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신호
정승화
한 마리 나른한 붉은 이리의 눈빛으로 살고 있어
그건 믿음과는 다른 이야기
하지만 아름다운 변심도 있지
일찍이 벚꽃이 놓친,
물오른 여름빛의 나무 잎사귀에
다시 꽃이 피는 계절이면
이렇게 나른한 붉은 이리가 돼
매 순간 긴장으로
나무 잎사귀가 익어가는 걸 알아
그건 잎사귀가 꽃으로 부활하는 순간이지
나도 꽃이 될까 봐 긴장을 잃어버리려는 거야
스스로 나른함에 걸어 들어가는 사람은
아름다운 변심을 꿈꾼 벌을 받으러 가는 거야
세상이 열리고 첫 겨울을 겪은 풀잎처럼
시간이 아무런 영향도 줄 수 없었던 기간만큼
한때 꽃보다 더 예쁘고 향기로웠던 기쁨만큼
그러니까 굉장한 혼란의 옷으로 갈아입지 말았어야지
그렇게 뉘우치는 일 따위는 하지 않은 벌도 함께
클로버의 행복을 훔치려고 한 죄
꽃을 강물에 심으려고 한 죄
새의 깃털로 날려고 한 죄
쨍쨍한 가을볕이 몸을 맡긴 죄
순진한 수줍음을 흘린 죄
바람둥이 바람을 배꼽에 숨겨 준 죄
밤의 고요헤 스며든 죄
해의 밝음에 반기를 든 죄
나비의 심장에 쳐들어간 죄
눈동자는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을 정도로만
무심한 듯 흔들릴 거야
붉은 이리는 늑대도 아니고 여우도 아니야
그냥 본질을 건드릴 원처적인 위험신호지
당신의 심장에 불이 켜졌을 거야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정승화
몰래 들어간 장례식장에서 신발을 잃어버리고 흰꽃들이 너줄한 사이를 정신없이 걸어가는 허름한 사내는 맨발로 도시를 돌아 다녔다 사내가 휩쓸고 다닌 도시의 골목에서 방울소리를 내던 고양이 입에 매장당한 어제의 신발 한짝이 물려 있었다 발라 먹은 생선처럼 뼈만 앙상한 사내는 강을 건너 왔다고 했다
우울한 샹송 같은 어둠만 있는 곳은 질색이야
침대는 너무 딱딱하고 화장化粧을 시키고 벽에 못질만 하잖아
그러고는 창문도 없는 방문을 반쯤만 열어 주고
내 가슴에 **곡비哭婢 같은 꽃들을 가득 안기지
노벨평화상을 받는 줄 알았다니까
내가 써 내려간 작품에 감격한 사람들이 다 울면서 꽃을 안겼어
어둠에서 올라온 사람들은 모두 검정 옷만 입고 있어
아니 잠시 눈을 감고 있어서 눈 안의 어둠을 착각했었는지도 모르지
숨을 쉴 수가 없었어 도망칠 수도 없었지 맨발이었거든
처음 알게 되었지 맨발인 사람은 심장으로 숨을 쉬는 게 아니라는 것을
그래서 나무로 침대를 만들었나 봐
그날부터 사내는 광합성을 시작했다 지하로 내려가거나 공기보다 가볍게 떠돌거나 소리를 지니지 않았다 혼자서는 무음인 채로 자작나무몸뚱이를 문지르다가 사내가 써 내려간 작품 사이를 계절처럼 다녀갔다 여전히 맨발인 채로
* 알렉산드로 푸시킨의 시 제목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에서 차용
**곡비哭婢 - 예전에 양반의 장례 때 행렬의 앞에 가면서 곡을 하는 계집종을 이르던 말
가벼운 사이
밥을 짓는 여인처럼 시를 짓기 위해 다소곳이 낱말을 마주하고 앉았다.
‘짓는다`’라는 낱말을 마주할 때마다 참 따스하다고 느낀다. 그렇게 시 역시 따스함을 지녀야 한다. 나는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어 시를 짓기 시작했다. 그 따스함의 첫 행함은 나 자신을 위로하는 것이었다. 삶에서 무수한 상처를 입고 비틀거릴 때, 시는 치유의 기적을 일으켰다. 비로소 편안하게 숨을 쉴 수 있었고 상처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었다. 시는 그렇게 나와 소통하기 시작했다.
나는 `사이`라는 낱말을 좋아한다. 당신과 나 사이, 침묵과 고독 사이, 낱말과 낱말 사이, 사이에는 여백이 있고 오래 들여다봄이 있고 기다려줌과 공소시효가 존재한다. 시도 그렇다 낱말과 낱말이 충돌하고 허물고 보듬으면서 자연스러운 시가 완성된다. 소외된 낱말의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그 낱말이 갖는 고유한 뜻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뜻밖의 문장을 짓는 것, 그것이 시의 사이이다. 시인은 독자로 하여금 그 사이를 들여다보도록 이끌어 줄 책임이 있다. 시와 시인, 시와 독자, 시인과 독자 사이에 소통의 길이 열릴 때 비록 몸은 다르지만 온전한 내 편, 친밀한 하나 됨을 느낀다.
고백하건대 나는 늘 낱말에 못 박히고 문장을 못 박는다. 그럴 때 오후 3시처럼 빛과 어둠 사이의 애매한 어디쯤에서 길을 잃는다. 최후의 언어를 잃어버린 마지막 후손처럼 오래 빈 노트 앞을 서성거리다 시 한 줄 짓는 일도 이렇게 어렵다는 것을 매번 깨달으며 현재의 삶에 감사하게 된다. 한 편의 시가 완성되듯 우리에게 돌아갈 집이 있고 마주 보며 이야기를 나눌 가족과 친구가 있고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먹을 수 있고 걸을 수 있고 만질 수 있음에 얼마나 큰 감사를 하는지 모른다. 심지어 고통을 느낄 수 있다는 것까지도 감사하게 된다. 살아 있다는 것은 부족함을 불평할 것이 아니라 만족함을 찾는 것이다. 우리가 시와 더불어 소통하고 이해하며 성장하듯이 부족함 또한 나의 일부임을 인정하고 당당하게 드러낼 수 있을 때 우리의 자존감은 높아진다. 그렇게 우리 삶의 질이 높아질 때 우리는 마음의 여유가 생기고 좋은 시를 짓기도 하고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시인은 끊임없이 질문한다. 시란 무엇인가 그리고 왜 써야 하는가 어떻게 써야 하는가 끊임없이 고민한다. 시인에게 그 어떤 막막함도 이보다 더 캄캄하기 어렵다. 우주는 시에 속해 있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것들이 텍스트다 신과 인간을 비롯하여 빛과 어둠, 삶과 죽음, 모퉁이, 비, 먼지, 목줄 그 모든 것이 시이다. 어쩌면 가장 아름다운 시는 절대 소리나 글자로 해석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니 나는 인간의 말을 하지 않는 것들이 가장 아름다운 시라고 생각한다. 절대 찾지 못할 곳에 숨겨놓은 보물 같은 어려운 시도 있지만 산새의 날갯짓에 흔들리는 나뭇잎, 5센티미터로 분분히 날리는 벚꽃 잎, 나의 꿈에서 빠져나온 설렘, 90도로 꺾어 키스하는 구스타프 클림트의 입술, 그냥 그 자체로 시가 된다. 이쯤에서 타협점을 찾는다. 시는 낱말로 그리는 그림이다. 수백 가지의 낱말을 이어 문장을 만들고 자르고 붙이면서 내가 시가 되어간다. 꽃을 피우기 위해 생살을 찢고 나오는 아픔을 겪어야 하고 나비가 날기 위해서는 30도로 체온을 높여야 하듯이 시인은 좋은 시를 짓기 위해서 끊임없이 관찰하고 발설해야 한다.
나는 왜 꼭 시를 써야만 하는가를 생각해 봤다. 시 짓는 일이 비록 꽃에서 좋은 향기를 뽑아내는 것처럼 힘들지만 시를 쓸 때 가장 행복하고 나다워지는 까닭이다. 문학의 정점에 시가 있다지만 그렇게 거창한 시 말고 나의 시는 누구에게나 손수건 같고 숨구멍 같고 따뜻한 밥상 같았으면 하는 바람을 갖으며 나의 시가 맛있는 음식처럼 중독성이 강하고 박테리아처럼 빠른 번식력을 가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