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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se Were The Days(1968, 한글자막) / Mary Hopkin
러시아인들은 어디에서 왔을까?
2010년 중국과 터키인 15명으로 구성된 탐사대원들이 '노아의 방주(方舟)'로 추정되는 목조 구조물을 발견했다고 보도했다.
터키 동부 아라라트산의 해발 4000m 지점에서 나왔다는 '노아의 방주' 추정 물체는 구약성경 창세기에 노아와 그의 가족들이 세상 모든 짐승을 태운 뒤 대홍수를 견뎌냈다는 거대한 배다.
탐사대는 목재 표본의 탄소연대를 측정한 결과 기원전 2800년대로 노아 시대와 비슷하고, 동물 우리로 보이는 칸막이들이 나온 점을 들어 "100% 확신 못하지만 99.9%는 노아의 방주라고 확신한다"고 주장했다.
노아의 후손들은 어디로 갔을까?
▲얼어붙은 바이칼 호수.
에덴의 동쪽으로 동쪽으로~
우리나라 한민족은 어디서 왔을까?
동쪽에서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서쪽에서 왔을 것이다
러시아도 그렇다
러시아의 원조는 메섹 두발과 로스족으로 밝혀지고 있다
“노아의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홍수 후에 그들이 아들들을 낳았으니 야벳의 아들은 고멜과 마곡과 마대와 야완과 두발과 메섹과 디라스요(창 10:1-2)”.
메섹의 정착지
노아홍수란 말에는 이런 뜻이 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사람은 8명뿐이라는 뜻
노아의 셋째 아들은 야벳이다.
야벳의 후손 중 하나인 메섹(Meshech)의 이름은 ‘키가 큰’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악카드 문헌에 보면 일찌감치 무쉬키(Mushiki)라는 이름이 나타나고,
앗수르 문헌에는 무스키(Mushki)라 불리는 북방 족이 등장한다. 이는 메섹 일족을 말함이 분명하다.
헬라(그리스)는 전통적으로 흑해 남동쪽에 자리잡은 이 민족을 무스코이(Muschoi, Μοσχοι)라고 불렀다.
즉 야벳의 후손 메섹은 같은 형제 두발과 동행하면서 바벨탑 사건 이후 인류 생명의 고향이요 조상의 근원인
아라랏산 방향으로 되돌아와 북쪽 카프카스(Kavkaz, 영어명은 코카서스(Caucasus)) 산맥을 향하여 가서 그 곳에 머물렀다
시간이 흘러, 중동에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같은 무력의 지배자들이 나타나면서 카프카스 산맥을 넘어
시베리아와 지금의 광활한 러시아 땅으로 들어가 오늘날 러시아 땅의 주인이 되었다.
그들이 머물렀던 카프카스 산맥 부근인 흑해와 아시아의 서쪽 끝 카스피 해 사이에는 3나라가 있는데
‘성서의 땅’ 아르메니아,
자연과 ‘신화의 나라’ 조지아(그루지아),
카스피해를 품은 ‘불의 나라’ 아제르바이잔이 자리를 잡고 있다.
만년설을 품은 코카서스 산맥의 대자연을 중심으로 다채롭고 독특한 풍광을 자랑한다.
러시아를 찾아가기전에 한 번 이 세나라를 찾아가 보자
만년설 카즈베기와 와인, 프로메테우스 신화가 숨쉬는 ‘조지아’
예전에는 그루지아란 이름으로 우리에게 익숙했던 나라다.
해발 5047m의 카즈베기 산은 만년설로 해발 2170m의 언덕에는
게르게티 츠민다 사메바교회(게르게티 성 삼위일체 교회)가 있다
1500년의 역사를 지닌 수도 트빌리시. 슬픈 역사를 간직한 종교문화유산을 비롯해 야경이 멋진 나리칼라 요새도 유명하다.
노아의 방주 아라랏 산, 최초의 기독교 국가 ‘아르메니아’
페르시아 제국의 자료에서 볼 수 있는 고대 국가 중 하나로서 한때는 지금의 터키와 시리아까지 정복한 대제국을
이뤘던 민족, 401년에 창안된 문자와 언어를 사용하는 코카서스의 유일한 역사와 전통이 살아 있는 아르메니안.
그들은 아르메니아를 ‘하이야스탄’이라고 부른다.
노아의 방주가 발견된 아라랏산이 터키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다,
평균고도가 1800m에 이르는 고원지대 중앙엔 코카서스의 물줄기를 끌어 모은 해발 1900m의 세반 호수가 있다.
불의 나라, 화려한 도시의 야경과 올드타운 ‘아제르바이잔’
세계 최초로 석유를 상업적으로 사용하고, 전 세계 천연가스 매장량의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땅에서 분출한 천연가스에 불이 붙어 치솟아 오르는 모습을 볼 수 있기에 ‘불의 나라’로 불린다.
세계인구의 변화
이러한 세 나라를 옆으로 비껴 사람들은 북쪽으로 점차 이동해 간다
이동해 간 인구는 그리 많지는 않았겠지만
지금 러시아 인구는 1억명이 넘는다
기원전후 인구통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대략 2.1억명 수준이다
1400후인 1492년에는 5억,
1804년 10억,
1922년 20억,
1959년 30억,
1975년 40억,
1986년 50억,
1999년 60억,
2011년 70억
2025년에는 90억,
2039년에는 130억으로 증가할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러시아인구는 1억 4천명 정도이다
그 당시 러시아와 중앙아시아는 다른 민족들이 지배하고 있었다
기원전 8세기경부터 카프카스산맥과 중앙아시아초원을 지배했던 민족은 스키타이족(Scythia)
고대의 유목민하면 얼핏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흉노와 스키타이이다. 흉노가 중국사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직후였다. 그런데 이 흉노보다 더 앞선 시기에 남러시아 초원지대로부터
알타이 산맥에 이르는 유라시아의 광대한 스텝 지역을 주름잡았던 유목민족이 있다. 바로 스키타이족이다.
스키타이족은 기원전 8세기부터 기원전 2세기까지 지금의 러시아 남부, 우크라이나와 중앙아시아의 스텝 지역에
거주했던 인도-유럽어족 계통의 유목민족이다.
스키타이라는 말은 그리스어에서 기원되었으며, 그리스어의 뜻은 '궁수'(Skuth?s)란 뜻이며,
알려진 바로는 최초의 기마 민족으로 채리엇(전차)이 아닌 직접 말을 타고 이동하며 싸웠다고 한다.
초원을 달리던 스키타이족의 후예 카자흐스탄
알타이 지역에서도 스키타이족의 흔적이 나타난다.
아시아 초원지대에 살던 스키타이의 일부가 BC 7세기에 유럽으로 이동해 카프카즈 산맥 북안과
흑해 북안의 초원 지대 즉 오늘날 남러시아에 도달하였다.
이들은 그곳에 머물지 않고 BC 670년대에 곧 카프카즈 산맥 남쪽으로 진출하였다.
카프카즈 산맥 남쪽은 오늘날 이란과 터키 등이 있는 서아시아 땅이다.
스키타이는 중앙아시아까지 세력을 넓혔는데 동쪽에서 흉노와 오손, 월지가 공격하자
남쪽인 그리스의 박트리아와 파르티아로 옮겨가 두 국가를 공격했고,
인도 북부에 있던 그리스 인도 왕국도 쳐들어가 인도-스키타이가 되었으나 세력이 약해져 사라지게 되었다.
소그드인, 타지크인이 이들의 직계 후손이고, 카자흐인이나 우즈베크인들의 조상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서쪽에 있던 스키타이인들은 크림 반도와 그 근역에서 살아가다가 기원전 2세기에 세력이 약해지며
사르마티아인과 알란인에 의해 흡수되었다. 그 후손이 오세트인이다.
오늘날의 우크라이나인들은 슬라브인과 스키타이인 혼혈의 후손이다.
러시아의 조상인 메섹 두발은 어떤 사람들인가?
러시아의 선조들은 중동의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같은 무력의 지배자들이 나타나면서
카프카스 산맥을 넘어 시베리아와 지금의 광활한 러시아 땅으로 들어가 오늘날 러시아 땅의 주인이 되었다.
성경(겔 38:2; 겔 39:1)은 메섹을 두발과 더불어 마곡 땅의 왕, 곡에게 종속된 민족으로 표현한다.
마곡을 스키타이족에 비유하는 학자들도 있다. 에스겔서를 보면 당시 카스피해 연안에서 흥한
스키타이(마곡족)가 두발과 메섹의 후손들보다 먼저 시베리아의 지배자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구절이다.
스키타이가 소멸되어 가면서 이후 두발 후손들은 지금의 조지아 땅에 터전을 만들었고
그곳을 중심으로 일부는 러시아의 변방 시베리아로 향하였고,
메섹의 후손들은 북방으로 나아가 러시아 땅 전체의 주인이 되었다.
메섹이 러시아 땅의 주인이라는 것은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Moscow)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다.
모스크바지명은 당연히 메섹에서 온 말이다.
모스크바는 러시아 수도인 동시에 그 도시를 둘러싼 지역의 명칭이기도 하다.
그 주변 지역 이름 가운데 하나인 ‘메스체라 로렌드(Meschera Lowland)’를 봐도,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메섹’이라는 이름의 흔적이 여전히 여러 곳에 남아 있음을 보게 된다.
로스(루스)족의 등장
세월이 지난 후 바이킹 족의 일파인 ‘로스’족이 등장하여
지금의 키예프 일대를 장악하고 원주민인 슬라브 족을 정복하며 서기 880년에 ‘키예프 공국’을 건국하였다
이 나라를 현재 러시아의 전신으로 본다. 잠깐 슬라브족을 상고해 보면 다음과 같다.
슬라브족은 주로 동유럽과 중앙유럽, 남유럽의 발칸반도에 분포하고 있으며, 러시아가 가장 유명하고,
벨라루스, 우크라이나등이 있다.
루스인의 어원은 '노를 젗는 사람'이라는 고대 노르드어로 추정된다.
루스 족은 정복한 슬라브 민족과 완전히 동화되어 현재는 거의 슬라브인의 일파로 여겨지고 있으며
‘루스’족의 명칭을 따 ‘러시아’라는 이름이 역사에 등장하였다. (‘루스의 나라’라는 뜻)
우리나라 사람들이 러시아인들을 멸시하며 부르는 단어가 로스케인데 이는 러시아인을 러시아어로 부른 ‘루스키’에서
나온 말이다. 이와 같이 루스 민족이 등장하여 러시아를 건국하자 비로소 ‘로스’에 대한 수수께끼가 풀리게 되었다.
에스겔이 지목한 ‘로스’는 바로 ‘러시아’를 뜻하는 명칭이다.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는 또한 슬라브족이라고도 한다.
모스크바에서 토블스크까지의 거리는 약 2300Km 도착시간은 약 32시간
지금 러시아의 수도인 ‘모스크바’는 러시아 전체의 수도인 동시에
바로 유럽 러시아의 중심부이기도 하다. 반면 ‘두볼스크’는 양분된 러시아의 한 부분인 시베리아의 중심부이다.
즉, 모스크바와 두볼스크는 유럽 러시아와 시베리아 러시아를 구분하여 이르는 두 지역을 각각 대표하는 도시들인 것입니다.
다시 정리해 보면
로스를 러시아로, 메섹을 모스크바로, 두발을 토볼스크로 해석하는 견해가 지배적이고
일단의 인종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은 대홍수 후에 소아시아의 인종들이 카스피해와 흑해를 넘어
북쪽으로 이동했으며 오늘날 우리가 아는 러시아인 로스 지역에 정착하고 살았다.
현재의 토볼스크는 시베리아의 주도요 러시아에서 손꼽히는 군사요충지다.
2016년 8월 24일 우크라이나 독립 25주년 기념 군사 행진 장면 중 일부 영상. 노랫말 원문에 나오는 꼬쉬오븨으 오따만은 원래 16 세기 - 18 세기 우끄라이나 자뽀리쥐쨔 Запоріжжя 지역 시츠 (자치 영농 준군사 공동체/부대) 대대장급 계급이다. 꼬자끄는 사병 계급이고, 헤쯔만(гетьман)은 16 세기 - 18 세기 우크라이나의 선출직 국가 원수 겸 군 총사령관으로서 우크라이나인들의 자유와 독립 수호에 헌신했다.
키에프 루스의 등장
러시아는 자신들의 국가 기원을 약 9세기경 지금의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전성기를 누렸던
키예프 루스에서 찾는다. 이 키예프 루스가 현재의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의 기원인 셈이다.
즉 동슬라브인의 최초 국가가 바로 우크라이나의 키예프 루스인 것이다.
키예프 루스는 ‘항해술이 뛰어난 키예프 사람’이라는 뜻이다.
키예프가 지금의 국가 형태를 형성한 것은 약 9세기경 바이킹의 후손인 올레크가 키예프를 점령한 이후이다.
물론 도시국가 형태의 ‘공국公國’ 연합이었다. 이 키예프의 전성시대를 연 군주가 스뱌토슬라프이다.
그는 평생을 말 위에서 내려오지 않은 ‘전쟁의 왕’으로 불린 군주이다.
그는 키예프 루스의 영토를 확장해 지금의 볼가강과 카스피해까지 진출해 비잔틴 제국과 맞닿은 국경선을 확보했다.
얼마 후, 스뱌토슬라프는 비잔틴 제국과 일전을 불사했지만 패하고 971년 비잔틴 제국과 강화 조약을 체결했다.
이윽고 스뱌토슬라프의 아들 블라디미르 대공이 즉위했다.
그는 키예프를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발전시킨 군주이다.
블라디미르는 그리스 정교를 받아들였고 본인 스스로 비잔틴 제국의 공주와 결혼해
이후 러시아 정교회 발전의 토대를 만들었다. 이때부터 키예프 루스의 전성기가 시작되었다.
1036년에 즉위한 블라디미르의 아들 야로슬라프는 키예프를 눈부시게 발전시켰다.
그는 법전을 정비하고 학교와 도서관을 지어 국민을 계도했다. 후에 역사가들은 야로슬라프를 ‘현자’라 불렀다.
하지만 키예프 루스의 전성기는 13세기 초 몽골 제국의 침략으로 끝났다.
야로슬라프의 손자인 블라디미르 모노마흐 때부터 키예프는 분열하기 시작했고 1240년 몽골 제국에 의해 멸망되었다.
이후 몇 세기 동안 키예프의 후손들 즉 러시아, 우크라이나 등의 동슬라브인들은 국가가 없는 시간을 지냈다.
이후 몽골 제국이 멸망하고
우크라이나 지역은 오스트리아 등 주변 강국의 분할 통치에 들어갔다.
모스크바 대공국은 주변 지역을 모두 장악했으며, 그들은 몽골 제국에 세금을 내는 대신 지역 지배권을 유지했다.
그 뒤 17세기 폴란드 지배 하에 있던 우크라이나는 독립을 위해 러시아에 도움을 요청한다.
이 시기부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직간접적인 지배와 간섭이 시작된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우크라이나는 독립 국가를 건국할 기회를 얻었지만 당시 프랑스가
폴란드의 서 우크라이나 지역의 병합을 용인함으로써 그 기회도 상실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우크라이나는 비로소 국가의 형태를 갖추고 독립했지만
역시 소련의 위성국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러시아 의장대
캬츄샤는 러시아에서 흔히 쓰는 여자이름으로 굳이 우리나라 말로 표현하자면 '순이' 정도. 이름의 어원은 러시아의 유명한 여제 였던 '예카테리나'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브란쩨르' 라는 작곡가가 전쟁시를 쓰고 거기에 곡을 붙인 것이라고 합니다. 군가라기 보다는 참혹했던 서부전선에 투입되었던 러시아 군인의 향수를 달래준 음악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러시아의 역사적 뿌리, 키예프 루스
푸틴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배권을 국제 사회에 공개적으로 표방하기 위해 이번 침공을 단행했다.
러시아와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원하는 첫 번째 이유는 러시아의 뿌리가 바로 우크라이나의 키예프이기 때문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민족, 종교에서 동질감이 있다. 물론 언어와 기타 문화적인 면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가 원래부터 러시아의 일부라는 인식을 감추지 않는다. 뿌리가 같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키예프에서 분리한 형제국이지만,
우크라이나는 러시아보다는 게르만, 투르크, 바이킹, 비잔틴 문화와 오랜 시간 교류하면서
우크라이나만의 독특한 문화를 형성해 왔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대해 동질적 뿌리 인식을 갖고 있는 반면 우크라이나인은 그렇지 않다.
우크라이나인들의 러시아에 대한 역사적 기억은 좋지 않다.
얼어붙은 감자 캐는 어린이들 - 1930년대 초반 극심한 기근으로 우크라이나에서 약 350만명이 굶어 죽는 비극이 벌어졌다. 소련이 집단 농장, 국영 농장에 농민들을 강제 편입시킨 데 이어 대량 공출로 곡물을 수탈하면서 굶주림이 심해졌다. 스탈린은 저항하는 우크라이나 농민들을 소비에트의 적으로 규정하고 가혹하게 처벌했다. 1933년에는 굶어 죽는 이가 하루 평균 1만5000명 규모로 늘어날 정도였다. 사진은 1933년 도네츠크의 한 집단 농장에서 어린이들이 얼어붙은 감자를 캐는 장면이다. /위키피디아
그들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돈바스 지역에 수많은 러시아 인을 이주시켰고 그로 인해 분쟁의 씨앗이 잉태됐다고 생각한다.
즉 돈바스 지역에 약 200만 명에 달하는 러시아 인들이 이주하면서 이곳에서 친 러시아 분리 독립이 시작된 것이다.
또한 유럽에서 러시아 다음으로 큰 영토인 우크라이나는 비옥한 곡창지대를 보유한 ‘유럽의 빵 공장’이다.
우크라이나인들은 이런 지리적 이점의 수혜를 그동안 각종 수탈과 핍박을 통해 러시아가 가져갔다고 생각한다.
유럽에서 가장 축복받은 비옥한 땅에서 벌어진 스탈린 시절의 우크라이나 대기근의 트라우마를 우크라이나인들은 잊지 않고 있다.
구 소련의 붕괴 이후 러시아의 영향력이 감소하자 우크라이나는 실질적 독립을 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는 여타의 동구권 국가와 다른 문제를 안고 있었다.
그것은 러시아 군이 우크라이나에 배치했던 약 1800여 기의 핵탄두.
이 숫자는 미국과 러시아에 이은 세계 3번째 핵보유국이 바로 우크라이나라는 뜻이다.
러시아는 물론이고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은 우크라이나가 1800여 개의 핵탄두를 보유하고 있는 것에 불안감을 표출했다.
해서 이들은 1994년 부다페스트 안정보장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각서의 주된 내용은 우크라이나가 핵폭탄 1800여 개를 러시아에 넘기고 대신
미국, 영국,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영토 보존과 정치적 독립을 약속하는 것이다. 우크라이나는 결국 핵 대신 달러를 선택했다.
핵을 포기한 우크라이나
하지만 이 부다페스트 각서는 말 그대로 각서. 즉 국가 간의 조약이나 협정보다는 구속력이 약한 약속일 뿐이다.
러시아는 핵탄두를 손에 넣었고, 미국과 영국은 우크라이나보다는 러시아가 핵탄두를 관리하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판단해 각서를 써준 것이다. 이후 러시아는 국가 재정비의 시간이 필요했다.
이런 상태에서도 우크라이나 돈바스 지역에서는 여전히 친 러시아계 주민들의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무장 투쟁이 일어났다.
즉 우크라이나 정부군과 친 러시아계 반군의 전투가 끊이지 않은 것이다.
드디어 러시아가 구 소련급의 국력을 회복했다고 판단한 푸틴 대통령은 2014년 전격적으로 우
크라이나 크림반도를 합병했다. 이는 러시아가 부동항을 갖기를 원하는 오랜 역사의 결과였다.
크림반도 안에 있는 세바스토폴 항구는 바로 러시아 흑해함대의 주둔지.
러시아는 이 흑해함대를 통해 지중해로 진출하려는 야망을 갖고 있었다.
2014년 3월11일, 크림 자치공화국과 세바스토폴이 독립을 선포하고 이른바 ‘크림공화국’을 결성했다.
그리고 친 러 악쇼노프라가 크림 자치공화국 총리 자격으로 푸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푸틴은 흑해함대와 러시아 주민보호 명분으로 크림반도에 군대를 파병했다.
2014년 3월16일, 러시아와 합병을 내건 주민 투표를 실시했다. 당시 주민의 63%가 러시아계라 결과는 예정되어 있었다.
투표 결과 95% 찬성으로 러시아와 크림공화국의 합병은 통과되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를 비롯해 미국과 유럽 국가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현재까지도 이 크림공화국을 인정한 국가는 전 세계에서 8개국뿐이다.
러시아로서는 옛 소련의 영화를 재현하기 위한 첫 단추를 크림반도 주민들의 자발적인 선택이라는 방법으로 이뤄낸 것이다.
2014년 당시 야누코비치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친러 정책에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시위대는 정부의 진압에도 반정부 봉기를 계속해 드디어 야누코비치 정권이 물러나고 새로운 친 서방 정권이 들어섰다.
이 시민 운동이 바로 ‘유로마이단’이다.
2013년 11월 21일 2,000명의 시위자들이 수도 키예프 ‘독립광장’(Maidan Nezalezhnosti)에서 EU가입을 요구하며 평화적 시위를 벌였다. 야당 인사 누군가가 그 시위를 ‘유로마이단’(Euromaidan)이라고 부르며 트윗했다. 우크라이나어로 광장을 ‘마이단’이라 하고, 유럽 가입을 요구한다고 해서 지어진 신조어였다. 이후 시위를 유로마이단 시위라 불렸다.
크림반도 합병에 자극받은 돈바스 지역 친러파들이 분리 독립을 주장하며 내전을 선포했다.
바로 돈바스 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 내전으로 약 1만4000명의 사상자와 약 150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이에 2015년 러시아, 우크라이나, 독일, 프랑스 등 4개국이 만나 분쟁 해결을 위한 민스크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그러나 민스크 협정은 사실 미봉책이다. 근본적인 해결 없이 협정을 체결, 그 이후에도 돈바스 지역에서의 내전은 끊이지 않았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직간접적인 간섭 역시 계속되었다.
미국과 러시아, 유럽의 에너지 패권
21세기는 자원 전쟁의 시대이다. 이 자원 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대두되는 것이 바로 천연가스이다.
유럽을 비롯한 세계 각국은 탈원전, 탄소중립을 선언하고 있다.
이에 가장 필요한 것이 천연가스, 즉 액화천연가스LNG이다.
러시아는 천혜의 혜택으로 이 천연가스 매장량이 막대하다.
러시아의 재건에 필요한 재원을 이 천연가스 수출로 충당할 정도.
이에 비해 서유럽은 자원이 빈약하다. 해서 러시아는 막대한 양의 천연가스를 그동안 서유럽 국가에 수출했다.
이 러시아 산 천연가스는 서유럽 국가의 난방 그리고 산업용으로 활용되었다.
지리적 특성상 러시아 산 천연가스의 주요 수출길에 우크라이나가 있다.
러시아는 미국을 비롯한 서유럽 국가와 마찰이 생길 때마다 가스관의 밸브를 잠가 버렸다.
물론 러시아도 피해를 보았지만 서유럽 국가는 당장 산업시설이 멈추고 국민들은
겨울에 냉방에서 지내야 하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러시아의 가장 큰 고객인 독일은 가스관을 직접 연결하는 노르트스트림1을 설치했다.
이 가스관 설치에 제일 반발한 것은 미국과 우크라이나다. 우크라이나는 자국의 서유럽에 대한 영향력 감소를,
미국으로서는 러시아의 서유럽 국가에 대한 영향력이 증대되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까지 미국은 서유럽 동맹에 막대한 가스를 수출했다.
하지만 러시아산 천연가스는 지리적 여건으로 미국산보다 유용했다.
미국이 반발했지만 러시아와 유럽, 특히 독일 주도의 노르트스트림2 설치 계획이 발표되면서 공사는 시작되었다.
미국의 공식 반대에도 불구, 독일은 이를 내정간섭이라 여기며 러시아와 직접 협력 입장을 고수했다.
이미 2012년 노르트스트림1은 설치되어 가동 중이며 여기에 더해 노르트스트림2 건설을 주도한 것은 독일이다.
독일은 2000년 당시 슈로더 총리가 이미 탈원전을 선언하며 러시아산 가스 수입을 확대시켜 왔고
노르트스트림2 건설도 2021년 완공했다. 발트해를 통해 러시아 북부와 독일을 직접 연결하는
이 거대한 해저 가스관은 길이가 무려 1200여km에 가스 공급량은 연 550억 입방미터.
약 13조 원이 투입된 이 가스관으로 독일은 자국 가스 필요량의 약 50%를 러시아로부터 공급받으려는 계획이었다.
미국과 영국 그리고 우크라이나는 이를 러시아의 영향력 증대를 이유로 반대했다.
물론 지금 러시아의 천연가스 수출 라인은 노르트스트림을 제외하고도 몇 개가 더 있다.
1997년부터 운영되고 있는 러시아-벨라루스-폴란드-독일을 경유하는 야말 가스관과 우크라이나를 통과하는 가스관이다.
러시아가 이 가스관들의 밸브를 잠가버리면 유럽은 큰 곤란에 직면하게 된다.
이미 작년 천연가스 가격이 연초에 비해 800% 폭등하는 직격탄을 맞은 바 있다.
러시아에 필요한 것은 노르트스트림보다 우크라이나를 통해 공급되는 라인이다.
우크라이나의 지정학적 중요성 때문에 푸틴은 절대 우크라이나를 그 어떤 것과 대신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세계의 화약고로 떠오른 ‘키예프 루스’
2022년 2월21일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돈바스 지역의 친 러시아 분리주의자들이 선포한 독립 국가 선언을
승인하며 후속 조치로 이 지역의 분쟁 완화와 돈바스 지역 약 400만 명에 이르는 시민의 안전, 특히 러시아계 시민 보호를
목적으로 러시아 평화유지군의 돈바스 진입을 승인했다.
2월24일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내에서 러시아 군의 군사 작전을 승인, 돈바스 지역뿐만 아니라
벨라루스, 크림반도 등을 통해 우크라이나를 향해 미사일 발사와 지상군을 투입했다.
만일 우크라이나가 달러대신 핵을 선택하였다면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가장 위대한 러시아인
2008년 12월 가장 위대한 러시아인이 발표되었다.
Name of Russia라는 프로그램이었다. 1위는 알렉산더 네브스키였고 2위는 표트르 스톨리핀, 3위는 요셉 스탈린이었다.
2017년 조사한 여론조사
러시아인들 "세계사서 가장 위대한 인물은 스탈린, 2위는 푸틴"
동서 냉전 해체의 주역으로 서방에서 칭송받는 옛 소련 대통령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고작 6%를 얻는 데 그쳤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스탈린의 길을 가는 푸틴. 그도 전쟁에서 이기기만 한다면 어떠한 비난도 잠재울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과연 역사가 그의 뜻대로 될 것인가?
러시아식 생활양식
당연히 여성들이 가장 먼저 주목을 끈다. 러시아 여성들은 극장이나 파티에 갈 때처럼 옷을 차려 입는다고들 한다.
이런 모습은 흔치 않아 곧장 눈에 띈다. 우크라이나 출신인 나 자신도 그 전에 잠시 세계 여행을 하고 나서
러시아에 와서야 이런 특징을 알아 되었다. 러시아 여성은 심지어 빵을 사러 나갔다 올 때조차도 화장을 하고 하이힐을 신는다.
러시아 사람들의 또 다른 특징은 잘 웃지 않는다는 점이다.
유럽인과 미국인들은 그저 예의상 모두에게 미소를 짓는다.
그렇게 일반화되어 규범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러시아 사람들은 당신에게 진심으로 공감할 때만 미소를 짓는다.
다른 사람들보다 당신을 왠지 모르게 특별히 나쁘게, 더 심하게 대하는 것 같아 처음에는 불편하게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익숙해지면 마이너스는 플러스로 바뀐다. 좀처럼 미소 짓지 않는다는 것은 당신을 보고 정말 기뻐함을 의미하는 것이지
일반화된 에티켓을 단순히 준수한다는 것이 아니다.
얼굴표정, 몸짓, 언어 표현도 그렇다. 물론, 음식도 있다.
러시아 음식에서 놀라운 점은 바로 마요네즈가 많이 들어간다는 것이다.
마요네즈는 새해맞이용 '올리비예(Оливье)' 샐러드와 '외투 입은 청어(селедка "под шубой")' 샐러드는 물론이고
다른 많은 샐러드에도 들어간다. 심지어 마요네즈를 바른 고기를 오븐에 넣어 구우려고도 하는데,
마요네즈가 차가운 샐러드 소스여서 열을 가하면 상하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온 세상이 알고 있는데도
이런 일은 널리 퍼져 있다.
‘거치른 파도가 우리의 배에휘몰아 친다.
어깨에 널따란 띠를 두르고적은 모래바닥을 한걸음씩끌고 나간다.
강가를 따라 무거운 짐을 끌고 올라간다. 볼가강이여,
밤낮 없이 드넓은 강둑을 따라 너를 위해 목청껏 노래한다.
드넓은 볼가강이여! 너 자유로운 볼가강이여!
너에게 슬픈 가락을 노래한다. 영치기 영차!"
어기여차,어기여차
한번더,한번더
우리는 자작나무를 자른다
울창한 자작나무를 자른다
밧줄을 단단히 묶어라
태양을 향해 노래를 부르세
우리는 강가를 걷는다
햇살에게 노래를 불러준다
아이다다 아이다
아이다다 아이다
햇살에게 노래를 불러 준다
밧줄을 단단히 묶어라
밧줄을 단단히 묶어라
볼가는 어머니의 강
넓고도 깊구나
아이다다 아이다
아이다다 아이다
볼가는 어머니의강
앞으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은 어떻게 될까?
성경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미래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 주 여호와가 이렇게 말하노라.
너 로스와 메섹과 두발 왕 곡아, 내가 너를 대적하여
너를 돌려 세우고, 갈고리로 네 아가리를 꿰고, 너의 말과 기마병
곧 네 온 군대를 끌어내되, 완전한 갑옷을 입은(완전무장한) 군대,
큰 방패와 작은 방패를 들고 칼을 휘두르는 큰 무리를 이끌어 낼 것이라.
방패와 투구로 무장을 한 바사(이란)와 구스(이디오피아)와 붓(리비아)을 끌어내고
고멜과 그의 모든 군대와, 북쪽 끝이 있는 도갈마 족속(터키족)과 그의 모든 군대 등
수많은 백성의 무리들을 너와 함께 끌어내리라.
너는 네게로 집결해 온 모든 군대와 함께 만반의 준비를 하고,
그들을 지휘하여라(각오하고 준비하여라).
여러 날 후 곧 끝 날에 너는 무장을 하라는 명령을 받을 것이라.
여러 해가 지난 후에
칼로부터 회복된 땅, 여러 민족들 가운데로 흩어져 사는 동안 폐허가 되었던
이스라엘 산지에 다시 세운 나라를 네가 공격하게 될 것이라.
그들은 이방의 다른 민족들 사이에서 살다가 돌아온 뒤에 모두들 안심하고 평안히 살고 있던 중이라.
그때 네가 쳐 올라갈 것이며, 너와 네 모든 군대와 너와 함께 한 많은 백성들이
광풍같이 이르고 구름같이 덮을 것이라.
지금 우리는 우크라이나를 응원하고 있다
그러나 앞으로 최종적으로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힘을 모아
이스라엘을 대적할 것이다
언제 이 말이 이루어질지
그리고 우리 대한민국은 어찌 될지...
첫댓글 와~대단하십니다.
이 방대한 자료를 헉^^
읽어가기도 부담,어려운것을~~
역쉬~센쎄이님이므이다.
감사~캄사~~
일반게시판으로 갈 걸 우리들의 이야기에 잘못 실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