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飜譯書> 논픽션, 閔妃暗殺」④-2
1863년 말, 철종이 급서했다. 이 왕에게도 세자가 없었다.
왕위계승자 결정이 긴급과제가 되었는데, 왕족의 거의가 서울을 떠나 피해 나가서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었으므로, 그 가족구성조차 중앙에 있는 사람들이 잘 모르는 상태였다. 따라서 누구에게도 마음 짚이는 데가 없었다.
왕실의 최 고위에 있는 조 대왕대비가, 창덕궁 중희당(重熙堂)에 중신 일동을 모았다. 중신의 대부분이 안동 김씨 일족이고, 소수의 풍양 조씨 등이 있었다. 왕실장전에 따라서 왕위 계승자 전형을 하려는 자리에, 왕족 남성은 한 사람도 없었다.
“국가의 다사다난한 현상을 생각하면, 왕위계승문제는 지극히 긴급을 요합니다”
조 대왕대비의 조용한 목소리가, 발 사이로 흘러나왔다. 그 말대로 이때 국가는 안팎이 다 같이 다사다난했다.
장기에 걸쳐서 농민들의 반란이 되풀이 되어 왔는데, 1년 전에 또 광범위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 의사와 행동력을 가지게 된 농민 세력은,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뿌리 깊은 저항을 보였다.
바가 저쪽에서는, 1831년에 영국 상선이 내항하여 통상을 요구한 이래, 구미 제국의 “이양선(異樣船)”이 계속 밀어닥치고, 1846년에는 프랑스 함대가 내항하여, 천주교 박해에 대한 항의문을 들이대는 소동까지 있었다. 철종 서거 직전에는, 러시아 제독 일행이 내항하여 수호통상을 요구했다. 제정 러시아의 숨은 노림이, 조선반도에서의 부동항 획득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이와 같은 외압에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까---. 외교에 익숙하지 못한 조선정부는, 그것을 생각하기 위한 지식도 경험도 가지지 못했다. 종주국에 의지하고 싶었으나, 청국은 아편전쟁에서 영국에 패하고, 1842년에 남경조약을 불리하게 체결하여, 샹하이(上海)등 5개 항을 개항하고, 홍콩을 할양한 상태이다. 이와 같은 실정을 앎에 따라,조선은 외압으로부터 나라를 지킬 수단으로 공고한 쇄국정책을 계속 취해왔다.
그러나, 과연 구미 제국이나 러시아의 요구를 거부해 낼 수 있을까. 머지않아 민족적 위기가 도래하는 것이 아닐까.---.
“국가의 다사다난을 생각하고, 여러 대신은 왕위 계승자를 조속히, 또한 신중하게 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드리워진 발(簾) 안쪽에서 흘러나오는 조 대왕디비의 말은 끝났다. 그러나 대왕대비의 말에 응대하는 말은 없다. 철종의 죽음이 갑작스러웠기 때문에, 김씨 일족에서도 아직 의견이 모아지지 않았고, 그들은 결정된 안을 가지지 않은 체 이 자리에 모인 것이다.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원로인 정원용(鄭元容)이 일동을 대표하는 형식으로, “대왕대비마마의 밝으신 뜻에 따라 결정되기를 바랍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하여 반대하는 소리는 없었고,정원용의 말은 묵인되었다. 지금은 조 대왕대비의 결심으로, 왕위계승자를 결정하기로 되었다.
“그러면” 하고 조 대왕대비는 침착한 소리로 말했다. “흥선군 하응의 둘째 자세 명복(命福)에게 대통(大統)을 승계시키도록 결정합니다.”
살람들의 안면에, 특히 김씨 일족들의 얼굴에 경악의 기색이 보였다. 그들은 귀를 의심하고, 일쪽 끼리 말끄러미 서로 얼굴을 마주볼 뿐, 소리를 내는 이는 없다. 백주에 악몽을 꾸는 느낌이었다. <우리 집에 와서는 금품을 달라고 치근대던 ‘宮乞人’의 아들이, 왕위에 오른다는 것인가. 설마, 그런 일이--->
발 바깥사람들의 동요에 상관하지 않고, 조 대왕대비는 주저 없이 일을 이끌고 갔다. 직필한 한글(조선의 문자) 조서에서, 신왕이 되는 명복에게 익성군(翼城君) 칭호를 내리고, 대왕대비의 남편이었던 익종(翼宗/추존)의 후계자로 받들었다. 이것은 명복이 선왕인 철종의 바른 계승자가 아니라는 것을 명시하는 왕실장전상의 조치이며, 이에 따라서 3대에 걸쳐 일문에서 왕비를 낸 김씨는 세도정치를 계속할 기반이 붕괴되는 것이다.
조례가 끝나려 할 때, 김씨 일족의 대표자인 김좌근이 처음으로 질문을 했다.
“신왕의 연세는 어떻게 되는지요”
이때 명복은 11살이었다. 그러나 그의 연령 같은 것은, 새삼스레 문제가 아니다. 명복이 왕위에 오르는 것은, 이미 흔들림 없이 확실하게 결정 되었다.
이명복(李命福)은 후에 민비의 남편이 되는 사람이다.
전격적인 신왕 결정은 조 대왕대비의 과단성 있는 제결에 의한 것이지만, 그 배경에는, 김씨 일문의 정치적 부패에 대한 상하각층의 전국적인 불만, 증오가 있었다. 김씨 이외의 원로나 중신 사이에 하응의 사전 교섭이 효과를 거둔 것도, 이런 배경에 의한 것이었다.
이때의 김씨 일족은, 아무리 생각해도 멍청했다. 그들은 하응의 암약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고, 조 대왕대비 임의로 신왕이 결정되도록 되었어도, 다시 선왕 철종과 같이 문자도 읽지 못하는 왕족의 자제가 뽑힐 것이라고 우습게보고 있었다. 60여년의 세도정치에 친숙해져, 대가족주의 세력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던 방심이 도리킬 수 없게 되었다.
명복을 지명한 직후, 그에게 “익성군” 칭호를 주고 익종의 후계자로 한 조 대왕대비의 솜씨는 뛰어났다. 신왕 선정을 위해 중신들을 모은 것은 철종 서거 직후였지만, 이때 단시간 내에 대왕대비가 이 같은 방책을 생각해 냈다고 할 수는 없다. 진작부터, 이때를 대비하여 노심초사해온 방책일 것이다. 이것도 또한 하응이 여관들을 개입시켜 조 대왕대비에게 제안해 둔 것일까. 어쨌든 명복이 새 임금으로 뽑힘으로써 큰 충격을 받은 김씨 일문은, 더욱이 신왕과 선왕 철종과를 분리한 것으로써 타격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