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승부, 해설, 보급을 넘나들며 활약하고 있는 김영삼 9단 | 며칠 전 문득, 전화가 걸려왔다. 김영삼이었다. ‘입신’이 된 기념으로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삼겹살이라도 굽고 싶다고 한다. 장소는 난지도 하늘공원 캠프장. 물론, 자비를 들여서 하겠다는 거다.
많은 프로들의 입신 축하연을 지켜봤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과연, YS답다’는 생각을 했다. 대부분은 입신이 된 프로의 후원자들이 호텔에서 성대한 축하연을 베풀어준다. 당사자도 주변도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YS의 주변에도 그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후원자들이 많다. 그들이, YS가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둘 것 같지도 않지만(이미, 그런 움직임이 있다) 아마도 하늘공원 캠프장의 삼겹살 파티만은 반드시 YS의 뜻대로 진행될 것이다. 그는 그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런 삶의 방향을 바꾸고 싶어 하지도 않는 것 같다.
그러고 보면 ‘그는 욕심이 많지 않다’는 말도 취소해야 할 것 같다. 타이틀보다 더 큰 사람들의 마음을 제멋대로 가져가는데 욕심이 많지 않다니, 명백한 실수다.
그런데 왜 자꾸 웃음이 나오고 사람들의 마음을 가져가겠다는 YS의 발칙한 상상이 실현되기를 바라는 걸까. 그게, 하늘공원 캠프장의 삼겹살 파티에 초대됐다는 즐거움 때문은 결코 아니라는 걸 밝혀둔다.
YS의 야심찬 ‘삽겹살 파티’는 비가 많이 오는 바람에 역삼동 한식당 ‘진진바라’에서 교류전을 겸한 만찬으로 바뀌었다.
▲7월28일 저녁에 열린 축하연. 김영삼 9단은 이례적으로 자비로 자리를 만들어 지인들을 초대했다. 그리고 " 9단승단 보다 더 좋은 일로 조만간 크게 쏘겠다."며 쑥스러워했다.
▲선릉역 부근에 위치한 한정식집 '진진바라'. 여성바둑연맹 회장인 승순선씨가 운영하는 관계로 바둑모임의 장소로도 곧잘 활용된다. 김영삼은 마음이 여린 프로다. 독하지 못하다. 그런 성품은 승부사에게 독으로 작용할 수도 있지만 좀 더 넓은 인간의 관점으로 보면 많은 사람들의 호의를 얻을 수 있는 장점이기도 하다.
‘독하지 못하다’는 말을 달리 표현하면 ‘너그럽다’는 말로 바꿀 수 있고 ‘욕심이 많지 않다’는 말도 된다. 맞다. 동료, 후배 또는 관계자들과 팬들이 그를 좋아하는 이유도 그런 성품에 있을 것이다.
그는 프로 같지 않아서 더욱 좋은 프로다. 아마추어들이 프로에게 지도를 요청할 때는 반드시 정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하지만 한국사회는 그런 ‘거래’에 거부감이 크다. 물론, 그렇다고 아마추어들이 공짜지도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대부분 틀에 얽매인 지도보다 자연스러운 교류를 통해 기량이 향상되기를 원한다.
▲축하연에 참석한 스승 허장회 9단. 김영삼 9단은 "저를 인간만들어 주신분" 이라고 말해 좌중을 웃겼다.
▲기도산업의 박장희 회장. "평소에 '김프로'에서 '영삼아'까지 다양한 호칭으로 부르곤 했는데 오늘만은 '사범님'이라 부르겠다." 한국사회에서 순수하게 바둑을 즐기는 아마추어의 상당수는 오피니언리더에 속한다. 이 시대를 이끌어가는 엘리트 계층이란 뜻이며 그들에게는 타고난 오만이 있다. 허례로 감출 수는 있겠지만 그건 속내가 아니다. 그들이 원하는 건 질리도록 겪어온 교사-학생의 교육이 아니라 전문가와 함께 미지를 탐험하는 정신의 유희다.
김영삼에게는 그런 재능이 있다. 가르치되 가르친다는 느낌보다는 함께 어울려 논다는 느낌을 더 많이 갖게 해준다. 그의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이유다.
정상의 프로들과 엇비슷한 재능을 갖추었으면서 타이틀을 따내지 못하고도 그다지 초조해하지 않고 또래의 동료들에 비해 제법 늦게 ‘입신(入神- 9단의 별칭)’에 이르고도 기꺼워하는 느긋한 성품이기에 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즐겁고 마음이 편하다.
아니, 생각해보니 느긋한 성품은 아니다(겪어본 바로는 오히려 급하다). 그보다는 앞서 말한 대로 욕심이 많지 않은 담백한 성품이라서 그렇게 느낀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날 축하연도 지인들의 수담과 함께했다. 프로기사는 양상국 9단, 허장회 9단, 정수현 9단이 참석했다.
▲정수현 9단과 함께. 교수님에게는 축하의 인사와 함께 꽃다발을 받았다. 제13회 농심신라면배 예선은 여전사 박지은의 분전과 노장 조훈현의 투혼도 팬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화제꺼리였으나 이번 국가대표선발전 내내 화제를 몰고 다닌 ‘진짜배기’는 따로 있었다.
한때 이름에 걸맞은 활약을 펼쳐 바둑저널로부터 ‘반상의 대통령’이란 별명을 얻었던 김영삼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대한민국 정치사에 ‘3김 시대’라는 굵직한 흔적을 남긴 김영삼 대통령이 그랬듯이 프로기사 김영삼도 이름보다 ‘YS'라는 애칭으로 더 많이 불리는데 사실, 이번 대회에서 눈빛이 초롱초롱하던 입단 초기도 아닌 그를 주목한 사람은 없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물론, 그는 여전히 많은 바둑관계자와 기자, 팬들로부터 사랑받는 프로다. 그런데 그 사랑은 토너먼트 승부사가 아닌 서글서글한 호남형의 얼굴과 차분한 말솜씨로 인기 높은 바둑방송 해설자를 향한 사랑이다.
다시 말해서 YS는 단, 네 명만이 살아남는 혹독한 국가대표 선발전 토너먼트 위쪽에서 이름을 발견하기가 어려운 처지라는 얘기다. 조금도 부끄러워할 일은 아니다. 농심 신라면배 국가대표 선발전을 통과한다는 것은 국내기전 본선 4강에 오르는 것과 같다. 좀 더 단순한 논리로 말하면 국내랭킹 1~4위의 강자라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한국기원 소속 264명의 프로기사 중 89위에 랭크된 김영삼이 감히(?) 그 자리까지 올라가보겠다고 생각했다면 그거야말로 ‘발칙한 상상’ 아닐까.그런데 그 발칙한 상상이 거의 이루어질 뻔했다. 아니, 선발전 결승까지 올라섰으니까 어떤 의미에서는 이루어졌다고 말해도 좋을 듯하다.
그는 사람 좋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운이 좋았다’고 말했지만 한국의 프로바둑은 그저 ‘운이 좋아서’ 본선 8강까지 올라갈 수 있을 만큼 호락호락한 세계가 결코 아니다. 실제로 YS는 결승까지 이르는 동안 5연승을 거두었는데 그 중 3회전은 랭킹52위 박시열, 4회전은 랭킹5위 강동윤, 5회전은 랭킹12위 윤준상이었다.
기계가 아닌 인간의 승부를 랭킹으로만 예측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랭킹을 집계하는 레이팅시스템도 프로들의 승패를 입력해서 얻어내는 결과니까 랭킹에 의한 예측을 전혀 근거가 없다고 말할 수도 없다. 무슨 말이냐? 이번 선발전에서 YS는 분명, 자기가 가진 평균 이상의 힘을 발휘했다는 얘기다. 유력한 후보들을 울려버린 그 ‘발칙한 상상’에는 도대체 무엇이 웅크리고 있을까.
▲한국물가정보배 해설자로 팬들에게 듬뿍 사랑받고 있는 김영삼 9단.
▲제13회 농심신라면배 예선. 강동윤과 윤준상을 격파하며 결승까지 올랐다. 바둑에 관한 재능은 그 류가 제법 다양하다. 감각이나 수읽기 또는 전체를 살피는 대국관 같은 본질적인 재능이 있는가 하면 집중력이나 인내력 그리고 평정심 같은, 어떤 분야에서든 전문가로 성공하기 위해서라면 반드시 필요한 재능도 있다.
바둑의 프로가 된 사람이라면 정도에 차이는 있겠지만 감각이나 수읽기, 대국관 같은 본질적인 재능은 모두 갖췄다고 봐야 한다. 그건, 랭킹의 고하를 막론한 프로의 절대조건이다. 그런데 왜 어떤 프로는 타이틀을 밥 먹듯 쉽게(아마추어가 보기에는) 따내는데 어떤 프로는 평생 타이틀 근처에도 접근하지 못하는 걸까.
본질적 재능에도 수준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전혀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 차이가 승부에 끼치는 영향은 생각보다 훨씬 작다. 그렇지 않다면 세계를 제패한 이창호, 이세돌 같은 최고의 프로들이 이따금씩 아마추어나 무명에 가까운 신예들에게 패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어려워진다.
그럼, 그 이유는 뭘까. 그건 바둑이 아닌, 포괄적 승부의 재능 집중력, 인내력, 평정심 등과 관계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추어들이 보기에 오래 전 승부를 포기한 것 같았던 김영삼이 국가대표 선발전 결승까지 치고 올라갈 수 있는 근거이기도 하다.
사실, YS는 이 대회와 제법 괜찮은 인연이 있다. 그는 제1회 농심 신라면배 국가대표였다. 그리고 첫 출전에 대어를 낚았다. 지금은 흘러간 스타로 취급당하고 있지만 당시 ‘중국의 바둑의 얼굴’이라 불리던 창하오와 쌍벽을 이루었던 IQ 160의 천재 뤄시허를 시원하게 보내버린 것이다.
어쩌면 YS는 어느 순간 12년이 지난 그때를 문득, 떠올렸는지도 모르겠다. 좋은 추억은 마음을 안온하게 해주는 힘이 있다. 바둑은 그런 멘탈의 작용이 강하다.
한번쯤 마음이 파릇파릇하던 그 시절로 돌아가는 건 어떨까. 뭐, 내가 패하는 모습을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은 없을 테니 어차피 부담은 없잖아. 그런 평정한 마음가짐은 이미 갖추고 있던 본질적 재능을 다시 일깨워 극대화시켜주고 상대에게는 거대한 압박으로 작용한다.
김영삼을 상대한 강자들의 패인은 단순한 방심이 아니다. 그들이 방심한 게 아니라 김영삼이 달라진 것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결승까지 오르고 보니 진짜 해내고 싶은 욕심이 생겼고 그 순간 마음의 평정도 깨졌다. 마음이란, 승부란 또 그런 것이다.
‘지상최고의 게임(The Greatest Game Ever Played)’이라는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른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골프를 동경하는 어린 프란시스 위멧(제임스 스팩톤)이 이벤트무대에서 우드 샷을 실패하자 챔피언 해리 바돈(스티브 딜레인)이 건네주는 말.
“괜찮아, 프란시스.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도 절대 포기하지 않는 게 중요한 거란다. 살아있는 새를 손에 쥐어본 적이 있니? 너무 꽉 잡으면 새가 다치지. 날아가지 못할 정도로만 힘을 주는 거야.”
물론, 프란시스는 두 번째 우드 샷을 멋지게 성공시킨다. 지난해 준결승, 올해 결승. 계단을 오르는 마음으로 평정을 잃지 않고 그렇게 오른다면 내년쯤엔 국가대표 YS의 모습을 다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 글/ 손종수 , 사진캡션/ 박주성 ]
▲김영삼 9단을 '딸바보'로 만들어 버린 그녀들. 이름은 연수와 시우다.
▲'엄마 미진'은 든든한 후원자이자 벗이다.
▲93년 입단해 18년 만에 이룬 9단. 그의 성실한 인생에 축배를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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