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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08. 묵상글 (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 - 선택이 아니라 정해진 대로 . 등 )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아직 / 05:23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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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08.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오늘 올리신 글은 아래에 있습니다
---05:06 올린 글 -----
작은형제회 홈페이지에 아직 게재가 안되였기 2021년도 강론글을 우선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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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 성 마리아 탄생 축일-선택이 아니라 정해진 대로
http://www.ofmkorea.org/424802
김레오나르도 2021.09.08 04:10
오늘 성모 마리아의 탄생 축일에 복음은 예수님의 족보 얘기와
예수님의 탄생 경위를 들려주고 미카 예언서는 뿌리에 대한 얘기를 줍니다.
"그의 뿌리는 옛날로, 아득한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런데 성모님의 탄생 축일에 성모님의 탄생에 대한 얘기는 들려주지 않고,
예수님의 탄생 얘기를 들려주는 것이 이상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어쩌면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왜냐면 성모님의 축일에 정작 성모님 탄생 얘기는 들려주지 않는 것이
성모님의 탄생에 관한 기록이 없기 때문이고 그래서
성모닌 탄생 얘기 대신 예수님의 탄생 얘기를 들려준 것이기도 하지만
성모님의 탄생은 아들의 탄생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기에 그런 거지요.
이렇게 얘기하면 요즘 여성주의자들 중에 어떤 분은 여자가
애를 낳기 위한 존재냐고, 그것이 여자의 존재 의미일 뿐이냐고
반박할 것이고, 저도 엄마가 돼야지만 존재 의미가 있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전례에서 마리아가 예수님의 어머니가 아니었다면
이 축일을 지내지도 않고, 더더욱 거창하게 축일로 지내지는 않을 것입니다.
요즘은 여성주의자들이 아니더라도 여성에게 선택권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엄마가 될지, 엄마가 아니라 그저 한 여성으로서 경력 여성이 될지.
저도 선택의 권한이 여성에게 있고,
그래서 한 아이의 엄마가 되기보다는 한 여성으로서 멋지게 살고,
한 아이보다는 많은 이를 위해 의미 있는 삶을 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엄마가 되기를 선택했다면 요즘 아이를 낳고 쓰레기 통에 버리거나
낳고는 학대하는 엄마가 아니라 훌륭한 엄마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인간적인 차원에서는 진보적인 생각이고 또 마땅한 생각일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적인 차원에서는 그리고 성모 마리아의 경우는
인간에게 그리고 마리아게 엄마의 선택권이 있지 않고 하느님께 있으며
그래서 오늘 미카서는 그 뿌리가 아주 오래 전의 옛날로 올라간다고 합니다.
마리아가 엄마가 되는 것은 선택권이 마리아에게 있지 않고,
하느님에 의해 오래 전 그러니까 천지창조 이전에 정해진 거라는 얘기이고,
잘 아시듯 성모 마리아께 대한 모든 교리는 다 여기에 바탕을 두고 있지요.
이에 성모님의 몫은 '예스', 곧 순종입니다.
정해진 것을 거부하지 않고 '예스'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이 '예스'는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전달을 받고 난 뒤
"Fiat mihi voluntas Tua! 당신 뜻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할 때 뿐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것이고,
아니, 태어나기 전에 이미 '예스' 하도록 정해진 것입니다.
당신에게서 아들 예수가 태어날 때 "예스"한 것이 아니라
당신이 태어날 때 이미 "예스"한 거라는 얘기입니다.
그러므로 선택이 아니라 정해진 것이 성소이고,
선택이 아니라 정해진 대로 살겠다는 것이 성소를 사는 것이라고
믿는 것이 우리의 믿음임을 이 축일에 다시 생각하는 우리입니다.
= 05:23 올림 =======================
250908.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9.08 05:07
- 지금 우리를 통해
발칙한 말로 오늘 저는 강론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하느님은 마리아가 동정녀기를 바라실지 모르지만
저는 마리아가 어머니시기를 바란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축일의 이름도 동정녀 마리아의 탄생 축일이 아니라
복되신 성모 마리아의 탄생 축일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동정녀 마리아의 탄생 축일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은 아니고,
다만 제겐 어머니 마리아의 탄생이 더 의미 있게 다가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탄생도 2천 년 전 이스라엘에서의 탄생이 아니라
지금 저에게서 또 우리에게서 주님의 어머니로 탄생하시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그분을 모범으로 삼는 우리도 주님의 어머니로 탄생하기 위함입니다.
물론 우리가 주님의 어머니가 되는 것은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입니다.
마리아께서 실제로 주님의 어머니가 되시어 수난을 당하셨다면
우리는 영적으로라도 주님의 어머니가 되자는 것일 뿐입니다.
어떻게 되느냐?
그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가 클라라 자매들에게 얘기하듯 성령의 정배가 되는 것이고,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에 모시고 간직함으로써입니다.
이것은 제가 지어낸 얘기가 아니라
잘 아시다시피 주님께서 친히 가르쳐주신 것 그대로입니다.
당신을 찾아오신 어머니 마리아를 빗대어 주님께선 우리도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천하면 어머니가 된다고 하셨잖습니까?
프란치스코는 여기에 덧붙입니다.
우리가 착한 행실로 그분을 세상에 낳을 때 어머니가 됩니다.
아무튼 우리가 주님의 어머니가 되는 것은 지금 우리를 통해
주님의 어머니가 탄생하는 것임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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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08.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축하합니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을!”
“거룩하신 동정 마리아님, 복되니시나이다.
정의의 태양, 그리스도 우리 하느님을 낳으셨으니,
온갖 찬미를 마땅히 받으시리.”
오늘은 참 아름답고 거룩한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입니다. 방금 복음에 앞서 들은 복음 환호송도 반갑고 감사한 느낌 가득 합니다. 우선 오늘 축일의 유래에 대해 간략히 나눕니다.
‘마리아의 탄생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나 성서의 증언은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마리아가 잉태되는 순간부터 죄에서 완전히 자유로웠으며, 평생동안 죄에서 자유로웠다고 믿습니다. 동방의 콘스탄티노플(현재의 이스탄불)과 서방의 로마 교회들은 6세기와 7세기부터 마리아의 탄생을 기념해 왔습니다.
이 전례는 6세기 예루살렘에 있는 성 안나 대성당의 봉헌에서 유래했고, 그 전에는 5세기 ‘목자의 들판’으로 알려진 곳에 마리아를 기리는 대성당이 있었고, 이곳은 요아킴과 안나의 집으로 추정됩니다. 7세기 동방에서 온 수도자들은 이 축일을 로마로 가져왔고, 그곳에서 서방으로 퍼져 갑니다.
13세기 장엄한 8부 축제로 격상되었으나, 1955년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오늘의 축일이라는 등급을 갖게 됩니다. 마리아의 무죄 잉태를 기념하는 12월8일 축일은 나중에 마리아 탄생 9개월 전으로 정해집니다. 동방교회에서는 12대 전례중 하나로 기념하며 명칭은 “우리의 고귀하신 여왕이시며 하느님을 낳으신 분이시며 영원 동정이신 마리아의 탄생”으로 불립니다.’
얼마전 수도원 성전앞 정원에 옮긴 바늬 성모님상으로 인해 에덴동산은 성모동산으로 변한 듯 느낌이 각별합니다. 제 집무실에서 한눈에 들어오는 마리아 성모님을 볼 때 마다 전구하게 됩니다. 또 엊그제는 마리아 성모님을 수호자로 모신 제가 각별히 아끼는 청담성모치과의원 탄생 30주년을 맞이하여 감사기념미사도 봉헌했습니다.
마리아 성모님의 생신날! 오늘 따라 그립게 떠오르는 20년전, 2005년 6월에 세상을 떠난,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닮은 제 어머니 신 마리아입니다. 옛 우리 어머니들은 모두가 또 하나의 성모님이셨습니다. 어머니 돌아가시던 몇 개월 전 어머님의 선종을 예견한 듯 써놨던 <어머니를 그리며>란 글이 생각납니다.
“남들은 내가 효자일거라 생각하는데
솔직히 말해 난 효자가 못된다
어머니를 닮아 붙임성도 없고 무뚝뚝한 편이다
이건 어머니도 인정하신 거다
어머니는 전형적인 조선 여자 같은 분이셨다
애교나 아양은 거의 없었지만
강인한 의지에 아주 참을성이 많고 지혜로운 분이셨다
심한 밭일에 몸 많이 피곤하여
밤에 끙끙 앓으셔도
아프다는 내색 하나 않으셨다
아버지 원망하는 말 하나 들은 적 없고
큰소리 내셔서
다투거나 화내신 적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매번 우등상을 타와도
덤덤하실뿐 칭찬 한 번 하신 적도 없다
돼지 키워 자식들 학비도 대셨고
장날마다 계란 모아 팔아 꼭 찐빵도 사다 주셨다
사실 오십년대 육십년대는 모두 가난했지
그러나 마음들만은 참 따뜻했고 부자였고 행복했다
어려워도 내 전과서며 학용품은
꼭꼭 잘도 사 주셨던 어머니
초등학교 시절
무척이나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던 나
일년에도 아마 열 번은 크레용을 샀을 거다
그 흔한 종교나 신앙없이도 한결같이 사셨던 어머니
삶자체가 기도였고 신앙이셨다
이리저리 감정에 연약하게 흔들렸던 분이셨다면
그 험한 세상 세월에
혼자 다섯 남매 어떻게 키웠을 것인가
‘외롭다’거니 ‘그립다’거니 감정 표현 없이도
흔들림 없이 꿋꿋이 가정을 지켜오신 내 어머니
내 수도원 들어 올 때에도 극구 만류하셨다
‘왜 이제 살만하게 됐는데 또 고생길에 접어드느냐’고
그러다 하루 지나 내 방에 들어오셔서
‘얘, 수철아, 네가 좋아하면 수도원 들어가라’고 허락해 주셨다
사실 어머니는 은연중
막내인 나와 살고 싶어 하셨다
지금은 극도로 쇠약해지셔서 온종일 방에 누워계신 어머니
정신은 여전히 맑으시고 마음도 고요하시다
그냥 계시기만 해도 좋은 어머니
‘신 마리아’
오래오래 사셨으면 좋겠다
나도 이제 나이 들어 철이 났나 보다”<2005.3. >
우연은 없습니다. 새삼 이처럼 하느님은 언제 어디서나 당신이 사랑하시는 작고 겸손한 이들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펼치심을 깨닫습니다. 오늘 마태복음의 예수님의 긴 족보를 통해 하느님의 무한한 인내와 겸손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하느님은 이런저런 작고 가난한 보잘 것 없는 이들 하나도 버림없이 구원섭리의 역사에 편입하여 한몫을 담당하게 하십니다.
여기서 주목할 바, 구약의 네 여인, 다말, 라합, 룻, 바쎄바입니다. 모두가 이름없는 비천하고 미약한 이방인 출신들입니다. 참으로 눈밝으시고 귀밝으신 하느님은 언제 어디에 있든 당신의 사람들을 찾아 내시어 당신의 도구로 삼으시니 그 섬세하고 자비로움이 놀랍고 감사합니다.
하느님은 다윗의 가계, 메시아의 가계가 바야흐로 끊어지려는 순간, 불가사의한 방법으로 가계를 이어갑니다. 마침내 불가사의의 극치는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는 대목이며, 예수님의 족보는 여기서 일단 끝납니다. 이어 주님의 천사는 다윗의 자손 요셉의 꿈중에 나타나 마리아의 잉태의 신비를 확인시킵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구하실 것이다.”
‘구원자’이자 우리와 늘 함께 하시는 하느님 ‘임마누엘’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태어나시니 그대로 하느님의 겸손과 가난, 사랑의 절정입니다. 마리아를 택하신 하느님의 놀라운 안목이요 이런 마리아의 탄생을 경축함은 그대로 하느님의 위업에 대한 찬미와 감사의 표현입니다. 미가 예언서의 예언대로 베들레헴 같은 작고 겸손한 당신 일꾼들을 통해 오늘도 이제와 영원히 하느님의 구원섭리가 펼쳐짐을 봅니다.
“너 에프라타의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 부족들 가운데에서 보잘 것 없었지만,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
예수님의 족보는 영원한 현재 진행형으로 지금도 교회를 통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의 우리 모두 각자 제 삶의 자리에서 제 몫을 다함으로 살아 있는 예수님 족보의 완성에 좋은 도움이 되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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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08.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축하합니다. 오늘은 ‘성모 탄생 대축일’입니다. 동시에, <몬떼 올리베또 성 마리아 대수도원>과 연합회의 주보성인 축일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더욱 기쁜 날입니다. 이 기쁜 날, 아기 성모님과 함께 벌어진 은총과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찰찰 넘쳐나길 빕니다.
사실, “성모성탄 대축일”인 오늘로부터 10달을 거슬러 올라가면, 12월 8일은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대축일”이 됩니다. 그러니, 성모님의 탄생은 ‘원죄 없으신 잉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은 ‘성모 마리아를 원죄 없는 잉태로 탄생시킴으로써 성자의 강생에 합당한 준비를 갖춘 하느님의 구원사업을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곧 구원 역사의 중요한 국면이 시작됨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처럼, 마리아의 탄생은 우리 구원의 여명으로 이해됩니다. 곧 구세주께서 준비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리아의 탄생으로 구원이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이토록 ‘성자의 강생에 합당한 준비’를 갖추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무한하신 사랑으로 성모님을 원죄로부터 보호받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이는 비록 인간이 죄의 굴레에 있다 하더라도, 결코 하느님의 축복의 굴레를 벗어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우리는 ‘죄보다 먼저 축복을 받은 존재’입니다. ‘죄보다 먼저 축복이 왔다’는 이 사실을 우리는 깊이 기억해야 합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축복받은 존재라는 이 사실을 말입니다.
그것은 바로 성모님의 탄생으로 준비 되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성모님께서는 원죄조차 없는 티 없이 아름답고 거룩한 대성전이셨습니다. 구세주, 하느님의 아들을 품으신 까닭입니다. 그러기에, 오늘은 참으로 기쁨과 찬미와 감사의 날입니다.
따라서 ‘성모님의 탄생’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은총과 복을 주시는 분”이시오, 성모님께서는 “은총과 복을 가득히 받으신 분”(루가 1,28 참조)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성 안셀모는 성모님을 “넘치는 은총으로 충만하신 분”, “복되시고도 지극히 복되신 분”이라고 찬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은총과 복이 모든 피조물에게까지 이르게 되었음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당신이 받으신 축복으로 말미암아 모든 피조물은 창조주로부터 축복을 받고, 창조주께서는 그들로부터 찬미를 받으신다. ~모든 피조물이 당신의 충만함의 흘러넘침을 입어 새싹이 트듯 되살아났다.”
이는 성모님께서 받은 은총과 축복이 성모님으로 말미암아 온 피조물에게 흘러들었음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성모님께서 받은 은총과 축복으로 말미암아 당신의 아드님과 형제가 되며 아버지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한 몸’을 이루며, 그분 안에 수렴(accapatulatio)됩니다. 이토록, 우리는 ‘은총에 은총을, 축복에 축복을 입게 되었습니다.’(요한 1,16 참조). 그리하여 성모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어머니가 되십니다.
흔히들, “부모의 기쁨은 자녀에게 있다”고 합니다. 성모님의 기쁨도 아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있습니다. 구세주 아들을 탄생시키기 위해 원죄 없이 잉태되셨으며, 오늘 탄생하셨습니다. 그렇게 아들로 말미암아 구원의 면류관을 쓰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어머니의 그 은총과 축복의 충만함을 입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특별히 축복에 축복을 받은 존재라는 사실, 많은 은총에 은총을 입은 존재라는 사실을 깊이 기억하고 찬미와 감사를 드립니다.
다시 한 번, 이 기쁜 날, 아기 성모님과 함께 벌어진 은총과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찰찰 넘쳐나길 빕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마태 1,20)
주님,
믿음으로 침묵할 줄을 알게 하소서.
행동으로 사랑할 줄을 알게 하소서.
타인의 처지를 자비로 헤아리고, 희망이 보이지 않아도 희망하게 하소서.
선하신 당신의 뜻과 당신의 의로움을 따르며,
영으로 인도되는 다 헤아려지지 않은 신비를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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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08.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지랖이 넓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지랖은 원래 옷의 앞자락을 뜻하는 말로, 겉옷의 앞자락이 넓으면 안에 있는 옷을 덮어 가리는 것처럼, 남의 일에 참견하는 모습에 비유되어 사용되었습니다. 좋게 말하면 남의 일에 도움을 주는 것이고, 부정적으로 말하면 참견을 많이 한다는 의미입니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사람’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좋게 말하면 남의 일에 끼어들지 않는다는 것이고 부정적으로 말하면 냉정하다는 의미입니다. 캐나다에서 살고 있는 어릴 적 친구에게서 문자가 왔습니다. 딸이 뉴욕으로 가서 일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제가 뉴욕에서 살았으니 딸의 직장 근처에 좋은 집을 알 수 있냐고 물었습니다. 이왕이면 집주인이 성당 다니는 교우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제가 뉴욕을 떠난 지 2년가량 되었고, 신문사에 있었기에 아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후임 신부님께 이야기했더니 적합한 곳을 찾아보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오지랖이 넓은 편은 아닌데 남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입니다. 덕분에 강의도 많이 했고, 여행도 가게 되었고, 새로운 사람도 알게 되었습니다.
문득 ‘하느님은 어떠신 분이신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느님은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오는 분은 아닙니다. 어찌 보면 오지랖이 넓으신 분입니다. 특히 사람에 대해서는 엄청 오지랖이 넓으신 분입니다. 성서의 이야기는 하느님의 참견과 간섭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판관을 보내서 이스라엘 백성을 외적의 침략에서 구해 주셨습니다. 예언자를 보내서 이스라엘 백성이 올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마침내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기쁜 소식을 알려 주셨습니다. 예수님도 어찌 보면 오지랖이 많으십니다.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이 측은하다고 하시며 오천 명이나 먹이셨습니다.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하셨고, 듣지 못하는 사람은 듣게 하셨습니다. 나병환자는 깨끗하게 하셨고, 중풍 병자는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셨습니다. “수고하고 힘든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나의 멍에는 편하고, 나의 짐은 가볍다.” 이 정도면 오지랖의 끝판왕이십니다. 아마 예수님께서 결혼하셨으면 아내에게 잔소리를 들었을 것 같습니다.
오늘은 성모님의 탄생 축일입니다. 요한복음은 혼인 잔치의 이야기에서 성모님을 이야기합니다. 성모님은 혼인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알았습니다. 성모님은 혼인 잔치의 주인도 아니셨고, 손님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성모님은 아들 예수님께 그 사실을 알리고 도움을 청했습니다. 아들 예수님은 ‘아직 때가 아닙니다.’라고 말하면서도 성모님의 청을 들어주셨습니다.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웠고, 그 물은 맛있는 포도주로 변했습니다. 시인 바이런은 이 장면을 아름다운 시로 표현했습니다. “물이 주인을 만나니 얼굴이 붉어지도다.” 성모님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이렇게 말하셨습니다.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가슴 깊이 새겼습니다. 그리고 사도들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멕시코의 과달루페에 발현하였고, 프랑스의 루르드에 발현하였고, 포르투갈의 파티마에 발현하였습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의 부탁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으며,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남의 일에 무관심한 것이 현대인의 미덕처럼 여겨지는 시대지만, 마리아처럼, 예수님처럼 ‘사랑의 오지랖’을 품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가족, 내 이웃, 나아가 이 시대를 향해 “이들이 포도주가 없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그 눈, 그 마음, 그 용기를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도 결국 하느님처럼, 성모님처럼, ‘사랑 때문에 참견하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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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08.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긍정적인 힘(권력)의 역동성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9월 7일 일요일- 서른여섯 번째 주간 (호명환 번역): 지배에서 친교로
권력은 지배보다 더한 그 무엇으로 재정의될 필요가 있습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매일 묵상은 그리스도교 관상 전통에 뿌리를 두고 리처드 로어와 CAC 운영진, 그리고 객원 교수들의 묵상 글을 제공해 주어 우리의 영적 수양을 심화시켜 주고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동정(compassion)을 구현하도록 도와줍니다.
리처드 로어는 우리가 하느님께서 주신 권력을 선과 악을 위해 사용했던 방식들에 대해 탐구합니다:
역사 전반에 걸쳐 기록된 수많은 권력 남용에도 불구하고, 권력 자체가 본질적으로 나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성령은 힘을 뜻하는 디나미스(dynamis)로 묘사됩니다(사도 1038; 1코린 2,4-5).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에 "성령께서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 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내면의 원천이신 성령과 지속적인 교감이 이루어지면 우리는 진실하고 겸손하며 자신감 있는 힘(권력)의 살아있는 상징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다른 이들에 위에 행사하는 "힘"(권력)을 추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내면의 힘"(권력)을 발견하였고, 또 그것이 우리는 물론이고 모든 생명체들이 공유하는 존엄성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확고하게 기반을 둔 한 인격체가 된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궁극적으로 바로 이것입니다.
바오로는 로마서 8,16에서 하느님의 전략에 대해 잘 설명합니다: "성령께서 몸소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우리의 영에게 증언해 줍니다." 오순절 사건에서 극적으로 드러난 상황에서처럼 우리 모두에게는 하느님 쪽에서 시작되고 부여된 공동의 인식과 공유된 권력이 있습니다. 이 권력의 기원은 하느님이지 인간이 스스로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힘은 선물입니다. 그리고 이 권력은 인간의 야망에 의해서가 이나라 성령의 내재와 활동을 통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간극을 메우기 위한 하느님의 계획은 우리 내면 깊숙한 곳에 하느님의 한 위격인 성령을 심어주는 것입니다(요한 14,16-17; 로마 8,9; 11; 1코린 3,16 참조). 그러나 많은 사람이 말했듯이, 성령은 여전히 삼위일체 가운데 "잃어버린" 혹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위격이십니다. 달리 말해 성령은 여전히 많은 이에게 가장 덜 이해되고, 가장 적게 경험되는 위격이시라는 말입니다. 사실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성부와 성자는 상대적으로 명확한 이미지와 역할을 지니고 있지만, 성령은 비물질적이고 추상적인 존재로 여겨져, 많은 믿는 이가 그 존재를 체험하거나 인식하기를 어려워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우리의 진정한 힘, 즉 우리 안에 내재하시는 성령과 접촉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다른 모든 잘못된 곳에서 힘을 추구하게 될 것입니다.
반복해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권력(힘)은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권력은 지배 이상의 그 무엇으로 재정의되어야 합니다. 성령이 권력(힘)이라면, 권력은 야망이나 탐욕의 결과가 아니라 선하고, 사랑스럽고, 우리에게 힘을 부여해 주는 그 무이야 합니다. 사실, 진정으로 영적이고 온전하며 거룩한 사람은 매우 강력한 사람입니다. 권력의 선한 의미를 명확히 밝히지 못하면, 우리는 악한 권력에 만족하게 되거나, 우리 자신의 강력한 소명을 주장하기를 회피할 것입니다. 이 강력한 소명이란 자신의 존재 목적과 세상에 대한 선한 기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권력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우리가 자신의 내면의 힘과 소명을 받아들이는 것을 두려워하게 만들며, 결국 자신을 축소시키는 삶을 살게 만드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이렇게 썼습니다. "사랑이 없는 권력은 무모하고 난폭하며, 권력(힘)이 없는 사랑은 감상적이고 무기력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필요합니다. 최고의 권력(힘)은 정의의 요청을 실현시키는 사랑입니다." [1]
킹는 이어서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지금까지 저는 삶을 살아오면서 문제를 해결하고 답을 찾으려는 사고의 과정에 집중했었지만, 이제는 무언가를 찾는 대신 고요와 침묵을 수양하는 쪽으로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이 관상의 공간 안에서, 가장 예상치 않은 순간에 강력한 통찰력이 떠오릅니다. 이 통찰력은 제 노력의 결과나 정신적 계산의 결과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을 통해 저에게 직접적으로 전달되는 선물입니다. 우리의 지성은 총명하고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지만, 밤하늘을올려다보거나 나비를 바라보는 순간에는, 우리의 정신은 고요하고 온화한 하느님의 인도하심에 자리를 내어 드리고 뒷 자리를 차지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정신과 지성만으로는 삶의 깊은 의미나 하느님의 진리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니다.
—David M.
References
[1] Martin Luther King, Jr., Where Do We Go from Here: Chaos or Community? (Harper and Row, 1967), 37.
[2] King, Where Do We Go, 66. Note: Minor edits made to incorporate gender-inclusive language.
Adapted from Richard Rohr, Things Hidden: Scripture as Spirituality, rev. ed. (Franciscan Media, 2022), 102–104.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cal gao, untitled (detail), 2021,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나"에서 "우리"로 - 움직여 간 우리는 서로의 선물을 존중해 주고, 존경심을 가지고 우리의 기술을 나누며, 홀로와는 비교도 될 수 없는 더 커다란 전체를 만들어 앞으로 나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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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08.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하느님의 어머니 성모님과 우리 존재 안에 주어진 하느님의 모성(母性)!
전에 언급해 드린 적이 있습니다만, 자녀가 태어날 때 '어머니'라는 존재도 탄생합니다. 성경 어디에서 마리아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완전한 하느님이시자 완전한 인간이신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는 나옵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어머니이자 인간의 어머니가 탄생합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는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Θεοτόκος - theotokos)라고 부릅니다. 이 호칭은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4세기 말 시리아에서 태어나 안티오키아에서 활동한 네스토리우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나중에 콘스탄티노플 대주교가 되는데, 예수님에게는 두 개의 본성, 즉 인성과 신성이 나뉘어져 있다는 주장을 하면서 431년 에페소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단죄를 받게 됩니다. 예수님의 두 가지 본성을 믿는 종교를 네스토리우스교라고 하는데, 우리에게는 경교라고 알려진 교회가 바로 이 교회입니다.
에페소 공의회에서 확언했던 것은 예수님은 완전한 하느님이자 완전한 인간으로서 하나의 본성을 지니고 계시다는 것이었고, 그러므로 공의회는 마리아에게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칭호를 선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451년 칼체돈 공의회에서도 이를 다시 확언해 주었습니다.
성모님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칭호가 지니는 의미심장함은 모든 존재의 어머니이신 하느님과 우리 인간과의 관계 때문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모상(模像)으로 우리를 창조해 주셨기에 우리에게는 하느님성이 부여되어 있는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모성(母性)이 부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모성을 많이 강조했던 신비주의자 중에 대표적인 사람으로 노리치의 율리안나 성녀가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 2023년 5월 12일에 율리안나 성녀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계시 650주년을 맞이하여 영국 노리치 대성당에서 가톨릭과 성공회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이 영국 신비주의자가 그리스도교 전통에 끼친 심오한 의미는 수세기에 걸쳐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참으로 큽니다.... 실로 그녀의 모성적 영향력,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겸손, 심오한 신학적 통찰력은 하느님 사랑의 섭리에 대한 믿음과 궁핍한 형제자매에 대한 아낌없는 봉사로 표현되는 삶의 성덕이 그리스도인 제자로서의 삶은 물론이고 정의롭고 형제애적인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영원한 진리임을 시의적절하게 상기시켜 줍니다.... 타인을 위해 자신의 편의를 기꺼이 희생하려는 이러한 마음가짐은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나라에서 많은 사람들이 느끼는 고립과 외로움이라는 고질적인 문제에 대응하는 데 특별히 필요합니다.... 그녀가 남긴 [거룩한 사랑의 계시]를 통해 우리는 율리안나가 하느님의 은총을 통해 우리 가운데 악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는 가르침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특히 전쟁과 불의, 생태적 재앙, 영적 빈곤이라는 시급한 도전에 직면한 모든 이가 이 영원한 지혜의 말씀으로 위로와 힘을 얻기를 기도합니다..."
실제로 노리치의 율리안나 성녀는 영적인 권고를 얻기 위해 자기에게 찾아오는 수많은 사람에게 자신의 시간과 사랑을 나누어 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모님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칭호에는 위기의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의 우리에게 던져 주는 매우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성을 잘 발휘하여 우리 함께 우리가 처해 있는 이 위기들을 이겨내기 위해 힘을 모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존재 깊은 곳에는 이미 어떠한 어두움도 이겨낼 하느님의 모성이 충분히 들어 있다는 확신과 임마누엘 하느님이 우리와 언제나 함께 계시다는 확신 안에서 말입니다.
성모님의 탄생 축일인 오늘 우리는 특별히 우리 내면의 하느님 모성을 힘껏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느님의 어머니" 성모님께 정성어린 전구를 청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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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08.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마태 1,18)
예수님의 불멸성은 인간으로 태어나신 뒤에도 변함없다
왜 마태오 복음사가는 복음서 처음에는 ‘나심’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여기서는 ‘탄생’을 이야기할까요? 첫머리에서는 ‘나심의 책’(마태 1,1)이라고 하고, 여기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마태 1,18)고 하니 말입니다.
그러면 탄생’과 ‘나심’의 차이는 무엇입니까?...‘탄생’과 남은 다룹니다. ‘남’ 또는 ‘생겨남’은 본디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이고, ‘탄생’은 죄를 지어 죽음을 선고받은 사람에게서 사람이 이어 지는 것입니다. 지금도 ‘남’은 불멸성과 죄없음의 의미를 담고 있는 반면 ‘태어남’은 정념과 죄에 매인 어떤 것을 암시합니다. 영원히 ‘나신’ 분인 주님은 죄를 지을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분의 태어나심은 불멸의 존재인 그분의 영원한 ‘나심’을 훼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태어나심으로써, 영속하지 않는 것을 취하셨습니다.
이는 그분께서 죄의 지배 아래 놓이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분은 태초의 아담의 모습을 한결같이 지니고 계셨으므로 타락이나 죄의 가능성이 조금도 스며들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경우, ‘나심’은 무존재에서 존재가 되는 과정을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나심’은 ‘하느님의 모습’으로 계시다가 “종의 모습" (필리 2,6)을 취하신 ‘옮아감’(바뀜, 길)이라고 하는 것이 맞습니다. 따라서 그분의 ‘태어나심’은 우리의 태어남과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보다 뛰어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태어나듯이 “여인에게서"(갈라 4,4) 태어나셨지만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요한 1,13) 성령으로 말미암아 태어나셨으므로 우리의 태어남보다 뛰어난 태어남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일어날 새로운 태어남에 대한 암시, 말하자면 예고가 담겨 있습니다.
-오리게네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셋째 오솔길】
돌파하여 자기 하느님을 낳기
설교 22 우리의 신성과 하느님의 신성
하느님이 된다는 것은 낳는다는 뜻이다
내 계명은 이렇습니다. 내가 그대들을 사랑한 것처럼 그대들도 서로 사랑하시오(요한 15,12).
신화야말로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영성신학에서 누차 되풀이되고 부연되는 흔한 주제다. 예컨대, 그는 또 이렇게 말한다.
혼은 하느님만을 누리고 하느님만을 기뻐할 정도로 하느님 안에 있는 자신을 몹시 사랑하고, 그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고 하느님과 하나가 됩니다. 복을 받고 하느님과 하나가 되었는데, 그 외에 사람이 무엇을 더 바랄 것이며, 무엇을 더 알려고 하겠습니까?
그는말한다.
하느님은 의로운 사람에게 신적인 존재를 주시고, 자신에게 붙여진 것과 똑같은 이름으로 그 사람을 부르십니다. 그 사람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엑카르트는 사람은 사랑에 의해 자기가 사랑하는 그 대상이 된다고 한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하느님을 사랑하면, 하느님이 된다고 말해도 되지 않을까요? 이것은 이단 사설처럼 들립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둘이 아니라 하나와 일치만이 있습니다. 나는 나 자신 속에 있을 때보다는 사랑 안에 있을 때 더더욱 하느님이 됩니다. 예언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신들이다. 너희는 모두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자녀들이다. 사랑 안에서 하느님이 될 수 있어야 한다고 하는 이 말은 엄청난 소리로 들리지만, 그것은 영원한 진리 속에서 보면 사실입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것을 입증해 보이셨습니다.(464)
✝️ 월요일 거룩한 독서(렉시오 디비나)의 날✝️
루카 12,2-12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을 선포하여라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에서 한 말을 사람들이 모두 밝은 데에서 들을 것이다.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속삭인 말은 지붕 위에서 선포될 것이다.
나의 벗인 너희에게 말한다.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누구를 두려워해야 할지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여라.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바로 그분을 두려워하여라.
참새 다섯 마리가 두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하느님께서 잊지 않으신다.
더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는 자는,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모두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너희는 회당이나 관청이나 관아에 끌려갈 때, 어떻게 답변할까, 무엇으로 답변할까, 또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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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08.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사람에게 반드시 있어야 하는 감정은 희망입니다. 독일 속담에 “희망은 가장 마지막에 죽는다”라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죽음 전까지는 희망이 있다는 것이며, 희망이 없음은 죽음밖에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라틴어 속담에도 “내가 숨을 쉬는 한 희망은 있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고생 끝에 낙이 온다’라는 뜻의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모든 어려움에도 삶을 거뜬하게 살아낼 수 있다는 믿음이 희망인 것입니다.
여기서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기대와 희망을 같은 의미로 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대가 무너지면 희망도 사라지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자 하는 기대, 좋은 직장에 취업하고자 하는 기대, 그 기대가 깨졌을 때 희망도 없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하지만 기대와 희망은 다릅니다. 기대가 무너져도 더 잘될 것이라는 희망을 충분히 품을 수가 있고, 좋은 미래가 내게 열릴 것이라는 희망 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희망은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현재 상황이 좋지 않더라도 싸울 수 있게 합니다. 자기 기대에 부합하지 않더라도, 새로운 희망으로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게 합니다. 그리고 이런 희망은 나로부터 시작해서 우리 공동체 안에서도 솟아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희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셨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족보가 나옵니다. 마태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 소개하지요.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모든 민족이 너를 통해 복을 받을 것이다.”(창세 12,3)의 성취자라는 뜻입니다. 또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하느님께서 다윗에게 약속하신 영원한 왕국(2사무 7,12-16)을 이루시는 메시아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특히 천사가 요셉에게 “아들의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라고 명령하지요. 예수는 ‘야훼께서 구원하신다’라는 뜻에서 온 이름으로,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희망인 주님이십니다. 따라서 철저히 주님의 말씀을 따라야 하고, 주님과 함께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런 예수님을 잉태한 분이 바로 성모님이십니다. 따라서 성모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오늘은 우리를 구원할 희망의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시작이 됩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 잉태부터 시작해서 전 생애에 보여 주셨던 믿음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성모님의 공경하고 그분의 삶을 따르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런 좋은 모범을 보여 주신 분의 탄생일인 오늘을 어떻게 그냥 넘어갈 수 있겠습니까? 축하의 마음을 가지면서, 동시에 성모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우리는 과거의 실수로부터 배우지만, 그 실수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쇼펜하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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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08.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박윤식 [big-llight]
■ 하느님 구원 사업에 참여하신 원죄 없으신 성모님 /
교회는 예루살렘의 마리아 성당 봉헌일인 9월 8일에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일을 지냈다.
사실 성경에 동정 마리아의 탄생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초대 교회 때부터 성모 신심이 계속 되면서 동방교회에서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을 지내기 시작하였으며,
성모님께서 언제 태어나셨는지 불분명한 상황이었기에 마리아 성당 봉헌을 성모님의 탄생일로 정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날을 기준으로 성모님의 탄생 축일을 정하였다.
성모님께서 9월 8일에 태어나신 것으로 볼 때 여기에 수태 기간인 9개월을 감안하여
12월 8일이 성모님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신 날이다.
우리는 성모님의 이 원죄 없이 잉태와 탄생의 ‘믿을 교리’를 믿는 신앙인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요셉은 이 일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그때 주님의 천사가 꿈에 나타났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라는
이사야의 예언이 예수님께 이르러 성취되었음을 믿는 우리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예수님 족보가 하느님의 구원 역사의 흔적을 보여준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당신 구원 계획을 실현하시려고 부족한 우리 인간을 선택하셨고,
당신의 아드님을 사람이 되게 하셨다.
이렇게 당신 계획이 이루어지는 과정에 마리아의 탄생은 큰 몫을 차지하였다.
초대 교회 신자들은 성모 마리아의 탄생을 경축하였다.
이는 예수님의 강생의 은총을 주시기 전에 하느님께서는 원죄 없으신 성모님의 잉태를 준비하시고
성모님의 탄생으로 죄의 저주에서 인간을 구원하기 시작하셨기에,
우리가 기쁘게 성모님의 생일을 축하하는 이유이다.
성모님은 흠 없는 처녀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낳은 동정녀이시다.
은총이 가득하신 성모님을 모시는 우리는 행복한 이들이다.
이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풍성한 은총을 나누어 주시기에.
이렇게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
어쩌면 예수님 탄생과 함께 ‘이미’ 구원이 왔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구원 역사는 이어진다.
아브라함에서부터 예수님까지 족보가 끊어질 위기가 여럿 있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함께하셨기에 예수님 가계가 이어질 수 있었다.
실제로 예수님의 탄생은 하느님의 섭리와 보호로 가능했다.
그분의 탄생에 마리아는 조연이었다.
주연이신 예수님은 조연으로 말미암아 더욱 빛난다.
우리도 봉사와 희생으로 ‘묵묵히 실천하는 조연’들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탄생으로 하느님 구원 사업에 참여하신 평생 동정이신 성모님의 탄생을 기리는 것은
삼위일체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에게는 누가 뭐래도 당연하다.
그리하여 초대 교회 때부터 성모 신심이 계속 되면서 동방 교회에서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을 지내기 시작하였으며,
예루살렘에 세워진 ‘마리아 성당’ 봉헌일인 그날을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로 교회의 전통에 따라
믿을 교리로 정해 기념하고 있다.
오늘은 성모님의 원죄 없이 탄생된 축일이다.
당신께서 스스로 주님의 종이심을 자처하신 성모 신심을 닮아,
우리도 주님을 믿으며 살아가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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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08.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박윤식 [big-llight]
■ 안식일에도 사랑 실천의 그 일은 해야만 / 연중 제23주간 월요일(루카 6,6-11)
우리는 종종 율법 학자, 바리사이들의 바늘 하나 꽂을 자리 없는 속 좁고 옹졸함을 본다.
그들은 안식일 규정이라는 율법으로 마치 돌같이 굳어만 있었다.
어딜 가나 그들은 그것을 하나같이 들먹이며 예수님께 트집 잡는다.
회당에서 그들은 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이를 치유하시는 모습을 지켜본다.
그들이야말로 육신은 멀쩡하지만, 영적으로 손이 오그라든 이들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면 너희들처럼 남 해치는 일을 하는 게 합당하냐?
목숨구하는 게 합당하냐?
아니면 죽이는 게 합당하냐?”
그리고 모두를 둘러보시며 그 병자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자 그 손이 다시 성해졌다.
그들은 골이 잔뜩 나, 예수님을 어떻게 할까 의논하였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사람을 살리는 것이 좋은지, 죽이는 것이 좋은지를 아예 대놓고 물어보신다.
안식일 법의 정신과 그 목적을 물어보신 거다.
그들은 이미 법의 정신을 잃은 이들이었기에 대답을 하지 못한다.
그런 이들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손이 오그라든 이를 앞에 세우시고는 보란 듯이 “손을 뻗어라.”하고 이르셨다.
법에 속박된 이를 해방시키려는 거다.
예수님께서 율법에 자유로우실 수 있으셨던 그 이유는, 이미 당신이 누군지를 아셨기 때문이다.
안식일은 말 그대로 쉬는 날이다.
일해서도, 시켜서도 안 되었다.
그렇다고 맹탕 놀기만 한다면?
휴식으로 거룩함을 지니는 게 본래 정신일 게다.
오늘날 주일은 의무적인 미사 참여 날로만 인식된다.
빠지면 고해성사를 봐야하기에 귀찮아 성당에 간단다.
그렇지만 주일은 주님 축복을 체험하는 날이다.
예수님은 이날 손이 오그라든 이를 고치셨다.
지켜보던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이렇게 좋은 일 하는 게, 남 해치는 것이냐?’라고 강한 톤으로 질문하시면서.
그런 구체적 질문을 하시는 예수님의 그 의도는?
안식일의 취지를 뭔지도 모르고 있음을 질책하신다는 모종의 암시일 게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에 사람을 치유하시는 예수님을 율법의 모독자로 여겼다.
그들은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믿지 못하여 알아보지 못했다.
손이 오그라든 이는 자신의 욕망과 이기심으로 주님을 배척한 이를 뜻하리라.
하느님께 손 내밀어 그분 뜻과 계획을 받아들인 이는,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만난 이 일게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완고한 그들의 마음이 부드러워지기를 원하셨다.
그들이 하느님의 온유하심과 자비하심에 시선을 고정하기를 바라셨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당신을 율법의 모독자로 고발하리라는 것을 이미 아셨지만, 그들에게 율법의 주인이심을 당당히 피력하신 거다.
이렇게 그분께서는 규정에만 얽매어 좋은 일 하지 않고, 목숨 구하지 못하는 이가 아님을 드러내셨다.
더 나아가 세상의 모든 율법은 오직 하느님 사랑과 그 정의를 드러내, 인간 구원에 봉사하는 것이라는 걸 그들에게 알리신 것이리라.
사실 분명한 것은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의 율법주의를 경계해야 하지만, 나아가 예수님의 여러 말씀을 각자 편리하고 유리하게 마음대로 해석하는 유혹도 경계해야 할 게다.
그리고 우리 역시 오그라든 옹졸해진 마음의 병을 버려야 하리라.
그리하여 사랑 실천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걸 깨닫자.
하느님은 모든 이를 살리시고자 예수님을 보내셨다.
‘하느님과 이웃 사랑’이 모든 율법의 출발이다. 지금 우리네 모습은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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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추가 안내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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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08.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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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8&id=2116401&menu=4770
위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리스트에서 “서하”를 찿아 들어가세요.
늦게 올라오거나 다음날 또는 게재 아니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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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08.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족보에서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음을
분명히 말합니다.
이스라엘 사회가 남성 중심이었기에
족보에 나오는 이름은 대부분 남자들이지만
몇 명 안되는 여자 이름 가운데
마리아도 언급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마리아의 경우는
다른 여자들과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된 것들을 보면
누가(남자) 누구(여자)에게서 자손을 낳았다는 식입니다.
하지만 마리아의 경우
누구(여자)에게서 자손이 태어났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주어로 하다보니
문장에서 예수님의 아버지인 요셉이 빠졌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경우만 그런 식인 것을 보면
마태오가 일부러 그렇게 표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탄생은 다른 사람들처럼
남자와 여자의 협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마태오는 이렇게 표현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물론 우리는 이어지는 구절에서
요셉의 협력도 있었음을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협력은 다른 사람이 태어났을 때와
다르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마리아를 통해 인간이 되시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기 위한 것이었음을
복음은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 사건에 있어서
마리아의 역할이 중요했다는 것을
복음은 은연중에 이야기합니다.
복음의 청자가 유다인이다보니
아무래도 이방인을 대상으로 하는 루카복음만큼
여자를 묘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마태오는 나름 마리아를 중요하게 언급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더 나아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길에
마리아의 역할이 중요했기에
마태오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마태오는 그러면서도 균형을 잘 잡는 것 같습니다.
마리아의 중요성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중심에는 항상 예수님을 두고 있습니다.
우리 구원을 위한 마리아의 역할을 잊지 않으면서도
우리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우리도 항상 기억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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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08.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태 1,18-23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오늘은 구세주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신 동정 마리아께서 그 부모인 요아킴과 안나로부터 태어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성모 마리아의 삶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단어가 ‘운명’이지요. 어머니 태중에 잉태되시던 순간부터 원죄에 물들지 않도록 정해지셨고, 중학생 정도 되는 어린 나이에 구세주 그리스도를 잉태할 모태로 정해지셨으며, 아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던 순간에는 그분의 제자 공동체를 믿음과 사랑으로 이끌 ‘교회의 어머니’로 정해지셨습니다. 그런데 ‘정해지셨다’는 말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운명론’과는 다릅니다. 운명론은 타의에 의해 일방적으로 정해진 것을 거스르지 못하고 무조건 따라야 하는 거라면, 하느님께서 당신 뜻으로 정해주시는 것은 우리가 그 뜻을 받아들이고 따라야만 비로소 실현된다는 점에서 다른 것이지요.
가톨릭 교회는 기본적으로 ‘예정설’을 믿지만,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모든 것이 다 정해져있고, 정해진 ‘팔자’대로만 살아야 한다고 믿는 건 아닙니다. 사람 팔자가 다 정해져있다면, 심지어 구원받을 사람과 그렇지 못할 사람까지 이미 다 결정되어 있다면,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자유 의지’는 무의미할 뿐더러 아무 쓸모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꼭 필요하고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있으나마나한 선물을 주실 리가 없지요. 그런 점에서 우리가 믿는 예정설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인간이 응답함으로써 그분 뜻이 이루어짐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억지로, 마지못해 하느님 뜻에 굴복하는 식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한 사랑으로, 그분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나에게 큰 기쁨이기에, 그분 뜻대로 되는 것이 나에게 가장 유익하다는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렇게 하여 하느님과 완전히 일치됨으로써 그분께서 누리시는 기쁨과 행복을 나도 함께 누리게 되지요.
성모 마리아도, 요셉도 하느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으로 그분의 뜻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분들이 이 세상에 태어나신 것은 하느님의 계획과 섭리에 따라 이루어진 ‘운명’이었지만, 그 이후의 선택은 철저히 본인의 자유의지로, 수많은 고뇌와 걱정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어 선택한 결정이었던 겁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부르심에 순명으로 응답함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계획이 완전한 모습으로 실현될 수 있었지요. 우리가 오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탄생 축일을 기념하는 것은 그런 모습을 본받기 위함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 하느님을 닮은 모상인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하느님 뜻에 의해 이루어진 나의 ‘운명’임을 받아들이고, 스스로의 의지와 결단으로 하느님 뜻에 순명함으로써 그분께서 나와 세상을 위해 준비하신 좋은 뜻이 나를 통해 이루어지게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인간으로 태어난 나에게 맡겨진 귀하고 중요한 소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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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1.”은 박 베드로 형제님이 보내주신 자료입니다.
## 공유하신 분께서 강론글이나 묵상글 수합과정에서 과년도의 자료를
사용하신 것도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 1. ================================================
♣복음말씀의 향기♣ No4340
9월8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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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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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진호 비오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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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 신앙 여정의 이정표요 모델이신 성모님!>
오늘 성모님의 탄생 축일입니다. 통상 성인들의 축일은 돌아가신 날에 경축하는데, 몇 분 예외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러하시고, 세례자 요한이 그렇습니다. 그리고 또 한 분 성모님이십니다.
성모님의 탄생에 대해서는 교회 전승을 통해서 살짝 유추할 수 있습니다. 성모님의 아버지 요아킴은 나자렛 출신으로 존경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머니 안나는 베들레헴 출신의 신심 깊은 여인이었습니다. 두 분은 열심한 신앙인이었지만 연세가 들도록 자녀가 없었습니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던 요아킴은 자녀를 청하기 위해 광야로 들어갔고, 40일간 단식하며 기도를 했습니다. 안나 역시 집에 남아서 탄식하며 기도를 바쳤습니다. 두 분의 기도가 얼마나 간절했던지 마침내 주님께서 응답을 들어주셨습니다.
천사가 안나에게 나타나 온 세상에 이름을 떨칠 아기를 낳을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안나는 아기가 태어나면 하느님께 봉헌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광야에서 기도하던 요아킴 역시 안나와 비슷한 환시를 받고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요아킴이 집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안나는 성문앞까지 마중을 나갔습니다. 두분은 서로 부둥켜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드디어 출산 날이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막상 아이를 출산하고 보니, 결과는? 기대했던 아들이 아니라 딸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많이 실망했지만, 마음을 바꿔먹었습니다. 하느님께 깊이 감사드리면서, 아기에게 마리아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또 하느님께 봉헌하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마리아가 세 살이 되었을 때, 예루살렘 성전에 데려가서 그곳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맡겼습니다.
여기까지가 전승에 따른 성모님의 탄생과 어린 시절에 대한 행적입니다. 신심 깊은 요아킴과 안나는 지극정성으로 마리아를 양육했고 교육시켰을 것입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참으로 묘하십니다. 기를 쓰고 위를 향해 올라가려고 발버둥치는 사람들은 한없이 깊은 나락으로 떨어트리십니다. 한사코 아래로 내려가려는 겸손한 사람들은 어떻게든 선택하시고 총애하시며 위로 위로 높이 끌어올리십니다. 나자렛의 마리아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교회의 가르침에 따르면, 성모님은 신화적인 인물이 아니라, 개인적인 역사를 지닌 참 여인이셨습니다.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전해진 ‘수태고지’란 엄청난 초대 앞에, 마리아는 너무나 두려운 나머지 온 몸으로 떨었을 것입니다. 요셉과 꿈꾸던 단란한 신혼생활을 접어야 하는 데서 오는 서운함에, 눈물도 흘렸을 것입니다.
나자렛의 한 처녀가 나름 계획하고 있었던 인생에 대한 소박한 기대와 희망이 순식간에 사라진 것에 대한 아쉬움도 컸을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마리아의 ‘Fiat’에서부터 시작해, 영광스런 승천을 통한,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기까지의 여정은 고달프고도 험난했을 것입니다.
소년 예수님을 양육하는 과정에서 목격하게 된 정말이지 이해하기 힘들었던 수 없는 사건들 앞에서, 성모님께서 느꼈던 난감함과 당혹스러움은 참으로 큰 것이었습니다. 때로 비수처럼 느껴지던 아들 예수님의 말씀 앞에 인간적인 상처도 많이 받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시작된 성모님의 신앙 여정은 약간의 힌트라든지, 사업계획서라든지, 로드맵 같은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이었습니다. 언제, 무엇이, 어떻게 전개될지 아무 것도 명백하지 않았습니다. 단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안갯속을 걷는 불확실한 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엄청난 도전 앞에 뒷걸음질치지 않았습니다. 불확실한 초대였지만 물러서지도 않았습니다. 회피하고 외면하지도 않았습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었지만, 기도하면서, 희망하면서 당당히 직면했습니다.
“그래 지금은 내가 부족해서 뭐가 뭔지 잘 모르겠지만, 모든 것이 희미하지만, 주님께서 언젠가 내 눈을 밝혀주실 것이다. 그때가 되면 모든 것을 알게 되겠지.”
그렇게 성모님은 오로지 주님께 의지하고 신뢰하면서, 하루하루 살얼음판 같은 여행길을 걸어가셨던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평생에 걸친 철저한 순명으로 당신의 뜻을 너그럽게 수용하시며, 당신의 인류 구원 계획에 충실하게 협조한 마리아를 ‘천주의 어머니’요 ‘교회의 어머니’ ‘인류의 어머니’로 높이 들어올리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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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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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님은 예수님 구원사업에 꼭 필요한 분이셨을까?>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족보를 들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낳고, 이사악은 야곱을 낳고…” 수십 명의 이름이 ‘남자가 남자를 낳는’ 방식으로 장엄하게 이어집니다. 그런데 이 지루할 것 같은 족보의 마지막에서, 마태오 복음사가는 갑자기 2000년의 역사를 뒤흔드는, 아주 이상하고도 혁명적인 문장을 써넣습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시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보십시오. 족보의 법칙이 깨졌습니다.
요셉이 예수님을 낳은 것이 아니라, 갑자기 ‘마리아에게서’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고 선포합니다.
마태오는 지금, 이스라엘의 모든 위대한 남성 족장들처럼, 이름도 알려지지 않았던 이 시골 처녀 마리아가 없었더라면 구세주께서는 결코 이 땅에 오실 수 없었음을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을 지내며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왜 굳이 이런 계획을 세우셨을까요? 왜 말씀이 사람이 되시기 전에, 그 말씀을 받아 안을 한 여인이 먼저 이 세상에 태어나야만 했을까요? 성모 마리아가 예수님의 구원사업에 정말 꼭 필요하셨을까요?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스승‘이 되셔야 하는데, 스승이 되려면 먼저 배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배우지 않고 혼자 스승이 되면 그 스승에겐 누구도 배우려 하지 않습니다. 저절로 배운 사람에게 무엇을 배울 수 있겠습니까? ‘스승이 배웠다면 나도 배울 수 있어.’라는 마음을 주는 존재가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성모님께 무엇을 배우셨을까요?
첫 번째는 다른 사람에게 속하는 법입니다. 곧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성경이 “그 뒤에 예수님께서는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시어,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내셨다.”(루카 2,51)고 증언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순종을 배워야 순종하는 법을 알려주실 수 있으십니다.
1970년대 미국 전역을 공포에 떨게 했던 연쇄살인마, 테드 번디가 있었습니다. 그는 잘생긴 외모와 명문대 법대생이라는 지성을 가졌지만, 사생아로 태어나 평생 어머니로부터 진정한 사랑과 인정을 받지 못했다는 깊은 상처를 안고 살았습니다. 그는 체포된 후 심리학자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다른 사람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나는 나 자신에게 속해 있습니다.”
그는 어머니의 사랑을 통해 타인에게 속하는 법, 즉 사랑으로 순종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에, 자기 자신이라는 감옥에 갇혀 세상을 파괴하는 악마가 되고 만 것입니다.
사랑이란 먼저 나 자신에게서 나와 타인에게 속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그것을 가르쳐 주신 첫 스승이 바로 성모 마리아입니다. 순종하는 법은 말씀과 은총, 두 가지를 통해 배우게 됩니다.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팀을 이끌며 기적을 만들어낸 박항서 감독의 리더십은 권위와 사랑의 균형을 보여주는 좋은 예시입니다. 그는 스스로를 '다혈질의 꼰대'였다고 말할 정도로 선수들에게 강한 권위를 내세웠습니다. 권위는 말씀이고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그 강한 권위의 바탕에는 선수들을 향한 진정한 부성애가 있었습니다. 그는 부상당한 선수를 위해 자신의 비행기 좌석을 양보하고, 선수들의 발을 직접 씻겨주기도 했습니다. 그는 선수들을 '가족'이라 여기며 선수들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축구협회에 요구하는 것을 감독의 역할이라고 믿었습니다. 선수들은 그의 사랑을 알았기에 그의 권위를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이것이 표징입니다. 이는 권위와 사랑이 분리된 요소가 아니라, 마치 한 몸처럼 공존하며 서로를 강화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예입니다.
부모는 자녀의 첫 스승입니다. 스승과 부모는 거의 동의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승이 있어야 제자가 성장합니다. 스승 없이 성장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부모 없이 온전히 성장하는 자녀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국악인이자 배우인 오정해 씨는 만당 김소희 선생이라는 위대한 스승을 만나 비로소 진짜 소리꾼으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김소희 선생은 제자에게 단순히 소리 기술만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밥상머리에서 제자의 그릇 크기를 보았고, 궂은일을 시키며 인내를 가르쳤습니다. 오정해 씨는 스승의 삶 전체를 배우고 그 인격을 닮아가면서 비로소 소리에 깊이를 더할 수 있었습니다.
그녀가 훗날 대학 교수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칠 때, 그녀의 입에서는 어느새 스승 김소희 선생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었다고 합니다. 스승이 있었기에 제자가 있었고, 그 제자가 다시 스승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스승 없이 저절로 완전해지셨다면, 그분은 우리의 참된 스승이 되실 수 없습니다. 나와 같은 처지를 겪어보지 않은 분을 어찌 스승으로 따를 수 있겠습니까? 스승은 나와 같은 인간적인 조건 속에서도 높은 경지에 오른 분을 말합니다. 원래부터 그런 존재에게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도 한 온전한 인간으로서 첫 스승이 필요하셨습니다. 스승은 자신이 직접 겪고 배운 것만을 가르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제자는 “스승님께서 하셨으니, 나도 할 수 있다.”고 믿고 따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순종을 가르치시기 위해, 먼저 한 인간으로서 순종을 배우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첫 스승으로, 어머니 마리아가 꼭 필요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첫 스승이셨던 어머니를, 십자가 위에서 우리 모두의 어머니요 스승으로 주셨습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그러니 우리가 성모님을 어머니로 모시고 그분을 스승으로 삼을 때, 우리 또한 예수님처럼 사랑으로 순종하는 법을 배워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의 어머니이신 스승께서는 우리를 당신 아드님께로 이끌며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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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지랖이 넓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지랖은 원래 옷의 앞자락을 뜻하는 말로, 겉옷의 앞자락이 넓으면 안에 있는 옷을 덮어 가리는 것처럼, 남의 일에 참견하는 모습에 비유되어 사용되었습니다. 좋게 말하면 남의 일에 도움을 주는 것이고, 부정적으로 말하면 참견을 많이 한다는 의미입니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사람’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좋게 말하면 남의 일에 끼어들지 않는다는 것이고 부정적으로 말하면 냉정하다는 의미입니다. 캐나다에서 살고 있는 어릴 적 친구에게서 문자가 왔습니다. 딸이 뉴욕으로 가서 일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제가 뉴욕에서 살았으니 딸의 직장 근처에 좋은 집을 알 수 있냐고 물었습니다. 이왕이면 집주인이 성당 다니는 교우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제가 뉴욕을 떠난 지 2년가량 되었고, 신문사에 있었기에 아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후임 신부님께 이야기했더니 적합한 곳을 찾아보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오지랖이 넓은 편은 아닌데 남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입니다. 덕분에 강의도 많이 했고, 여행도 가게 되었고, 새로운 사람도 알게 되었습니다.
문득 ‘하느님은 어떠신 분이신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느님은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오는 분은 아닙니다. 어찌 보면 오지랖이 넓으신 분입니다. 특히 사람에 대해서는 엄청 오지랖이 넓으신 분입니다. 성서의 이야기는 하느님의 참견과 간섭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판관을 보내서 이스라엘 백성을 외적의 침략에서 구해 주셨습니다. 예언자를 보내서 이스라엘 백성이 올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마침내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기쁜 소식을 알려 주셨습니다. 예수님도 어찌 보면 오지랖이 많으십니다.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이 측은하다고 하시며 오천 명이나 먹이셨습니다.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하셨고, 듣지 못하는 사람은 듣게 하셨습니다. 나병환자는 깨끗하게 하셨고, 중풍 병자는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셨습니다. “수고하고 힘든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나의 멍에는 편하고, 나의 짐은 가볍다.” 이 정도면 오지랖의 끝판왕이십니다. 아마 예수님께서 결혼하셨으면 아내에게 잔소리를 들었을 것 같습니다.
오늘은 성모님의 탄생 축일입니다. 요한복음은 혼인 잔치의 이야기에서 성모님을 이야기합니다. 성모님은 혼인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알았습니다. 성모님은 혼인 잔치의 주인도 아니셨고, 손님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성모님은 아들 예수님께 그 사실을 알리고 도움을 청했습니다. 아들 예수님은 ‘아직 때가 아닙니다.’라고 말하면서도 성모님의 청을 들어주셨습니다.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웠고, 그 물은 맛있는 포도주로 변했습니다. 시인 바이런은 이 장면을 아름다운 시로 표현했습니다. “물이 주인을 만나니 얼굴이 붉어지도다.” 성모님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이렇게 말하셨습니다.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가슴 깊이 새겼습니다. 그리고 사도들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멕시코의 과달루페에 발현하였고, 프랑스의 루르드에 발현하였고, 포르투갈의 파티마에 발현하였습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의 부탁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으며,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남의 일에 무관심한 것이 현대인의 미덕처럼 여겨지는 시대지만, 마리아처럼, 예수님처럼 ‘사랑의 오지랖’을 품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가족, 내 이웃, 나아가 이 시대를 향해 “이들이 포도주가 없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그 눈, 그 마음, 그 용기를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도 결국 하느님처럼, 성모님처럼, ‘사랑 때문에 참견하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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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바오로수도회 김태훈 리푸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우리말로 “약혼”(마태 1,18)이라고 옮긴 낱말은 당시 유다인 사회에서 증인들 앞에서 하는 정식 혼인 전 예식을 가리킵니다. 이 예식으로 남녀는 공식 이혼 절차를 밟지 않고서는 깰 수 없는 ‘정식 부부의 관계’가 이루어집니다. 두 당사자는 이미 정식 부부이기 때문에 배우자가 죽으면 홀아비나 과부라고 불리고, 상대가 간음을 하면 그 행위가 이혼 사유에 해당됨은 물론 간통죄로 다스려졌습니다.
마리아는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주님께서 자신을 통하여 당신의 계획을 이루고자 하심을 알게 되자 기꺼이 자신을 내놓았습니다. 미래에 대한 자신만의 푸른 꿈이 있었을 수도 있지만, 갑자기 듣게 된 하느님 전갈에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 꿈을 포기하고 불명예를 떠안고 죽을 위험마저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마리아의 마음에는 주님께서 첫자리를 차지하셨습니다. 자신보다 주님을 더 소중히 여긴 것입니다.
요셉은 마리아의 임신에 깊은 배신감을 느꼈을 수도 있지만, 마리아가간통죄로 처벌받는 것도, 공개적으로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도 바라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그를 사랑하였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간음한 여인과 혼인할 수는 없기에 파혼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런데 천사의 알림을 받자, 그는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동정 잉태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면서, 자신의 의지가 아닌 하느님 뜻을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모두 구원하시고자 당신 자신을 아낌없이 내놓으신 것은 그분께서 하느님을 무척 사랑하셨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하느님을 위하여 기꺼이 자신을 포기하는 마리아와 요셉의 모범을 가정에서 배우셨기 때문이기도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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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1-16,18-23: 그의 태중에 있는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오늘은 성모님의 탄생 축일이다. 교회가 성모님의 성탄을 축일로 지내는 것은 구원의 역사적 측면에서 마리아의 위치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 축일을 지내는 것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분명히 하려는 그런 의미가 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족보(1,1-7)로 시작한다. 그것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겠는데, 첫째, 다윗의 후손,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이스라엘 백성과 관련된 인물이라는 점, 둘째,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아로서의 합법성, 셋째, 구원 역사의 정점이며 종합이신 예수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마태오의 족보는 우
선 우리나라의 족보가 장자 중심으로 되어있는 것과도 다르지만, 당시의 유다이즘에서도 여인들의 명단이 열거되는 것은 특이한 일이다. 그들은 다말, 라합, 룻 그리고 우리아의 아내 바쎄바이다. 또 하나는 요셉과 관계없이 오직 마리아로부터의 예수님의 탄생이다. 요셉이 마리아에게서 예수를 낳았다가 아니라,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마태 1,16)라고 기록하고 있다. 우선 네 여인은 죄인들이며, 예수께서는 그러한 죄인들까지도 구원하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며, 둘째로 그들은 이방인들이다. 즉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백성을 구원하시고자 한다는 의미이다. 셋째로는 이 여인들이 다윗 가문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며, 넷째로 이 여인들의 결혼이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한 결혼이 아니었다. 마리아도 요셉과 관계없이 예수님을 잉태하고 출산하였다.
이 모든 것은 이방인이건, 죄인이건, 또 평범하지 못한 결혼을 한 사람이건 상관없이, 인간적인 결함이나 부족하지만, 하느님의 선택은 자유롭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리아 역시 특별한 방법으로 하느님 구원계획의 도구로 선택되었음을 잘 드러내고 있다. 하느님의 구원계획은 인간이 생각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인간이 지닌 어떤 결함에도 상관없이 당신의 주도로서 이루어진다. 선택된 마리아는 인간적 장애를 극복하고 승리하는 하느님 섭리의 표징이 되고 있다.
예수의 족보는 아버지와 아들로서 요셉과 예수 사이에 모종의 단절이 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마태 1,16). 예수님 출생에 하느님의 개입이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예수의 진정한 아버지가 신비롭게 감추어져 있다. 이 족보는 예수를 다윗 가문에서 태어난 메시아로 제시하면서도, 예수의 어머니로서 마리아의 역할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렇게 마태오 복음은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임을 보증하는 요셉의 기능도 등한시하고 있지 않지만, 하느님의 구원계획 안에 더욱 중심이 되는 것은 마리아의 역할이라는 것을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다.
또 복음은 예수님의 탄생을 전하면서 마리아에게서 동정으로 잉태되고 태어난 사실을 명확히 한다. 요셉은 예수님의 탄생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것은 약혼녀 마리아의 임신에 그가 당황스러워하고 파혼까지도 생각하며 고민했던 모든 상황을 통해 분명히 드러난다. 그 탄생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이사야 예언자가 예언했던 임마누엘로서(이사 7,14),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에서 예언되었던 메시아라는 사실과 더불어 마리아는 일찍부터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오늘 지내는 마리아의 탄생은 우리 구원의 여명이다. 구세주를 준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에 있어서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가기 위한 준비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 마리아의 탄생으로 구원이 이제 시작되었다고 한다면, 우리는 이제 역시 작은 마리아로서 그리스도를 낳아 주어 세상이 구원을 얻게 하는 모습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삶을 우리가 잘살 수 있도록 주님의 도우심을 청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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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최고의 찬사>
마태오 1,1-16.18-23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낳고 이사악은 야곱을 낳았으며 야곱은 유다와 그 형제들을 낳았다. 유다는 타마르에게서 페레츠와 제라를 낳고 페레츠는 헤츠론을 낳았으며 헤츠론은 람을 낳았다. 람은 암미나답을 낳고 암미나답은 나흐손을 낳았으며 나흐손은 살몬을 낳았다.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즈를 낳고 보아즈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았다. 오벳은 이사이를 낳고 이사이는 다윗 임금을 낳았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솔로몬은 르하브암을 낳았으며 르하브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삽을 낳았다. 아삽은 여호사팟을 낳고 여호사팟은 여호람을 낳았으며 여호람은 우찌야를 낳았다. 우찌야는 요탐을 낳고 요탐은 아하즈를 낳았으며 아하즈는 히즈키야를 낳았다. 히즈키야는 므나쎄를 낳고 므나쎄는 아몬을 낳았으며 아몬은 요시야를 낳았다. 요시야는 바빌론 유배 때에 여호야킨과 그 동생들을 낳았다.
바빌론 유배 뒤에 여호야킨은 스알티엘을 낳고 스알티엘은 즈루빠벨을 낳았다. 즈루빠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야킴을 낳았으며 엘야킴은 아조르를 낳았다. 아조르는 차독을 낳고 차독은 아킴을 낳았으며 아킴은 엘리웃을 낳았다. 엘리웃은 엘아자르를 낳고 엘아자르는 마탄을 낳았으며 마탄은 야곱을 낳았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곧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최고의 찬사>
“당신을
세상에 보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려요”
“당신을
세상에 낳아주신
당신 부모님께 감사드려요”
하느님께서
세상에 보내주시고
부모님께서
세상에 낳아주시어
세상에
태어날 수 있었던
사람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최고의 찬사이기에
너무나도 듣고프지만
과연 나는 들을만한가
과연 나는 듣고 있을까
과연 나는 들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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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하느님께서는 세상 창조 이전에 이미 계획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곧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이다."(마태 1,18-23)
1) 9월 8일은 ‘성모님 성탄절’입니다. 그런데 여러 가지 이해하기 어려운 점들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의 성모님의 비중과 성모 신심을 생각하면, 왜 축일 등급이 대축일이 아니고 그냥 축일인지, 그리고 특별한 행사 없이 왜 이렇게 조용히 지나가는 것인지... 또 성모 신심에 열성적인 신자들도 성모님의 성탄절을 모르거나 알더라도 무심하게 지나치는 일이 많은 것은 무슨 이유인지......
마치 가정에서, 엄마는 가장과 자녀들의 생일을 잘 챙기는데 식구들은 엄마의 생일을 잊어버리고 지나가는 것과 같은 모습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렇다고 해서 성모님께서 서운해 하시지는 않겠지만, 성모님을 공경한다는 사람들이 그러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과 더불어서 몇 가지 더 생각해야 할 점은, 신자들이 자신들의 본명 축일에 대해서 무심할 때가 많다는 점과 자신이 세례 받은 날을 아예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세례성사’를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는’ 일이라고 표현하는데, 그렇다면 신앙의 관점에서는 육신이 태어난 생일이 아니라 영적으로 새로 태어난 날, 즉 세례성사를 받은 날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더 크게 축하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2)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인류 구원 계획’과 그 계획의 실현에 대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찬미 받으시기를 빕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좋으신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랑하시는 아드님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은총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셨습니다."(에페 1,3-6)
하느님의 인류 구원 계획은 ‘세상 창조 이전에’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이 우리 교회의 믿음입니다. 성모님의 ‘원죄 없이 잉태되심’과 ‘탄생’은, 그 계획이 구체적으로 실현되기 시작했음을 나타내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우연히’는 없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우발적으로 일어나는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각자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난 것도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라, ‘세상 창조 이전에’ 이미 세워진 하느님의 계획에 의한 일이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하느님의 소중하고 귀한 존재입니다.
만일에 자기는 하느님의 뜻과 상관없이 우연히 생긴 존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자기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전락시키는 사람입니다. 우연히 생겼다면 우연히 사라져도 그만입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그렇게 애타게 ‘잃은 양’을 찾으실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3) 성모님의 축일들과 예수님의 축일들을 보면, 인간들은 모르는 하느님의 어떤 시간표가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시간표대로 일을 진행하십니다. 각 개인의 인생도 하느님의 시간표 안에 있습니다.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내 뜻에 의해서 인생을 살아간다고 생각했었는데, 내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일들이 생기면서,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바뀔 때가 있다.”라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방향이 좋은 쪽일 수도 있고, 나쁜 쪽일 수도 있습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은 그것을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생각하지만, 믿는 우리는 ‘하느님의 섭리’ 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하느님께서는 미리 뽑으신 이들을 당신의 아드님과 같은 모상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습니다."(로마 8,28-29ㄱ)
하느님의 뜻과 섭리의 목적은 ‘나의(우리의) 구원’입니다. 내가(우리가) 하고 있는 신앙생활은 그 뜻과 섭리에 응답하는 생활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과 응답하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에 대한 하느님의 뜻과 섭리에서 스스로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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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모든 것을 통하여 구원을 이루시는 주님>
마태오 복음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그리스도에 이르는 하향식 족보를 전해줍니다. 이 긴 족보에는 윤리적으로 문제 있는 네 명의 여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느님께서는 이들을 유용한 도구로 삼아 구원업적을 이루십니다. 이 족보는 예수님의 신성(神性)과 더불어 ‘함께 하시는 하느님’(1,23; 28,20)의 놀랍고도 특별한 섭리를 알려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는 부차적인 인물로 드러납니다. 마리아는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평범한 여인이었지요.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보잘것없는 마리아의 탄생을 통하여 메시아를 보내시어 구원 업적을 이루십니다. 이렇게 마리아의 탄생으로 구원의 문이 열렸으며, 자유와 해방의 기쁜 소식이 전해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마리아의 탄생을 기념합니다. 마리아의 탄생으로 하느님이신 분이 살을 취하시어 우리에게 오시어 함께하신 것 자체가 경이로운 신비입니다. 자비요 선이며 의로움이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내려오시어 우리 삶에 개입하시게 된 하강과 강생의 신비는 감당할 수 없는 선물입니다.
평화 자체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까이에 평화를 가져다주신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특별한 섭리입니다. 마리아의 탄생을 기념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분께서 ‘복되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천사로부터 처녀의 몸으로 잉태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때 마리아는 인간적인 고통이 따르리라는 것을 알면서도,'예’라고 대답하며 기꺼이 순종합니다.
그분은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깊이 되새기심으로써 ‘말씀과 함께하셨기에 복되십니다. 구세주 잉태는 마리아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축복이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축복을 자기 것으로 삼지 않았지요. 그분은 예수님의 뒤를 ‘끝까지, 말없는 가운데, 철저히’ 따르시면서 전 생애를 온전히 되돌려 드리고 헌신하셨습니다.
동정 마리아는 구원을 품은 사람답게 그분의 사랑을 품고 사랑의 여정을 항구히 걸으셨기에 복되십니다. 주님께서는 보잘것 없고 때로는 죄의 어둠속을 헤매는 우리를 구원의 도구로 삼으십니다. 아니 우리가 알아차리지도 못한 사이에 나를 구원의 밭으로 삼으시어 씨앗을 뿌려주셨습니다. 따라서 어떤 경우에도 우리 기준으로 선악을 구분하고 남을 단죄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오히려 모든 것을 도구 삼아 구원을 이루시는 주님께 모든 것을 맡겼던 마리아의 믿음으로, 메시아를 낳는 주님의 복된 도구가 되도록 힘써야겠습니다. 또한 마리아를 본받아 사소한 일상사나 보잘것 없는 이들 안에 담겨 있는 구원의 표지를 알아볼 수 있도록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을 지니도록 해야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말씀에 귀 기울이고 말씀을 받아들여 사랑으로 실행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착하고 거룩한 표양, 사랑의 견딤을 통해 하느님을 낳는 어머니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마리아께서 ‘세상 끝날까지 함께해주실 구세주’를 잉태하시어구원의 문을 열어주셨듯이, 우리도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 함으로써 참 행복과 기쁨을 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 마음에 하느님의 선과 사랑, 진리와 정의를 품고 구원의 길을 겸허히 걸어가는 오늘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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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한만옥 토마스 신부님]
<성모님처럼 주님을 잉태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창세기에서부터 예언된 분이고, 4천 년 동안 준비되고 기다려 온 분이었듯이 성모 마리아도 그렇다.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가 범죄함으로써 그들에게 약속된 영원한 생명을 잃게 되었지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크신 자비로 영원한 생명을 되찾아 주실 구세주를 약속하셨다.(창세기 3,15 참조)
그 약속 중에는 구세주를 낳으실 어머니도 예언적으로 암시되어 있다. 오늘 독서인 미카서에도 구세주를 약속하면서 그분을 낳으실 어머니를 예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해산하는 여인이 아이를 낳을 때까지.”(미카 예언서 5,2)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하느님과 똑같으신 그 지존하신 분을 잉태할 여인은 마땅히 순결하고 하자 없으신 분이어야 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그 여인이 원죄 없이 잉태되게 하셨고, 죄에 물들지 않도록 준비시키셨다. 마리아께서는 당신의 그 순결한 태중에 하느님의 아드님을 잉태하여 열 달 동안 품어주셨고, 세상에 구세주를 전해주셨다.
우리 역시 성모님처럼 주님을 세상에 전해야 한다. 주님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선 성모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하느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과 순명으로 내 안에 주님을 받아들여 모셔야 한다.
주님께서 내 안에 계시지 않으면 어떻게 세상에 주님을 전할 수 있겠는가? 성모 마리아의 탄신을 경축하는 오늘, 나도 성모님처럼 주님을 잉태하여 세상에 전할 수 있도록 성모님의 그 높은 겸손과 깊은 믿음을 청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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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상일 이냐시오 신부님]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신 축일입니다. 이 시간 하느님의 어머니 거룩한 동정녀 교회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삶을 한번 되돌아보고 그분의 삶을 묵상하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초대교회 전승에 따르면 어린 마리아는 나자렛에서 요아킴과 안나 성인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어린 나이에 예루살렘 성전에 봉헌되셨고 16세가 되자 어른들의 뜻대로 같은 다윗가문의 청년인 목수 요셉을 남편으로 맞이하였습니다. 그녀는 한마디 불평도 하지 않고 오직 순명으로 그 혼사를 받아들였습니다.
결혼을 준비하고 있던 마리아에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가장 큰 일을 시작하십니다. 바로 메시아의 어머니로 그녀를 선택하십니다. 가브리엘 천사의 방문을 받은 마리아는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하면서 하느님께 자신의 인생을 맡기십니다.
그리고 만삭이 되었을 때는 아우구스티노의 호적조사 때문에 무거운 몸을 이끌고 베들레헴으로 내려갑니다. 추운 겨울날 방을 얻지 못해서 당신의 아이를 마굿간에서 낳게 됩니다. 세상의 주인이신 하느님이 마굿간에서 태어나십니다.
또 몸도 제대로 풀지 못했을 때 헤로데의 추격을 피해서 멀리 이집트까지 피난을 가게 됩니다. 시간이 흐른후 나자렛에 돌아와서는 어린 예수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스승이셨고, 가정을 보살피는 아내였고,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로 살아왔습니다.
카나 혼인잔치에서는 일꾼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데로 하여라고 말하면서 예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드러냈습니다. 또 갈바리아산 십자가 밑에서 끝까지 당신의 아드님과 함께 하시며 같은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숨을 거두시기 전에 마리아에게 요한을 아들로 주시고 요한에게 마리아를 어머니로 주십니다. 이제 마리아는 제자들의 어머니이며 교회의 어머니가 되십니다.
예수께서 죽으신 후 제자들이 불안에 떨때 마리아는 그들을 돌보았고 특별히 예수께서 승천하신후 약속된 성령께서 오실때까지 제자들과 함께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하였습니다.
주님의 어머니가 되었다는 이유로 한평생 험난한 인생을 사셨던 마리아, 그러나 당신의 아들을 잃는 고통 가운데서도 하느님의 뜻을 알려고 했던 마리아, 그 여인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로 모셨습니다.
성모님의 탄생은 바로 하느님 아버지께서 하실 가장 위대한 일의 시작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는 성모님의 탄생을 기뻐하고 성모님을 통하여 놀라운 일을 하신 하느님을 찬미하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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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사람에게 반드시 있어야 하는 감정은 희망입니다. 독일 속담에 “희망은 가장 마지막에 죽는다”라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죽음 전까지는 희망이 있다는 것이며, 희망이 없음은 죽음밖에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라틴어 속담에도 “내가 숨을 쉬는 한 희망은 있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고생 끝에 낙이 온다’라는 뜻의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모든 어려움에도 삶을 거뜬하게 살아낼 수 있다는 믿음이 희망인 것입니다.
여기서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기대와 희망을 같은 의미로 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대가 무너지면 희망도 사라지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자 하는 기대, 좋은 직장에 취업하고자 하는 기대, 그 기대가 깨졌을 때 희망도 없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하지만 기대와 희망은 다릅니다. 기대가 무너져도 더 잘될 것이라는 희망을 충분히 품을 수가 있고, 좋은 미래가 내게 열릴 것이라는 희망 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희망은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현재 상황이 좋지 않더라도 싸울 수 있게 합니다. 자기 기대에 부합하지 않더라도, 새로운 희망으로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게 합니다. 그리고 이런 희망은 나로부터 시작해서 우리 공동체 안에서도 솟아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희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셨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족보가 나옵니다. 마태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 소개하지요.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모든 민족이 너를 통해 복을 받을 것이다.”(창세 12,3)의 성취자라는 뜻입니다. 또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하느님께서 다윗에게 약속하신 영원한 왕국(2사무 7,12-16)을 이루시는 메시아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특히 천사가 요셉에게 “아들의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라고 명령하지요. 예수는 ‘야훼께서 구원하신다’라는 뜻에서 온 이름으로,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희망인 주님이십니다. 따라서 철저히 주님의 말씀을 따라야 하고, 주님과 함께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런 예수님을 잉태한 분이 바로 성모님이십니다. 따라서 성모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오늘은 우리를 구원할 희망의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시작이 됩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 잉태부터 시작해서 전 생애에 보여 주셨던 믿음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성모님의 공경하고 그분의 삶을 따르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런 좋은 모범을 보여 주신 분의 탄생일인 오늘을 어떻게 그냥 넘어갈 수 있겠습니까? 축하의 마음을 가지면서, 동시에 성모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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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성모님께서 받은 은총과 축복>
오늘은 ‘성모 탄생 축일’입니다. 동시에 <몬떼 올리베또 성 마리아 대수도원>과 연합회의 주보성인 축일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더욱 기쁜 날입니다. 이 기쁜 날, 아기 성모님과 함께 벌어진 은총과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찰찰 넘쳐나길 빕니다. 사실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인 오늘로부터 10달을 거슬러 올라가면, 12월 8일은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대축일'이 됩니다. 그러니 성모님의 탄생은 ‘원죄 없으신 잉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은 ‘성모 마리아를 원죄 없는 잉태로 탄생시킴으로써 성자의 강생에 합당한 준비를 갖춘 하느님의 구원사업을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곧 구원 역사의 중요한 국면이 시작됨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처럼 마리아의 탄생은 우리 구원의 여명으로 이해됩니다. 곧 구세주께서 준비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리아의 탄생으로 구원이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이토록 ‘성자의 강생에 합당한 준비’를 갖추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무한하신 사랑으로 성모님을 원죄로부터 보호받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이는 비록 인간이 죄의 굴레에 있다 하더라도 결코 하느님의 축복의 굴레를 벗어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우리는 ‘죄보다 먼저 축복을 받은 존재’입니다.
‘죄보다 먼저 축복이 왔다’는 이 사실을 우리는 깊이 기억해야 합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축복받은 존재라는 이 사실을 말입니다. 그것은 바로 성모님의 탄생으로 준비되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성모님께서는 원죄조차 없는 티 없이 아름답고 거룩한 대성전이셨습니다. 구세주, 하느님의 아들을 품으신 까닭입니다. 그러기에 오늘은 참으로 기쁨과 찬미와 감사의 날입니다. 따라서 ‘성모님의 탄생’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은총과 복을 주시는 분'이시요, 성모님께서는 '은총과 복을 가득히 받으신 분'(루가 1,28 참조)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성 안셀모는 성모님을 “넘치는 은총으로 충만하신 분”, “복되시고도 지극히 복되신 분”이라고 찬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은총과 복이 모든 피조물에게까지 이르게 되었음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당신이 받으신 축복으로 말미암아 모든 피조물은 창조주로부터 축복을 받고, 창조주께서는 그들로부터 찬미를 받으신다. ~ 모든 피조물이 당신의 충만함의 흘러넘침을 입어 새싹이 트듯 되살아났다.” 이는 성모님께서 받은 은총과 축복이 성모님으로 말미암아 온 피조물에게 흘러들었음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성모님께서 받은 은총과 축복으로 말미암아 당신의 아드님과 형제가 되며, 아버지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한 몸’을 이루며, 그분 안에 수렴(accapatulatio)됩니다.
이토록 우리는 ‘은총에 은총을, 축복에 축복을 입게 되었습니다.’(요한 1,16 참조) 그리하여 성모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어머니가 되십니다. 흔히들 “부모의 기쁨은 자녀에게 있다.”고 합니다. 성모님의 기쁨도 아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있습니다.
구세주 아들을 탄생시키기 위해 원죄 없이 잉태되셨으며, 오늘 탄생하셨습니다. 그렇게 아들로 말미암아 구원의 면류관을 쓰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어머니의 그 은총과 축복의 충만함을 입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특별히 축복에 축복을 받은 존재라는 사실, 많은 은총에 은총을 입은 존재라는 사실을 깊이 기억하고 찬미와 감사를 드립니다. 다시 한번, 이 기쁜 날, 아기 성모님과 함께 벌어진 은총과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찰찰 넘쳐나길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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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샘 기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마태 1,20)
주님,
믿음으로 침묵할 줄을 알게 하소서.
행동으로 사랑할 줄을 알게 하소서.
타인의 처지를 자비로 헤아리고, 희망이 보이지 않아도 희망하게 하소서.
선하신 당신의 뜻과 당신의 의로움을 따르며, 영으로 인도되는 다 헤아려지지 않은 신비를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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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축하합니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을!-
“거룩하신 동정 마리아님, 복되니시나이다.
정의의 태양, 그리스도 우리 하느님을 낳으셨으니,
온갖 찬미를 마땅히 받으시리.”
오늘은 참 아름답고 거룩한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입니다. 방금 복음에 앞서 들은 복음 환호송도 반갑고 감사한 느낌 가득 합니다. 우선 오늘 축일의 유래에 대해 간략히 나눕니다.
‘마리아의 탄생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나 성서의 증언은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마리아가 잉태되는 순간부터 죄에서 완전히 자유로웠으며, 평생동안 죄에서 자유로웠다고 믿습니다. 동방의 콘스탄티노플(현재의 이스탄불)과 서방의 로마 교회들은 6세기와 7세기부터 마리아의 탄생을 기념해 왔습니다.
이 전례는 6세기 예루살렘에 있는 성 안나 대성당의 봉헌에서 유래했고, 그 전에는 5세기 ‘목자의 들판’으로 알려진 곳에 마리아를 기리는 대성당이 있었고, 이곳은 요아킴과 안나의 집으로 추정됩니다.
7세기 동방에서 온 수도자들은 이 축일을 로마로 가져왔고, 그곳에서 서방으로 퍼져 갑니다.
13세기 장엄한 8부 축제로 격상되었으나, 1955년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오늘의 축일이라는 등급을 갖게 됩니다. 마리아의 무죄 잉태를 기념하는 12월8일 축일은 나중에 마리아 탄생 9개월 전으로 정해집니다. 동방교회에서는 12대 전례중 하나로 기념하며 명칭은 “우리의 고귀하신 여왕이시며 하느님을 낳으신 분이시며 영원 동정이신 마리아의 탄생”으로 불립니다.’
얼마전 수도원 성전앞 정원에 옮긴 바늬 성모님상으로 인해 에덴동산은 성모동산으로 변한 듯 느낌이 각별합니다. 제 집무실에서 한눈에 들어오는 마리아 성모님을 볼 때 마다 전구하게 됩니다. 또 엊그제는 마리아 성모님을 수호자로 모신 제가 각별히 아끼는 청담성모치과의원 탄생 30주년을 맞이하여 감사기념미사도 봉헌했습니다.
마리아 성모님의 생신날! 오늘 따라 그립게 떠오르는 20년 전, 2005년 6월에 세상을 떠난,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닮은 제 어머니 신 마리아입니다. 옛 우리 어머니들은 모두가 또 하나의 성모님이셨습니다. 어머니 돌아가시던 몇 개월 전 어머님의 선종을 예견한 듯 써놨던 <어머니를 그리며>란 글이 생각납니다.
“남들은 내가 효자일거라 생각하는데 솔직히 말해 난 효자가 못된다. 어머니를 닮아 붙임성도 없고 무뚝뚝한 편이다. 이건 어머니도 인정하신 거다. 어머니는 전형적인 조선 여자 같은 분이셨다 애교나 아양은 거의 없었지만 강인한 의지에 아주 참을성이 많고 지혜로운 분이셨다. 심한 밭일에 몸 많이 피곤하여 밤에 끙끙 앓으셔도 아프다는 내색 하나 않으셨다. 아버지 원망하는 말 하나 들은 적 없고 큰소리 내셔서 다투거나 화내신 적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매번 우등상을 타와도 덤덤하실뿐 칭찬 한 번 하신 적도 없다 돼지 키워 자식들 학비도 대셨고 장날마다 계란 모아 팔아 꼭 찐빵도 사다 주셨다. 사실 오십년대 육십년대는 모두 가난했지. 그러나 마음들만은 참 따뜻했고 부자였고 행복했다. 어려워도 내 전과서며 학용품은 꼭꼭 잘도 사 주셨던 어머니, 초등학교 시절
무척이나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던 나, 일 년에도 아마 열 번은 크레용을 샀을 거다. 그 흔한 종교나 신앙없이도 한결같이 사셨던 어머니 삶 자체가 기도였고 신앙이셨다. 이리저리 감정에 연약하게 흔들렸던 분이셨다면 그 험한 세상 세월에
혼자 다섯 남매 어떻게 키웠을 것인가 ‘외롭다’거니 ‘그립다’거니 감정 표현 없이도 흔들림 없이 꿋꿋이 가정을 지켜오신 내 어머니. 내 수도원 들어 올 때에도 극구 만류하셨다. ‘왜 이제 살만하게 됐는데 또 고생길에 접어드느냐’고 그러다 하루 지나 내 방에 들어오셔서 ‘얘, 수철아, 네가 좋아하면 들어가라’고 허락해 주셨다. 사실 어머니는 은연중 막내인 나와 살고 싶어 하셨다. 지금은 극도로 쇠약해지셔서 온종일 방에 누워계신 어머니. 정신은 여전히 맑으시고 마음도 고요하시다. 그냥 계시기만 해도 좋은 어머니. ‘신 마리아’. 오래오래 사셨으면 좋겠다. 나도 이제 나이 들어 철이 났나 보다.”<2005.3. >
우연은 없습니다. 새삼 이처럼 하느님은 언제 어디서나 당신이 사랑하시는 작고 겸손한 이들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펼치십니다. 오늘 마태복음의 예수님의 긴 족보를 통해 하느님의 무한한 인내와 겸손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하느님은 이런저런 작고 가난한 보잘 것 없는 이들 하나도 버림없이 구원섭리의 역사에 편입하여 한몫을 담당하게 하십니다.
여기서 주목할 바, 구약의 네 여인, 다말, 라합, 룻, 바쎄바입니다. 모두가 이름없는 비천하고 미약한 이방인 출신들입니다. 참으로 눈밝으시고 귀밝으신 하느님은 언제 어디에 있든 당신의 사람들을 찾아 내시어 당신의 도구로 삼으시니 그 섬세하고 자비로움이 놀랍고 감사합니다.
하느님은 다윗의 가계, 메시아의 가계가 바야흐로 끊어지려는 순간, 불가사의한 방법으로 가계를 이어갑니다. 마침내 불가사의의 극치는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는 대목이며, 예수님의 족보는 여기서 일단 끝납니다. 이어 주님의 천사는 다윗의 자손 요셉의 꿈중에 나타나 마리아의 잉태의 신비를 확인시킵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구하실 것이다.”
‘구원자’이자 우리와 늘 함께 하시는 하느님 ‘임마누엘’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태어나시니 그대로 하느님의 겸손과 가난, 사랑의 절정입니다. 마리아를 택하신 하느님의 놀라운 안목이요 이런 마리아의 탄생을 경축함은 그대로 하느님의 위업에 대한 찬미와 감사의 표현입니다. 미가 예언서의 예언대로 베들레헴 같은 작고 겸손한 당신 일꾼들을 통해 오늘도 이제와 영원히 하느님의 구원섭리가 펼쳐짐을 봅니다.
“너 에프라타의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 부족들 가운데에서 보잘 것 없었지만,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
예수님의 족보는 영원한 현재 진행형으로 지금도 교회를 통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의 우리 모두 각자 제 삶의 자리에서 제 몫을 다함으로 살아 있는 예수님 족보의 완성에 좋은 도움이 되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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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지금 우리를 통해>
발칙한 말로 오늘 저는 강론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하느님은 마리아가 동정녀기를 바라실지 모르지만 저는 마리아가 어머니시기를 바란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축일의 이름도 동정녀 마리아의 탄생 축일이 아니라 복되신 성모 마리아의 탄생 축일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동정녀 마리아의 탄생 축일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은 아니고, 다만 제겐 어머니 마리아의 탄생이 더 의미 있게 다가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탄생도 2천 년 전 이스라엘에서의 탄생이 아니라 지금 저에게서 또 우리에게서 주님의 어머니로 탄생하시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그분을 모범으로 삼는 우리도 주님의 어머니로 탄생하기 위함입니다.
물론 우리가 주님의 어머니가 되는 것은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입니다. 마리아께서 실제로 주님의 어머니가 되시어 수난을 당하셨다면 우리는 영적으로라도 주님의 어머니가 되자는 것일 뿐입니다.
어떻게 되느냐? 그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가 클라라 자매들에게 얘기하듯 성령의 정배가 되는 것이고,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에 모시고 간직함으로써입니다.
이것은 제가 지어낸 얘기가 아니라 잘 아시다시피 주님께서 친히 가르쳐주신 것 그대로입니다.
당신을 찾아오신 어머니 마리아를 빗대어 주님께선 우리도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천하면 어머니가 된다고 하셨잖습니까?
프란치스코는 여기에 덧붙입니다. 우리가 착한 행실로 그분을 세상에 낳을 때 어머니가 됩니다.
아무튼 우리가 주님의 어머니가 되는 것은 지금 우리를 통해 주님의 어머니가 탄생하는 것임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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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마태 1,20ㄷ)
<어머니의 모범을 따라가자!>
오늘 복음(마태1,1-16.18-23)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한 말씀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마태1,1)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마태1,18)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믿고 닮으려고 애를 쓰는 예수 그리스도,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신성)이심과 동시에 사람(인성)이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인성을 지니신 사람이셨기 때문에 우리와 똑같은 족보도 필요했고, 예수님을 낳으실 태도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요셉과 약혼한 마리아, 아직 남자를 알지 못했던 처녀 마리아를 예수님을 낳을 도구로 선택하셨고, 마리아는 선택에 응답했습니다. 마리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된 것은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고, 곧 성령으로 말미암은 일'입니다.
이렇게 나자렛 처녀 마리아가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낳으실 태가 되셨기 때문에, '원죄에도 물듦이 없으셨고, 평생 동정을 간직하셨다.'는 교리가 믿을 교리로 선포된 것입니다.
오늘은 하느님의 어머니요, 우리의 어머니이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탄생 축일'입니다. 엄마의 탄생을 함께 기뻐하고 경축하면서, 어머니 마리아의 모범을 잘 따라가려고 날마다 노력하는 어머니의 사랑스런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복되신 동정녀께서 성자를 낳으시어 저희 구원이 시작되었으니, 동정녀 탄생 축일을 지내는 주님의 종인 저희에게, 천상 은총의 선물을 내려 주시어, 길이 참평화를 누리게 하소서."(본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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