의 시력이 회복된 것은, 예수님 덕분에 ‘구원의 길’을
알게 된 것을 나타내고, 눈을 뜬 다음에 예수님을
따랐다는 말은, 그 자신이 간절하게 원했던 그대로
‘구원의 길’을 걷기 시작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길은 곧 ‘구원의 길’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출처]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