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3주간 화요일 강론>(2024. 11. 19. 화)(루카 19,1-10)
복음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9,1-10
그때에 1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들어가시어 거리를 지나가고 계셨다.
2 마침 거기에 자캐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세관장이고 또 부자였다.
3 그는 예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보려고 애썼지만
군중에 가려 볼 수가 없었다. 키가 작았기 때문이다.
4 그래서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갔다.
그곳을 지나시는 예수님을 보려는 것이었다.
5 예수님께서 거기에 이르러 위를 쳐다보시며 그에게 이르셨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6 자캐오는 얼른 내려와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였다.
7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8 그러나 자캐오는 일어서서 주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9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10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부르심에 응답했다면, 당연히 회개와 보속도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들어가시어 거리를 지나가고 계셨다.
마침 거기에 자캐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세관장이고
또 부자였다. 그는 예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보려고
애썼지만 군중에 가려 볼 수가 없었다. 키가 작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갔다.
그곳을 지나시는 예수님을 보려는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거기에 이르러 위를 쳐다보시며 그에게 이르셨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자캐오는 얼른 내려와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였다.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그러나 자캐오는 일어서서 주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루카 19,1-10)”
1)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자캐오를 부르시고
자캐오가 그 부르심에 응답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자캐오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맞아들인 일은
묵시록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
예수님께서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라고 말씀하신 것은,
자캐오의 문을 두드리신 일과 같습니다.
아마도 자캐오는 예수님의 소문을 이미 들었던 것 같은데,
그가 예수님을 보려고 애쓴 일을, 예수님께서 그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셨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예수님의 복음 선포는 ‘모든 사람’을 향해서
하신 일이고, ‘모든 사람’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신 일이고,
‘모든 사람’을 부르신 일입니다.
자캐오만 따로 특별히 부르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자캐오만 부르신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부르신 예수님의 부르심에 자캐오가
응답한 이야기라고 표현하는 것이 좀 더 정확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부르시는데, 그 부르심에
‘모든 사람’이 응답하는 것은 아니고, 무시하고 외면하는
사람들도 있고, 응답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2) 응답했더라도 온 마음과 온 삶으로 응답하지는 않고,
겉으로만 응답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몸만 따르고
마음은 다른 곳을 향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겉으로는 미사 참례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몸만 성당에 있고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다면,
그것은 미사 참례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날 것입니다(콜로 3,1-4).”
“여러분은 옛 인간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 버리고,
새 인간을 입은 사람입니다. 새 인간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모상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지면서
참 지식에 이르게 됩니다(콜로 3,9ㄴ-10).”
자캐오가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혹시라도
횡령한 일이 있었다면 네 곱절로 갚겠다고 말한 것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서 자신의 온 삶을
완전히 새롭게 변화시키겠다는 결심을 말한 것입니다.
3) 우리는 그의 직업이 세관장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어떻게 살았는지, 어떤 사람인지,
무슨 죄를 얼마나 지었는지는 모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에서는 그것이 중요한 것도 아닙니다.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했고, 어떻게 변화했고,
어떻게 ‘새 인간’이 되려고 노력했는지가 중요할 뿐입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따르기 위해서 새롭게 변화되려고
노력하는 것, 그것이 ‘응답’입니다.
그래서 ‘회개’와 ‘보속’은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이 반드시
실행해야 하는 일입니다.
‘회개’와 ‘보속’은 ‘낡은 삶’을 버리고
‘새 삶’으로 나아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새 인간’으로 변화되지는 않고,
그 ‘삶’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과 다르지 않다면,
부르심에 응답한 것이 아닙니다.>
4)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군.”이라고 예수님을
비난했던 사람들은, 자캐오의 직업만, 또는 과거만
생각하면서, 그의 변화는 보지 않으려고 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직업에 대한 편견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자캐오의 변화를 인정하기가 싫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캐오의 직업이나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모습만, 즉 그의 변화된 삶과 마음만 보셨습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라는 말씀은,
자캐오의 응답과 회개와 보속을 인정하신 말씀이고,
그가 ‘구원의 길’을 걷기 시작했음을 인정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오늘’이라는 말도 중요합니다.
신앙생활은 어제도 아니고, 내일도 아니고,
바로 ‘오늘’ 해야 하는 생활입니다.
[출처]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