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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스크랩 청주 여행2 - 수암골 벽화마을 연탄카페 이야기
민지홍(8기) 추천 0 조회 206 15.07.21 13:4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수암골 벽화마을 연탄카 이야기


사라진 것에 대한 넋두리


대도시에서도 연탄을 주 연료로 사용하던 시절이 있었다. 불과 30년 전까지의 일이다. 이후에 기름 보일러가 등장하고 아파트가 일반화되면서 편리한 가스를 이용하게 되어 주변에서는 연탄을 보기가 힘들어졌다. 일상생활에서는 사라졌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덕분에 요즘 청소년들은 연탄이 뭔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연탄이 마치 구 시대의 유물로 비춰진 오늘날이지만 중년의 사람들은 연탄으로 인한 애환과 추억이 많다. 나도 대학시절 고학을 할 때 자취를 했던 터라 탄불을 꺼트리지 않기 위해 항상 신경을 써야 했고, 그래도 꺼지면 번개탄을 이용하여 탄불을 살리고자 매케한 연기를 들이마셔야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중년 이상의 아지메들은 소시적에 엄마의 외출로 인한 명령, "연탄불 oo시에 갈아야 하니 잊지마라~~~!"를 가장 싫어했을 지도 모른다. 깜박 잊고 연탄을 갈지 않았거나 갈았음에도 불구하고 연탄불이 죽어 있는 경우라면 엄마의 끝없는 잔소리는 물론 "우리 엄마 맞어?"라고 하면서 잠시 엄마를 게모로 착각하게 만들기도 했을 게다.


그 때 그 시절에는 그 정도로 "연탄불 지켜내기"가 온 부엌 살림의 기본이자 가장 큰 디딤돌이었다. 한겨울 피곤한 몸을 쉽게 녹여주는 아랫묵을 만드는 것도, 따뜻한 국과 맛 있는 찌게는 물론이고 전기밥솥이 나오기 전까지는 밥까지, 평상시에는 물을 데워서 설겆이는 물론이고 빨래물로 끓이기도 하고, 개별 욕실이 없던 시절이라 매일 부엌에서 따뜻한 샤워라도 할라치면 계절에 상관없이 부엌은 연탄의 살신성인으로 인한 덕(德)의 산물이었고 우리는 그 혜택을 고스란히 받고 자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지어는 경남 고리에서 원자력 발전이 생겼어도 석탄으로 화력발전을 하여 전기 혜택을 받는 이가 더 많았던 기대였으니. 이 언급을 하는 동안에 실감하는 독자들은 아련한 옛 생각에 회한이 스쳤을 것이다.    


구들장이 놓인 온돌방은 방 밖의 아궁이에서 열기를 보내야만 데워지는 것이기에 근대화된 부엌이라고 해도 원료가 땔나무에서 연탄으로 바뀐 것에 지나지 않았다. 


현대에 와서 빌라라는 공동 주택과 아파트라는 주택에서 연탄을 사용하는 집들이 없어지고 가스를 사용하는 입식 부엌이 집 안으로 들어온 것은 가히 혁명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이 서구적인 현대건축은 그야말로 우리네 생활양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이 현대적 주거건물의 등장으로 아궁이 자체가 없어졌던 것이다. 아궁이가 없어졌다는 것은 구들장을 이용한 온돌 문화라는, 수천 년 전통 문화가 없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 연탄은 자연적으로 사라질 수밖에 없었고 냉장고의 등장은 당연한 것이겠지만, 여기에 한술 더 떠서 세탁기가 등장한 것도 문명 발달사에 또 하나의 획을 그은 사건이었는데 이후로 진공청소기까지 등장하면서 주부들의 허리가 편해지고 삶의 질이 한층 높아졌다.


오늘날 아파트가 아니라도 냉장고와 세탁기, 진공청소기를 사용하지 않는 집은 거의 없을 것이다. 심지어는 에어컨이 없는 집도 찾아보기 힘들다. 1세대 1 car 시대도 이미 지나간 옛 이야기에 불과하지 않는가.


하지만 그런 현대적 건축과 문명의 이기들이 거저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집 값도 비싸지만 제품 가격들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현대적인 건물에서 온갖 문명의 이기들을 갖춘 채 편리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뼈빠지게 열심히 일을 해야만 한다.


거기에 더해서 사람의 욕심이란 한도 끝도 없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첨단 TV나 음향시스템, 통신기기, 고급 승용차 등의 첨단 제품들을 구비하기 위해서는 허리가 휠 만큼 노예처럼 일해야 하니 더욱 황금만능주의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지금도 결혼하려는 남자들은 집 장만이 가장 큰 문제이고, 여자들은 그 집에 채워넣을 온갖 가재도구와 문명의 이기들을 사느라 엄마와 함께 다리품을 많이 팔아야 할 게다.


어쨋거나 그 오랜 세월동안 여인들의 애환이 서린 부뚜막이 사라진 것은 중노동이나 다름없던 부엌 살림에서 해방된 것을 의미하지만 한편으로는 현대식 입식 부엌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던 향수어린 정경이 있었기에 중년들이 연탄구이 식당을 자주 찾는 이유도 그런 향수를 함께 맛보려는 것일 지도 모르겠다.



버려진 연탄 다시 태어나다



청주 수암골 벽화마을을 이야기 하면서 갑자기 연탄에 대한 상념을 꺼내든 것은 이 달동네가 주는 서민적 이미지가 아직도 연탄을 사용하는 집이 있을 법한 주택들이라서가 아니라 이 벽화마을 한 켠에 있는 허름한 집을 예술적 작업공간으로 삼은 연탄카페라는 곳을 발견해서이다. 커피 한 잔에 수천 원씩 하는 요즘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카페는 결코 아니다. 그런 카페는 이런 달동네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개업을 했다가는 며칠 못가서 폐업을 해야할 터이니.


다 사용한 연탄은 죽음의 상징이다. 말 그대로 불꽃처럼 살다가 제 역할을 다하고 조용히 사라져 한 줌 흙으로 돌아가는 연탄은 우리네 인생을 그대로 닮았다. 평소라면 그렇게 사라져야 할 폐연탄을 재활용한 작품들은 이를 보는 나같은 중년으로 하여금 뇌리를 강타하는 충격조차 준다.


지구 자원의 고갈로 인한 심각한 문제는 절약과 재활용이라는 거창한 테마를 빌려오지 않더라도 아니라도 요즘 재활용에 대한 각국의 노력은 눈물 겨운 실정인데 우리나라 또한 예외가 아니다. 각 가정마다 분리수거를 하기 위해 주부들은 물론이고 남편들까지 도와야 하는 이 재활용 문제에 포함되지 않는 것들은 한순간에 사라지고 버려지는 것들인데, 그런 쓰레기들 중에 연탄은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왜냐하면 다른 쓰레기들과는 달리 추억과 애환을 잔뜩 머금은 것으로서 그 마저도 쉽게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도시에서 일부러 폐연탄을 보려면 연탄구이 식당을 가야만 할 것이다. 


그런 연탄을 버려진 그대로 가져다가 작업하여 새롭게 변신시키는 작업장, 연탄카페는 수암골 벽화마을 한 켠의 끝에 있다. 간판에 내 걸린 작은 제목이 눈에 들어온다. 뇌리를 강타하는 충격은 폐연탄뿐만 아니라 저 문구에서도 일어난다.


"비극적 사회와 그 적들"


대체 무엇이 비극적 사회라는 것일까? 그리고 적들이라니 여기서 말하는 적의 의미는 무엇을까? 남들은 그냥 지나칠지도 모르는 이 신선한 마주침과 문구는 내 발 길을 한없이 잡아 둔다. 그래서 수암골 벽화마을을 소개하면서 두 편으로 나누고 수암골의 모든 것을 한 편에 소개하는 한편 나머지 이 한 집, 연탄카페를 특별히 한 편으로 구성한 터이다.


사용 전(前) 연탄은 습기가 없는 곳에 잘 보관해 두었다가 필요할 때마다 하나씩 가져다 사용한다. 연탄이 제 역할을 할 때는 아주 아름다운 불꽃을 피운다. 지름 2cm도 안 되는 여러 구멍에서 파란 불꽃이 올라오는 것을 본 사람들이라면 알 게다. 검정색 연탄이 퇴색하면서 피어내는 그 불꽃은 초가 자신을 스스로 태우며 제 살을 깎아내리는 아픔을 대변하는 촛불과는 사뭇 다른 신비하고도 아름다운 불꽃을 낸다. 


계속 보고 있노라면 얼마나 뜨거운 지도 잊은 채 만져 보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느끼게 되는 그 예쁜 불꽃, 한 겨울 아궁이를 들여다보며 그 불꽃 위에 올린 뚝배기에 된장찌게라도 보글보글 끓고 있는 모습은 아무리 떠올려도 싫증나지 않는 추억이자 향수임에 분명하다.


그렇다면 사용하고 난 뒤에 버려진 연탄과 그 잔해들을 보고 카페의 쥔장은 비극적 사회라고 성토하는 것일까? 필요할 땐 애지중지, 사용할 땐 즐감하다가 다 쓰고 난 뒤에는 아무련 미련없이 버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는 사회 풍토를 말함인가? 일회용품의 난발이 우리 사회에 미치는 좋지 않은 영향들을 말함인가? 사실 연탄이 흔하던 시절에 폐연탄의 쓰레기들이 모인 것을 보면 인상이 절로 찌푸려지는 풍경이었다. 비록 연탄은 없어졌지만 지금도 밤에 나가보면 쓰레기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는 새삼 거론할 필요가 없다.


게다가 적들이라니. 버리는 사람이 적이란 것일까? 아니면 그런 사회를 자의반 타의반 주도적으로 만들고 있는 정치지도자들을 풍자적으로 비꼬는 것일까? 


어쨋든 상당히 정치적인 뉘앙스가 많이 풍기는 이 제목 하(下)의 간판 아래에는 버려진 연탄, 이미 그 역할을 다한 연탄들의 재생이 예술로 승화되어 있다. 죽은 나무에 꽃이 피는 것은 본 적이 있지만 다 사용하고 버려진 연탄을 이렇게 특별히 재생한 것은 처음 보는 것이라 더욱 새롭다.


연탄재를 이용한 재생 작품들이 전국투어를 한단다.^^



폐연탄이 말을 하다



달동네를 연상시키는 지붕에 올려진 폐연탄이 웃고 있다. 그리고 말푯말을 세웠다.


"당신 참 좋다."고 말을 거니

"나보다 (당신이) 더 좋다."고 화답하는 한 쌍의 폐연탄이 심금을 울린다.


사람으로 친다면 이미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노년일 것인데 당신이 참 좋다니. 물론 이것은 그 노년의 일반 친구가 아니라 배우자를 보고 한 말일 것이다.


삶의 질이 높아지고 문명화가 고도로 발전된 이 시대에 오히려 이혼율이 높고, 황혼 이혼을 고려하는 부부들도 많아진 각박한 현실에서 저런 문구는 물론 진부한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사랑과 인생의 슬픈 방정식에 대한 답은 물론 정답이 없기에 해법을 찾기 힘들 지도 모르지만 정답이 없기에 노력하는 자만의 결실로 돌아올 것임이 자명하다.


하지만 그런 노력이 성인이 되는 노력보다 힘들다고 느껴지는 것이 우리네 인생아닐까? 게다가 이런 노력의 결실이라는 것이 무조건 맛 좋고 아름다운 열매로 맺어지는 것이 아님을 우리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런 지난한 노력을 해야만 하는 슬픈 방정식이 우리네 사랑과 인생의 방정식이 아닐까?


그래서 중년은 힘들고 외롭고 친구가 그립다. 같이 수다를 떨어줄 친구가 그립고, 같이 한 잔 술로 인생을 안주삼아 순간의 성토에 동참해줄 친구가 그리운 것일 게다. 그래서 오늘도 연탄구이 식당을 지날 때 불러 낼 친구를 뇌리 속에 떠올려보는 것일 게다.


어쨋거나 진부하기 그지 없고 닥살스럽기 그지 없는 저런 문구 자체는 이미 우리네 중년들의 눈길을 잡지 못한다. 그런데 폐연탄에 미소를 그려넣고 문구를 세우니 전혀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깊은 전우애마저 느껴지는 동료의식이 저변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마치 도(道)를 구하기 위해 일평생 묵언(默言)하던 수행자가 아주 간단한 말로 생의 진리를 토하는 듯하다.


말에는 주술(呪術)적인 힘이 있다고 언어학자들은 말한다. 그래서 그런지 저 문구의 말은 내가 말 하고 구군가로부터 대답을 듣는 듯한 느낌, 누군가 내게 말 하고 내가 대답을 해주는 느낌이다. 나도 그런 주술적인 힘에 이끌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한 곳에서 나지는 않았더라도 같은 방법으로 화려한 불꽃을 피우고는 미련없이 생을 마감해야 하는 연탄들의 삶은 거의 동질이다. 그렇게 살았어도 인간이란 동물은 전혀 자신들에게 고마워하지도 않지만 자신의 삶을 제대로 살다가는 연탄들의 못다한 이야기들은 마치 도가(道家)의 은둔 현자들처럼, 유가(儒家)의 군자(君子)들처럼 느껴진다. 


이쯤 되니 갑자기 옛날 순조 때 '조침문(弔針文- 중년이라면 국어 교과서에 실려 있어서 읽어봤을 것이다.)'이라는, 부러진 바늘을 보고 훌륭한 글을 써서 아낙네의 문장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유씨 부인이라는 분이 환생한다면 이 폐연탄에 대하여 살림하는 아낙네의 심경(心境)으로 유려한 필체의 문장을 남겼을 법하다.


여기에 보이는 문구들은 흔히 주변에서 많이 보고 들어 온 말들에 지나지 않지만 버려진 연탄의 말(言)로 다시 들으니 느낌이 전혀 다르다. 추체험(追體驗)한 듯 실감나게 느껴지기 때문이고, 연탄에 대한 향수가 있기 때문이다. 마치 십년 전 돌아가신, 세상에서 오로지 내게 가장 나이팅게일 같았던 할머니의 생전의 음성처럼 들려온다. 





직접 체험을 해볼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서투른 솜씨로 버려진 것들을 살리려는 노력이 가상하다고나 할까? 개구멍을 통해 안을 엿보니 분주하게 보이는 예술인들이 있는데 그들의 손을 거쳐 새로운 탄생이 나온다. 마이다스의 손은 아닐지라도 신비로운 손임에 틀림이 없다.



봄을 기다리는 폐연탄의 바램. 생동하는 봄의 기운이 만연하면 이들도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일까?


아무리 거북이처럼 다니며 여행을 하지만 그래도 오늘처럼 일정이 정해져 있는 경우에는 한 곳에서 오래 머무를 수가 없다. 그런 나를 애써 발길을 잡는 것은 이 폐연탄 위를 장식한 각종 문구들이다.


새롭게 다가오는 느낌으로 변신을 한 폐연탄들의 마지막 삶과 초월자(超越者)인 듯한 그들의 말을 들어보자. 독자분들도 다시 한 번 음미해 보시기 바란다.


5월 15일, 봄의 절정에 마주한 것임에도 마치 지금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한겨울이라 힘드니 이를 위로하는 듯하다.


마음속으로만 억지로 스스로를 자위하는 문구인데 보고 있자니 마치 실제로 그런 느낌을 받는다. 그런데 정말 이와 같지 않을까? 지구상 70억의 인구 중 비록 개미 한 마리 같은 한 명에 불과 하지만 나는 오로지 하나일 뿐이니. 이 글을 쓰는 나와 이 글을 읽는 독자분들 모두 우리 자신에겐 특별함이 있음을 알고 살자. 살아 있는 동안에는. 


미안한 마음이 절로 생긴다. 그래 더 따뜻한 사람이 못 되어 미안하다. 노력할께.


가수 안 치환의 노래가 요즘도 인기가 많다. 고등학교 절친 중에 한 명이 예전에 이 노래를 참 잘 불렀는데 이후로 그 친구의 입으로 들어보진 못했지만 대신에 내가 여러 번 부른 것 같다. 안 치환은 세상을 향해 절규하듯 노래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이미 그가 이 노래를 부르던 시절에도 사람보다 우선시되는 것들이 있었기에 그런 절규를 했을 것이다.


이제는 다시 폐연탄이 마지막 미소를 잃지 않은 채 오로지 한 마디 한다. 죽은 나무에 꽃을 피우듯 자신의 머리에 꽃을 피운 해바라기 연탄에게 웃으며 자신있게 말을 한다. 꽃 중에서도 해바라기를 피운 것이 특히 의미심장한 일인데, 해바라기 연탄의 모습은 자긍심이 가득하여 교만스럽기까지 하다.


"마음이 아름다우면 꽃보다 예뻐질 수 있다"고.


그러자 해바라기 연탄이 그를 쳐다본다. ("엉? 그, 그런가?", "그, 그렇겠지......")

여기서 작가는 해바라기 연탄의 입을 생략해버렸다.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원래 진리 앞에선 말이 필요 없다는 뜻일 게다. 그리고 아래의 연탄들은 슬며시 미소짓는다. 염화시중(拈華示衆)의 미소가 이와 같지 않을까? 그들은 말푯말을 세우지 못하는 아래층 연탄들이지만 굳이 말로 화답할 이유가 없는 듯하다.


그리고 보니 꽃보다 예쁜 친구, 마음이 참 아름다운 한 친구가 내 옆에 동행하고 있어서 나는 참 행복한 놈이다. 오늘 만날 다른 두 친구도 그렇지 아니한가. 내 인복이 참 많다는 생각이 든다.


당신도 무엇인가를 간절히 원해본 경험이 있나요? 지금도 그런 간절함 속에서 기도하는 삶으로 살고 계신가요?


무슨 무슨 사연과 운도 따라주지 않아 조그만 희망조차 사라졌다구요? 힘내세요^^ 당신도 할 수 있습니다.


갈수록 이해타산(利害打算)과 물질적 이욕(利慾), 뜨거운 삶의 경쟁에 떠밀려 새벽 녘 희미한 별빛처럼 사라지는 사랑의 불빛. 과연 작가는 영원한 사랑을 꿈꾸는 것일까? 어쨋든 사랑은 오래갈수록 좋은 것임에 틀림이 없을지니......


중년 아지메 曰

; "애써 키운 아이들은 저 잘났다고 밖에서만 놀다 잠만 자러 들어오니 품 안에 자식일 뿐이고, 남편은 직장에서 짤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탓에 퇴근하면 지쳐 쓰러지기 일쑤이니 나는 벽만 보고 살아야 하나? 나 도대체 뭐지?"


중년 아저씨 曰

; "졸업하고 사회 나와 돈 벌기 시작한 이래 벌써 수십 년. 지친다 지쳐. 손가락의 지문이 지워지지 않은 것이 용하다. 낮에는 직장에서 위 아랫 사람들에게 치이고, 밤에는 마누라 눈치보며 살아야 하고. 돈도 싫어지고 명예도 다 귀찮다. 하지만 그만 둔다고 하면 무서운 마누라가 곰국 끓여놓고 나갈까봐 그러지도 못하고. 누가 이 내 지친 마음을 달래주지?"


그런데요......아지메 아저씨요...... 그거 아십니까?

당신들의 역사는 당신들 스스로 써왔음을......잠시 뒤돌아보세요. 그리고 자신이 걸어온 발자욱을 보세요......


보이시나요?.......사회에 갓나와 이론과 현실의 대립 속에서도 오히려 발분(發憤)하면서 묵묵히 견뎌내며 숱한 세월 감내한 자신의 인내와 성실의 발자욱들이.......그것은 단순히 돈만 벌어다 주던 당신의 겉모습이 아닙니다. 당신은 당신의 희망과 꿈을 이루기 위해 매일매일 한걸음 한걸음 훌륭한 족적을 남기며 살아 온 것입니다. 남들이 뭐라하든 그 족적은 당신만이 지켜줄 수 있습니다.


보이시나요?.......사랑했건 다른 이유이건 자신이 선택한 남자와 함께 아름다운 미래를 꿈꾸며 비록 단칸방에서라도 행복한 설계를 하고, 천사같은 아이를 키우며 아이의 순수한 미소 속에서 주부로서의 온갖 시름을 잊었고, 현모양처가 되기 위해 하나하나 정성을 기울이며 살아온 당신의 지난 날들.......


들리시나요?...... 지금도 당신들의 보금자리 곳곳에 있는 말없는 것들의 애정어린 소리들이...... 당신들의 손길이 묻은 작은 가구나 등 하나도 당신을 위로하고 있습니다......말없이 당신들을 지켜보며 숱한 시간을 당신들을 위로하고 박수쳐 준 것 들.......


몇 년 전에 죽은 모기인지 하루살이인지 희끗하게 들어가 있는 거실과 모든 방의 천정의 등갓, 셀 수도 없이 간접적인 손키스를 해야했던 현관의 손잡이, 투명하지만 넓은 평면을 가지고 여실히 당신들을 투영해주었을 거실의 유리창, 거실 벽에 걸린 사진틀, 식탁 유리 밑에 깔린 식탁보, 주방 싱크대의 모든 때 묻은 손잡이들, 평생 벌 받듯이 벽에 꽃혀 있는 못들, 욕실 샤워기의 손잡는 부분과 세면대의 수도꼭지, 주방 싱크대 수납장의 때 묻은 모든 손잡이들, 비가 와야 비로소 날개짓하듯 펼쳐지고 주인과 손잡고 행복한 외출을 할 수 있다면서 오늘도 비만 오기를 기다리는 우산들, 계절이 지나 신지 못하는 신장의 신발들, 미련인지 청승인지 옷장의 버리지 못하고 있는 유행이 지난 옷들, 심지어는 당신이 홀로 있는 시간을 은밀히 지켜보았을 화장실의 먼지 낀 환풍기 커버까지도......


그 모든 것들이 말하지 않나요?.....

당신은 위대하다고, 엄마는 스스로를 희생하며 창조하는 존재라고.......

당신은 위대하다고, 아빠는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위대하다고.


그러니 당신들은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셔도 됩니다. 스스로를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남도 나를 소중히 여기지 않음일지니.......


이게 무슨 꼬부라진 단어이고 문구인지 한참 찾아보니 스페인 속담이랍니다.


"좋은 친구는 좋은 은신처와 같다."

abrigo는 원래 외투를 뜻하는 단어인데 한겨울에 한기(寒氣)를 막아주는 것이므로 훌륭한 은신처라는 의미로 전용(轉用)되었습니다.


그런데 죄 지은 친구를 숨겨주는 것이 좋은 친구? 법이라는 문제만 아니라면 그 보다 좋은 일은 없겠지만 인정상 신고할 수도 없고, 법을 어기기도 힘들겠죠. 법 문제가 아니라면 충분히 이해 가능한 속담이고, 이해가 가는 속담입니다.



모든 이의 평화를 기도하듯, 모든 이들이 그저 행복하시기를 오늘도 기원합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온 산하를 뒤져봐도 아프지 않게 살아온 초목이 어디 있을까요? 아픔없이 피어난 꽃이 어디있을까요? 비록 지금 여기저기 상처입고 여기저기 아프고 시큰거리고 스트레스 한 없이 받고 있을 지라도 당신이 적어도 희생하며 살아온 세월이 있기에 당신은 따뜻한 존재입니다. 그 따뜻함을 다른 이에게 베풀고 아니고를 떠나서 말입니다. 스스로를 한 겨울 속으로 끌고 가지 마세요. 거긴 너무나 추워서 마음까지 얼어붙을 테니까요.


사랑이란 그런 것인가 봅니다. 바라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사랑해야 사랑을 받는. 대접 받고자 하려면 먼저 대접하라는 성경의 말씀처럼. 그러니 아무리 힘들고 바쁘더라도 먼저 사랑하십시오. 아주 작은 사랑의 관심과 표현이 당신의 행복을 지켜줍니다. 이 나이에 조금은 쑥스럽다고 해도 표현하지 않는 사랑을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요즘 세대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청춘 남녀들의 고민이 담긴 문구입니다. 우리도 젊은 시절 저와 비슷한 고민들 해본 적이 있을 겁니다. 그것이 짝사랑이든 아니든. 문구처럼 신세대적인 것이든 아니든.^^ 보이지 않는 심장의 설레임 가득한 박동소리가 천둥치듯 들려오던 그 시절의 사랑, 당신도 있었겠지요^^


과연 이 여친은 기다릴가요? 아니면 고무신 거꾸로 신고 도망갈까요? 요즘은 당연히 고무신 거꾸로 신습니다. 유학갈 때도 일단 헤어집니다. 잘못된 것이 아니냐구요? 사랑을 너무나 가볍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나구요? 예, 물론 그런 일면도 있습니다. 문제는 이미 그런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죠. 우리는 이미 뒷전의 세대이고. 우리는 우리처럼, 요즘 세대는 그들처럼 사랑하는 방식이 다르겠지요. 그래도 애교부리며 "너 하는 거 봐서"라고 말하니 얼마나 귀엽나요. 마치 언제까지라도 기다릴 것 같은 뉘앙스를 풍기며 군에 가는 남친을 기대에 부풀게 해주고 있습니다.ㅎㅎㅎ.


인간은 누구나 외로운 존재임을 이미 우리는 알지요. 그런데 너무 늦게 안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반쯤 깨어져 흉측해진 친구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니 그 친구는 오히려 웃으며 도가의 현인처럼 대답합니다.

"괜찮다고. 누구나 아픈 것이라고. 나도 그 중에 하나라고."

위로하려 했던 친구가 오히려 놀랍니다. 그리곤 자신이 위로받은 것을 알게 됩니다.

위로하면 위로받음이니 참으로 신기합니다.  




연탄카페 주변의 많은 폐연탄들과 구구절절 대화하고 봄 바람이 전해주는 그네들의 사연들을 듣고 다시 골목 투어에 나서다 거의 마지막 부분에서 본 색다른 풍경입니다. 만화그듯 우화적인 지금까지의 폐연탄들과 달리 사람 얼굴 하나 그렸을 뿐인데 느낌이 전혀 다릅니다.


어쩌면 이 수암골 벽화마을 연탄카페의 작은 제목이었던 '비극적 사회와 그 적들'이라는 문구와 잘 어울리는 작품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 연탄 속의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삶을 살았던 사람인지는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생을 마감했는지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작가는 왜 폐연탄에 저 사람을 그려 넣었을까요? 그것도 다른 폐연탄과는 확연히 다른 것에 그리고 연탄카페와는 많이 떨어진 곳에 두었을까요? 묻고 싶지만 특별한 답은 아닐 겁니다. 그리고 정답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독자들의 몫이고 생각하기 나름일 테니까요.


그런데 저 사람은 웃고 있습니다. 나도 그냥 웃을랍니다. 미소를 잃지 않으렵니다.



마지막으로 소개하는 작품들입니다.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때로는 말 보다 침묵이 필요할 때가 있는데 바로 이 시점이 아닌가 합니다. 독자분들의 행복을 기원하면서 수암골 벽화마을에 대한 글과 사진을 마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대봉제(待鳳齋)에서 민 삿갓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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