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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가톨릭문화원 원문보기 글쓴이: 익명회원 입니다
축일:2월13일 리에티의 복자 안젤로 딴끄레디 FRATE ANGELO TANCREDI DA RIETI Bl. Angelus Tancredi of Rieti
1첼라노 109, 110 에서 프란치스코, 그가 몹시도 그리던 곳(뽀르찌웅꿀라)에서 며칠을 쉬고 나서, 그는 죽음의 시간이 임박하였음을 느꼈다. 그때 그는 형제이며 정신적인 아들로 생각하는 두 형제를(완덕의 거울에 따르면 안젤로 딴끄레디와 레오이다) 불러 부탁하기를 죽음이 다가오고 있으니, 아니 차라리 생명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으니 기쁨에 넘친 큰소리로 주님께 찬미의 노래를(이는 태양의 노래를 뜻한다) 부르라고 하였다. 갑자기 그는 온 힘을 다하여 다윗의 시편을 큰소리로 읊었다: "목소리 높이어 주께 부르짖나이다. 소리소리 지르며 주께 비옵나이다.(시편141) ... 이윽고 그가 성서를 가져오라 명하였고, 요한 복음의 다음 구절부터 읽으라고 하였다: 과월절 6일전에 예수께서는 이제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실 때가 된 것을 아셨다."(요한12,1; 13,1.3.)
성 프란치스코의 무덤과 제대 오른편에는 루피노, 안젤로 형제의 무덤이,
세 동료 전기(Legenda trium sociorum) "세 동료 전기"는 그 저자가 누구이든지 간에 프란치스코라는 역사적 인물을 아씨시라는 틀 안에서 제시하고자 목적하고 있는 가장 세심한 전기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사료로써 1246-47년경의 작품이다. 모든 사본들이 그렉치오의 세 동료들의 편지(1246.8.11)를 서두에 달고 있다. 이 때문에 "세 동료 전기"로 불리어 오고 있으나, 오늘날 아무도 이것이 "세 동료들의 전기"라고 생각지 않는다. 그래서 "소위 혹은 이른바 세 동료 전기"라 부르는 것이 가장 올바른 호칭일 것이다. "세 동료 전기"는 "제1첼라노"와 스피라의 율리아노를 사료로 택하고 있으면서도 새로운 요소들을 첨부하고 있으며 "익명의 뻬루지아 전기"를 그대로 따르면서 새로운 요소를 첨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세 동료 전기"는 후에 "제2생애" 제1부의 주요 원천이 된다. 아씨시의 성인 프란치스코를 강조하고 있음을 볼 때 아마도 저자는 아씨시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제2첼라노"이전의 작품으로 토마스의 "제1생애"를 반박하기 위한 목적도 아울러 지니고 있는 듯하다. "세 동료 전기"에서 나타나는 프란치스코는 지혜로운 상인이요 사업가이며 쾌활한 성격의 소유자, 정중하고 예의 바른 젊은이이다. 그리고 프란치스코의 회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나환자와의 만남임을 강조하고 있다는 데서 프란치스코 자신이 유언에서 언급하는 회개 여정과 가장 일치하고 있다. 그리고 성인을 현양할 목적으로 기적 사화를 전혀 전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한마디로 "세 동료 전기"는 아씨시판 성 프란치스코의 전기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청년기의 프란칫코와 회개 및 형제회의 창설 과정 등에 있어서 가장 정확한 사료로서 인기를 누리고 있다. (성 프란치스코의 전기들과 문제점-오상선바오로O.F.M. 프란치스칸 삶과사상 1999 특집호202-203쪽에서)
주님이 나 프란치스꼬 형제에게 이렇게 회개생활을 시작하도록 해 주셨습니다: 1 내가 죄중에 있었기에 나병환자들을 보는 것이 나에게는 너무나 역겨운 일이었습니다. 2 그런데 주님이 친히 나를 그들에게 데리고 가셨고 나는 그들 가운데서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3그래서 내가 그들한테서 떠나올 때에는 역겨웠던 바로 그것이 내게 있어 몸과 마음의 단맛으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로 얼마 있다가 나는 세속을 떠났습니다. - 복되신 프란치스꼬의 유언중에서
The Cross that spoke to St. Francis(THE SAN DAMIANO CROSS)
"프란치스코야, 가서 무너져 가는 나의 집을 고쳐라." (1205년(말) 성 다미아노 성당에서의 계시-세동료 5,13)
우리 사부 성 프란치스꼬의 축복 (2첼라노 191) 오! 지극히 사랑하는 형제들, 그리고 영원히 축복받은 아들들, 우리는 큰 것을 약속했고 우리에게는 더 큰 것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고통은 짧고 영광은 영원합니다. 누구든지 자기의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 아멘. (작은형제회 홈에서 www.ofm.or.kr)
작은 형제회(Ordo Fratrum Minorum) 프란치스칸 강좌에서 1.17. 이런 획기적인 사건들 중 하나는 1208년 2월 24일 성 마티아 사도 축일에 맞추어 일어났다. 프란치스코는 미사 시간 중에 복음 말씀을 들었는데, 그 내용은 그리스도께서 지팡이나 지갑도 없이 사도들을 맨발로 설교하러 파견하는 이야기였다. 그들은 순회자 혹은 순례자가 되어, 그들의 말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평화를 설교해야 했다. 프란치스코는 너무 기뻤다. 그것이 바로 그가 오랫동안 찾아왔던 바였던 것이다. 그는 그가 들은 것을 글자 그대로 실행하려고 한시도 지체하지 않았다. 그는 지팡이와, 신발, 그리고 은수자의 허리띠를 벗어버리고, 타우(T) 모양으로 된 겉옷을 입고 허리에는 허름한 띠를 매고 맨발로 나갔다. 그는 회개의 은수자 삶에서 사도적 설교가의 삶으로 자신의 삶의 양식을 바꾸었다. 이것이 바로 장차 프란치스칸 운동을 도래케 한 이상이었다.
1.18. 프란치스코가 뽀르찌운꿀라에서 첫 번째 형제들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바로 몇 주 후의 일이었다. 그들 중 첫 번째 사람은 아시시의 부유한 젊은이인 Quintavalle의 베르나르도였다. 그는 프란치스코를 자기 집에 초대하여 (우연히도 그의 집은 아직도 아시시에 남아 있다) 저녁식사를 함께 하였다. 밤에 프란치스코는 그 친구의 집에서 묵었는데, 베르나르도는 프란치스코가 밤새도록 기도하고 있었던 것을 알아차렸다. 그 다음날 아침 베르나르도는 과감한 결정을 내렸다. 프란치스코와 함께 그는 아시시 광장에 있는 성 니꼴라오 성당으로 가서, 함께 하느님의 뜻을 구하기 위해 복음서를 들춰보았다. 세 번이나 책을 펼쳤는데, 다음의 구절들이 나왔다: “너희가 완전한 자가 되려거든 가서 가진 재산을 다 팔아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면 너희는 하늘나라에서 보물을 갖게 될 것인데, 그런 다음 나를 따르라”(마태 19.21); “여행할 때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루가 9,3); “누구든지 나의 제자가 되려거든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루가 9,23). 이 성서 말씀들은 프란치스코가 시작한 복음 운동에 있어서의 삶과 회칙의 근간을 이루게 되었다. 같은 해인 1208년 4월에 2명의 형제가 더 프란치스코와 베르나르도의 삶에 가담하였는데, 그들은 대성당 참사위원이었던 Pietro Cattani와 Egidio 혹은 Giles(영어식 이름)였다. 이날은 4월 23일이었다. 그들이 합류하자마자 그들은 둘씩 짝지어 설교 여행을 떠났다. 프란치스코와 Giles(에지디오)는 Ancona의 Marches(마르키아 혹은 마르케)로 갔다.
서로 받아들임
BROTHER EGIDIO FROM ASSISI
프란치스코는 그 비결을 제시해준다. "그들이 보다 훌륭한 그리스도인들이었으면 하고 바라지 말고 - 기경호O.F.M., 회개하는 형제 자매들의 삶, 재속프란치스코회 한국국가형제회, 2003, 484-485쪽에서.
I Compagni di San Francesco
까따니의 베드로(+1221) FRATE PIETRO CATTANI 아씨시의 복자 에지디오 (+1262, 축일:4월23일) Frate Egidio di Assisi 모리꼬 Frate Morico 리에티의 복자 안젤로 딴끄레디 (+? 축일 2월13일) FRATE ANGELO TANCREDI DA RIETI 아씨시의 실베스텔(+1240 하느님의 종, 축일3월6일) Frate Silvestro di Assisi 까벨라의 요한 FRATE GIOVANNI DELLA CAPPEL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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