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중해 시인의 '떠나가는 배'는 당시 여대생과의 6개월간에 걸친 사랑의 도피끝에 제주 부두에서 의 이별하는 시인의 모습이라는 요지이다.
저 푸른 물결 외치는 거센 바다로 떠나가는 배 내 영원히 잊지 못할 님 실을 저배야 야속해라 날 바닷가에 홀로 버리고 기어이 가고야 마느냐. (떠나가는 배-원시)
가곡 ‘떠나가는 배’(작사 양중해 작곡 변훈)의 주인공은 1978년 타계한 청록파 시인 박목월이라는 것과, 50년대 중반의 그와 한 여대생의 ‘제주 잠행’ 생활에 대해 처음으로 구체적인 증언이 나왔다.
노랫말을 쓴 양중해(1927~2007) 시인은 목월이 50년대 중반 잠시 제주에 머물 때 시와 술을 나눈 절친한 친구 사이.양 시인은 “1953년 휴전 무렵 유부남이던 목월이 젊은 여자와 피란 겸 사랑의 도피를 위해 제주에 왔으나 끝내 이별하게 됐으며,제주부두에서 두 사람의 이별 장면을 시로 옮긴 게 바로 ‘떠나가는 배’”라고 말했다.양 시인은 지난해 7월 제주문화원에서 열린 한 문학강좌에서도 ‘떠나가는 배’에 대해 “목월의 아픈 이별을 담은 시”라고 거론한 적은 있으나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았다.
목월이 당시 머물렀던,지금은 사라진 제주시 관덕정 인근 동화여관 가족들에 따르면 목월은 한국전쟁 막바지에 제주에 왔으며,여대생(당시 홍익대 재학)과 함께6∼7개월간 동화여관에 머물렀다. 목월과 함께 온 여인의 성은 한씨이며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주일마다 근처 서부교회에 나가 예배를 봤고,몸이 아플 때는 목월이 직접 부축하거나 업고 갔다.이 여인은 아주 깔끔해서 빨래가 잦은 편이었고,식사도 여관에서 내주는 음식 대신 직접 지어 목월에게 내왔다.또 아이들을 좋아해 과자와 과일을 자주 나눠줬고 튀김 등을 직접 만들어 줬다고 한다.
여관에서도 시낭송회가 자주 열렸는데 여인은 늘 목월 곁에 앉아 경청하곤 했다. 여관집 아들 이창주(64·당시 중학교 2학년)씨는 “그 여자는 목월에게 꼭 ‘선생님’이라고 불러 선생님과 제자 사이 같았으며,지금의 여느 탤런트보다도 예뻤고 몸도 호리호리했으나 자주 아파 병원 출입이 잦았다.”고 기억했다.또 “목월에게 ‘이름이 왜 목월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어느날 밤 나무에 걸린달이 너무 고와 ‘영종’이라는 이름 대신 ‘목월(木月)’이라는 이름을 쓰게 됐다는 말도 들었다.”고 했다.
이씨는 “목월과 여자가 이별할 무렵 여관에 있던 짐을 도둑맞아 경찰에 신고한 적이 있는데 이 여인은 ‘다른 것은 필요 없고 사진첩만 찾아 달라.’고 애원했으나 범인이 이미 아궁이에 넣어 불태워 버린 후여서 몹시 상심했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짐 소동이 있고 얼마 후 목사인 이 여인의 아버지가 서울에서 내려왔고,가지 않겠다는 딸을 이틀 밤낮에 걸쳐 설득한 끝에 사흘째 되는 날 서울로 가기 위해 부두로 갔다.이씨도 양중해·박목월 선생과 함께 부두까지 배웅 나갔으며 여인과 목월 사이에는 아무 말도 없었다. “어깨가 들썩이는 것으로 미뤄 우는 것 같기는 했는데,우리 쪽으로 전혀 고개를 돌리지 않더군요.아마도 정인(情人)에게 우는 모습을 보이기 싫었던 것이겠지요….” 이씨는 “여관에 있는 동안 이런 정 저런 정 많이 들어 그때 무척 울었다.”며 당시 처연히 고개를 떨구며 돌아서던 목월 선생의 표정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고 말했다.
당시 제주제일중학교 국어교사로 있던 양중해 시인은 집으로 돌아온 즉시 ‘두 정인의 부두에서의 이별’을 시로 옮겼고,같은 학교 음악교사이던 변훈에게 음을 붙이도록 해 가곡 ‘떠나가는 배’는 탄생했다. 그동안 기록(잡지 ‘시인세계’ 등)에 따르면 목월과 이 여대생은 시인과 문학소녀로 만나 사랑하는 사이로 발전하고,결국 제주도로 잠행했다.그때 두 사람은 겨울 한복을 지어 제주로 찾아간 부인의 인품에 목월이 반성하고 그가 서울로 돌아오면서 두 사람의 사랑도 끝이 나며, 이로써 목월에게 ‘이별의 노래’를 남겼다는 내용만 나와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