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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3)
성령의 도움을 받으라
요 14:16-17 / 박찬길 목사
여러분도 경험하셨으리라 생각하는데 우리가 미지의 세계로 여행할 때에 가이드의 도움을 받으면 편안하고 즐겁습니다. 요즘은 인터넷을 통해서도 도움을 받지만 가이드의 도움을 받으면 여행이 한결 수월해집니다. 시간도 단축되고 정확한 정보도 얻을 수가 있고, 자는 것, 먹는 것, 행선지 등의 걱정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가이드가 자라고 하는 호텔에서 자면 되고, 가이드가 먹으라는 식당에서 먹으면 되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편한지 모릅니다.
간혹 긴급한 일정이 생길 때에도 가이드의 도움을 받으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지난 2월에 이스라엘에 갔을 때에 세겜을 가는 일정이었는데, 운전하시는 분이 갑자기 못 간다는 거예요. 왜 그런가 했더니 전날 어느 여행팀이 세겜을 갔다가 버스가 돌에 맞았다는 거예요.
세겜은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세겜 땅 상수리나무에 이르렀을 때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이 땅을 네게 주겠다고 하셨던 곳입니다. 아브라함이 거기에서 제단을 쌓고 하나님을 예배하던 곳입니다. 세겜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지파들을 모아서 고별설교를 했던 곳이고, 요셉의 뼈를 애굽에서 가져와서 장사했던 곳입니다. 요즘은 아랍 사람들이 거주하는 도시가 됐습니다.
유대 사람들과 아랍 사람들이 관계가 좋지 않으니까 가끔씩 문제가 발생되는데, 우리가 방문하기로 예정된 전날에 돌을 던지는 일이 생겨서 못 간다는 거예요. 방법이 없지요. 그래도 우리는 걱정하지 않았어요. 가이드가 있기 때문입니다.
가이드가 어디로 안내했느냐 하면 유대 광야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고대 길로 갔어요. 예수님이 열 두 살 되었을 때에 유월절이 되어서 부모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예배드리고 집으로 오지요. 그 때에 부모가 예수님을 잃어버렸어요.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나지요. 부모는 예수님이 동행하고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에 알게 된 거예요.
저는 성경을 볼 때에 궁금했어요. 부모가 왜 잃어버렸을까? 가보니까 대로가 아니었어요. 유대 광야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려면 산을 올라가야 하는데, 산 중턱에 나 있는 길입니다. 한 사람이 갈 수 있는 길이어서 사람들이 한 줄로 서서 가는 길입니다. 산 중턱에 길이 있어서 아래는 낭떠라지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부모님은 당연히 가는 줄로 알았다가 가서 보니까 아들이 없어서 당황하게 된 겁니다. 세겜을 가지 못한 것이 아쉬웠지만 고대 길을 걸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가이드의 도움을 받으니까 일정에 차질 없이 아름다운 추억을 담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도 도움을 주는 분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는 이 땅에서 천년만년 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이 오라고 하시면 가야 합니다. 이 땅에서 살아갈 때에 인생의 미래를 아는 분이 도와준다면 후회 없이 살수가 있잖아요. 내 인생을 인도해주며 도와주는 분이 있다면 우리의 인생은 성공적으로 살아갈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우리의 인생을 도와주시는 분을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그 분의 이름은 성령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16절,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보혜사는 돕는다, 변호한다는 뜻이 있는데, 예수님은 우리를 도와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해서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겠다는 거예요.
예수를 처음 믿는 분들은 보혜사가 쉽게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원어의 뜻을 설명하면 이해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다른 보혜사”라고 말씀하셨는데, 헬라어의 ‘다르다’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알로스’와 ‘헤테로스’입니다. ‘알로스’는 똑같은 것 중에 다른 것(another one)을 말할 때에 쓰고, ‘헤테로스’는 전혀 다를 때에(different one) 씁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다른 보혜사”는 알로스입니다. ‘똑같은 것 중에 다른 것’ another one입니다. 그 동안 예수님은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계셨지만, 앞으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로,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은 우리를 도와주시는 보혜사인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도와주실까요? 요한복음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자동차에 네비게이션이 있지요. 내가 어떻게 가야 할지 모를 때가 있어요. 주소만 입력하면 얼마나 자세하게 안내해 주는지 모릅니다. 어떤 자동차는 굵직한 남자 목소리로, 어떤 자동차는 예쁘고 상냥한 여자 목소리로 가르쳐 주지요. 내가 초행길이라고 해도 네비게이션에서 가르쳐주는 대로 가기만 하면 틀림없습니다. 성령께서 이처럼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 제자들은 홀로 남게 됩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이제부터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자신들의 미래가 불투명한 것입니다. 사명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제자들을 향해서 예수님은 성령이 너희를 가르치실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가르쳐 주십니다. 요즘은 세상이 복잡해서 어떻게 결정해야 할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공부하는 학생이 시험을 볼 때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이때에 성령께서 모르는 것을 가르쳐 주시면 얼마나 좋을까요? 할렐루야지요.
직장 생활이 얼마나 힘들어요. 어떻게 결정하는 것이 회사에 유익한 것인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인지 얼마나 복잡한지 몰라요. 이럴 때에 성령께서 지혜를 주셔서 가르쳐 주시면 얼마나 좋아요. 아이들 키우기가 얼마나 힘들어요. 부모 마음대로 되지도 않아요. 아이들이 말도 잘 듣지 않아요. 그럴 때에 성령께서 가르쳐 주세요. 아이들은 이렇게 키워라. 얼마나 좋아요.
여러분, 성령은 우리가 복음을 위하여 살아갈 때에 어떻게 해야 될지를 가르쳐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복음을 어떻게 증거할 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갈지를 가르쳐 주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분인지 모릅니다.
둘째는 생각나게 하십니다.
학교 다닐 때에 한번 이상은 경험하셨을 거예요 시험 볼 때에 몰라서 쓰지 못하는 것도 있지만 생각나지 않아서 쓰지 못하는 것도 있지요. 저의 경험으로 보면 생각이 날듯날듯 하는데 생각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배우긴 배웠는데 도무지 생각나지 않는 거예요. 어쩔 수 없이 시험지를 제출하고 나면 그때 생각이 납니다. 시험장 밖으로 나가면 그때서 생각납니다. ‘아 그건데, 아 그건데..., 내가 실수했네. 틀렸구나’ 성령께서 생각나게 하신다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여러분, 성령이 역사하시면 이 정도의 수준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생각나게 하신다는 말씀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생각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좁게는 복음서이고 확대하면 성경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임하시면 하나님의 말씀,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정말로 중요합니다. 이제 제자들은 예수님과 떨어져 있어야 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혼자서 결정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파할 때에 고난의 자리가 있잖아요. 우리가 사도행전을 통해서 알지만 제자들에게 핍박이 가해지잖아요.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에 태평성대의 시대가 오는 것이 아니라 고난의 시대가 오잖아요. 이럴 때에 제자들이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모르는데, 성령께서 어떻게 말할 것인지 생각나게 해 주시고 가르쳐 주신다는 것입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베드로와 사도행전에 나오는 베드로의 차이가 무엇인가요? 성령을 받기 전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3년 동안 따라다니면서도 예수님의 심중을 모릅니다. 자기 생각대로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에 내가 가는 곳에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고 말씀하시니까 베드로는 나는 감옥이나 죽는 자리라고 해도 주님과 함께 갈 각오가 되어 있다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에 모른다고 부인하잖아요. 도망가잖아요.
그런데 사도행전에 나오는 베드로는 이전의 모습이 아닙니다. 성령 충만을 받게 됩니다. 성령이 시키는 대로 말합니다. 이 모습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깜짝 놀랍니다. 베드로가 설교할 때에 3천명이 회개하고, 5천 명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많은 사람이 성령 충만을 받으니까 사람들은 새 술에 취하였다고 조롱합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말합니다. 지금은 아침 아홉 시입니다. 이 사람들은 술에 취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서 요엘서의 말씀을 증거합니다. “마지막 날에는 내가 내 영을 사람들에게 부어줄 것입니다.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꿀 것입니다. 그러면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성령 충만하니까 요엘서의 말씀이 생각나서 외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이렇게 도와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성령의 도움을 받으라고 하니까 성령 받은 다음에 돈 떼먹은 사람이 생각난답니다. 자기에게 잘못한 사람, 자기 흉을 본 사람이 생각난다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성령을 받으니까 다른 사람의 허물이 생각나고, 미운 사람이 생각난다는 거예요. 그것은 성령의 생각이 아닙니다. 성령을 받으면 내 자신을 바로 보게 됩니다. 나의 연약함, 내가 다른 사람에게 잘못한 점, 내가 함부로 말한 것이 생각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을 받으면 “회개하라”(막1:15)는 말씀이 생각나서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막11:17)이라는 말씀이 생각나서 제단에 나와서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섬기라는 말씀이 생각나서 교회에 충성하게 되고 성도들을 극진하게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사랑하라는 말씀이 생각나서 성도들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이 생각나서 이웃을 내 몸처럼 아끼고 돌보며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 받은 사람들의 모습인 줄로 믿습니다.
목회하면서 절실하게 느끼는 것이 많습니다. 하나님이 많은 사람들을 보내주시고 물질도 보내주시고 건물도 주시고 파킹낫도 넓은 곳을 주시면 교회가 얼마나 탄력을 받겠어요. 그런데 이러한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의 도움을 받는 것입니다.
신앙생활하면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요? 자녀들이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회사에 취직하고 여러분이 돈을 많이 벌고 건강한 것인가요? 아니지요. 신앙생활하면서 정말 중요한 것은 성령의 도움을 받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잖아요. 목회도 잘 되고, 성도들도 형통합니다. 신앙생활이 건강합니다. 성령의 도움을 받으셔서 신앙생활의 놀라운 축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성령이 언제까지 우리를 도와주실까요? 16절 끝부분에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성령은 일정한 기간에만 도와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예배드릴 때만 도와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기도할 때에만 도와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성령은 변함이 없습니다. up and down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한번 임하시면 영원토록 함께 하셔서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어떤 분은 “목사님, 전에 성령을 받았는데, 요즘은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아요. 성령이 떠났나 봐요.” 말합니다. 왜 그럴까요? 내가 성령을 대우해 드리지 않으니까 나를 도와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령을 최고도 대우해 드리시기 바랍니다. 성령이 여러분의 마음에 가르쳐 주시고 생각나게 해 주실 때에 그대로 순종하면 성령께서 도와주십니다. 내가 성령을 최상으로 대우해 드리면 성령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서 가르쳐 주시고 생각나게 해 주시면서 복음의 역사를 이루시는 줄로 믿습니다.
성령은 어디에서 역사하실까요? 17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성령은 밖에는 계시지 않습니다. 내 안에 있습니다. 이 세상에 가장 귀한 것이 인간이고 인간에게 가장 귀한 것이 있다면 어디입니까? 마음입니다. 잠언 4:23,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심령이 중요하기 때문에 성령이 내 속에 들어와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시지요. 인격이 성숙하기를 원하시지요. 모든 것은 마음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없어도 내 안에 성령이 오시면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이고, 내가 모든 것을 다 소유했어도 내 안에 성령이 없으면 그 사람은 지옥 같은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령은 내 안에 들어오셔서 생각나게 해 주시고 가르쳐 주시는 분입니다. 나를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분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보혜사 성령께서 내 안에 나와 영원토록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3: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여러분, 성령은 우리 안에서 어떻게 역사하실까요? 성령이 임하면 얼굴이 환해집니다. 인간의 마음은 죄악으로 어두워졌습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졌기 때문에 우리의 심령은 소망이 없습니다. 절망과 낙심뿐입니다.
공부를 많이 하면 마음이 밝아질까요? 돈이 많으면 마음이 환해질까요? 지위가 높아지면 마음이 밝아질까요? 결혼을 잘하면 인생이 활짝 열려질까요? 근본적인 해결점은 내 마음에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인 햇빛이 들어와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이 임해야 합니다. 우주 밖에서 들어오는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의 힘이 내 안에 들어올 때에 내 얼굴이 환해지는 것이고 영혼이 빛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성막이 있는데 성막은 네 종류의 덮개를 씌우잖아요. 출애굽기 26:1, “너는 성막을 만들되 가늘게 꼰 베 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로 그룹을 정교하게 수 놓은 열 폭의 휘장을 만들지니” 가장 안쪽에는 가늘게 곤 베실과 청색 자색 홍색으로 수 놓은 덮개가 있어요. 두 번째 덮개는 염소 털(출26:7)로 만들어서 덮고, 세 번째 덮개는 수양의 가죽(출26:14)으로 만들어서 덮고, 네 번째 덮개는 해달의 가죽(출26:14)으로 만들어서 덮어야 합니다.
성막을 네 종류의 덮개로 씌웠으니 얼마나 어두울까요? 그런데 성막 안에 불이 있어요. 감람유로 만든 불이 있어요. 이것이 성령입니다. 어두워진 우리의 마음을 비출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성령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내 심령에 들어오면 내 마음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내 얼굴이 빛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인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시온의 대로가 활짝 열리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 오셔서 나에게 가르쳐 주시고 생각나게 도와주시면 나에게 이러한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하는 것도 성령이 도와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3,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베드로가 “주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을 때 주님은 이것을 알게 한 이는 네가 아니라 성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오시도록 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연구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주신다고 생각하는데, 신앙생활은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세계는 영적이기 때문에 연구하고 공부해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믿음으로 발견되는 것입니다. 믿으려고 연구하고 공부하면 은혜의 세계에 들어가서 영적인 세계를 발견하고 느끼고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앙생활이 힘들다고 하는데, 내 힘으로 하려니까 힘든 것입니다. 내 능력으로 하려니까 힘든 것입니다. 내 경험으로 하려니까 답답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을 받아보세요. 성령의 도움을 받아보세요. 신앙생활이 얼마나 쉬운지 모릅니다. 신앙생활이 얼마나 즐거운지 모릅니다. 기쁨이 있어요. 예수님께서 내가 주는 기쁨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않다고 말씀하시잖아요. 하나님의 영이 내 안에 들어오면 세상이 주는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가만히 보면 얼굴이 환한 사람들이 많아요. 이번에도 집회 때에도 보니까 얼굴이 환한 분들이 많더라구요. 지난번 수련회 때에도 보니까 얼굴이 환한 겁니다. 영적인 미인미남들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나에게 들어오면 이렇게 달라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하면 성령의 도움을 받으실 수가 있을까요? 예수님의 말씀을 믿으시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주실 것이다. 그냥 믿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가르쳐 주실 것이고 생각나게 해 주실 것이다. 믿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믿으면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빌리 그래함(Billy Graham) 목사님이 지은 책을 보니까 그리스도를 영접한 어린 아이와 그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린 아들이 예수님을 믿고는 아빠에게 물었습니다. “아빠,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한 성령을 어떻게 믿으라고 해요?” 전기공이던 아버지는 그 방법을 가르쳐 주려고 아들을 발전소로 데리고 갔습니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전기가 나오는 동력기를 보여주면서 말합니다. “저것은 우리 집을 따뜻하게 해주고 밝게 하도록 전기를 공급해 주는 기계란다. 우리는 전기를 직접 볼 수 없지만 그 힘이 기계 속에서 나온단다.”
그러니까 아들이 “아빠, 전기가 있다는 것을 이제는 믿을 수 있어요.” 그때에 아빠가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도 마찬가지야. 하나님이 계신 것을 그대로 믿으면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이 우리의 눈에 보이는 거야.” 그래서 이 아들이 성령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믿으면 성령이 나에게 들어와서 나를 움직여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얼마나 신비한 일인지 모릅니다. 오늘이 성령 강림절인데 기도하세요. “하나님, 성령이 나에게 오게 해 주세요. 내가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습니다. 성령의 도움을 받으며 내 인생을 살아가기 원합니다.”
성령강림절에 성령의 도움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을 인정하세요. 성령을 받아 드리세요. 성령을 의지하여 성령의 도움을 받으세요. 육체의 한계를 뛰어넘는 일이 생깁니다. 여러분의 지식을 뛰어넘는 일이 생깁니다. 성령의 도움을 받으면 우리의 실력과 능력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근사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러한 사람으로 만들어서 복음을 증거 하여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성령을 보내주시고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성령강림절에 성령 충만함을 입으시고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능력 있게 감당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령의 도움을 받기 원합니다. 내 실력과 능력은 한계가 있어서 어림도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도움을 받을 때에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게 되어서 내 실력과는 비교할 수 없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음을 믿사오니 성령의 도움을 간절히 원합니다. 주여,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성령님 임하소서!
요 14:16-17 / 신문수 목사
두 천사가 여행을 하다가 어느 부잣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거만한 그 집 사람들은 이 손님들에게 저택에 있는 객실 대신 차가운 지하실 한쪽 구석 비좁은 공간을 내주었습니다. 딱딱한 마루바닥에 누워 잠자리에 들 무렵 늙은 천사가 벽에 구멍이 난 것을 발견하고는 그 구멍을 메워주었습니다. 젊은 천사가 그 이유를 묻자 그는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네.”라고만 대답했습니다. 그 다음날 밤, 두 천사는 아주 가난한 집에 머물게 되었는데, 농부인 그 집의 남편과 아내는 그들을 아주 따뜻하게 맞아 주었습니다. 그들은 얼마 되지도 않은 음식을 나누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침대를 내주어 편히 잠잘 수 있도록 배려를 해 주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날이 밝았습니다. 그런데 농부 내외가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우유를 짜서 생계를 유지하며 살았는데, 유일한 생계원인 하나밖에 없는 젖소가 간밤에 들판에서 죽었기 때문입니다. 젊은 천사는 화가 나서 늙은 천사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게 내버려 둘 수 있었느냐고 따졌습니다. 부잣집 사람들은 모든 것을 가졌는데도 구멍 난 벽을 막아주며 도와주고, 궁핍한 살림에도 자신들이 가진 모든 것을 나누면서 하는 이들의 귀중한 젖소를 어떻게 죽게 놔둘 수 있느냐고 늙은 천사를 몰아붙였습니다. 그러자 늙은 천사가 대답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네.” 젊은 천사는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냐”고 다그쳐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늙은 천사가 설명을 합니다. “우리가 그 저택 지하실에서 잘 때 나는 벽에 난 구멍을 통해 벽속에 금덩이가 있는 것을 발견했지. 그 집 주인은 탐욕으로 가득 차 있어서 자신의 부를 나누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벽에 난 구멍을 봉해서 그가 금을 찾지 못하도록 한 것 일세. 그리고 어젯밤 우리가 농부의 침대에서 잘 때는 죽음의 천사가 그의 아내를 데려가려고 왔었네. 그래서 농부의 아내 대신 젖소를 데려가라고 했던 것일세.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네.”
이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마치 이 세상이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양 살아갑니다. 더 잘 보이기 위해서, 더 날씬해 보이기 위해서, 더 비싸 보이기 위해서, 더 고급처럼 보이기 위해서 혈안이 된 것 같아 보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보다 눈에 안 보이는 것이 사실은 더 중요하고, 더 가치 있고, 더 영향력이 있습니다. 눈에 안 보이는 여러분의 생각이나 마음이나 정신, 영혼에 의해서 여러분의 삶이 이루어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먼저 영혼이 잘 되어야 범사가 잘 됩니다. 그러면 몸도 강건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영이 죄로 말미암아 타락해져서 영으로써의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영으로 하나님을 알고, 믿을 수 있게 되었는데, 영이 타락하여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생각이 허망하여졌고, 그 마음이 어두움으로 가득 찼고, 그 영이 우둔하여져서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으로 생각하여 우상을 섬기며, 욕심대로 자신을 내버려두어 참으로 온갖 죄를 지으면서도 그것에서 빠져나오려고 하기는커녕, 점점 더 죄의 늪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 죄의 결과로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불행을 가져다주게 되었습니다. 삶의 고통과 슬픔과 허무가 시작되었습니다. 평화가 깨지고, 사랑이 사라지고, 거짓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선하게 살기로 다짐하고, 행복하게 살기로 결심하고, 영혼이 잘되도록 목표를 세우면 우리 영혼이 잘 됩니까?
새해를 맞으면서 하는 결심은, 지난해를 돌아보면서 잘못된 것, 고쳐야 할 것들을 성찰하고, 새해에는 이렇게 하리라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짐이 이루어질 것을 소망하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어느 글에 보니까, 어떤 아가씨는 신년 결심은 “핸드폰을 챙겨라, 언제나”라고 합니다. 지난해에 여섯 번이나 핸드폰을 잃어버리고 여섯 번이나 다시 찾았기 때문입니다.
어느 시인의 신년 결심은 “졸지 말자!”랍니다. 그가 어느 날, 집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타고서 중간에 전철을 갈아타야 했으나 술기운에 졸다가 새벽 1시에 반대편 종착역에 도착해서야 강제 하차를 당한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기를 원하기 때문에 새해 결심을 “졸지 말자”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인가를 다짐해보고, 결심해 본 사람은 그것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잘 알 것입니다. 다짐하고 결심한 것을 지키려고 애를 써 본 사람은 내 힘과 내 의지만으로 그 결심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절실히 깨달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내 계획대로 안 된다는 것, 내 힘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 내 의지와 결심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더욱 절실히 경험하게 됩니다. 인생이 쉽지 않다는 것, 인생이 힘들고 어렵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나름대로 안간힘을 써 보지만 결과는 흡족하지 않습니다.
맥스 루케이도는 [목마름]이라는 책에서, 자동차를 구입한 뒤에 자동차의 시동을 걸지 않고, 자동차를 밀고 다니는 사람, 자동차를 끌고 다니는 사람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여러분은 그런 사람에 대해 이야기를 듣게 된다면 웃으시겠지요. 그런 멍청한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맥스 루케이도는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지만 성령의 도움을 받지 않고 사는 성령 충만하지 못한 사람을 또 이런 사람으로 비유합니다. 성령의 도움없이 선하게 살려고 애쓰고, 새사람이 되려고 애쓰고, 변화된 삶을 살려고 애쓰는 것을 마치 자동차를 밀면서 다니는 사람에게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종교적인 사람이라 합니다. 종교적인 사람과 영적인 사람은 차이가 있습니다. 종교적인 사람은 자기 힘으로, 자기 능력으로 어떤 선함에 이르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영적인 사람은 성령에 의하여 사는 사람입니다.
본문 말씀은 성령 하나님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신 후에 제자들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시면 성령 하나님을 보내주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본문 말씀 앞, 7절에 예수님께서 떠나가시는 것이 우리들에게 유익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예수님께서 떠나가시지 않으면 보혜사 성령님이 우리들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영이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시지 않고 예수님이 계속 이 세상에 남아계셔야 한다면, 예수님은 몸을 입고 계시기 때문에 한 장소 밖에 계실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땅은 초만원이 될 것이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사람들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질 지도 모를 일입니다. 나부터도 한국 땅에 안 살고 이스라엘 나라로 어떻게 해서든지 가서 살려고 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온 지구에 있는 신앙인들에게 말씀하실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의 문제를 도우실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우리를 놔두고 그냥 떠나실 수도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너무 비싼 대가를 지불하시고 우리의 생명을 구원하셨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방치해둘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으시고, 보혜사 성령 하나님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전에 섬기던 교회에 탁아방을 크게 운영하는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하루 종일 맡기는 아이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 아이들은 엄마, 아빠보다 탁아방을 운영하는 그 집사님과 있는 시간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아이가 아프면 엄마, 아빠는 출근해야 하니까 그 집사님이 병원에도 데리고 가고, 아이의 하루 생활의 많은 시간을 같이 있다보니까 어떤 아이는 자기 엄마, 아빠 보다 그 집사님을 더 좋아하는 경우들이 혹간 있다고 합니다. 밤늦게 아이를 찾으러 온 엄마에게 아이가 선뜻 가지 않는 경우가 있을 때에는 민망한 마음이 들 때도 있다고 합니다. 그 아이에게 있어서 실제적인 보호자는 부모들 보다 탁아방 원장입니다. 그렇게라도 맡길 수 있다는 것은 천만다행입니다.
요즘에는 이런 뉴스가 뜸 한 것 같습니다. 맞벌이 부부가 아주 어린 자녀들을 맡길 때가 없어서 방 안에 먹을 것을 넣어주고서 밖에서 잠그고 일하러 갔는데, 불이 나서 그 아이들이 문을 열고 나오려고 해도 밖에서 잠갔기 때문에 문을 열고 나오지 못해서 방 안에서 질식해서 죽은 사건들 말입니다. 과거에는 종종 있었습니다. 곁에 있는 보호자가 없어서 벌어진 참사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 세상속에 그렇게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주제입니다. 우리에게 보호자를 보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교우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끝까지 책임지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 주신 것은 우리를 도우시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 방치해 두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를 도우시는 분을 보내주셨습니다. 16절에, “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보혜사 성령님을 성부 하나님께서 보내주셔서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성령을 일컫는 말이 성경에는 많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신’이라고도 하고, ‘하나님의 영’ 또는 ‘예수의 영’이라고도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는 예수님께서 성령님을 일컬어 ‘보혜사’라고, ‘진리의 영’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보혜사’라는 말의 원어는 “파라클레토스”인데,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베풀도록 곁에 부름을 받은 자’라는 뜻으로 “보호해주시는 분” “도와주시는 분” “변호사” “위로자, 상담자, 친구”이라는 뜻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우리의 위로자이십니다. 상담자이십니다. 친구이십니다.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이시고, 보호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보혜사 성령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가운데 첫 번째는 성도들 안에 거하시는 것입니다. 본문 16절 하반절의 말씀이 그 뜻입니다. 17절의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는 말씀과 같은 뜻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우리 안에 거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령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성령님, 제 마음 속에 임하시옵소서.” 금년 표어입니다. “성령님, 임하소서!” 모든 교우들이 항상 성령님께서 오셔서 함께 하시기를 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로마서 8장 9절 말씀,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오시면, 우리가 성령 하나님을 통해서 예수님을 믿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교회의 교적부에 이름이 등록되어 있다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거하실 때 비로소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누구도 성령의 도우심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습니다.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성령의 도우심 없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성령 하나님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구주이심을 믿게 되고, 그분이 주이심을 고백하게 되는 것도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셔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날 구원해주시는 분이심을 믿습니까? 구원받았음을 확신하십니까? 그렇다면 성령 하나님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거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깨닫고 받아들이는 것도, 하나님의 자녀로써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는 것도,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것도, 영원한 기업을 소망하는 것도 성령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우리는 사탄을 이길 수도 없고, 유혹을 물리칠 수도 없고, 죄를 억제할 수도 없고, 시험에서 이기는 일도 없을 것이며, 그리스도인으로 신앙을 지키며 능력 있는 삶을 사는 일이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혜사 성령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을 보호하시고, 도와주십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모든 것들, 하나님이 약속하신 모든 것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허락하신 모든 것들은 오직 유일하신 능력의 근원이신 성령 하나님께 우리가 연결되어 있을 때에만 제대로 현실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여러분, 텔레비전이나 냉장고나 온열기를 코드를 꽂았다고 가동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스위치를 켜야 합니다. 성령 하나님의 스위치를 켜야 역사가 나타납니다.
교우 여러분,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은 영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성령님이 영이시라는 사실은 성령님이 비물질적이시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오감 바깥에 계신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직접 성령님을 만져보거나, 눈으로 보거나, 냄새를 맡거나, 음성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17절,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고 말씀하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살아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곁에, 우리 속에 거하십니다.
성령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무소부재하십니다. 안 계신 곳이 없다는 뜻입니다.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성령 하나님을 믿고 도우심을 구하면 도와주시는 분이십니다. 영이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우리 영 속에 오셔서 우리의 마음 깊은 곳을 감찰하시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십니다.
죄를 책망하셔야 할 때에 죄를 깨닫고 뉘우치게 하시고, 상처를 받고 슬픔 가운데 있을 때에 위로해 주시고, 가야 할 길을 알지 못할 때에 분별하게 해 주시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알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도록 인도하십니다. 또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도록 기도하게 하십니다. 입에서 찬송이 나오도록 하십니다. 마음속에 세상이 주지 못하는 기쁨도,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안도 성령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영이신 성령 하나님은 우리의 영을 통해 일하십니다.
고린도전서 2장 10절 이하에는, 성령님께서 모든 것을, 심지어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속속들이 살피신다고 말씀하면서, 사람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그 사람 속에 있는 영이 아니고서야 알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생각도 하나님의 성령만이 아실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영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오는 성령을 받았고, 성령에 속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에 속한 것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그런 것들은 영적으로만 분별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성령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생각을 아시기에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계획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이시니 우리에게 하나님의 생각을 넣어주시고, 하나님을 닮게 하십니다.
교우 여러분,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대로 이 세상에서 살아가기 원하십니까? 매일 하나님이 가라고 하시는 곳을 가기 원하십니까? 하나님이 하라고 하시는 일을 행하면서 살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고 살아가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이렇게 간구하십시오. “성령님, 임하소서. 성령님, 내 마음 속에 오셔서 충만히 거하소서. 성령님, 나를 인도하소서. 성령님, 나를 다스리고 지배하여 주시옵소서. 나는 어리석습니다. 나는 연약합니다. 나는 부족합니다. 나는 추악합니다. 나는 교만합니다. 나는 열등의식에 빠져있습니다. 나는 외롭습니다. 나는 공허합니다. 내 삶은 무의미합니다. 나는 절망 속에 있습니다. 무기력합니다. 성령님, 내 속에 오셔서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기쁨이 없습니까? 사람과의 관계에서 자꾸만 부딪힙니까? 마음이 메말라 있는 것 같습니까? 뭔가에 자꾸만 불안합니까? 여러 가지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습니까? 평안이 없습니까? 의욕이 상실되었습니까? 진실하게 살고 싶은데 잘 안됩니까? 분노와 적개심, 복수심이 사라지지 않습니까? 이기심과 명예욕과 교만이 사라지지 않습니까? 탐욕과 정욕 때문에 자꾸만 유혹에 넘어집니까?
나보다 지혜로우신 분,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분, 나보다 통찰력이 있으신 분, 나보다 온전하신 분, 나보다 성결하신 분의 도움을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성령 하나님을 구하십시오.
“성령님, 임하소서!”
성령 하나님은 믿고 순종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임하십니다. 목말라 물을 마시기를 원하듯 성령 하나님을 모시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임하십니다.
간절히 갈망하십시오. 간절히 구하십시오. 간절히 사모하십시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갈망하십시오. “성령 하나님이 아니시면 나에게 소망이 없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자꾸만 실수하고, 자꾸만 넘어지고, 자꾸만 허물이 드러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임하시지 않으면 나는 무기력합니다. 그러나 성령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능력주시는 자안에서 무슨 일이든지 다 해낼 수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 임하소서!” 이렇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교우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기쁨과 은혜 속에서 살기를 원합니다.
교우 여러분, 보혜사 성령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충만히 임하시는 한 해가 되시기 바랍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
요 14:16-17 / 신문수 목사
세상에는 특별감지기능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시각, 촉각, 미각, 청각, 후각 등 다섯 개의 감각인 오감만으로는 감지할 수 없고 판단할 수도 없는 것에 대하여 과학적 기계를 이용하여 감지하는 것입니다. 북극의 자력을 감지하는 데는 나침반을 사용합니다. 나침반은 어느 곳에 있던지 북쪽을 향하여 바늘이 움직여 가리키기 때문에 방향을 파악하는 데 중요하게 사용됩니다.
먼 곳으로부터 오는 전파는 레이더를 가지고 감지합니다. 비행기라든지 미사일이라든지 물체가 날아올 때에 레이더를 가지고 감지하여 식별합니다. 또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별에서 날아오는 전파 에너지는 전파망원경으로 관측합니다. 그래서 별의 위치뿐만 아니라 그 별의 특성들을 관측합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특별감지기능을 가지고 있는 기계를 통하여서만 감지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감각기관으로는 느끼고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차원이 다른 세계를 느끼고 알고 경험하기 위해서는 그 세계에 맞는 기계나 또는 그 무엇이 필요합니다.
저희 집에서 지금 보는 텔레비전은 바꾼 지는 2년이 채 안됩니다. 그전까지 보던 20인치 텔레비전은 10년이 넘도록 보던 것입니다. 화면이 잘 안 나올 때에는 A/S 센타에 연락해서 고쳐서 잘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A/S 센타 직원이 와서 고치면서 하는 말이 이제 다시 화면이 이상하면 더 이상 수리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 텔레비전을 켰더니 화면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움직일 때마다 몸에서 불길 같은 것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것도 붉은 색만이 아닌 여러 가지 색깔의 불기둥이 사람이 움직일 때마다 같이 움직이는 것이었습니다. 도무지 그런 상태로는 연속극도, 뉴스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텔레비전 방송국에 이상이 생겨서 그런 것도 아니고, 케이블 TV회사 측에 이상이 생겨서 그런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 집 텔레비전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전파를 받아서 그대로 화면에 비추어줄 수 있는 기능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그렇다고 라디오를 켜서 텔레비전 방송을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냉장고를 켜서 텔레비전 방송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텔레비전을 새 것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특별히 감지할 수 있는 기능, 감지된 것에 반응할 수 있는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그런 현상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감각기관이나 이성으로는 영원한 세계, 영혼의 세계를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영혼의 세계를 느끼고 경험하기 위해서는 우리 영혼이 제대로 기능을 발휘해야 합니다. 그러나 죄로 말미암아 우리 영혼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의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고 상실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이 제대로 그 기능을 발휘하고, 영적인 세계를 제대로 느끼고 경험하고 영위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될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 영이신 성령 하나님을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대로 보내주셨습니다.
영이신 그 성령 하나님을 본문 말씀에서는 보혜사라고도 말씀하시고, 17절에서는 ‘진리의 영’이 우리와 함께 거하시고, 우리 속에 계실 것이라고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진리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에 대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어떤 일을 하시는 지를 깨닫고자 합니다. 그래서 진리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진리의 성령 하나님은 빛을 밝혀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어둠 속에 있을 때에는 앞을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어둠 속에 어떤 물건들이 있는지, 어떤 장애물이 있는지를 알지 못하여 부딪히거나 넘어지기가 쉽습니다. 빛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둠 속에서는 혼돈과 혼란과 무질서가 일어납니다. 방향을 잡지 못합니다. 우리 마음은 온갖 어둠 속에 있어서 볼 것을 못 봅니다.
우리의 영혼은 죄로 말미암아 어둠 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영혼의 세계, 영원한 세계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어둠 속에 있는 영혼에 빛을 비추어 우리 영혼 속에 있는 온갖 어둡고, 더럽고, 혼돈스럽고, 부정적이고, 마귀적인 것을 몰아 내주시기 위해 성령 하나님께서 오셨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는, 성경 즉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 말씀하는데, 여기서 하나님의 감동이란 성령의 감동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기록하도록 하신 분도 성령 하나님이시고, 그 성경 말씀을 깨달아 알 수 있도록 하시는 분도 성령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 하나님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진리의 영이시기 때문에 거짓이 물러가도록 빛을 비추어 진리를 발견하도록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령 하나님은 진리의 말씀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성경 말씀을 떠나서 성령 하나님을 바로 알고 바로 믿을 수 없으며, 성령 하나님을 떠나서 성경 말씀을 바로 알고 바로 믿을 수 없습니다. 성령의 빛을 비추어 주심 없이는 누구도 성경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달을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시편 119편 18절에 시인은 하나님께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 이 고백이 우리의 기도의 제목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에 성령 하나님께서 빛을 비추어 주셔서 우리 마음속에서 어둠이 사라져서 마음의 눈이 열리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밝은 빛 가운데로 인도하셔서 하나님 말씀을 바로 읽고 보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령의 내적 조명’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성령의 내적 조명’이란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조명 즉 빛을 비추어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어거스틴은 성령의 조명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우리 육신의 눈이 만물을 보기 위해서는 빛이 필요합니다. 빛이 비치기만 하면 눈을 뜨고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의 눈은 우리 스스로 떴다 감았다 하지 못합니다. 마음의 눈은 성령이 오셔서 열어주셔야만 합니다. 이것을 ‘조명’이라고 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빛을 비추어 마음의 눈을 밝혀주시지 않으면, 영의 눈을 열어주시지 않으면 아무리 성경을 읽는다고 하더라도 그저 그 내용을 역사소설이나 문학작품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적인 내용으로만 기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 하나님께서 빛을 비추어 주시면 영적인 눈이 밝아지게 됩니다. 영적인 눈이 밝아지면 보지 못하던 것을 봅니다. 믿지 못하던 것을 믿게 됩니다. 위엣 것을 사모하게 됩니다. 하늘 위에서 주시는 것을 받게 됩니다. 영원한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신앙인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말씀의 절대적 권위를 존중합니다. 성경 말씀을 소중히 여깁니다. 성경의 원리와 교훈을 철저히 따르려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때마다 먼저 기도합니다. “성령 하나님, 제 속에 임하셔서 빛을 비추어주시고, 내 머리로 읽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으로 느끼고, 깨닫고, 믿어지게 해 주십시오.” “성령님, 제게 들려주시고자 하시는 말씀을 듣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교우 여러분, 성경을 읽을 때만 아니라 설교를 들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앉아서 육체의 귀로만 듣는 사람과 성령을 통한 영으로 듣는 사람은 설교를 들을 때에 받는 은혜가 다릅니다. 성령을 통하여 설교를 듣고자 하는 사람은 마음의 준비가 다릅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듣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충만히 임하셔서 말씀을 바로 듣게 하시고, 나를 깨닫게 하시고, 내 마음의 밭이 옥토가 되어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이 뿌리를 내릴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은혜의 말씀이 되게 하옵소서.” “믿음으로 말씀을 받게 하옵소서.” 그래서 마음에, 영에 말씀이 전해질 때에 “아멘”하면서 받습니다.
교우 여러분, 진리이신 성령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 충만히 임하셔서 모든 어둠을 몰아내고 빛을 비춰주시기를 바랍니다. 마음의 눈이 밝아지기를 바랍니다.
성령 하나님은 깨닫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깨닫게 하시는 데 있어서 전문가이십니다. 스승과도 같습니다. 먼저 빛을 비추어 드러내십니다. 성령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면서 우리에게 빛을 비추어 죄를 깨닫게 하십니다. 우리의 죄를 지적해주심으로 우리가 죄에 대한 대가를 치뤄야 하고, 죄 때문에 죽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구원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말을 듣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은 죄를 짓지 않았고, ‘나만큼만 착하게 살라’고 말합니다. 자신은 범죄자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범법자가 아니기 때문에 죄인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교우 여러분, 범죄와 죄는 다릅니다. 범죄는 세상의 법을 어겨 지은 죄입니다. 살인했다든지, 폭력을 행사했다든지, 도둑질을 했다든지, 다른 사람의 재산을 훼손했다든지 하는 것은 범죄입니다. 그러나 죄는 그런 범죄는 당연히 포함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예수님을 믿지 않은 것, 우리에게 생명을 주셔서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은 것이 죄입니다. 마음으로 미워하고, 마음으로 간음하고, 마음으로 살인한 것도 죄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기 해드리지 못한 것도, 믿음으로 행하지 않은 것도 죄입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충만히 거하시면, 그전에는 죄라고 깨닫지 못하던 것을 죄로 깨닫게 됩니다. 무디어졌던 양심이 진리의 영으로 민감해집니다. 죽었던 양심이 살아납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더 많은 죄를 깨닫습니다. 죄를 더 많이 짓는다는 말이 아니라 그동안 모르던 죄를 더욱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이 하나님의 영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판단을 깨닫게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기준으로 깨닫게 해주시고, 하나님의 생각을 우리에게 넣어주셔서 깨닫게 합니다.
요한복음 15장 26절 말씀에는 진리의 성령이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나왔다고 말씀합니다. 고린도전서 2장 10, 11절에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 하나님에 의하지 않고는 영적인 세계를 알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마음을 다 알고 계신 진리의 성령님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이 우리 마음속에 빛을 비추어 역사하실 때에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생각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오직 진리의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계실 때에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우리가 죄를 지을 때에 아버지 하나님께서 얼마나 슬퍼하시는지,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시는 지, 우리를 어떤 마음으로 대해주시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제가 목사라고 해서 어찌 전혀 죄를 짓지 않고 살겠습니까? 목사라고 해서 언제나 마음이 맑은 물처럼 깨끗하기만 하겠습니까? 목사라고 해서 허물이 왜 없겠습니까? 실수가 왜 없겠습니까? 그 때마다 저는 하나님께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갑니다. 마치 집을 나가 방탕하여 모든 것을 다 잃고서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는 둘째 아들처럼, 하나님께 고개를 떨구고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나를 품어주시면서 “내 아들아, 내가 다 안다. 내가 너를 알고, 네 마음에 있는 나를 향한 마음을 안다. 용서할 테니 힘내라. 내가 너를 사랑하는지 잘 알지 않느냐?” 성령 하나님을 통해서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느낄 수 있기에 또다시 저는 일어섭니다. 또다시 시작합니다. 또다시 주님을 믿고 주님의 손을 잡고 섭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가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을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가치관이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의 말이 달라지고, 우리의 얼굴빛이 달라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우리 자신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을 받아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 속에 가득 채워 우리의 영성이 달라질 것입니다.
인격이 성숙해지면 질수록 자신의 부족함을 더욱 깨닫듯이 성령이 충만해지면 질수록 내 입장에서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장에서 나를 보게 됩니다. 하나님 중심의 생각을 갖게 됩니다. 성령님의 빛을 비추어 주심으로 인해 우리의 삶의 방향이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방향이 바로 잡힙니다. 이것이 영성입니다. 이런 일을 진리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하시는 일입니다.
교우 여러분, 진리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을 충만히 모시고, 죄를 깨닫고, 나의 모습을 깨닫고,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깨달아 가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은 변압기이십니다.
댐을 막아 수력 발전소를 만들면 수백만 볼트의 전기가 만들어집니다. 발전소와 수원지에서부터 도시로 들어오는 선을 따라 들어오다 보면 “위험, 고압선 주위”라는 표지판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변전소를 거쳐서 공장으로, 가정으로 전기가 공급됩니다. 변전소에는 “출입 금지, 위험”이라는 경고판을 써서 붙여 놓습니다. 저의 이모부님이 변전소장을 지내셨기에 어린 시절 방학 때에 놀러 가면, 이모님께서 늘 조심을 시키셨기 때문에 너무도 잘 압니다. 변전소에 들어온 전기를 그냥 가정에서 사용하면 집을 다 태워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공학도들이 변압기를 만들어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전기만큼 그 단위를 낮추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변압기란 발전소에서 만들어진 전기를 그대로 공급되지 않고 용도나 대상에 따라 변압하는 장치를 말합니다. 공장에 들어가는 전기의 전압이 다르고, 가정에 들어가는 전기 전압이 다릅니다. 가정에서 사용하는 가전제품의 종류에 따라 220볼트로, 또는 110볼트로 변압시켜 사용해야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교류를 직류로, 또는 직류를 교류로 변환해주는 기계도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놀라운 힘과 능력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 놀라운 힘과 능력을 우리에게 그대로 행하시면 우리는 아무도 살아남을 사람이 없습니다.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령 하나님은 인격적이신 분이십니다. 각 사람에 따라 인격적으로 대하시는 분이십니다. 같은 진리를 가지고도 대상에 따라 변압하십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각각에 맞게 깨닫게 하시고, 가르쳐 주십니다.
요한복음 14장 26절 말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여기서 가르친다는 말은 상세히 설명하거나 해설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개인 교사처럼 각 수준에 맞게 역사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훌륭한 선생님은 눈높이 교육을 하듯이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은 우리에게 맞는 눈높이로 역사하십니다.
교우 여러분, 설교자들에게는 고민이 있고, 설교를 준비하는 데 있어서 어려움이 있습니다. 다양한 교인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신앙생활을 한지 수십 년이 넘은 분도 계시고, 이제 막 믿기 시작한 분도 계십니다. 성경에 대해서 너무도 잘 아는 분도 계시고 성경에 대해 잘 모르는 분도 계십니다. 구원을 받아 새생명이 시작된 분이 있고, 아직 복음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분이 함께 계십니다. 그래서 어디에 초점을 맞추어 설교를 해야 할지 고민이 되고, 그에 따른 부담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교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은 나의 인간적인 고민이고, 성령 하나님께서 각기 필요한 부분을 깨닫게 해주시고, 은혜를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부족한 저로서는 성령 하나님께 기도할 뿐입니다. 나로서는 설교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는 설교의 목적을 정하고, 이 설교를 들을 때에 어떤 결과가 나타날 것을 예상하면서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설교의 결과는 성령 하나님께서 역사 하시어 각 사람에 맞는 은혜를 주시도록 기도할 뿐입니다. 그러면 성령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맞게, 각 사람이 준비된 그릇에 맞게 깨닫게 하시고, 감동을 주시고, 은혜를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님께서 역사하실 때에, 성경 말씀은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말씀이지만, 오늘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공급됩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때에, 성경 말씀을 읽는다든지, 하나님 말씀을 설교로 듣는다든지, 성경 말씀을 연구하고 배울 때에, 나에게 딱 맞는 말씀, 나에게 해주고 싶으신 말씀, 내게 가장 적절한 말씀으로 주십니다.
하나님의 장엄한 진리를 우리가 필요로 하는 수준에 맞게 나누어주십니다. 우리가 받을 수 있는 정도의 분량에 맞게 공급해 주시고 깨닫게 해주십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진리를 이 남자에게 맞게, 저 여자에게 맞게, 이 어린이에게 맞게, 저 어른에게 맞게, 울고 있는 이에게 맞게, 웃고 있는 이에게 맞게 변압시키셔서 나누어주십니다. 나의 신앙의 단계에 맞게 역사하십니다. 맞춤형 공급을 해주십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 각 사람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맞는 진리를 공급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이 땅을 살게 하셨습니다. 이 땅을 살게 하시면서, 우리가 어떤 사람으로 살기를 원하시는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사는 사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 하나님께서 복 주시는 사람,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목적대로 사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 성령 하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성령 하나님을 통해서만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사람으로 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회복한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습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을 통해서만이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고, 이 죄 많고 고통이 많은 세상 속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행복을 누리면서 살 수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진리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이 여러분 가운데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이 여러분 가운데 충만히 임하셔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보혜사 성령
요 14:16-21, 26-27 / 이종철 목사
근심하지 말라
요한복음 14장 1절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는 이 말씀은 요한복음 14장부터 16장에 이르는 말씀, 곧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길게 강론하신 주된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떠나신다고 하니 제자들은 근심이 가득합니다. 그럴 만도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메시야인 줄 믿고 여기까지 왔는데 메시야의 사역을 성취하기도 전에 예수님께서 떠나신다고 하니 그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그들이 뛰어난 역량을 가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행하셨고 그들은 단지 예수님께서 지시하신 것만 행했을 뿐입니다. 예수님이 계시지 않다면 그들은 오합지졸과 같은 존재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는 데 앞장섰던 유대 지도층도 이 사실을 잘 아는 까닭에 예수님만 제거하려 하였지 제자들에게는 더 이상을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의 현재 심정을 잘 드러내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18절입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제자들은 지금 고아와 같은 심정입니다. 가끔 언론을 통해 부모님들이 사고로 모두 돌아가시고 자녀들이 졸지에 고아가 되었다는 소식이 보도 될 때가 있습니다. 그 남겨진 아이들의 처지를 생각하며 정말 가슴이 아픕니다. 그들은 더 이상 의지할 때가 없습니다. 자기 손으로 음식도 하고 빨래도 하고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합니다. 지금 제자들의 실상이 그렇습니다.
이런 제자들을 향하여 주님은 근심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는 단순히 위로하는 차원의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가 근심하지 않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16절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보혜사란 말은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인데 이 뜻은 곁에서 ’돕는 자’, ‘대언자’ 란 뜻입니다. 여기 ‘또 다른’ 보혜사라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보혜사였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돕는 자가 되어서 그들을 보호하시고, 인도해 오셨습니다. 그들의 대언자가 되어 제자들을 변호해 주셨습니다. 이제는 그 역할을 성령님께서 대신 하십니다.
오히려 이 도우심은 더 완벽합니다. 예수님은 시공간에 얽혀 계실 수밖에 없지만 성령님은 언제 어디에든 계십니다. 모든 사람에게 임하실 수 있고, 또 우리 곁 정도가 아니라 가장 가까운 곳 우리 마음속에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16장 7절에서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라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밖에 계신 예수님이, 성령님을 통해서 내 안에 들어오시게 된 것입니다.
이 요한복음을 쓰고 있는 제자는 사도 요한입니다. 그는 요한복음에서 자신의 이름 대신 ‘예수님의 사랑받은 제자’ 곧 ‘애제자’란 말을 주로 사용하였습니다. 요한 자신도 예수님이 떠나신다고 할 때 근심하고 두려워했습니다. 예수님이 근심하지 말라고 하였지만 근심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성령이 임하시고 나니 예수님의 말씀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더 이상 예수님이 계시지 않다는 사실로 인하여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자기 안에 성령님의 형태로 예수님이 들어와 계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요한복음을 기록한 때는 AD 90년대로 추정합니다. 요한도 이제 흰 수염을 날리는 노인이 되었고 곧 죽음이 가까워 옵니다.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있는데 이번에는 사도 요한의 제자들이 근심이 가득합니다. 대 스승이신 사도 요한이 곧 떠나실 것 같은데 자기 공동체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근심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요한은 자기가 예수님을 마지막으로 떠나보냈던 그 순간이 떠올랐습니다. 보혜사에 대한 약속은 자신이 예수님으로부터 받았던 약속이며, 이제 사도 요한이 자신 제자들을 향하여 주는 위로의 말입니다. ‘나 떠나간다고 하여 근심하지 말라 너희에게는 보혜사 성령님이 계신다. 성령님께서 너희를 이끌어 가실 것이다.’
이 말씀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를 향하신 주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고아처럼 내 주변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아 외롭습니까? 고아처럼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는 것 같습니까? 사람은 우리를 돕지 못할지라도 근심하지 마십시오. 우리 안에는 성령님이 계십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되신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십니다. 진리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십니다. 위험에서 우리를 막아주십니다. 우리에게 능력을 부어주셔서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게 하십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어린아이와 함께 동반 자살하는 어른들을 보면 화가 납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현실은 이해합니다만 그렇다고 하여 아이들까지 죽음으로 몰아서야 되겠습니까? 어른들 생각에는 자기가 죽으면 남은 아이들이 아주 비참하게 살 것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살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절망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아이들에게는 아이들의 인생이 있습니다. 그들의 인생을 이끌어 가시는 분이 계십니다.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인생을 어떻게 영화롭게 만드시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자기 생각으로 월권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상황 속에서도 지키신다는 믿음입니다. 그래야 마음의 부담감을 내려놓고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에 주님은 우리에게 기도할 것을 요청하십니다. 12절부터 14절을 읽어보십시오.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주님은 반복해서 기도할 것을 요청하십니다. 내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다 이루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자신이 한 일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근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근심할 시간에 다만 기도하십시오.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
보혜사 성령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17절입니다.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성령 하나님이 어디 계십니까? 바로 우리 안에 계십니다. 성령님은 교회 공동체 가운데 계시고 동시에 개개인의 인격체 안에 계십니다. 특히 요한복음은 개인에게 임하는 성령님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공생애 기간 동안 예수님은 우리 몸 밖에 계셨다면 이제 성령의 시대에는 예수님께서 우리 몸 안에 계십니다.
밖에 있는 예수님과 우리 안에 있는 예수님은 엄청난 차이입니다. 밖에 있는 예수님은 불안합니다. 언제 사라질지 모릅니다. 밖에 있는 예수님을 좇는 사람은 비주체적입니다. 항상 지시사항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에 계신 예수님은 떠나지 않고 언제든 우리 곁에 있습니다. 안에 계신 예수님을 모신 사람은 주체적인 사람입니다.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행동합니다. 스스로라고 하였지만 실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내가 떠나는 것이 유익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살아계실 동안에는 제자들은 오합지졸이고 자리를 놓고 싸우는 철부지 같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떠나시자 모두가 위대한 기둥 같은 존재요, 순교자요, 성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안으로 들어오셨기 때문입니다.
큰 나무는 베어져야 작은 나무가 삽니다. 어떤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있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 영향력이 너무 크면 그 밑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비주체적으로 만듭니다. 모두 지도자의 손가락만 바라보게 만듭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지도자로 서는 것이 좋습니다. 아이들이 성장하는 것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모가 모든 것을 결정해주면 아이는 자라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이가 스스로 결정하는 법을 배울 때 그 아이는 빠르게 성장하고 어른이 되어갑니다.
우리 안에서 얼마나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아십니까? 20절입니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고,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벤다이어그램이라는 집합 그림으로 그리면 하나님 아버지라는 큰 원 안에 예수님이 계시고 그 예수님 안에 우리가 들어가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성령 안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그날입니다. 곧 성령님께서 보혜사로 내 안에 들어오시는 날입니다. 삼위일체의 놀라운 신비가 바로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서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6:19) 우리 몸이 성령이 거하시는 전이라고 합니다.
교회사에서 크리소스톰이란 분은 걷는 것도 조심조심했다고 합니다. 자기 몸이 성전인데 함부로 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톨스토이는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우리 모두의 자아는 그 내부에 깃들어 있는 신성을 가리는 덮개이다. 우리가 자아에서 벗어나면 벗어날수록 우리 안의 신성은 더욱 더 뚜렷이 나타난다.” 우리의 완고한 자아에 갇혀서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을 우리가 발견하지 못하지만 자아의 껍질을 깨면 깰수록 우리는 신성에 가까워집니다. 우리의 육체의 소욕을 죽이고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 주목할수록 성령님은 우리 안에서 더 뚜렷이 역사하실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인간은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지 모릅니다. 그 안에 하나님을 품고 있고 또 하나님을 품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동학의 교주 최시형의 일화입니다. 최시형은 36년 동안 장기수배를 받으며 동학을 일으켰던 사람입니다. 그가 어느 날 자신의 신도의 집에서 피신해 있을 때의 일입니다. 그 집 며느리가 베를 짜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신도에게 묻습니다.
“누가 베를 짜고 있는가?”
“예 제 며느리입니다.”
“아닐세, 바로 하나님이네”
동학의 유명한 인내천(人乃天) 사상은 곧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곧 사람이 하늘이라는 사상입니다. 베를 짜는 아낙네의 모습에서 베 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오늘 요한 사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놀라운 진리 또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몸은 그냥 몸이 아닙니다. 성령이 거하시는 전입니다. 우리 안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한 인간이 위대한 것도 다른 사람을 위대하게 보아야 하는 이유도 다 그 안에 하나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놀라운 감격을 알고나 있습니까?
진리의 영
보혜사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에 이제는 그분께 우리는 물어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궁금한 점이 있으면 예수님께 물었듯이 말입니다. 26절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성령님은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는 분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일화나 말씀 등을 바쁘게 돌아다녔던 제자들이 어떻게 일일이 다 기록했겠습니까? 나중에 성령님께서 제자들에게 생각나게 하신 것입니다. 저는 가끔 TV에서 최면술 장면을 보면서 깜짝 놀랄 때가 있습니다. 우리 의식의 깊은 곳에 감추어진 상처나 어렸을 때 장면을 최면술을 통하여 생생하게 다시 재현시킵니다. 성령님께서 하시는 역사가 바로 그렇습니다. 우리가 보았던 것들은 마치 컴퓨터의 저장 장치에 담기듯 우리 뇌의 깊은 곳에 담겨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그때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우리 의식 위로 끌어올립니다.
모든 것은 성령님께서 가르쳐주십니다. 요한 사도는 자신이 기록한 요한일서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일2:27) 성령님께 물으면 성령님께서 친히 가르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불안해할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께 묻기만 하면 됩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주실 것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어리석은 생각을 마치 하나님이 주신 생각인 것 마냥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말씀’과 ‘시간’과 ‘공동체’입니다. 하나님께서 생각을 주실 때 성경 말씀에 비추어 검증해 보십시오. 말씀에 위배된 것은 성령님의 생각이 아닙니다. 성경이란 것은 성령님 당신이 기록한 책이기에 서로 위배됨이 없습니다. 또 시간을 두고 지켜보십시오. 시간은 좋은 스승입니다. 시간이 우리 어리석음과 성령님의 지혜를 구분해 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공동체에 물어보십시오. 성령님은 내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라는 공동체 안에 있습니다. 서로 묻고 기도하다보면 성령님의 생각에 접근해 갈 수 있습니다.
한국에는 이단이 많고 잘못된 성령 오용 사례가 많은 까닭은 이처럼 성령의 생각을 잘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생각을 성령님의 생각으로 착각을 합니다. 교회사에서 성령의 생각과 그 인도하심에 잘 따른 모범으로 성 프란치스코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일찍이 하나님으로부터 “내 집을 세우라”는 성령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물질과 권력의 노예가 된 중세교회를 프란치스코는 이 감동을 따라 ‘가난과 고행’으로 새롭게 세우고 있었습니다. 이런 프란치스코의 운동에 당시 많은 젊은이들이 동참하게 되었고 이를 시기한 사람들이 그에게 이단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러자 프란치스코와 그와 함께 하는 11명의 탁발 수도사는 1210년 교황 이노센트 3세를 알현하러 갑니다. 성 프란치스꼬 일행을 만나기 전 성령님께서는 꿈에 교황에게 다 쓰러져 가는 교회를 부축하여 다시 세우는 프란치스코의 모습을 보게 하십니다. 결국 교황의 인정을 받고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정식적인 활동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생각이며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방식입니다. 성령님의 생각은 성령님께서 이끌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인내와 겸손이 필요합니다. 말씀과 시간과 공동체에 맡겨 드릴 때 성령의 생각은 분명해집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생각을 주시는데 위기의 순간에 주십니다. 기발한 지혜를 주십니다. 주님은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라는 무리들의 곤혹스런 요구 앞에 서신 적이 있습니다. 돌로 치자니 주님의 사랑에 어긋나고 그렇지 않자니 모세의 율법에 어긋난다고 무리들의 비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때 주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8:7)는 지혜로운 말씀으로 위기를 극복하셨습니다. 성령님이 주신 지혜입니다. 또 한 번은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합당한 지에 대한 곤혹스런 질문이 있었습니다. 세금을 바치라고 하면 열심당들이 책을 잡을 것이요, 바치지 말라고 하면 반역죄로 로마당국에 고발당할 것입니다. 그때 주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막12:17)는 말씀으로 위기를 넘기셨습니다. 이것이 성령님께서 주시는 지혜입니다.
성령님은 무엇보다 우리의 좋은 변호사가 되십니다. 보혜사란 뜻은 대언자, 곧 변호사란 의미도 있습니다. 위기의 순간에 우리를 대신해서 성령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변호해주십니다. 마태복음의 말씀입니다. “또 너희가 나를 인하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마10:18-20) 초대교회의 제자들은 위기의 순간에 도우시는 성령님의 은혜를 실제 경험하였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좋은 변호사가 옆에 있으면 얼마나 든든한지 모릅니다. 돈 많은 사람들은 대형로펌이나 전관예우에 해당하는 변호사를 찾기에 급급합니다. 승소율이 높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 우리의 좋은 변호사가 되셔서 위기의 순간에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평안의 영
주님의 주시는 평안은 심상한 위로가 아닙니다. 27절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여기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고 합니다. 세상의 평화는 곧 사라지는 평화이고 불안한 평화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평화는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심으로서 주어지는 평화입니다. 그냥 자기 마음을 비운다고 하여 평화가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내 옆에서 내 손을 꼭 잡아주는 능력의 손을 경험할 때 우리는 비로소 안심합니다. 마치 어머니 품속에 고이 잠든 아기와 같은 평화입니다. 세찬 비바람이 몰아쳐도 아기는 아무런 두려움이 없습니다.
어느 사생 대회의 주제가 ‘평화’였습니다. 모두가 평화에 대한 그림을 그렸습니다. 초록색으로 덮인 초원을 거니는 사슴 무리들, 푸른 하늘에 구름이 둥실둥실 떠 있는 모습, 아이들이 잠자리를 잡는 가을 모습, 코스모스 만발한 시골길 등 생각만 해도 편안하고 안식을 느끼는 그런 그림들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정작 대상을 탄 그림은 이런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습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하늘에 파도가 거세게 일고 폭풍우가 치는 바닷가 절벽 틈에 새끼 새가 작은 둥지에서 엄마 새 품에 안겨서 잠에 든 그림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평화입니다. 세상은 바람 잘 날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성령님의 품속에서 평화를 누립니다.
찬송가에서는 이 평화를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 데서 맑은 가락이 울려나네 하늘 곡조가 언제나 흘러나와 내 영혼을 고이싸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이 평화는 우리가 만들어낸 평화가 아닙니다. 우리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평화입니다. 바로 성령의 샘에서 솟아오르고 있습니다. 잠잠히 내 안에서 들려오는 이 평화의 노래를 들어보시길 바랍니다. 평화는 밖에 있지 않습니다. 소유에 있지 않습니다. 바로 내 안에 있습니다.
보혜사 성령
요 14:16 / 강성찬 목사
예수님은 아버지께 구하여 다른 보혜사 곧 성령을 보내 시겠다고 합니다. 보혜사(파라클레토스)는 '돕기 위하여 부름을 받은 자'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음을 보여줍니다.
보혜사는 보호 하시고 은혜를 주시는 분이라는 뜻이 함께 합니다. 이는 성령의 사역을 잘 보여 주는 이름입니다. 보혜사를 주사 영원토록 함께 하시리라 합니다.
하나님이 여호와 삼마로 함께 하시고 예수님이 임마누엘로 함께 하시며 성령님도 보혜사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의 도움이 필요 할 때 도와주시기 위하여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하십니다.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위해서 자기가 떠난 후에 제자들에게 임하도록 보혜사 성령을 간구하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 구하시겠다고 하신 말씀을 볼 때 보혜사 성령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내 주시는 인격적인 삼위 일체의 신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보혜사(파라클레토스)는 보내신 다고 합니다.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 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요 16: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또한 주신다고 합니다.
(요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요청으로 파라클레토스를 보내셨다면 파라클레토스는 요청(부름)을 받아 보내어 주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런던의 유명한 샤프츠버리(Shaftesbury)경이 길을 지나가는데, 어린아이가 횡단보도를 지나가다가 자기의 힘으로 걸어갈 수 없으니까 '아저씨 나를 도와 주세요.'하고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샤프츠버리 경은 이 아이를 안고 길을 건너가 내려 놓았습니다. 여기에서 샤프츠버리 경은 어린 소년으로부터 위대한 신앙의 교훈을 받았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즉 우리의 힘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부딪쳤을 때 '주여, 나를 도와 주소서.'하며 소년처럼 하나님께로부터 놀라운 에너지를 공급받아 승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지금도 우리 곁에서 우리가 '나를 도와 주세요.'라고 도움을 청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분은 언제나 우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계십니다.
다른 보혜사
보혜사의역할은 성령만 하시는 사역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먼저 보혜사가 되어 주셨음을 나타내고 있으며 예수님이 하나님께 구하시고 하나님이 보내시는 성령은 예수님의 사역과 생소한 일을 하시기 위해 오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시던 역할과 똑같은 보혜사이시며 예수님은 잠시 세상에 오셨다가 부활 승천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은 한 번 오신 후에는 우리와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시고 함께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성령님은 세상에 오셔서 주님이 하시던 것처럼 우리와 함께 하셔서 우리의 행할 바를 지도하여 주시며, 가르치시며, 도와 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대언자(변호자 Advocate 중재자 Intercessor)이신 보혜사 입니다.
(요일 2: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보혜사(파라클레토스)는 '남을 도우기 위해 부름받은'이란 수동적 의미를 가지었으며 , 여기서 '법정에서 도우는 자'란 의미로 발전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법정의 법률 용어로서 처음으로 발전되는데 '법적인 보조자', '변호자'로 옛날 그리스 법정의 변호인을 가리킵니다. 당시의 변호사는 지금처럼 돈 받고 일하는 전문 직업인이 아니라, 대부분 피고의 친구들이었습니다. 죄인을 변호하면 함께 죄인으로 몰릴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파라클레토스는 희생을 각오하고 친구의 무죄를 위해 계속 곁에 앉아 힘과 위로를 주는 친구 중의 친구였던 것입니다.
피고를 위하여 말하는 자들이 대언자 입니다. 대제사장의 의복의 상징적인 장식은 성전에서의 그의 속죄 사역에서 그를 변호하는 것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파라클레토스로서 아버지의 법정에서 죄 범한 신자를 대변하는 변호자이십니다 (요일 2:1 이하).
예수님께서 죄인을 변호하시는 모습을 요8장의 간음 중에 붙잡힌 여인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율법대로 하면 그녀는 현장에서 돌 세례를 받아야 마땅합니다. 이런 위급한 상황중에서 이 여인을 변호해준 변호사 예수님이십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8:7)
예수님의 이 한마디의 변호가 없었더라면 이 여인은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했을 것입니다.
보혜사 성령은 변호해주는 대언의 영입니다. 변호해 주는 대언의 성령으로 충만해져서 남을 정죄하는 자리에 서는 것이 아니라 남의 부족을 덮어 주고 용서해 주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 보다 유명했고 선명회의 지도자였던 피어스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피어스 박사에게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자기 부인과 이혼을 하느냐 같이 사느냐 하는 문제였습니다. 얼마나 성격이 괴퍅한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피어스 박사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아무리 유명한 사람이라도 사람들의 마음에는 언제나 좋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모든 사실을 다 알고 보면 존경할 만한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인도주의자였던 도스토예프스키는 인류를 위해서라면 열 번이라도 죽을 용의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구체적인 사람과는 단 하루도 같이 살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사람의 배후를 전부 다 알고 사랑을 하지는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미화시켜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소문난 사람들, 유명한 사람들, 성자들, 자서전을 쓴 사람들은 대개 다른 사람들이 미화시켜서 만든 것입니다. 누가 말하기를 자서전의 99퍼센트는 거짓말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크롬웰은 한때 영국에서 매국노이고 위선자라고 해서 시체까지도 형벌을 받을 정도로 가혹한 냉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토마스 카알라일이 크롬웰의전기를 쓰면서 크롬웰은 200년 만에 다시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고 영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로서 그 명예를 회복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런 것을 생각해 볼 때 사람의 마음을 우리는 다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모든 것을 다 알면서 일곱 번 속아 주고 열 번 속아 주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나를 속이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용서해 주고 사랑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독교의 사랑입니다. 정죄하는 자가 아니라 용서하는 자가 되어서 기쁨을 회복하는 복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보혜사는 안위(위로 comforter)자입니다.
흠정역에서 안위자로 번역 합니다.
(욥 16:2) 이런 말은 내가 많이 들었나니 너희는 다 번뇌케 하는 안위자(comforters)로구나
이 안위자들은 욥을 권고하러 왔으나 그렇게 할 수 없는 표면상 친구들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참된 위로자입니다.
위대한 설교자 스펄전이 하나님이라는 주제가 우리에게 크나큰 위안이 된다면서 이렇게 감격적인 말을 한 것이 있습니다. “오! 그리스도를 묵상하는 것에는 모든 상처를 치유하는 치유제가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명상하는 것에는 모든 슬픔을 근절시켜 주는 것이 있습니다. 성령의 감화력 안에는 모든 아픈 곳을 잊게 해 주는 진통제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슬픔을 잊고자 합니까? 여러분의 염려를 잊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신성의 깊고 깊은 바다, 하나님을 보는 깊고 깊은 바다에 잠겨 보십시오. 하나님의 광대함에 몰두해 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편히 쉬다가 나오는 사람처럼 기운이 나고 생기가 돌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을 열심히 묵상하는 것보다 더 영혼에 위로를 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슬픔과 비탄의 굽이치는 파도를 그처럼 진정시키며 시련의 바람들을 평온하게 해 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참 아름다운 고백입니다.
세리장 삭개오가 로마의 앞잡이 노릇을 하여 권세와 재물은 얻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조롱을 받고 배척을 받았습니다. 삭개오는 겉은 화려했지만 그의 내면은 너무나 공허했습니다. 이러한 때에 예수께서 삭개오를 만나주신 것은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눅19:5) 예수의 이 말씀 한마디는 조롱으로 상처받고 있는 삭개오에게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삭개오에게 임한 예수의 위로가 여러분의 마음가운데 임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상처받은 마음에 덫을 더 붙이는 사람이 아니라 상처를 싸매어 주고 위로해 주는 안위자로 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보혜사는 상담자(Counsellor) 입니다.
영어 개정역(R.S.V)에는 상담자(카운셀러 Counsellor)라 고 번역했습니다.
어느 날 두 사람의 남자가 랍비에게 상담을 하러 찾아왔습니다. 한 사람은 그 마을에서 가장 돈이 많은 부자이고 다른 한 사람은 매우 가난한 사람입니다. 돈이 많은 부자가 가난한 사람보다 몇 분 먼저 왔기 때문에 차례가 되어 먼저 방에 안내되었습니다. 상담시간은 대단히 오래 걸려서 한 시간 이상이나 지체한 다음 가난한 사람의 차례가 되어 방에 안내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상담은 불과 5분 만에 끝나고 말았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내심 분개하였습니다. ‘아무리 돈이 없는 사람이라고 이렇게 차별대우를 할 수 있는가? 돈이 많은 부자에게는 성의를 다해서 한 시간 동안이나 상담에 응해 주고 나는 가난뱅이라고 적당히 하는 것이 아닌가?’ 이 눈치를 챈 랍비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돈이 많은 사람은 그만큼 마음이 가난하니 그 가난한 마음을 채워주기 위해서는 시간이 더 걸리는 법일세.”돈을 천시하거나 경원시하지도 않지만 돈만을 추구할 때에 인간은 그 마음이 빈약해질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교훈하기 위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 상담이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입을 교훈 합니다.
요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는 세상적으로는 어른이지만 영적으로는 거듭나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니고데모는 세상의 권력과 재력과 지력을 모두 소유하고 있었지만 영력을 소유하고 있지 못한 것이 문제가 되어 고민하고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세상적으로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영적으로는 사막입니다. 니고데모는 세상 낚시에는 도통을 했는데 하나님의 나라의 낚시에는 전혀 문외한입니다. 이러한 때에 니고데모는 밤중에 예수를 찾아가서 상담을 했습니다. 예수와의 상담을 통해서 그는 생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 받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고민이 충만해서 상담을 했습니다. 저는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문제가 없는 곳이 없을까요. 이때 대답하기를 문제 없는 곳이 한군데 있습니다. 밝은 표정으로 물었습니다. 그곳이 어디입니까? 그곳은 공동묘지입니다. 그렇습니다. 공동묘지에 가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살아서 호흡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문제를 안고 있습니까? 먼저 사람과 의논하기 전에 우리의 상담자가 되시는 예수와 상담하여 문제를 해결받는 체험의 소유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상담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완전한 사람은 이땅에 한사람도 없습니다. 인간은 누구든지 일생을 통해서 적고 큰 문제를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때 사람과 의논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과 기도와 말씀을 통해서 삶의 모든 문제를 아뢰어야 합니다.
벧전5:7에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우리의 모든 염려와 근심을 다 주께 아뢰면 하나님께서 보혜사 성령을 통해서 역사하셔서 문제를 풀어주시는 사람을 만나게 해주십니다.
보혜사는 협조자 (돕는자 Helper)입니다.
공동번역은 협조자 영어 새번역(NASB)은 돕는자(Helper)로 번역 합니다.
(롬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계속되는 절망과 실패의 상실감 속에 빠져 있을 때, 가장 필요한 것은 참된 조력자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힘으로 충분히 세상을 이기고, 스스로를 구원해 낼 수 있으리라는 착각을 합니다. 그래서 몸부림을 치며 살아보지만, 결국 찢겨진 영혼의 갈 곳은 죽음의 길뿐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영원한 인생의 조력자가 함께하고 계십니다. 보혜사 성령께서 조력자로 함께 하십니다.
프랑스 영지인 적도 아프리카에 사는 카레 족에게 기독교를 전파하던 여선교사 에스텔라 마이어즈는 본토민들에게 `보혜사'를 설명하기가 무척 힘이 들었습니다. 이 말은 성경에 있는 말 중에서도 번역이 어려운 것으로 손꼽힙니다. 그녀는 성령의 직무와 역사를 장황하게 설명하였습니다. 성령의 직무요, 역사라면 신자들을 장려하시고 권하시며 책망하시고 보호하시고 안위하며 인도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그 설명을 다 듣고 난 본토 조력자들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그런 일을 해주는 이를 우리는 `우리 옆에 구부리는 이'라고 하지요.' 마이어즈는 이 말이 보혜사를 표현하는 말로는 부적당하다고 생각하면서 본토민들에게 그 말의 유래를 듣기 시작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짐꾼들은 머리에 짐을 이고 긴 여행을 하는데 보통 2, 3개월씩 걸린다고 합니다. 그 때에 그들 중에는 학질이나 이질에 걸리는 사람들이 생기기 마련이었고 그들은 결국 행렬에서 낙오하게 됐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그대로 있으면 대부분 들짐승의 밥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나가던 사람이 그들을 발견하면 쓰러진 사람을 측은히 생각하여 그들을 일으켜서 다음 동네까지 데리고 갔습니다. 그들을 가리켜 '우리 옆에 구부리시는 이'라고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이어즈 선교사는 이 같은 설명을 듣고 `보혜사'를 '우리 옆에 구부리시는 이'로 번역하였다합니다. (21세기 예화- 우리 옆에 구부리는 이)
보혜사 성령의 충만을 덧입고 서로 용서하고, 서로 위로하며, 서로의 무거운 문제를 해결해 주는 성령의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의 변호사와 위로자와 상담자가 되어 주시는 보혜사 성령의 인도를 받는 복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다른 보혜사
요 14:16-17 / 조용기 목사
우리의 사회생활이 복잡해질수록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전문가들에게 의탁하게 됩니다. 그 중 우리생활에 가장 두드러진 전문가들은 법률관계의 문제를 도와주는 변호사와 세무사, 부동산 중개인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전문가들보다 더욱 우리와 함께 계셔서 우리에게 조언을 해주시는 이가 계십니다. 눈에는 안보이지만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좋은 분인 것입니다. 이분이 바로 보혜사 성령이십니다. 보혜사란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라고 하는데, 즉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우리를 돕기 위해서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성령은 2천년 전 오순절날 마가의 다락방에 임하신 이후로 지금까지 교회와 성도를 떠나지 아니하시고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3년여 동안 동고동락하시며 복음을 증거하신 후에 갑자기 떠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망연자실했습니다. 앞이 캄캄하고 희망이 다 사라졌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시고 예언자들이 예언한 천년왕국을 가져올 줄 알고 모든 재산과 직업과 부모, 형제, 처자를 떠나서 3년여 동안 따라 다녔는데 주님이 갑자기 그들을 떠나시겠다고 하니 그들은 정말로 천지가 아득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 후에 또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떠나시면 고아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성령의 강림하심을 통하여 예수님이 다시 보이지 않는 형태로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성령님의 오심은 바로 예수님의 다른 형태로 임재하심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제자들은 그 절망 가운데서 큰 소망을 얻었습니다. 결코 주님은 제자들을 버리지 않고 떠나지 않으실 것이라는 확신을 얻게 된 것입니다.
1. 다른 보혜사
성령님을 다른 보혜사라고 했는데 ‘다르다’는 헬라어에는 두가지 뜻이 있습니다. ‘알로스’라는 말과 ‘헤테로스’라는 말이 있는데 ‘알로스’는 ‘똑같은 동질 중에 다른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똑같은 두 개 중 하나 다른 것이 ‘알로스’입니다. 그러나 전혀 다를 때 ‘헤테로스’라는 말을 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라’고 하실 때 사용된 다른 보혜사는 ‘알로스 파라클레토스’라는 말을 썼던 것입니다. 그것은 나와 똑같은 다른 보혜사라는 것입니다. 나는 첫째 보혜사이고 성령은 다른 보혜사이기에 그가 온 것은 내가 온 것이고, 내가 온 것은 그가 온 것이며 우리는 전혀 똑같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성령님은 똑같은 하나님으로서 똑같은 사역을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이 오시면 예수님의 자리에서 예수님이 하신 일을 계승하셔서 행하시는 하나님이 되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떠나신 후 주의 사역이 끝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똑같은 다른 보혜사가 오셔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자리에서 일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인을 용서하고 성령의 능력으로 승화시키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시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은총과 복을 받게 하시며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하나님의 사역을 그대로 계속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몸 속에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이 와 계시므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를 통해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게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때문에 주님께서는 성령을 통해서 오늘날도 옛날처럼 죄를 용서하고 구원하시고, 옛날처럼 우리에게 천국을 주시고 성령충만을 주시고, 또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을 고치시고 마음속에 소망을 주시고 아브라함의 복을 주시며 부활과 영생과 천국의 소망으로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복음은 하나의 종교적인 형식이나 의식이 아닙니다.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이 땅에 다시 오셔서 그의 몸된 교회안에 계시면서 사역을 계속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모든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 질병, 고통과 괴로움을 가지고 주님을 찾아 나왔을 때 주님은 교회 안에서 우리를 만나 주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치료해 주시고 복을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2. 성령님의 하시는 일
성령님께서는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기억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5절로 26절에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배우는 말씀은 세상의 학문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온 계시의 말씀입니다. 세상 지식이 아니라 계시적인 지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속한 진리의 말씀은 하늘에서 오신 성령님이 우리 마음속에서 깨닫게 해주어야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성령이 오셔서 우리 마음속에 진리를 깨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마음에 깨달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마음속에 성령의 계시가 함께 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질문을 하셨습니다. 그때 제자들이 ‘예레미야, 엘리야 혹은 구약의 위대한 선지자라고 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다시 물으셨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과 육이 아 니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혈과 육인 인간의 지식으로 깨달은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로부터 오신 성령님의 계시를 통해서 그리스도가 메시아 되심을 깨닫게 된 것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성령님이 오셔서 우리 마음속에 진리를 깨닫게 해주시고 또 진리를 기억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고 난 다음 다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는 순간 말씀을 통한 영적양식이 우리들에게 다 흡수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필요할 때면 기억나게 만들어줍니다. 성령께서 기억나게 해주셔서 말씀을 통하여 믿음을 갖게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기에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고 그리스도를 나타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말미암지 않고는, 성령의 역사를 말미암지 않고는 예수님을 주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성령이 우리 속에 오셔서 깨닫게 해주셨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성결케 해주십니다. 세속과 마귀와 죄가 가득한 세상을 인간의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세속과 마귀와 죄를 벗어날 수 있게 해주시는 이가 보혜사 성령이신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절로 2절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 얽혔으나 성령의 법이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성령의 역사가 우리로 하여금 세속과 마귀와 죄악의 굴레에서 해방되게 해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속의 죄에서 벗어나기가 쉽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술 취하고 방탕하고 음란하고 아편과 쾌락에 빠진 사람들이 이 세상을 벗어나고자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못 벗어나고 허우적거립니다. 그때 성령이 오셔서 마음속에 해방을 주시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의 법을 내어쫓고 생명과 성령의 법으로 해방시켜 주십니다.
성령께서는 오늘날도 우리의 심령에 임재하사 끊임없이 우리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시는 것입니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깨달으면 죄에서 자유케 되고 세속과 마귀에서 자유케 되고 질병의 사슬에서 풀려나고 저주와 가난에서도 풀려나고 사망과 절망의 사슬에서도 풀려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시고 자유와 해방을 주시는 담대한 믿음을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령은 마치 태우는 불길과 같고 바위를 쳐서 깨뜨리는 방망이와 같습니다. 성령이 오셔야 우리 마음 가운데 큰 확신과 권능으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전달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부활하셨지만 성령이 오시지 않았으면 이 일은 2천년 전 예루살렘의 한 구석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잊혀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셔서 이 사건을 온 천하에 영원한 구원의 사건으로 만들고 만 것입니다. 성령은 바로 증거의 영이 되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를 통해서 그리스도가 주님이 되심을 증거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3년 반 동안 그리스도를 따라 다니고 진리를 깨달았지만 예수님이 돌아가신 것을 보고 혼비백산해서 다 도망치고 숨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에 성령을 충만히 받자 그들은 일어나서 하루에 3천명, 그 다음 5천명, 그 다음 온 예루살렘을 그리스도의 부활의 복음으로 꽉 채워 넣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때문에 복음의 증거의 능력인 성령을 우리가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들이고 의지하면 용감히 나갈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 는 결코 그리스도의 복음이 승리할 수가 없습니다.
성령은 일곱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사야 11장 2절에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지혜의 영이 되십니다. ‘지혜가 부족하거든 꾸짖지 아니하고 후히 주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지혜가 필요할 때 성령께 지혜를 구하면 됩니다. 그리하면 성령은 지혜의 영이시기에 우리에게 놀라운 지혜를 허락하사 문제를 해결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성령께서는 총명의 영이 되십니다. 우리 마음이 아둔할 때 성령께 고하면 우리의 마음에 깨달음을 주십니다. 세상의 영은 우리의 마음을 혼미케 해서 진리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게 하나 성령께서는 우리 마음에 총명을 주셔서 밝은 마음으로 진리를 알 수 있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은 모략의 영으로 우리에게 상담자가 되십니다. 우리에게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 가장 올바르게 살고 잘살 수 있는가를 상담해 주십니다.
그리고 재능의 영으로 오십니다. 여러 가지 재능을 주십니다. 어떠한 사람에게는 설교 잘하는 재능을 주시고, 심방 잘하는 재능을 주시고, 구제하는 재능을 주십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 때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주시는 재능이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그 재능을 통해서 우리를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떠한 재능을 주셨는가를 깨달아서 그 재능을 가지고 하나님을 충성스럽게 섬겨야 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진리에 대한 지식을 주시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게 만들어 주시고 우리에게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는 힘이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님의 일곱가지 특성이 우리에게 나타나야 됩니다. 우리가 친구를 사귀면 친구의 행실을 닮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충만하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살면 성령은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몰약과 재능의 영이요, 지혜와 지식의 영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거룩한 영이기 때문에 이와 같은 역사가 우리의 인격 속에도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3. 성령님과의 관계
성령은 우리에게 중생의 체험을 주십니다. 아무리 전도해도 무관심하던 사람도 성령이 임하면 마음속에 죄를 깨닫고 통회하고 자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기독교를 반대하던 사람이 교회와서 앉아 있다가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리고 가슴을 치고 회개하는 것은 성령의 감동이 다가왔기 때문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6장 8절로 9절에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오셔서 책망하십니다. 성령이 죄를 책망하시면 마음속 깊이 감화 감동을 입어 회개하고 자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그 무리들이 오순절날 성령이 강림하자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한꺼번에 3천명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튿날에는 5천명이 회개를 함으로써 온 예루살렘을 그리스도의 부활의 복음으로 가득히 채웠습니다. 그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오면서 저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고 함쳤던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도 성령이 오시면 마음속에 큰 깨달음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들은 불신 가족들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의 성령이 임해 달라고 간구해야 되는 것입니다.
디도서 3장 5절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령이 우리를 새롭게 합니다. 낡은 우리가 어떻게 새롭게 됩니까? 낡은 생각, 낡은 마음, 낡은 행동을 하는 우리가 어떻게 새로워 집니까? 성령이 오시면 깨달음을 주시고 회개시켜서 새롭게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은평대교구 임진숙 성도는 2001년 유방암 수술을 받고 퇴원했는데 암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일주일 후에 병원에서 항암 주사를 맞고 집으로 오던 중에 몸이 이상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근육이 풀려 걷지도 못하고 심장박동이 격해져서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 같아서 다시 병원으로 이송되었습니다. 의사는 검사결과 이상이 없다고 말했으나 나중에 알아 보니 20일 간격으로 맞아야 하는 항암주사를 병원측 실수로 1주일 만에 맞아 극심한 약물 중독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간수치가 정상치 40을 넘어 170에서 180까지 이르고 신경쇠약, 우울증, 불면증에 물 한 모금도 못 마시고 암과는 비교가 안 되는 고통으로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군대에서 휴가 나온 아들이 주고 간 라디오의 주파수를 돌리던 중 극동방송을 듣게 되었는데 마음에 평안이 다가왔습니다.
퇴원한 이후에 성경책을 사서 읽으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고 주기도문을 외우면 마음이 평안해졌습니다. 교회에 가고 싶어도 어떻게 가는지를 몰라서 집 근처 교회를 돌아다녔는데 장로교에 출석하던 권사님 한 분이 ‘순복음교회에 가면 성령도 받고 병도 고침받을 수 있다’고 해서 우리 교회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딸과 함께 처음 주일에 왔는데 얼마나 기쁜지 그동안 교회 다니지 않은 것을 후회하고 성령님이 주시는 기쁨이 충만하여 아직 병이 낫지 않았는데도 죽고 싶었던 우울증과 불면증이 사라지고 기쁨이 충만해서 사람들을 따라서 찬송도 부르고 박수도 치고 통성기도도 했습니다.
이 자매님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의 능력으로 너무 기뻐하고 난 다음 두달이 지난 후에 병원에 가보니 암이 온데간데 없이 다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깨끗이 나아버렸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이렇게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성령이 주시는 기쁨으로 말미암아 모든 마귀의 사슬에서 해방을 얻게 해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기뻐해야 됩니다. 성령이 오시지 아니하면 기쁨의 샘물이 터지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 와서 마셔라 그리하면 너희 배에서 생수의 강이 넘쳐 나리라’고 했는데 그 생수의 강의 성격 중 하나가 기쁨의 강인 것입니다. 성령이 오셔야 마음 속에 기쁨의 강물이 솟아오르는 것입니다. 기쁨이 솟아오르면 모든 질병이 낫고 마음에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이 사라지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마음의 상황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예수님을 영접하게 하고 우리 안에 아들의 영으로 거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항상 아바 아버지를 부르게 만듭니다. 갈라디아서 4장 6절로 7절에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령이 오셔야 우리 마음속에 아들의 영을 주시고 하나님을 향하여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구만리 장천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교회에 계시고,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 속에 와 계십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로 17절에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속에 거하시므로 우리가 더러운 생각이나 더러운 일이나 더러운 곳에 가면 성령이 마음속에서 우리를 꾸짖으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난 다음 마음대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 믿고 난 다음 우리가 성전이 되고 성령이 거하시므로 우리가 죄를 지으면 성령이 우리를 괴롭게 하시고 꾸짖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냥 거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세례 혹은 충만이라는 새로운 단계의 체험을 하게 해주십니다. 우리가 성령세례의 체험을 하게 되면 권능을 받게 됩니다. 사도행전 1장 4절에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사도행전 2장 1절로 4절에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성령충만, 혹 성령세례를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충만, 성령세례를 받으면 하늘의 바람, 하늘의 불이 우리 속에 충만해지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게 됩니다. 이제 한차원 높게 우리의 영이 하나님과 더불어 기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45년째 목회를 하고 있지만 성령받고 방언 말하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도저히 슬퍼서 인간의 말로 기도할 수 없을 때 성령으로 말미암아 방언으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알아들으시고 제 영혼을 깊은 수렁에서 건져주십니다. 또한 하나님 말씀을 증거해야 될 때, 위기에 처했을 때, 내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할 때 예수 이름으로 엎드려서 방언으로 기도하고 나면 알지 못하는 마음의 평안과 확신이 넘쳐나고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셨다는 기쁨이 마음속에 채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선물 중 가장 놀라운 선물이 방언기도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말로써 기도하고 대화하면 한계점에 도달하지만 방언기도는 인간의 한계를 초월해서 하나님과 더불어 기뻐하고 슬퍼하고 탄식하고 찬미하며 기도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오셔서 여러 가지 은사를 주십니다. 고린도전서 12장 4절로 11절에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어떤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하나님께서는 지식의 말씀의 은사, 지혜의 말씀의 은사, 영분별의 은사를 주시고 또 예언의 은사, 방언의 은사, 방언통역의 은사도 주시고 능력의 은사, 믿음의 은사, 기적의 은사, 병고치는 은사를 주셔서 하나님의 사역을 하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이것은 우리 스스로가 공로가 있어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하나님의 사업을 효과 있게 하기 위해서 나누어주는 은사들인 것입니다. 성령충만 받았다면 하나님의 은사가 무엇인지 간절히 기도해서 깨달아 알고 그 은사를 따라 주를 섬겨야 되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맡은 직임을 수행하기 위해서 직임의 은사도 주십니다.
로마서 12장 6절로 9절에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이 교회에서 하는 여러 가지 봉사일에도 섬기는 것도 은사고 가르치는 것, 사람들을 심방해서 구원하는 것도, 구제하는 것도, 다스리는 것도, 긍휼을 베푸는 것도 은사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사를 받아야 끝이 없이 피곤치 않고 지치지 않고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은 우리에게 오셔서 믿는 자에게 열매를 맺게 해주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로 23절에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우리의 삶 속에 열매를 맺지 않으면 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열매 없는 나뭇가지는 꺾어버리겠다고 하셨습니다. 열매는 하루 아침에 맺히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이 걸리지만 예수님을 믿으면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성령의 열매가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런던성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어느 회사 여사장의 옆자리에 앉게 됐습니다. 그 여사장이 하는 말이 ‘한국 민족의 30퍼센트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데 한국사회에 왜 이렇게 부정도 많고 부패도 많고 비정상적인 일들이 많습니까? 교회가 정말 빛과 소금의 일을 행했다면 한국이 달라져야 될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전도 안해도 우리 같은 사람도 다 예수 믿지 않겠습니까? 여기에 대해서 목사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질문에 할 말이 없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란 ‘그래도 한국에 30퍼센트의 성도가 있기 때문에 이 정도이지 만일 30퍼센트의 성도가 없었으면 완전히 부정부패하고 말았을 것입니다’라고 궁색한 대답만 했습니다. 사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정말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고 변화받아 성령의 열매를 맺었다면 국민전체가 회개하고 기독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열매를 맺는 일에 힘쓰고 애써야 될 것입니다.
구약 4천년 동안은 성부 아버지께서 사역하신 시대입니다. 그때 아버지께서는 아들 예수님이 오실 것을 3백번 이상 예언자를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대로 2천년 전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33년 동안 세상에 계시면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구원의 역사를 마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대속의 일을 마치시고 승천하신 후에 오순절 날에 성령께서 강림하셨습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교회를 세우시고 교회와 우리를 통해서 복음사역을 하고 계십니다. 바로 오늘날은 성령님의 시대입니다. 아버지 하나님, 아들 예수님께서는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 가운데 임재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는 성령님을 올바르게 알고 성령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며 결코 성령이 없는 신앙생활을 하려고 해서는 안됩다. 성령과 함께 살아야 성공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있고 성령님을 통하 여 깨달음과 믿음을 얻어서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한 삶을 살게 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열매를 맺고 감화 감동을 가져와서 온 이웃과 세계를 복음화시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리지 않고 지금도 이 자리에 오셔서 역사하고 계신 것입니다.
[기 도]
거룩하시고 영광스러우신 아버지 하나님! 2천년 전 오순절날에 성령께서 강림하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이제 하늘보좌에 아버지가 계시고, 우편에 예수님이 계시고, 성령님은 교회 안에 계셔서 우리와 함께 거하십니다. 보혜사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들이고 의지합니다. 성령이여 바람같이 불같이 생수같이 운행하여 주시옵시고 오늘 우리 성도들을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성령없는 교회, 성령없는 신자가 되지 말게 도와주시옵소서. 또한 성령충만하여 기쁨이 넘치는 신앙생활을 하게 도와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